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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점령한 만주국. 만주는 근대에 들어 러시아-일본-중국을 오가는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다.
만주(또는 동북) 지역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살짝 빗겨간, 변경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청이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할양한 1861년부터 동북아시아의 교통, 전략적 중심지로 자리잡으면서 열강들이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시끄러운 지역이 되었다. 수십 년 간의 쟁탈전 끝에 만주의 지배권을 공고히 한 세력은 일본이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만주에서의 이권을 확보한 일본은 만주 점령을 공고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만주사에 대해서 활발한 연구를 진행했다. 철도 부설지 경영을 위해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산하 ‘만선역사지리조사부’가 창설되어 만주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으며, 일본 본토에서도 만주에 대한 역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도 뜨거운 감자인 ‘만선사관’과 ‘식민사관’ 논쟁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 글에서는 러일전쟁 이후부터 만주국 건국에 이르기까지 일본 학자들이 주장한 ‘만주사’ 이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만주의 역사가 어떻게 ‘독립‘되었는지를 간략하게 보고자 한다.
초창기 - ‘만주민족’ 만들기
‘만주사’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든 인물은 일본 동양학의 시초라 평가받는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였다. 시라토리는 1887년 개설된 제국대학 사학과에 진학해, 랑케의 제자 루트비히 리스에게 역사학을 배운 일본의 근대적인 역사학 1세대 인물로, 졸업 이후에는 동양학에 매진하여 돌궐, 흉노 등 북방 민족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1908년에는 만철 총재 고토 신페이를 설득해 만철 내 ‘만선역사지리조사부’를 창설하게 된다.
시라토리는 먼저 동양사를 남(문명)과 북(무력)의 충돌로 규정했다. 그리고 만주를 ‘남과 북의 충돌의 동쪽 끝“이자 지나(한족), 몽고, 퉁구스 세 민족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규정했다. 즉 만주의 역사는 일종의 ’지역사‘가 되는 것인데, 그 지역을 호령한 민족은 몽골 또는 퉁구스계 민족이었기 때문에 만주의 주권은 한족보다는 몽골,퉁구스 민족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만주 지역은 여러 민족들이 성장한 지역이지 주체적으로 발전한 지역으로는 볼 수 없게 되고, 고구려, 거란 등과 같이 만주 바깥에까지 범위를 미친 국가들의 계승성이 불분명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시라토리는 이 맹점을 혈통사를 적용해 설명했는데, ’만주민족’이라는 하나의 개념 아래에서 만주사를 정리하여 ’고구려-발해-여진-청‘라는 계보를 만들었다. 퉁구스족이 ‘건국한’ 고구려, 발해는 계보에 들어가지만 만주의 과거를 세 세력의 투쟁 지역으로서 정리할 때 자신이 이야기한 ‘몽골종에 속하는 거란’과 원은 ‘만주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만주사에서 배제된다.
당시 학계의 거물이었던 시라토리와 그가 이끈 만선역사지리조사부는 만주사 연구의 기반이 되는 지리 뿐만 아니라,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만주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만선사로 이어지는 여러 후계자들을 길러내게 된다. 만주사 전체에 대한 최초의 통사적 시도 역시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등장했는데, 1915년에 <만주발통사>를 발간한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다.
정립기 - 만주사의 체계화
이나바 이와키치는 1908년 만선역사지리조사부에 들어가 스스로를 만선사학자로 부를 정도로 만주사에 대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3세기 연과 동호(東湖)의 접촉부터 20세기까지 만주의 역사를 정립한 <만주발통사>에서 시라토리의 ‘만주민족’ 이론과는 다른 새로운 이론을 이야기하였다. 만주의 범위를 백두산에서 끌어내려 조선과 만주의 경계를 대동강~원산만을 잇는 선까지로 잡은 것이다.
