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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유 게시판 스크랩 감자를 삶으며
아녜스 김채경 추천 0 조회 35 08.05.28 14:56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감자를 삶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옮겨갈 즈음에 제철의 감자는 우리들의 반주식이기도 했다.

좀 더 많이 배불리 먹이겠다고 엄마는 아침밥 차려주고는 칠성시장으로 가셨다.

한 나절 제일 더울 때쯤 커다란 키에 감자를 머리에 이고 오셨다

감자 5관에 짓눌린 엄마의 목은 유독 더 건들건들거렸다.

엄마의 훤칠한 키가  더 건들거리게 보였는 지, 무거운 짐을 제대로 이지 못해서였는 지 모르겠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귀밑으론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우리 삼남매 반양식은 해결되었단

그 벅참에 엄마의 온 얼굴은 웃음이 가득했었다.

커다란 양푼이에 감자를 가득 담아서 북북 씻어 흙을 털어내고, 숟가락으로 껍질을 벗길 때면 우리도 주렸던 배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감자껍질을 깠다.

연탄불 위의 작은 솥에서 감자 익는 냄새만 맡아도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시간이었다.

엄마가 한 임 가득 이고 온 감자는 끝없이 먹어도 될 듯 하기만 했다.

 

그러고 여름방학.

더 이상의 지체할 수 없는 시간이 시계초침처럼 재촉하면서 닥아왔다.

달아날 곳도 숨을 곳도 꺼져버릴 곳도 없어질 즈음에 엄마는 연탄 한 장 들어가는 작은 화덕을 사오셨다. 우리가 산책가던 앞산공원으로 감자와 밀가루 기름 화덕을 들고 나섰다.

여름날 뜨거운 화덕은 다리 근처에서 열기를 더 해 덥다는 단어 하나로는 부족했다.

기어이 혼자 있기 싫어 엄마를 따라 나섰다.

앞산공원 계곡에 비닐을 깔고 전을 폈다.

엄마는 감자를 썰고 밀가루옷을 잎혀 튀겼다.

나는 곁에서 방학숙제를 했다.

처량맞기가 그지없는데도 굳이 나는 왜 따라 가려했을까?

엄마와 늘 함께 있고 싶었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렵고 무섭고 싫었다.

나는 열심히 속다짐을 했다.

'절대 부끄러워 말자.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당당해지자'

아무리 다짐을 해도 자꾸만 시선이 아래로 가고 사람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감자 튀김이 하나 둘 튀겨져도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보기만 할 뿐 사가지를 않는다.

게다가 좀 전 부터는 비도 온다.

여름비 속에서 눅눅해진 감자튀김을 쳐다보는 엄마와 나는 신파가 따로 없었다.

 

손님이 한 사람 왔다.

하필 우리반 아이와 그 아이 아빠다.

"너 야 아나?  한 반이네"

그만 모른 채 해주면 좋으련만 기어이 서로 아는 사이라고 그 아저씨는 일러주셨다.

그 아이는 몹시도 의아해 하는 눈빛으로 아무말 없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래도 쟤 보다 공부도 잘 해.'

속으로 그 말을 되뇌이어도 상한 자존심이 도저히 회복되질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그 아이와 말도 하지 않았다.

 

'글쓰던 손에 이게 왠 말가?'

외할머니의 눈물지으며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부끄러워 하면 엄마가 더 슬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애써 내감정은 숨겼다.

엄마가 내 감정까지 떠 안기엔 너무 힘들어 보였다.

 감자튀김은 누글누글해져 빗속에서 쳐량하게 있는데, 남은 것을 먹을 수 있으니 입은 또한 행복해지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어린 나로서도 당황스러웠다.

결국 장사수완이 없는 엄마는 화덕값만 날리고 감자튀김 장사를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세월이 많이 갔나보다.이 얘기를 내가 할 수 있다니!

감자 분이 풀풀 날린다.

감자를 딱 알맞게 삶았다.

어릴적 상한 자존심도 풀풀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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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5.28 15:27

    첫댓글 우~~~생각을 말아요~~~지나간 일들을~~~ 우~~~그리워 말아요~~~떠나간 일인데~~~ ♪ 아아녜스님의 아스라한 옛이야기를 읽고있는 때마침 이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어요~^^ 새벽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아직도 구름속에 덮혀있는 축축한 날씨가 먼기억 여행을 하게 하나봅니다... 도저히 잊을수 있을것같지 않은 일들도 세월앞에 장사없다고...지워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용서도 되고 그러더라구요...이리 글 잘쓰시는게 친정어머니의 소질을 물려받으신거로군요~ ^^

  • 작성자 08.05.29 14:07

    김정호의 '하얀나비'죠? 오랜만에 속으로 불러봅니다. 대학 들어가서 첫미팅때 서로 노래부르기 했었는데 제 친구가 고개를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하곤 한껏 분위기 잡으며 불렀는데 분위기가 다운되어서 두고두고 그 친구는 이 노래만 나오면 얼굴이 빨개졌어요.

  • 08.05.28 16:09

    아름다우세요. 이 글 읽으니 전에 본 이오덕 선생님의 동화 [ 감자를 먹으며 ]가 지나갑니다. 그림과 글들이.

  • 작성자 08.05.29 14:08

    그런 글이 있었군요.이오덕 선생님이 글은 쉬우면서도 가슴에 와 닿지요.

  • 08.05.28 22:55

    칠성시장과 앞산은 거리상 옛적엔 대구의 끝에서 끝입니다. 거기다 5관이면 20킬로의 무게인데....아네스님, 그래요. 지나간날의 기억은 다 애잔하고, 소중하고 가슴이 싸아하지요. 아네스님의 아픈 얘기가 우리에겐 너무나 귀한 얘기로 들린답니다.그리고 따스한 옛 얘기로 전해 온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해요. 들어 내 놓을수 있는 여유를...

  • 작성자 08.05.29 14:10

    맞아요. 여유가 있으니 이제 자존심 상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냥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 08.05.30 01:24

    어린마음에 얼마나 많이 속상했을지.....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일이 아닌것들이 그 당시엔 정말 죽고싶도록 싫었었지요.

  • 08.05.30 17:13

    저도 이해해요.어릴 적 장사하는 엄마가 왜 그리 부끄러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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