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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18회
진여공(晉厲公)은 장어교(長魚矯) 등이 일을 처리하고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어전으로 나왔다. 많은 무사들이 떠들썩하게 몰려드는 것을 본 여공은 깜짝 놀라며 서동(胥童)에게 물었다.
“죄인들은 이미 주살되었는데, 왜 무사들을 아직 해산시키지 않았는가?”
서동이 아뢰었다.
“반당(叛黨) 난서(欒書)와 순언(荀偃)을 사로잡아 왔으니, 주군께서 처결하십시오!”
여공이 말했다.
“이번 일에 난서와 순언은 관련이 없다.”
장어교는 여공 앞에 무릎을 꿇고 은밀히 아뢰었다.
“난씨와 극씨는 함께 공을 세워 일체가 되어 있으며, 순언은 극기(郤錡)의 부장(部將)입니다. 삼극(三郤)이 주살되었으니, 난씨와 순씨는 필시 불안을 느껴 머지않아 극씨를 위해 복수할 것입니다. 주군께서 오늘 이 두 사람을 죽이지 않으시면, 조정은 태평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공이 말했다.
“하루아침에 삼경(三卿)을 죽이고 또 그 여파가 다른 가문에까지 이르는 것을 과인은 차마 할 수 없노라!”
여공은 난서와 순언은 죄가 없다고 하면서 원직에 복귀시켰다. 난서와 순언은 사은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장어교는 탄식하며 말했다.
“주군은 두 사람에게 인정을 베풀었지만, 두 사람은 주군에게 인정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
장어교는 서융(西戎)으로 달아났다.
여공은 무사들에게 중상을 내렸다. 삼극의 시신은 조문 밖에 전시했다가, 사흘 후에야 장례를 허락하였다. 극씨의 종족들 가운데 조정의 관직에 있던 자들은 모두 파직되어 시골로 내려갔다. 서동은 상군원수가 되어 극기의 지위를 대신하고, 이양오(夷羊五)는 신군원수가 되어 극주(郤犨)의 지위를 대신하였으며, 청비퇴(清沸魋)는 신군부장이 되어 극지(郤至)의 지위를 대신하였다.
楚나라 공자 웅패(熊茷)는 석방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서동이 경의 반열에 올라서자, 난서와 순언은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서동은 晉侯의 총애를 믿고 못하는 짓이 없었다.
어느 날, 여공은 서동과 함께 총신 장려씨(匠麗氏)의 집으로 놀러갔는데, 그 집은 강성(絳城)에서 20여 리 떨어진 태음산(太陰山)의 남쪽에 있었다. 여공은 그 집에 사흘간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았다.
순언이 은밀히 난서에게 말했다.
“주군이 무도한 것은 원수께서도 아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 나가지 않고 있어 지금은 비록 편안하지만, 훗날 서동 등이 의심을 하게 되면 다시 우리가 원망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무고(誣告)할 것입니다. 그러면 삼극이 당한 화를 우리도 끝내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난서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대신의 도리는, 사직을 중하게 여기고 군주는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백만 대군이 원수의 손안에 있으니, 저들이 예측하지 못할 때 거사하여 따로 어진 군주를 세운다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거사를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겠소?”
“용이 못 속에 있을 때에는 사람이 틈을 엿볼 수 없지만, 용이 못을 떠나 뭍에 오르면 동자라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주군이 장려씨 집에 놀러가 사흘을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이는 못을 떠난 용과 같습니다. 더 이상 무얼 의심하십니까?”
난서가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晉나라에 충성해 왔는데, 이제 사직의 존망(存亡)이 걸려 있으니 부득이 거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 후세에 필시 내가 시역(弒逆)했다고 하겠지만, 어쩔 수가 없구려!”
두 사람은 상의하여, 병이 나았다고 하면서 주군을 알현하여 의논할 일이 있다고 알렸다.
순언과 난서는 아장(牙將) 정활(程滑)로 하여금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태음산 좌우에 매복하게 하였다. 두 사람은 장려씨의 집으로 가서 여공을 알현하고 아뢰었다.
