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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19회
주간왕(周簡王) 13년 여름 4월, 초공왕(楚共王)은 우윤(右尹) 임부(壬夫)의 계책에 따라,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정성공(鄭成公)과 함께 宋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어석(魚石) 등 宋나라 다섯 대부를 향도로 삼아 팽성(彭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초공왕은 어석 등 다섯 대부에게 병거 3백승을 주어 팽성을 지키게 하면서 당부하였다.
“晉나라가 요즘 吳나라와 친교를 맺었는데, 팽성은 晉나라와 吳나라가 왕래하는 길목이오. 지금 많은 병력을 이곳에 남겨 그대들을 돕게 할 것이오. 진격하여 싸워 이기면 宋나라 땅을 그대들에게 봉지로 줄 것이고, 이곳을 잘 지키기만 해도 吳나라와 晉나라의 사신이 왕래하는 것을 끊을 수 있소. 그대들은 성심껏 임무를 다하여, 과인의 부탁을 저버리지 마시오!”
공왕은 楚나라로 돌아갔다.
그해 겨울 송성공(宋成公)은 대부 노좌(老佐)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팽성을 공략하게 하였다. 어석 등은 수졸(戍卒)들을 거느리고 맞서 싸워 노좌를 패퇴시켰다.
[송성공은 송양공의 아들로서 훨씬 이전의 인물이다. 착오가 있다. 제115회에, 진경공(晉景公)이 죽고 진여공(晉厲公)이 즉위했을 때, 송공공(宋共公)이 상경 화원을 晉나라로 보내 조문하고 신군의 즉위를 축하했다고 하였다. 성공→소공(昭公)→문공(文公)→공공(共公)으로 이어지고, 이때는 공공 다음의 평공(平公)이다. 평공은 공공의 아들로서 이름은 성(成)이다. 평공의 이름이 ‘成’이어서 ‘成公’으로 잘못 쓴 것 같다. ‘수졸(戍卒)’은 변경을 지키는 군졸을 말한다.]
楚나라 영윤 영제(嬰齊)는 팽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력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갔다. 노좌는 자신의 용맹만 믿고 적을 얕잡아보고서 楚軍 깊숙이 들어갔다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영제는 宋나라 도성으로 진격하였다.
송평공은 크게 두려워하여, 우사(右師) 화원(華元)을 晉나라로 보내 위급을 고하였다.
한궐(韓厥)이 진도공(晉悼公)에게 말했다.
“예전에 문공(文公)께서 패자가 되신 것은 宋나라를 구원한 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晉나라가 흥하느냐 쇠퇴하느냐는 이번 일에 달려 있습니다.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도공은 사신들을 제후들에게 보내 군대를 일으키도록 하고, 친히 대군을 일으켜 한궐·순언(荀偃)·난염(欒黶) 등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태곡(台谷)에 주둔하였다.
영제는 晉의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려 楚나라로 돌아갔다.
주간왕 14년, 진도공은 宋·魯·衛·曹·莒·邾·滕·薛 8국의 군대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팽성을 포위하였다. 宋나라 대부 상수(向戍)는 군사들로 하여금 초거(轈車) 위에 올라가 성의 사방에서 성 위를 향해 소리치게 하였다.
“어석 등은 주군을 배신한 역적이므로,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晉侯께서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립된 성을 짓밟아 풀 한 포기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순역(順逆)의 도리를 안다면, 어찌하여 역적들을 사로잡아 항복하지 않느냐? 무고한 살육을 면하도록 하라!”
그렇게 수차례 성을 돌면서 소리쳤기 때문에, 팽성의 백성들은 그 소리를 듣고 어석 등이 반역했음을 알고 성문을 열어 晉軍을 받아들였다. 그때 楚軍의 수졸들은 비록 숫자는 많았지만, 어석 등이 잘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을 다하지 않았다. 진도공이 입성하자 楚軍 수졸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한궐은 어석을, 난염과 순언은 어부(魚府)를, 宋나라 상수는 상위인(向為人)과 상대(向帶)를, 노나라 중손멸(仲孫蔑)은 인주(鱗朱)를 사로잡아, 진도공 앞으로 끌고 왔다. 도공은 다섯 대부를 참수하고, 그 종족들을 황하 동쪽 호구(壺邱) 땅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이동하여 鄭나라에 죄를 물으러 갔다.
