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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9,16-19.22ㄴ-27>
형제 여러분,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39-42>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 곧 자신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일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42)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나의 행복을 위해 너에게>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오늘의 바오로 사도 말씀에 비춰서 저를 봤습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제가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표시가 바로 선교입니다.
바꿔 말하면 신앙적으로 미성숙하고 그래서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 때, 사랑을 했어도 거친 사랑밖에 할 수 없을 때는 선교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미성숙했던 때는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라 저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찾는 데 급급했고, 나의 고통과 불행과 씨름하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는커녕 돌아볼 여유도 없었는데 20대 중반까지의 저는 이러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왜 살아야 하는지 복음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했고, 복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았으며, 그래서 복음에서 나의 행복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30대 중반이었고 이때부터 이웃을 사랑해야겠다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이런 제가 저만 이렇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 너무 미안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 특히 북녘의 동포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 30대 후반부터이고 지금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제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 더 나아가 불행한 사람, 사랑이 자기 사랑이나 가족 사랑에 머무는 사람은 선교할 수 없고, 행복하고 이웃 사랑이 있더라도 그 행복과 사랑이 복음 때문이 아니면 인도적인 실천을 할망정 복음 선포는 못할 거라는 점을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선포는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만 할 수 있고, 기도로 사랑이 충만해야지만 복음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봉사자들과 매일 식당을 여는 기도를 봉헌하면서 “주님, 오늘도 당신 사랑을 저희에게 부어주시어 저희가 당신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 사랑을 이 식당을 통해 나눔으로써 당신 복음이 이 지역 사회에 널리 전파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게 복음 선포는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라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저는 불행할 겁니다.
그러니 저는 제가 행복하기에 복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저의 행복을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요, 너의 행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저의 행복을 위해서 선포하는 겁니다.
너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너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나를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갈수록 더 느끼는 저이고,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저인데, 아직도 아쉬운 것은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Omnibus, Omnia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지는 못하는 점입니다.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과 감사의 풍요로움>
고유의 명절 추석이다.
선물이 오가고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먹으며 ‘마음의 풍요’를 느끼는 때이다.
선물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선물을 주는 것이다.
감사와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선물이다.
계산적이지 않다.
그러나 되돌아올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선물의 의미를 잃고 호의를 사기 위한 뇌물이 된다.
이 명절에, 받는 사람에게 선물의 의미가 잘 전달되어서 서로 기쁨을 나누길 희망해 본다.
만약 뜻하지 않게 어울리지 않는 선물을 전달했다면 받는 사람의 기분도 선물을 주는 사람의 기대와 달리 불편함을 주는 셈이 될 것이다.
의미 있는 선물을 통해 서로 간 만남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다.
코로나19의 팬데믹에 이은 초강력 태풍 ‘힌남노’로 인해 만남의 기쁨을 누리기에 안타까움이 있지만, 조상과의 만남, 부모와 자녀의 만남, 친지와의 만남이 소중하고, 만남 그 자체가 서로에게 큰 선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백화점, 마트, 온라인 몰 등에서 다채로운 선물세트를 경쟁적으로 선보이고 있는데 음식이나 과일을 주고받는 유형의 선물보다는, 각종 상품권, 모발일 식사권 등 무형의 선물을 선호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형적인 물질보다는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랑과 감사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이다.
필자는 한 할머니의 선물을 잊지 못하는데 네잎클로버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인 할머니께서는 작은 컨테이너를 숙소로 사용하고 계셨는데 시들지 않게 하려고 물이 담긴 작은 컵에 네잎클로버를 담아오셨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드릴 것은 없고, 좋은 일 생기라고 가져왔소.”
할머니의 속마음을 생각하며 그만 울컥하였다.
얼마 후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오셨는데 ‘둥굴레’였다.
“무엇인가 드리고 싶은데 돈은 없고, 들에 나가서 뜯어다가 정성껏 말렸다”며 “맛이 달고 구수해 숭늉이나 누룽지 같으니 자주 끓여 드시오” 하셨다.
결정적인 한 마디에 제가 박장대소하였는데 “요즘 머리가 많이 빠지신 것 같은데 이것을 끓여 먹으면 머리가 난대요. 그러니 이 할머니 생각해서 꼭 챙겨 드시오”.
필자는 머리가 많이 빠져 있었다.
필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할머니의 모두를 받았다.
요즘 대통령께서 추석 선물을 하였다고 한다.
“어렵고 힘든 시기이지만 희망이 보름달처럼 환하게 우리를 비출 것”이라는 내용의 카드가 담겨 있단다.
그런데 “윤 대통령 추석 선물 팝니다.” 중고가 최고 00원이라고 중고시장에서 판매한다니 진정한 선물의 의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권세가에게는 비위를 맞추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친구다.”