“주군께서 정사를 돌보지 않으시고 놀러나가셔서 사흘이나 돌아오시지 않고 있어, 신민(臣民)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신들은 특별히 어가를 모시고 조정으로 돌아가려고 왔습니다.”
여공은 어쩔 수 없이 어가에 올랐다. 서동이 앞장서고, 난서와 순언이 뒤를 따라갔다. 일행이 태음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포성이 울리면서 복병이 나타났다. 정활이 먼저 서동을 베어 죽이자, 여공은 깜짝 놀라 어가에서 뛰어내려 달아나려고 했다. 난서와 순언은 군사들에게 명하여 여공을 붙잡아오게 하였다. 난서와 순언은 태음산 아래에 주둔하고, 여공을 군중에 감금하였다.
난서가 순언에게 말했다.
“범씨(范氏)와 한씨(韓氏)가 다른 말을 할지 모르니, 군명을 가장하여 그들을 부르는 것이 좋겠소.”
순언이 말했다.
“좋습니다.”
난서는 사자를 보내 범개(范匄)와 한궐(韓厥)을 불러오게 하였다.
사자가 범개의 집에 가서 말했다.
“주군께서 부르십니다.”
범개가 물었다.
“주군께서 무슨 일로 나를 부르시는가?”
사자가 대답하지 못하자, 범개가 말했다.
“의심스럽군.”
범개는 심복을 보내 한궐이 가는지 안 가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 한궐은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았다고 하자, 범개가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소견이 대략 비슷하군.”
범개는 가지 않았다.
난서는 범개와 한궐이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순언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순언이 말했다.
“우리는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어떻게 내리겠습니까?”
난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하였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세를 ‘기호지세(騎虎之勢)’라고 하는데, 이미 시작한 일이라 도중에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그날 밤, 난서는 정활에게 명하여 여공에게 짐주(鴆酒)를 바치게 하였다. 여공은 짐주를 마시고 훙거하였다. 난서는 군중에서 여공의 시신을 염하여, 익성(翼城) 동문 밖에 장례를 지냈다. 범개와 한궐은 여공이 훙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나와 장례에 참석하였으나, 여공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장례가 끝난 후, 난서는 대부들을 소집하여 신군 세울 일을 의논하였다. 순언이 말했다.
“삼극이 죽은 것은, 그들이 공손 주(周)를 군위에 옹립할 것이라고 서동이 무고(誣告)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참언(讖言)이 되었습니다. 영공(靈公)이 도원(桃園)에서 죽은 후 양공(襄公)의 후사(後嗣)가 끊어졌는데, 하늘의 뜻이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공손 주를 모시고 와야 합니다.”
[‘참언(讖言)’은 앞일에 대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말이다. 거짓으로 꾸며 남을 비방하는 말은 ‘참언(讒言)’이다.]
대부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난서는 순앵(荀罃)을 경성으로 보내 공손 주를 모셔오게 하였다.
공손 주는 그때 나이가 14세였는데, 아주 총명하고 지략이 출중하였다. 순앵이 모시러 오자, 공손 주는 사정을 자세히 묻고 나서 단양공(單襄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순앵과 함께 晉나라로 돌아왔다. 공손 주가 청원(清原)이란 곳에 당도하자, 난서·순언·범개·한궐 등의 대부들이 모두 영접하러 나와 있었다.
공손 주가 대부들에게 말했다.
“과인은 타국에 기려(羈旅)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군위에 오를 것을 어찌 바랐겠습니까? 군주가 존귀한 것은 명을 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명색으로만 군주로 받들 뿐 그 명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군주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경들이 과인의 명을 기꺼이 따르겠다면 오늘 즉위하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경들은 다른 사람을 모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과인은 헛된 이름만 끌어안고서 주포(州蒲; 여공)의 뒤를 잇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려(羈旅)’는 나그네로서 타향에 머무는 것이다.]
난서 등은 모두 전율을 느끼며 재배하고 말했다.
“신들은 어진 군주를 받들기를 원합니다. 어찌 감히 명에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대부들이 물러나온 후, 난서가 대부들에게 말했다.
“신군은 이전 군주와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마땅히 조심해서 받들어야겠습니다.”