楚나라 우윤 임부는 鄭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다시 宋나라를 침공하였고, 연합군은 군대를 돌려 宋나라를 구원하러 갔다. 楚軍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연합군도 각기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해에 주간왕이 붕어하고, 태자 설심(泄心)이 즉위하니 그가 주영왕(周靈王)이다. 영왕은 태어날 때부터 입 위에 콧수염이 있어 주나라 사람들은 자왕(髭王)이라 불렀다.
주영왕 원년 여름, 정성공(鄭成公)은 병이 위독하자, 상경 공자 비(騑)에게 말했다.
“楚君은 우리 정나라를 구원하느라 한쪽 눈을 잃어, 과인은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소. 과인이 죽은 후에도 경들은 楚나라를 배신하지 않도록 하시오!”
당부를 마치자 정성공은 훙거하였다. 공자 비 등은 세자 곤완(髡頑)을 받들어 군위에 세웠다. 그가 정희공(鄭僖公)이다.
진도공은 鄭나라가 아직 복종하지 않자, 제후들을 척(戚) 땅에 소집하여 의논하였다. 魯나라 대부 중손멸이 계책을 내놓았다.
“鄭나라에서 가장 험한 곳은 호뢰(虎牢)로서, 楚나라와 鄭나라가 통하는 요로(要路)입니다. 그곳에 성을 쌓고 관문(關門)을 설치하여 많은 병력을 주둔시켜 압박하면, 鄭나라는 필시 복종할 것입니다.”
[제37회에도, 관중이 말하기를, 호뢰의 험준함은 천하에 소문이 나 있다고 하였다.]
楚나라 항장 무신(巫臣)도 계책을 내놓았다.
“吳나라와 楚나라는 장강(長江)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있습니다. 신이 예전에 吳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함께 楚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조했었습니다. 그 후 吳나라는 여러 번 楚나라의 속국들을 침략하여 楚나라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사신을 보내 吳나라로 하여금 楚나라를 침공하게 하면, 楚나라는 吳軍 때문에 동쪽에서 골치를 썩일 것이니 어느 겨를에 북쪽에서 鄭나라를 놓고 다툴 수 있겠습니까?”
[‘장강(長江)’은 양자강(揚子江)이다. 제113회에, 굴무(무신)는 晉나라로 망명하여, 晉나라로 하여금 吳나라와 우호를 맺게 하고, 병거로 싸우는 법을 吳나라에 가르쳐 주었다. 자신의 아들 호용(狐庸)으로 하여금 吳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하여, 晉과 吳 사이에 왕래가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때부터 吳나라는 세력이 날로 강해지고 병력도 날로 늘어나, 楚나라 동쪽의 속국들을 모두 탈취하였다. 吳나라 군장 수몽(壽夢)은 마침내 왕을 참칭하였으며, 楚나라의 변방은 吳나라의 침공으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고 하였다. 제115회에, 무신은 吳·晉·魯·齊·宋·衛·鄭과 종리(鐘離)에서 회맹하였다.]
진도공은 두 가지 계책을 모두 쓰기로 하였다.
그때 제영공(齊靈公)은 세자 광(光)과 상경 최저(崔杼)를 회맹에 보내 晉侯의 명을 따르게 하였다.
[제111회에, 애꾸눈 극극, 대머리 계손행보, 절름발이 손량부, 곱사등이 공자 수를 희롱하다가 제나라가 晉·魯·衛·曹 4국에 패전하고 항복했을 때는 제경공(齊頃公)이었다. 제영공은 제경공의 아들이며, 이름은 환(環)이다.]