경계를 이렇게 설정하면 만주사는 몽골, 중국, 만주라는 세 세력의 힘이 교차했던 지역의 역사라는 시라토리의 논리를 계승하면서도, 거란이나 원은 물론 고구려로 대변되는 한반도 북부까지도 만주사의 일부로 포섭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명대 이전 시기 만주를 장악한 세력을 읍루, 부여, 고구려, 발해, 거란, 여진, 몽골의 순서대로 나열하여 최종적으로 청(여진)으로 이어지는 단일한 계보의 역사로 규정하였고, 한인(중국)의 이주로 혼란해진 만주에 손을 뻗은 러시아를 일본이 저지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완성기 - 만주국의 역사로 체계화하기
일본이 본격적으로 만주를 중국사에서 ‘떼어내기’ 시작한 시점은 워싱턴 회의 이후였다. 회의에서는 ‘중국의 주권과 영토적 통합성을 존중’한다는 결론을 내었는데, 이는 서양 열강이 정신없는 틈을 타 중국의 이권을 독점하려는 일본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이에 일본에서는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역사적으로 부정하는 논의를 확대하기 시작하였는데, 외무성의 정책적인 지원을 통해 많은 일본 연구자들이 만주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만주국 건국(1932년) 이후 만주사는 만주국의 역사로 체계화되었다. 만주국과 일본의 관계를 전제로 만주 지역과 일본의 교류를 강조하는 한편, 만주의 민족을 순수 퉁구스 종인 숙신-읍루 계통과, 몽고종이 일부 혼혈된 예맥족으로 구분했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한족의 식민지였고, 부여는 만주민족 최초의 부족국가나 농업왕국으로, 고구려는 만주족 최초의 ‘독립국’으로 평가되었다. 발해는 만주족이 세운 정돈된 국가로서는 최초의 대국이며 최초의 퉁구스적 색채가 농후한 중앙집권국가로 보았는데, 발해 문화와 일본과의 교류에 대한 부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일본 우위의 우호 관계가 더욱 강조되었다.
또한 야노 진이치(矢野仁一)는 만주사를 “국사(國史)”로 만들고자 하여 전국시대 연나라의 진개 이래로 만주에 중국의 주권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만주의 영토적 독자성과 더불어 시작부터 만주와 중국을 별개로 구분하는 ‘만주국사’의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마쓰이 히토시(松井等)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에게도 비판받을 정도로 엉성하게 급조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더불어 일본과의 관계도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대륙의 영향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삼국과 일본의 동맹, 몽골의 일본침공 후 멸망이 증명한다는 논리였다.
한편 이나바는 본인이 주도한 <조선사> 편찬이 거의 끝난 1938년 만주로 이동하여 만주건국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였고, 38~39년 간의 강의 원고를 정리해 1940년 <만주건국통론>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이나바는 기존 한족 왕조별로 정리된 시대구분을 부정하였고, 만주 내에 있던 여러 민족들을 ‘만주민족’으로 뭉뚱그려 만몽불가분론을 제시한다. 만주족과 몽골족은 민족적 차원에서 하나라 할 수 있으며, 거란과 청의 정복사업에 대한 서술을
통해 정치적 차원에서도 하나가 되어야 국가 발전의 기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위 글처럼 20세기 이후 일본인 연구자들의 만주사 연구는 ‘만주-몽골-중국’ 사이 투쟁의 장이라는 ‘지역사’적인 관점에서 만주국 건국 이후 ‘만몽의 민족’ 중심의 민족사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해 갔다. 이는 당시의 일본의 위치와 관련이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래 만주는 단순히 철도부설권을 비롯한 ‘이권 경쟁’의 위치에 있었다면, 31년 만주국이 설립된 이후로는 만주국이란 나라의 정당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 만들기 시도는 신생 국가의 근대적 역사성을 말하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으며, 이는 과연 역사와 정치는 분리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사례로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나바는 1940년 사망하였다. 이 당시는 일본이 만주를 넘어 중국 대륙에 대한 야욕을 펼치고 있을 때였고, 일본의 학계는 이에 따라 다시 한 번 변화하게 된다. 만주사를 연구하고 만든 이들의 연구는 국가적으로 새롭게 추진하던 ‘대동아사’로 이어지게 된다. 1945년 패망 전까지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사 연구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참고
지역사에서 민족사로, 정상우, 만주연구, 2019
20세기 전반 일본인 연구자들의 ‘만주사’ 만들기, 정상우, 만주연구, 2020
만선사와 일본사의 위상, 정상우, 한국사학사학회, 2013
식민주의 역사학으로서 만주건국대학에서의 역사 연구, 정상우, 동북아역사논총, 2019
해석된 ‘만주’ -동양사에서 본 만주의 의미, 박선영, 만주연구, 2019
첫댓글 평소에 관심있던 지역인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만주국의 역사를 일본학자들이 정립하고 체계화시켰고 워싱턴 회의 이후 중국사에서 떼어내기를 시작했군요
잘 읽었습니다.
만주사의 저 원리 예맥족은 한민족이 아니다 라는 개소리가 그대로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에 이용되었죠....
잘 읽었습니다
요동사가 만선사관이 연상된다는 견해가 무슨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일제가 만든 사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 수 있네요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번 노렸던 일제의 야망이 드러나는 만주의 역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