공손 주는 강성(絳城)으로 들어가 태묘에 고하고 군위에 올랐다. 그가 진도공(晉悼公)이다. 진도공은 즉위한 다음 날, 이양오와 청비퇴 등을 불러 주군을 잘못 모신 죄를 꾸짖고 조문 밖으로 끌어내 참수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종족들은 모두 국경 밖으로 쫓아내게 하였다. 또 여공을 시해한 죄를 물어 정활을 저자에서 책형(磔刑)에 처하게 하였다.
[‘책형(磔刑)’은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깜짝 놀란 난서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난서는 늙었다는 핑계로 벼슬을 내놓고, 한궐을 후임으로 천거하였다. 얼마 후, 난서는 놀람과 근심이 병이 되어 죽었다. 도공은 평소 한궐의 현명함을 들었기 때문에, 한궐을 중군원수에 임명하여 난서를 대신하게 하였다.
[제96회에, 晉軍이 秦軍과 싸우기 위해 하곡(河曲)으로 출전할 때, 중군원수 조돈의 심부름으로 함부로 중군에 뛰어든 어자를 중군사마였던 한궐이 참수하였다. 그때 조돈은 한궐을 칭찬하면서 훗날 晉나라의 정권을 잡을 자는 필시 한궐일 것이라고 했었다.]
한궐은 사은한다는 핑계를 대고, 궁으로 들어가 도공에게 은밀히 아뢰었다.
“신들은 모두 선대의 공 덕분에 주군을 좌우에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대 가운데서도 조씨(趙氏)보다 공이 큰 사람은 없습니다. 조쇠(趙衰)는 문공(文公)을 보좌하였고, 조돈(趙盾)은 양공(襄公)을 보좌하였는데, 모두 충성을 다하여 천하에 晉나라의 위엄을 떨치고 주군이 패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영공이 실정(失政)하고 간신 도안가(屠岸賈)를 총애하여 조돈을 죽이려 하였는데, 조돈은 달아나서 겨우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 후 변란이 일어나 영공은 도원에서 피살되었고, 경공(景公)이 즉위하였는데 또 도안가를 총애하였습니다. 도안가는 이미 죽은 조돈을 모해하기 위해, 조돈이 영공을 시해했다고 무고하여 조씨 일족을 절멸시켰습니다. 신민(臣民)들은 그 일에 대해 아직까지도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천행으로 조씨의 고아인 조무(趙武)가 아직 살아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오늘 공 있는 자에게 상을 내리시고 죄 지은 자를 벌하셔서 晉나라의 국정을 크게 바로 세우셔야 합니다. 이미 이양오 등에게 벌을 내리셨으니, 조씨의 공을 다시 복원시켜 주십시오.”
[제114회에, 도안가는 조돈의 아들 조삭을 죽였고, 조돈의 문객이었던 정영은 조삭의 아들 조무를 구출하여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궐이 조무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었다.]
도공이 말했다.
“그 일은 과인도 선친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조무는 어디 있습니까?”
“당시에 도안가가 조씨의 고아를 아주 급하게 찾았습니다. 그래서 조씨의 문객 공손 저구(杵臼)와 정영(程嬰)이 모의하여, 저구는 정영의 아들을 조씨의 아들로 속여 함께 죽음을 당했고, 정영은 조무를 안고 우산(盂山)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이제 15년이 지났습니다.”
“경은 과인을 위하여 조무를 불러 오십시오.”
“도안가가 아직 조정에 있으니, 주군께서는 이 일을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과인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한궐은 궁을 나와 친히 수레를 타고 우산으로 가서 정영을 찾았다. 정영이 예전에 도망칠 때에는 구강성(舊絳城)을 빠져나왔었는데 오늘 돌아갈 때에는 신강성(新絳城)으로 들어가게 되니, 성곽이 모두 예전과 달라 슬픔이 북받쳤다.
한궐이 조무를 데리고 내궁으로 들어가 도공을 알현하였다. 도공은 조무를 궁중에 숨겨놓고, 거짓으로 병이 났다고 전하게 하였다.
다음 날, 한궐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으로 들어가 문안했는데, 도안가도 그 가운데 있었다. 도공이 말했다.