진도공은 9로 제후의 병력을 규합하여 호뢰에 큰 성을 쌓고 돈대(墩臺)를 설치하고, 대국은 군사 천 명, 소국은 3~5백 명을 차출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과연 정희공은 두려워하여 晉나라에 화평을 청하였다. 진도공은 鄭나라와 화평을 맺고 귀국하였다.
[앞서 팽성을 포위했을 때에는 宋·魯·衛·曹·莒·邾·滕·薛 8국이 참여했는데, 이번에 제나라를 포함하여 9국이 된다. ‘돈대’는 홍수 때 침수 방지나 군사용 목적 등으로 터를 쌓아 주변 지대보다 높고 평평하게 만든 소규모의 대지이다.]
그때 중군위(中軍尉) 기해(祁奚)는 나이가 70이 넘어, 늙었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진도공이 물었다.
“누가 경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해호(解狐)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해호는 경의 원수(怨讐)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그를 천거하십니까?”
“주군께서는 누가 적임자인가를 물으셨지, 신의 원수가 누구인지 묻지는 않으셨습니다.”
도공은 해호에게 중군위 벼슬을 내렸는데, 해호는 벼슬에 오르기도 전에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 그래서 도공은 다시 기해에게 물었다.
“해호 외에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그 다음으로는 기오(祁午)가 적임자입니다.”
“기오는 경의 아들이 아닙니까?”
“주군께서는 누가 적임자인가를 물으셨지, 신의 아들이 누구인지 묻지는 않으셨습니다.”
도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중군부위(中軍副尉) 양설직(羊舌職)도 죽었으니, 경은 그 후임자도 천거해 보십시오.”
기해가 말했다.
“양설직에게는 적(赤)과 힐(肹) 두 아들이 있는데, 둘 다 현명합니다.”
도공은 기오를 중군위에, 양설적을 중군부위에 임명하였다. 대부들은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기해가 원수를 천거한 일을 ‘기해천수(祁奚薦讐)’라 하는데,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사람을 천거한다는 말로 쓰인다.]
한편, 무신의 아들 무호용(巫狐庸)은 진도공의 명을 받고 吳나라에 가서, 吳王 수몽(壽夢)에게 군대를 일으켜 楚나라를 공격하라고 청하였다. 수몽은 그 요청을 승낙하고, 세자 제번(諸樊)을 장수로 삼아 장강 어귀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게 하였다.
첩자가 그 소식을 탐지하여 楚나라로 가서 보고하였다. 초나라 영윤 영제가 초공왕에게 말했다.
“吳軍이 아직 楚나라까지 침범한 적이 없었지만, 한번 국경을 침범하게 되면 다음에 또 침범하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먼저 정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왕은 그 말에 찬성하였다. 영제는 수군(水軍)을 점검하고 정예병 2만을 선발하여 장강을 따라 내려가 구자(鳩茲)를 기습하여 점령하였다. 영제가 장강을 따라 계속 내려가려고 하자, 효장(驍將) 등요(鄧廖)가 말했다.
[‘효장(驍將)’은 용맹하고 날랜 장수이다.]
“장강은 물살이 급해서 나아가기는 쉽지만 물러서기는 어렵습니다. 소장이 일군을 거느리고 앞서 나아가, 이기면 계속 전진할 것이고, 지더라도 크게 지지는 않겠습니다. 원수께서는 학산기(郝山磯)에 주둔하고 계시다가, 기회를 보아 움직이시면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제는 그 계책에 찬성하고, 중무장병 3백과 보병 3천을 등요에게 내주었다. 그들은 모두 일당십(一當十)의 용사들이었다. 크고 작은 배 백 척을 타고 포성을 울리면서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吳나라 초선(哨船)이 구자가 함락당한 사실을 탐지하고 세자 제번에게 가서 보고하였다. 제번이 말했다.
“구자가 이미 함락되었으니, 楚軍은 필시 승세를 타고 동쪽으로 진격해 올 것이다. 마땅히 대비해야겠다.”
