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0월 23일 연중 제30주일 전교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고 주님의 말씀이 그곳에서 나오리라고 예언한다. 그는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통해서 온 세상에 평화를 이룩하신다고 전한다(제1독서). 주님을 입으로 고백하고 그분께서 구원자이심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런 주님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걸음은 아름답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구원의 기쁜 소식을 땅끝까지 전하도록 열한 제자를 파견하신다. 그분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이다.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0,9-18
형제 여러분, 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서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전교 /허영엽 신부
“당신들 종교인들이,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닐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삶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쉬운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종종 가르치는 말과 행동이 달라서 종교인들에게 실망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
인도의 지도자 간디(1868-1948)가 교회에서 쫓겨나면 서 남긴 말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유학을 간 영국에서 우연히 성경을 읽고 많은 감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 미개한 나라였고, 인종차별도심한 때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청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간디가 남긴 이 교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지금도 유효한 말이며, 이는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 해당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첫째 사명이며, 존재 이유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동시에 증거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하는 이웃 사랑으로 우리 삶속에서 현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세상의 빛이되고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진리를 다른 이에게 납득시켜야 합니다. 만약 우리 신앙인의 생활이 불성실하며 거짓말과 위선, 불의와 독선으로 가득 차있다면 결코 복음을 선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이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복음 선포이고 참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은 무엇보다 긴급한 요구와 특수한 상황에 무조건 응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시적인 요구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어떤 사람들에게라도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웃사랑은 이제 외부에서 강요되는 계명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우리를 보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러분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며칭찬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안동] 예수님의 제자삼기/권용오 신부
찬미 예수님!
오늘은 전교에 종사하는 선교사들과 전교 지역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제고하기 위해 교회가 정한 전교 주일입니다. 선교 혹은 전도라고도 하는 전교는 이 세상이 끝나는 날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 은혜를 입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도 종말과 구원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전란의 시대에 등장한 예언자 이사야에게 ‘구원’이란 하느님이 민족들의 재판관, 백성들의 심판관이 되는 이상적인 세상이었으며, 그날이 오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세상을 환시를 통해 보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하느님과 우리를 갈라놓는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없애버리셨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이런 구원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이 온 땅으로 퍼져가고 모든 사람이 듣게 되리라 믿으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게 된다는 확신을 전합니다. 이런 확신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자신의 회심의 과정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해 알려지게 된 구원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실현되었으며,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주님의 권한을 받아 파견됨으로써 전교의 사명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사도들과 그의 후계자들의 사도직 활동 안에 현존하시면서 당신의 구원사업이 세상의 종말까지 계속되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과 마침에 ‘산 위’라는 상징적인 특정한 장소를 설정함으로써 구원역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이 예수님의 강생을 위한 준비였다면 그 이후는 승천하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남아있는 사도들이 구원활동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선교사들이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도록 도와주거나, 신앙생활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 새롭게 신앙의 생활로 되돌아오게 도와주는 활동만으로 전교의 의미를 제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새 신자를 인도하거나 새로운 복음화를 시도하는 것이 전교의 중요한 활동이긴 하지만, 전교가 교회나 신자들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활동이며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구원사업의 연장이라는 측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당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다른 사람들도 지키도록 ‘제자로 삼아’ 가르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대로 그들 자신이 각자가 처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고 공동체를 건설해야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을 향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전교의 모든 활동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의 능력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사랑과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순명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만난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예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모든 성인들은 각자의 시대와 상황에 따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전교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잘 보이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잘 보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충실히 실천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부산] 마태 22, 34-40./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 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오늘의 복음 외에 복음서들 안에 더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서들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 서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사랑을 모릅니다...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여 당신 아드님을...보내셨다는 것입니다.”