“경들은 과인이 왜 병이 낫는지 아시오? 공로부(功勞簿)에 한 가지 사건이 분명하지 않아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오.”
백관이 머리를 조아리고 물었다.
“공로부에 분명하지 못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조쇠와 조돈은 2대에 걸쳐 나라에 공을 세웠는데, 어찌하여 그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소?”
백관이 일제히 응답했다.
“조씨 가문이 멸족된 것이 이미 15년 전 일입니다. 지금 주군께서 그 공을 추념(追念)하신다 하더라도 내세울 후손이 없습니다.”
도공은 조무를 불러내 백관에게 절하게 하였다. 백관이 물었다.
“이 젊은이는 누구입니까?”
한궐이 말했다.
“이 사람은 조씨의 고아 조무입니다. 예전에 죽은 조씨의 고아는 문객 정영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순간 도안가는 넋을 잃고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바닥에 엎어져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도공이 말했다.
“이 일은 모두 도안가가 저지른 것이오. 오늘 도안가를 족형(族刑)에 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하에 있는 조씨의 원혼을 위로할 수 있겠소?”
[‘족형’은 삼족(三族)을 멸하는 형벌이다. 삼족은 부계(父系)·모계(母系)·처계(妻系)를 말한다.]
도공은 좌우에 명하였다.
“도안가를 끌어내어 참수하라!”
그리고 도공은 한궐에게 명하여, 조무와 함께 도안가의 집으로 가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죽이게 하였다. 조무는 도안가의 수급을 청하여, 조삭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晉나라 사람들은 통쾌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잠연(潛淵)선생이 시를 읊었다.
岸賈當時滅趙氏 도안가가 당시 조씨를 멸족했는데
今朝趙氏滅屠家 오늘은 조씨가 도씨를 멸족했네.
只爭十五年前後 15년의 세월이 흘러
怨怨仇仇報不差 철저히 원수를 갚았도다.
진도공은 도안가를 죽이고 나서, 조무를 조당으로 불러 관을 씌워 주고 사구(司寇)로 임명하여 도안가를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 예전의 전답과 녹봉을 모두 돌려주었다. 또 정영의 의로움을 듣고 군정(軍正)으로 임명하고자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정영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시 내가 죽지 않은 까닭은 조씨의 고아를 살리기 위해서였소. 이제 조씨의 관직이 복원되고 원수도 갚았으니, 어찌 부귀를 탐하여 공손 저구만 홀로 죽게 할 수 있겠소? 내 이제 지하에 가서 저구에게 소식을 알려야겠소.”
정영은 자결하였다. 조무는 그 시신을 쓰다듬으며 통곡하였다. 조무는 도공에게 청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운중산(雲中山)에 있는 저구의 묘에 함께 매장하였다.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이의총(二義塚)’이라 불렀다. 조무는 3년 동안 상복을 입어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
陰谷深藏十五年 깊은 골짜기에 숨어 지내기를 15년
褲中兒報祖宗冤 바지 속의 아이가 조상의 원한을 갚았네.
程嬰杵臼稱雙義 정영과 저구는 한 쌍의 의로운 사람이라 일컬어지니
一死何須問後先 죽음은 어차피 한번인데 굳이 선후를 물어 무엇 하랴?
[제114회에, 도안가가 궁궐을 수색하자 조삭의 부인 장희는 어린 아들을 속바지 속에 숨겼었다.]
한편, 진도공은 조무의 문중을 다시 세워준 다음, 宋나라에 망명해 있던 조승(趙勝)을 불러들여 한단(邯鄲)을 다시 식읍으로 주었다.
[제114회에, 도안가가 조씨 일족을 죽일 때 조전의 아들 조승은 한단에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하고 송나라로 달아났다.]
도공은 또 대신들의 지위를 바로잡아, 현명한 자는 지위를 높이고 능력 있는 자를 임용하였다. 지난 공로에 대해 상을 내리고, 작은 죄는 사면하였다. 백관을 정리하여 그 능력에 맡는 직책에 임명하였다.