(잠언 19,6)
사랑과 정성이 담긴 귀한 선물을 기억하고 나도 그런 선물이 되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을 나누어 주면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 퍼져나가고 스며들듯이 선물도 다르지 않다.
받는 이에게 기쁨이 되고 이웃에게 흘러나간다.
감사의 마음으로 선물이 되어주는 순간 받는 사람도 아무런 조건 없이 다른 이의 선물이 되어준다.
“한 사람이 신께 빌었다.
쌀 항아리를 채워주시고, 과일 광주리를 채워주시고, 고기 상자를 채워주시라고.
하도 졸라대는 통에 신은 허락해 주고 말았다.
그런데 쌀 항아리와 과일 광주리와 고기 상자를 주워 담으면 담는 대로 커지게끔 만들었다.
그 사람이 쌀 항아리 앞으로 가면 쌀이 저절로 생겼다.
쌀 항아리에 쌀을 퍼담는 그는 신이 났다.
한참 쌀을 담다 보면 쌀 항아리는 커지는데 고기 상자가 그대로인 게 그는 불만이었다.
이번에는 고기 상자 앞에 섰다. 이내 고기가 저절로 생겼다.
고기를 집어넣는 대로 고기 상자 또한 커졌다.
하나 과일 광주리가 그대로인 게 그는 또 불만이었다....
번갈아 쌀 항아리와 고기 상자와 과일 광주리를 채우다 보니 어느덧 죽는 날이 다가왔다.
그제야 그는 문득 깨달았다.
게걸스러운 거지가 되어 살아온 자기 삶을. 그는 신에게 항의하였다.
‘어찌 이렇게 거지인 채로 살아오게 하였습니까?’
신이 대답하였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 순전히 네 탓이다.
꽉 차지 않아도 만족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 아니냐’”
(정채봉)
추석 명절에 음식이나 과일, 고기보다는 스스로 서로에게 마음의 선물이 되어주기를 기도한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지적질로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금쪽같은 내 새끼' 78회 ‘가족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는 아들’에서는 내가 통제하고 지적하고 잔소리하면 상대가 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십니다.
60년간 오직 자녀교육을 잘 시키려 갖은 고생하신 할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아들조차도 엄마에게 “엄마는 항상 강압적, 지시적, 명령적이었어요, 항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아들도 자신이 어머니를 비난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금쪽이는 아빠, 할머니의 지나친 통제와 지적질에 숨이 막히고 그래서 가끔은 소변을 지리기도 합니다.
엄마가 이혼한 상태라 빈자리가 큰 금쪽이는 할머니와 아빠를 화해시키려 노력하다가 혼자 방에 들어와 숨죽여 웁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라고 하십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성장시켜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식과 다르게 하려는 제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눈먼 인도자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눈먼 인도자들이 하는 행태를 나무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루카 6,41-42)
곧 눈먼 인도자들은 자신들 제자들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 그들 눈의 티를 빼내려는 이들입니다.
이것은 비난, 지적질, 혹은 나무람, 잔소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것으로 자신을 고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발합니다.
자유가 있어서 통제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이를 오히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데모가 한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떠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이슈보다는 감정 싸움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전경에게 매 맞고 돌아온 선후배들을 볼 때 화가 나고 전경들은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과 돌에 맞아 상처를 입은 동료를 보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 사람은 그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그래서 너는 뭐가 잘났는데?”로 나옵니다.
방어기제가 작동되는 것입니다.
방어기제는 자아가 양심 때문에 알게 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려는 시도입니다.
그렇게 죄는 사라지고 서로 간의 비방만 남습니다.
미국에서 한 아버지가 아들이 마약을 한다며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의사는 역할극을 시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뭘 못 해줘서 그렇게까지 아이가 망가졌는지 답답해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제 역할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내가 마약 중독자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식의 비난을 감당할 수 없었고 감당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면 자기 잘못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진짜 죄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잘못을 드러내는 방식은 당신이 우리 죄 때문에 칼에 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죄를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
한 소매치기 청년이 어떤 병원 앞에서 담배만 피우다 지하철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한 여인의 가방에서 돈 냄새를 맡아 소매치기하여 달아납니다.
얼마 뒤 그 소매치기의 남동생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전화가 옵니다.
형은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보려고 병원에 왔었던 것입니다.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동생의 말에 형은 돈 없으면 다 죽어야 하느냐고 분개합니다.
세상이 이 모양이니 자신이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동생은 어머니 수술비로 자신의 결혼자금까지 찾아오던 애인이 소매치기만 당하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소매치기당한 시간과 장소는 정확히 자신이 소매치기 한 시간과 장소와 일치했습니다.
소매치기 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유리조각’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일화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 죄의 칼에 찔리심을 통해 우리 죄를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고치려 할 때는 그들의 죄를 들추어내고 지적질하고 나무라면서 고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실까요?
하십니다.