(1요한 4, 8-1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상대는 바리사이파 율법 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하기 위해, 인간 삶의 모든 경우를 가상(假想)하여 각 상황에서 지켜야 하는 율법의 차림표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율법 조항은 600개를 넘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율사들은 율법을 다 배우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율법 조항이 이렇게 많다 보니, 사람들은 율법에 정신을 빼앗겨 살아야 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의식하고 살도록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진 율법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덫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조항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율법의 기원은 기원 전 13세기, 이집트 탈출을 앞둔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준, 10계명에 있습니다. 구약성서 탈출기는 하느님이 모세와 계약을 맺으셨다고 말합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고,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것은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일”(탈출 33,19 참조)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모세는 그 실천을 열 개의 구체적 지침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율법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한 율사들이 생기고, 성전에서 제물 봉헌을 전담하는 사제들이 생겼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의 중요성만 강조하고, 사제들은 제물 봉헌의 의무만 과장한 나머지, 이스라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데만 정신을 쓰게 되었습니다. 본(本)과 말(末)이 전도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율법이었고,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자기 노동의 대가를 하느님 앞에 가져와, 이웃과 나눈다는 것을 상징하는 제물봉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을 잊으면서 율법도, 제물 봉헌도, 지키고 바쳐서 인간이 소원성취 하는 수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교 실세들은 율법과 제물 봉헌만을 강조하였습니다. 동시에 선하신 하느님은 사라지고, 사람들 위에 무자비하게 군림하며 율법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준수를 절대적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준수로써 쟁취해야 하는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열리는 삶의 공간입니다.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자녀가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인간이 되듯이, 신앙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그분의 가치 질서를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5-36).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질문하는 율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율사가 질문에 그 단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율사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계명’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율법이라는 계명에만 집착하였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집착하는 그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계명 준수만 하는 무자비한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에 대해 깨달아서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분의 사랑을 이웃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율법을 주고, 심판하기 위해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강자(强者)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 법으로 질서를 세웁니다. 그들이 주는 법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것을 범하면, 벌이 따라 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우리의 삶이 베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도 그 베풂을 자유롭게 실천합니다. 하느님 자녀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기적(利己的)이고 또 배타적(排他的)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긍정하고 방어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에게서 고립되고, 이웃에서도 고립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준수에 정신을 빼앗기고,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하여, 자기의 구원을 자기의 힘으로 쟁취하겠다고 고립되지 말고,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과의 연대성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니 우리도 이웃에게 자비로워야 하고, 하느님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시니, 우리도 이웃에게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여,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
[의정부] 마음 편안한 사랑/조승균 신부
복음은 우리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인간인지라 살면서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고, 이웃을 따뜻하게 대하지 못했다고 미사 중 기도 중에 가슴 아파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
웃이 아프면 내 몸도 아프던가요? 아닙니다. 이웃집 아이는 대학에 합격하고 내 자식은 재수하고도 떨어졌는데 과연 이웃집 아이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할 수 있었던가요? 아닙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종일 하느님만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무슨 일이 생기든지 간에 늘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이 가능할까요? 남편이 실직당하고, 어린 자식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큰 아들이 집을 나갔는데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을 수 있단 말인가요?
다른 각도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자식이 어렵게 구해다 준 놀이기구나 학용품을 다른 아이들에게 다 주고 다닌다면 과연 부모로써 잘했다고 할 수 있는지요? 생활이 어려운 친구를 위해 밥도 안 먹고 침울한 표정을 짓는다면 부모 입장에서 마음 편안하겠는지요? 내 자식이 공부는 하지 않고 하루 종일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산다면, 공부는 맨 날 꼴찌하면서도, 주변 친구들에게 항상 좋은 아이로 비춰 손해만 보고, 주일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신앙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그런 자식을 보고 과연 내 자식이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부모는 마음 편치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계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이상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셨을 뿐입니다. 사람은 자기만족을 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불만스러우면 여러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
기만족에 빠지면 자기도취라는 또 다른 부작용이 생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인생의 목표로 삼되 완전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데까지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히말리야 산맥에서 제일 높은 천년설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꼭대기까지 올라 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나머지는 세상살이에 몰두하다가 가끔 봉우리를 보면서 위로를 받거나 아니면 절반정도 높이까지 올라가서 경치를 불 수 있을 뿐입니다.