중요한 관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한궐은 중군원수, 범개는 중군부장, 순앵은 상군원수, 순언은 상군부장, 난염(欒黶)은 하군원수, 사방(士魴)은 하군부장, 조무는 신군원수, 위상(魏相)은 신군부장, 기해(祁奚)는 중군위(中軍尉), 양설직(羊舌職)은 중군부위(中軍副尉), 위강(魏絳)은 중군사마(中軍司馬), 장로(張老)는 후엄(候奄), 한무기(韓無忌)는 공족대부(公族大夫), 사악탁(士渥濁)은 태부(太傅), 가신(賈辛)은 사공(司空), 난규(欒糾)는 친군융어(親軍戎御), 순빈(荀賓)은 차우장군, 정정(程鄭)은 찬복(贊僕), 탁알구(鐸遏寇)는 여위(輿尉), 적언(籍偃)은 여사마(輿司馬)에 임명되었다.
[위상은 위기의 아들로, 제115회에 秦나라에 가서 명의 고완을 데리고 왔던 인물이다. 양설직은 제111회에 도적을 잘 찾아내던 극옹의 죽음을 예견하고 진경공에게 사회를 천거했던 인물이다. 위강은 위주의 둘째 아들이다. 앞서 위주의 아들로서 위과와 위기가 나왔었는데, 위강은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도공은 백관을 모두 임명한 후, 국정을 크게 바로잡았다. 백성들이 미납한 세금은 면제해 주고 세금을 낮추었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부역을 줄였다. 망한 집안을 일으켜주고, 홀아비와 과부를 구휼하였다.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宋·魯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은 그 소식을 듣고 입조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만 정성공(鄭成公)만은 楚王이 鄭나라를 구원하려다가 한쪽 눈을 잃었기 때문에 그에 감격하여 晉나라를 섬기지 않고 있었다.
한편, 초공왕(楚共王)은 진여공(晉厲公)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희색이 만면하여 군대를 일으켜 복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또 신군이 즉위하여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를 벌하며, 현명한 자를 임용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고, 조정이 청소되어 안팎으로 사람들이 귀부하여 패업을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이 근심으로 바뀌었다.
초공왕은 신하들을 소집하여, 중원을 혼란시켜 晉나라가 패업을 이룩하지 못하게 할 계책을 의논하였다. 영윤 영제(嬰齊)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공자 임부(壬夫)가 말했다.
[제115회에, 언릉에서 楚軍이 晉軍과 싸울 때 우윤(右尹) 공자 임부는 우군대장이었다.]
“중원에서는 宋나라가 작위가 가장 높고 나라도 큽니다. 게다가 宋나라는 晉나라와 吳나라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晉의 패업을 방해하려면 반드시 宋나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宋나라 대부 어석(魚石)·상위인(向為人)·인주(鱗朱)·상대(向帶)·어부(魚府) 다섯 사람이, 우사(右師) 화원(華元)과 반목하여 우리 楚나라에 망명해 있습니다.
그들에게 병력을 빌려주어 宋나라를 정벌하게 하고, 宋나라 고을을 얻으면 그것을 봉지로 주겠다고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적으로써 적을 치는 이적공적(以敵攻敵)의 계책입니다. 晉나라가 宋나라를 구원하러 오지 않으면 제후들을 잃게 될 것이고, 宋나라를 구원하러 오면 필시 어석 등을 공격하게 될 것이니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그 성패만 구경하면 됩니다.”
공왕은 그 계책을 쓰기로 하고, 임부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어석 등을 향도(嚮導)로 삼아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宋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宋나라 사람은 겨우 다섯뿐이고, 정작 싸우는 군사는 모두 楚나라 사람들이다. 이것이 어찌 ‘이적공적’의 계책이 될 수 있는가? 자기 군사들이 적과 싸우는데, 앉아서 구경만 한단 말인가?]
첫댓글 상관의 명에 따랐을 뿐인데,상관이 힘이 없으니,
하릴없이 죽는구나.
조씨의 조나라,위씨의 위나라,한씨의 한나라의
3분의 조짐이 엿보인다.
다른 나라가 잘 되면,내나라가 위태롭다.
꼭 지금 상태와 똑 같네.
우리들이 옛 고전을 읽어야 하는 것은 그러하므로
인해서 우리 현 생활의 지혜을 얻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