그러나 당신 들보, 곧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하십니다.
베드로의 예를 봅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적받은 베드로는 변했을까요?
안 변합니다.
언제 변했을까요?
정말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찌르면서 변합니다.
어떤 죄도 그 죄 때문에 찔려 피를 흘린 누군가를 보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스승이 되려면 제자들의 죄 때문에 칼에 찔리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면 들보가 사라집니다.
그제야 그들의 티를 빼내 줄 수 있게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전사 - 영적 훈련, 영적 전쟁>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우리들!
우리는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옵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 떠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우리들!”
(시편 84;2,5-6)
9월1일부터 10월4일까지는 교회에서 정한 창조시기로 매일 끝기도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를 바칩니다.
창조시기와 맞물려 하느님의 피조물인 까치와 까마귀의 배 피해가 심각합니다.
공동 식사 시간 배밭 농장 수사님과 나눈 대화입니다.
“배밭 까마귀, 까치 피해가 어느 정도입니까?
10% 정도 됩니까?
10%정도면 1/10, 하느님의 피조물들의 피해이니 십일조 정도로 알고 하느님께 봉헌한다고 생각해야 될 것 같네요.
피조물과 더불어 살라는 것 같습니다.
창조시기,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문을 바치기에 참 묘하게 됐습니다.”
“10%가 아니라 30%쯤 아니,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맛있는 황금배들은 얼마 남지 않고 거의 다 쪼아 먹었습니다.
수사님, 까마귀, 까치들에게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강론 좀 해 주세요.”
대화를 나누며 웃었습니다.
배 피해가 참 심각한데도 배농장 수사님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 태평스러웠고, 나머지 수사님들 역시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이 또한 끊임없는 공동전례기도를 통한 믿음의 훈련 덕분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덕분에 그리 크게 동요되지 않는 것이지요.
사랑뿐 아니라, 희망도 믿음도 영적훈련에 속합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문자 메시지로 편지를 나눌 때도 가능한 마음을 담아, 이름 앞에 ‘사랑하는’이란 말마디를 붙이고 시작하는 것도, 일종의 사랑의 훈련입니다.
이렇게 용기있게 ‘사랑하는’ 말마디를 쓰다보면 상대방은 물론 제 마음도 알게 모르게 정화되고 성화되어 사랑의 사람이 되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수사님들이 일상생활에서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도 믿음의 훈련이 잘 된 덕분입니다.
삶은 영적훈련이요 영적전쟁입니다.
영적훈련이자 동시에 영적전쟁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이고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이에 해당됩니다.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제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참 많이 강조해온 주제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여 제가 내심 자주 소망을 표현하곤 합니다.
“나는 주님의 전사다.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평화의 전사이다.
영적전쟁 중 싸우다 전사했으면 좋겠다.
사고사, 객사, 교통사, 병사가 아닌 주님의 전사戰士로서 영적전쟁 중, 즉 기도하다, 일하다, 공부하다 전사戰死했으면 좋겠다.”
구도적 열정과 순수의 주님의 전사인 수도자들 누구나의 공통적 소원일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치열한 영적전투의 삶을 살다가 주님의 전사로 생애를 마감했으면 하는 소원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의 순교자들이 영적전쟁의 삶을 살다가 전사한 분들입니다.
우리 역시 깨어 영적훈련에 영적전투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영적전쟁의 핵심은 자기와의 전쟁이자, 더 구체적으로 무지와의 전쟁입니다. 여름 밭농사를 풀과의 전쟁이라 하는데, 우리의 평생 영적 전쟁은 무지와의 전쟁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과의 영적전쟁입니다. 참 대책없이 힘든 것이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병입니다.
참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이요, 참 어려운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자기인식을 참 많이 강조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이래서 그렇게도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와 회개 또한 중요한 영적 훈련에 속합니다.
자기를 몰라 판단이나 심판이지 정말 자기의 한계와 단점들을 아는 겸손한 사람들은 결코 남을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알아가는 것도 참 중요한 영적 자기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눈먼 이가 상징하는 바, 바로 무지의 사람입니다.
나라든 가정이든 그 무슨 공동체든, 눈밝은 지혜로운 자가 아닌 눈먼 무지의 사람들이 인도자가 되면 본인은 물론 공동체에도 이보다 큰 재앙도 불행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스승은 예수님으로 바꿔도 좋습니다.
우리 제자들은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보다 높지 않습니다.
평생 주님의 학인이 되어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영원한 참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되면 충분합니다.
이어지는 우리의 스승, 예수님 말씀이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편견과 선입견, 오해와 착각으로 자주 실수하는 무지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다.”
바로 문제는 나이고 답은 주님임을 아는 자가 지혜롭고 겸손한 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없이 무지의 실체인 “자기ego”라는 눈 속에 들보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무지한 자기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파스카 예수님뿐입니다.