제번은 공자 이매(夷昧)로 하여금 전선(戰船) 수십 척을 거느리고 양산(梁山) 동서쪽에서 적을 유인하게 하고, 공자 여제(餘祭)로 하여금 채석항(采石港)에 매복하게 하였다.
[제번은 수몽의 첫째아들, 여제는 둘째아들, 이매는 셋째아들이다.]
등요가 학산기를 지나자, 양산 쪽에서 병선(兵船)이 나타났다. 등요가 용맹하게 전진하자, 이매는 잠시 싸우다가 패한 척하면서 동쪽으로 달아났다. 등요가 이매를 추격하여 채석기(采石磯)를 지나자 제번의 대군이 나타났다. 楚軍과 吳軍이 접전을 벌여 10합이 채 되지 않았는데, 채석항 안에서 포성이 크게 울리면서 여제의 복병이 나타나 楚軍을 협공하여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등요는 얼굴에 화살을 세 대나 맞았지만, 화살을 뽑아 버리고 힘을 다해 싸웠다. 이매는 큰 몽동(艨艟)들을 이끌고 돌진해 왔는데, 배 위에는 정예병들이 큰 창을 들고 적선을 공격하였다. 많은 楚軍의 배들이 뒤집어지고 군사들은 물에 빠져 죽었다. 등요는 吳軍에게 사로잡혔으나, 굴복하지 않아 죽음을 당했다. 楚軍 가운데 도망친 자는 중무장병 80명과 보병 3백 명뿐이었다.
[‘몽동(艨艟)’은 쇠가죽으로 선체를 덮어 적의 화살이나 돌을 막으면서 돌진하여 적의 배를 쳐부수는 데 쓰이는 좁고 긴 전투용 배이다.]
영제는 죄가 두려워 패전한 일은 숨기고 승전한 일만 아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吳나라 세자 제번이 승세를 타고 반격하여 楚軍을 기습하였다. 영제는 대패하여 돌아갔고, 구자는 다시 吳나라 영토가 되었다. 영제는 수치심과 분노로 인해 병을 얻어 영도(郢都)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사관(史官)이 시를 읊었다.
乘車射御教吳人 병거 싸움과 궁술을 吳나라에 가르쳤더니
從此東方起戰塵 동방에서부터 전쟁의 먼지가 일기 시작했다.
組甲成擒名將死 楚軍 병사들이 사로잡히고 명장이 죽었는데
當年錯著族巫臣 예전에 무신(巫臣)의 종족들을 잘못 죽였기 때문이었네.
[제113회에, 무신(굴무)이 晉나라로 망명하자 초공왕은 무신의 종족을 몰살했으며, 그 소식을 들은 무신은 복수를 다짐했었다.]
초공왕은 우윤(右尹) 임부를 영윤으로 승진시켰다. 임부는 본래 탐욕하고 야비하여 속국들에게 뇌물을 요구하였다. 진성공(陳成公)은 임부의 요구를 견디다 못해 원교(轅僑)를 晉나라로 보내 속국이 되겠다고 청하였다.
[제106회에, 초장왕이 陳나라를 멸하여 초나라의 현으로 만들었다가, 신숙시의 ‘혜전탈우(蹊田奪牛)’ 얘기를 듣고 진성공을 복위시켜 주었었다.]
진도공(晉悼公)은 계택(雞澤)에서 제후들을 모아 회맹하고, 다시 척(戚) 땅에서 또 회맹하였다. 吳王 수몽 역시 회맹에 참석하였다. 이리하여 晉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세력이 크게 떨쳐졌다.
초공왕은 陳나라를 잃은 것에 노하여, 임부에게 그 죄를 물어 처형하였다. 그리고 字가 자낭(子囊)인 임부의 아우 공자 정(貞)을 영윤에 임명하였다. 초공왕은 군대를 점검하고 병거 5백승을 동원하여 陳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그때 진성공(陳成公) 오(午)가 훙거하고 세자 약(弱)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진애공(陳哀公)이다. 진애공은 楚軍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다시 楚나라에 귀부하였다.