성인들은 하느님이 선택한 분입니다. 성인이 될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언정 굳이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만 성실하게 열심히 살기만 하여도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관심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마음 편안하게 복음을 접합시다. ‘하느님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춘천] 연중 제30주일(전교주일)/신호철 신부
어느 날, 길거리를 가고 있던 저에게 누군가가 진지하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혹시 영원한 삶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낯선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는 그분의 열성이 가상하기도 하고, 사제복을 입고 있는 제가 누군지를 모르는 무지가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들과 전교 지역 교회를 돕기 위해 정해진 ‘전교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의 복음이 온세상에 널리 전파되기를 기도하고, 교회의 선교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 헌금을 하게 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 말씀을 통해 교회는 선교하는 공동체로 태어났습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와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우리 모두의 존재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하지 않는 교회란 있을 수 없으며, 복음을 전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이 같은 복음 선포의 중요성을 모르는 신앙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치않습니다. 냉담교우들은 점점 늘고 있고, 신자 증가율도 감소 추세가 역력합니다. 몇 년 전부터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위기로 규정하고, 복음화와 선교의 활성화를 위한 여러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황청도 이런 추세를 반영하여 ‘새복음화촉진평의회’라는 부서를 신설하였습니다.
‘새 복음화’라는 말은 선교의 참된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믿지 않는 사람이 세례를 받도록 하는 것만이 선교가 아니라,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모두 철저하게 복음을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선교는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표양과 복음을 살아가는 헌신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이제 자신의 삶을 통해 그것을 실천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하는 것이 ‘새 복음화’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선교이며 복음 선포입니다.
“종교의 좋고 그름은 거기에 몸담은 자들의 생활을 보면 제일 잘 알 수 있다.” <천국의 열쇠>에 나오는 이 말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는 전교주일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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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엽공호룡(葉公好龍)이어서야…/박혁 신부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전교 주일입니다. 전교란 간단하게, 자신이 믿는 종교를 선전하여 널리 알린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전교는 단지 내가 좋아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8∼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 계명을 지킬 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전교란 엄밀히 말하자면 신앙의 형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의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할 뿐 아니라 신앙의 내용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것을 자기가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그의 말을 듣고 신앙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옛날 중국 땅에 살던 엽공(葉公)이라는 사람이 용(龍)을 좋아하는 정도가 지나쳐 옷이나 가구, 담장, 그릇이나 술잔 등 집안 가득 용을 새겨 놓고, 용에 관한 책만 읽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소식을 들은 용은 자기를 그토록 좋아한다는 엽공을 만나러 엽공의 집에 갔습니다. 용이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 엽공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고 합니다. 용을 보자마자 도망간 엽공이 진심으로 용을 좋아하고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희생하고 참지 않는다면 누가 그의 말을 전해 듣고 하느님을 믿겠습니까? 만일 어느 집에 늘 접시 깨지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난다고 합시다. 누가 그 가족들의 사랑하라는 말을 곧이 듣겠습니까? 우리가 진실 되게 믿는 바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전교는 곧, 엽공의 용 사랑과 같은 허울에 불과할 것입니다. 전교란 말이나 행동이 생활의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서 우리 삶을 온통 예수님으로 채우고, 그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서지만,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로, 네 온 힘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200주년성서 루카10, 27) 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 삶의 고갱이로 삼아, 내 사랑의 삶과 내 희생의 모범이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밑거름이 되도록 힘껏 노력합시다.
[군종] 주님 때문에/소재나 신부
첫댓글 내일 주일 강론을 미리 묵상 하네요.
주님께 올리는 기도 분향 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 제사 같게 하시옵소서...
수고해주시네요. 주일 강론모음을 읽고 한주동안 묵상을 해야겟습니다. 고밥습니다.
이렇게 서로 도으면 사는것이 사랑을 실천하는것 아니겠습니까.. 배운것이 도둑질이니 완전하십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