이래서 겸손히 평생 예수님을 배워 닮아가는 배움의 여정, 예닮의 여정, 주님과 일치의 여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우리가 문제라면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예닮의 여정과 참나를 알아가는 앎의 여정은 함께 갑니다.
주님을 알아가면서 참나를 알아가니 주님의 탐구와 참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 참나에 이르러 내 눈의 자기라는 들보가 사라질 때 비로소 이웃 형제의 지혜로운 조언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유일한 해법이자 처방은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참 나를 알아가는 길뿐이요, 역시 평생과제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적전쟁은 무지와의 전쟁이요,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면서 참나에 이를 때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나 영적 승리의 월계관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궁극의 목표이자 희망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야말로 불세출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롤 모델입니다.
바오로는 영적훈련, 영적전쟁의 주님의 전사를 경기장의 경기자로 명명합니다.
우리 삶은 영적 전쟁터이자 동시에 경기장이 되기도 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 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 달리고 있는지, 참으로 잘 싸우고 있는지 잠시 휴전하고 멈추어 자기를 살펴보며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우리의 영적 경기는 상대 평가가 아닌 절대 평가입니다.
자기 페이스대로 한결같이 목표 지점에까지 달릴 때 하나하나 모두가 1등에 썩지 않는 화관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과연 제 페이스대로 잘 달리고 있습니까?
잘 싸우고 있습니까?
예닮의 여정, 참나를 알아가는 앎의 여정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죽어야 끝나는 영적훈련에 영적전투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 모두 사기충천士氣衝天케하며, 용기백배勇氣百倍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단련하여 조복調伏시켜야 합니다.
육신의 욕망에 영혼이 끌려가지 않고,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야 합니다.
아니 자발적으로 육신이 영혼을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님을 배우고 닮아갈 때 주님의 은총으로 육신은 저절로 영혼을 따르고 이어 영혼의 건강에 영력靈力을 선물로 받습니다.
평생 영적 훈련에, 영적 전투의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가 이에 해당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불퇴전不退轉의 주님의 전사로 살게 합니다.
“주 하느님은 태양이요 방패이시니, 주님은 은총과 영광을 주시나이다.
흠없이 살아가는 우리 주님의 전사들에게, 복을 아끼지 않으시나이다.”
(시편 84,1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서품 31주년 동창 모임엘 다녀왔습니다.
원래는 서품 30주년에 만나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1년 연기했습니다.
동창들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걷고, 식사하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동창 중에 한 명이 서품 10주년을 기념하면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21년 전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때는 다들 첫 본당 주임 사제가 되어서 열정과 꿈을 가지고 지냈습니다.
21년이 지난 지금 그때처럼 열정과 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다들 가을에 감이 빨갛게 익어가듯이 여유로워졌고, 서로에 대한 배려도 깊어졌습니다.
예전에는 먼가를 해야만 의미가 있고,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저 머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감사합니다.
서품 40년이 되면 모두들 사목의 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 서품 31주년 동창 모임 사진을 보여주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때가 좋았지!’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서품 40주년을 모임에서 동창들 모두가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빵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 줄 나의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서 흘릴 나의 피다.”
신학교의 도서관 입구에도 ‘모든 이의 모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라는 의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라, 다음에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높은 관직에 있을수록 더욱 몸가짐을 조심했다고 합니다.
가족들 또한 아버지의 관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하느님께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먼저 나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침묵을 강조하는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수도원에 들어온 수도자들은 평상시에는 말 한마디 할 수 없고, 1년에 한 번 수도원장과의 면담 때에야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수도자로 이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침묵을 지키면서 열심히 수도 생활을 했지요.
그리고 드디어 1년이 지났고, 수도원장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침대가 너무 딱딱해서 큰 고생을 했습니다.
침대를 바꿔주세요.”
수도원장은 곧바로 침대를 바꿔주었습니다.
다시 1년이 지나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수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식이 부실해서 식사 때마다 고역입니다.
음식에 신경을 써주세요.”
수도원장은 최대한 그가 원하는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또다시 1년이 지나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제가 지내는 방이 열악합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방으로 바꿔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가 원하는 방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네 번째 면담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도자는 “말 한마디 못 하니 너무 답답하고 바보가 된 느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당신이 바꿔 달라는 대로 다 바꿔주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바꾸어 보세요.”
우리는 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대가 바뀌길 원합니다.
남편이 바뀌길, 아내가 바뀌길, 자식이 바뀌길, 세상이 바뀌길….
그러나 여기서 늘 빠지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점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듯이, 자신을 먼저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변화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외적인 행동과 마음속 생각의 불일치를 이루면서 결국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선자’라는 호칭이 지금을 사는 우리가 계속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만 바꾸라고 성을 내면서 말하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바뀌면서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선의 삶이 아닌, 진실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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