진도공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군대를 일으켜 陳나라를 놓고 楚軍과 싸우려고 하였다. 그때 홀연 무종국(無終國)의 군주 가보(嘉父)가 보낸 대부 맹락(孟樂)이 晉나라에 와서 호랑이 가죽과 표범 가죽 백 장을 바치며 진도공에게 아뢰었다.
“산융(山戎)의 여러 나라는 제환공(齊桓公)이 정복한 이래로 평온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燕나라와 秦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중원에 패자가 없는 틈을 타서 산융은 다시 침략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과군은, 晉君께서 영명하시어 제환공과 진문공(晉文公)의 패업을 계승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晉나라의 위덕(威德)을 산융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산융의 여러 나라들이 晉나라와 동맹 맺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군이 신을 보내 군후의 명을 받들게 하였습니다. 군후께서 재결해 주십시오.”
[제41회에 보면, 산융은 북융(北戎)의 한 종족으로서, 영지(令支)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지(離支)라고도 한다고 했었다. 제환공이 영지를 정벌하러 갔을 때, 북융의 한 종족이기는 하나 산융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무종국의 장수 호아반이 기병 2천을 거느리고 와서 제환공을 도왔었다. 제환공은 영지와 고죽국을 평정하였다.]
진도공이 장수들을 소집하여 상의하자, 장수들이 모두 말했다.
“융적(戎狄)은 신의가 없으므로 정벌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전에 제환공이 패자였을 때, 먼저 산융을 평정한 후에 형만(荊楚)을 정벌하였습니다. 저들은 승냥이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어 군대의 위력이 아니면 제어할 수 없습니다.”
사마 위강(魏絳)만 홀로 반대하며 말했다.
“안 됩니다. 지금 제후들이 처음 회맹하여 아직 패업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군대를 일으켜 산융을 정벌한다면, 楚軍이 필시 빈틈을 노리고 중원으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면 제후들은 필시 우리 晉나라를 배반하고 楚나라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적(夷狄)은 금수(禽獸)이고, 제후들은 형제입니다. 이제 금수를 얻기 위해 형제를 잃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계책이 아닙니다.”
도공이 말했다.
“융적과 화평을 맺을 수 있겠소?”
위강이 대답했다.
“융적과 화평을 맺으면 다섯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융적은 우리 晉나라의 이웃으로 그 땅은 넓지만 척박하여 재화가 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재화로 땅을 바꾸어 영토를 넓힐 수 있으니, 그것이 첫 번째 이득입니다. 융적이 침략하지 않게 되면 변경의 우리 백성이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이 두 번째 이득입니다. 우리가 덕으로써 먼 나라를 품음으로써 군사들이 피로하지 않게 될 것이니, 그것이 세 번째 이득입니다. 융적이 우리 晉나라를 섬기게 되면 천하가 진동하여 제후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게 될 것이니, 그것이 네 번째 이득입니다. 우리가 북쪽을 근심하지 않게 되면 남방에만 전념할 수 있으므로, 그것이 다섯 번째 이득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이득이 있는데, 주군께서는 왜 화평을 맺지 않으려 하십니까?”
도공은 크게 기뻐하며, 위강을 융적과 화평을 맺는 사신으로 임명하였다.
위강은 맹락과 함께 무종국으로 가서, 국왕 가보와 화평 맺는 일을 상의하였다. 가보는 산융의 여러 나라를 무종으로 불러 삽혈하고 맹약을 맺었다.
“지금 晉侯가 패업을 계승하여 중화(中華)의 회맹을 주도하고 있으니, 모든 융족들은 晉侯와의 약속을 잘 받들어 북방을 방위하며 晉나라를 침략하거나 배반하지 않음으로써 각자 안녕을 보전할 것이다. 만약 동맹을 배반하는 자는 천지신명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융족들은 동맹을 맺고 모두 기뻐하였으며 각기 토산물을 위강에게 바쳤는데, 위강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융족들은 서로 바라보며 말했다.
“상국의 사신이 이처럼 청렴하다니!”
융족들은 위강을 더욱 존중하였다. 위강이 맹약을 맺고 돌아와 진도공에게 보고하자, 도공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때 楚나라 영윤 공자 정(貞)은 이미 陳나라를 얻고서 병력을 이동하여 鄭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하지만 호뢰에 많은 병력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사수(汜水)를 따라서 진격하지 않고 허(許)나라를 거쳐 영수(潁水)를 향해 진격하였다.
정희공 곤완은 두려워 6경을 소집하여 의논하였다. 당시 6경은, 공자 비(騑), 공자 발(發), 공자 가(嘉), 공손 첩(輒), 공손 채(蠆), 공손 사(舍)였다. 비의 字는 자사(子駟), 발의 字는 자국(子國), 가의 字는 자공(子孔)인데, 세 사람은 모두 목공(穆公)의 아들로서 희공의 조부(祖父) 항렬이었다. 첩의 字는 자이(子耳)로서 공자 거질(去疾)의 아들이었고, 채의 字는 자교(子蟜)로서 공자 언(偃)의 아들이었으며, 사의 字는 자전(子展)으로서 공자 희(喜)의 아들이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목공의 손자로서 부친의 작위를 계승하여 경이 되었으며, 희공의 숙부 항렬이었다. 이처럼 6경은 모두 희공보다 항렬이 높았으며 鄭나라의 국정을 쥐고 있었다.
[제113회에, 정목공(鄭穆公) 난(蘭)에게는 이(夷)·견(堅)·거질(去疾)·희(喜)·비(騑)·발(發)·가(嘉)· 언(偃)·서(舒)·풍(豐)·우(羽)·연(然)·지(志) 등 아들이 13명 있었다고 하였다. 이(夷)는 목공 다음에 즉위하여 영공(靈公)이 되었는데 자라탕으로 희롱하다가 공자 송(宋)에게 피살되었다. 그 뒤를 이어 견(堅)이 즉위하여 양공(襄公)이 되었는데, 아우 11명을 모두 대부에 임명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제113회에, 정양공 견이 훙거하고, 세자 비(費)가 즉위하였는데, 그가 정도공(鄭悼公)이다. 제115회에, 정성공(鄭成公)이 등장하는데, 이름은 곤(睔)이고 정도공의 아우이다. 앞서 정성공이 훙거하고 세자 곤완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정희공이다. 그러므로 정희공은 정목공의 증손자이다.]
정희공은 포부가 크고 오만(傲慢)하여 6경을 예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君臣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상경인 공자 비와는 더욱 사이가 나빴다. 희공은 굳게 지키면서 晉나라가 구원하러 오기를 기다리자고 했는데, 공자 비가 말했다.
“속담에 이르기를, ‘멀리 있는 물로 어떻게 가까이 있는 불을 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楚나라를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희공이 말했다.
“楚나라를 따르다가 또 晉軍이 오면, 어떻게 합니까?”
공자가 비가 대답했다.
“晉과 楚 중에 누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겠습니까? 우리 역시 두 나라 중 누구를 택해야겠습니까? 다만 강한 나라를 섬기면 그뿐입니다. 이제 희생과 예물을 가지고 국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楚가 오면 楚와 회맹하고 晉이 오면 晉과 회맹하면 됩니다. 양웅(兩雄)이 다투다 보면 필시 한쪽이 꺾일 것이고, 그래서 강약이 나누어지면 우리는 강자를 택함으로써 백성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희공은 그 계책에 반대하며 말했다.
“경의 말씀대로 한다면, 鄭나라는 아침저녁으로 회맹에 대기하느라 평안한 날이 없을 것입니다.”
희공은 晉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려 했는데, 대부들은 공자 비의 뜻을 어기는 것이 두려워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희공은 분노하여 친히 晉나라로 갔다. 그날 밤 희공이 역사(驛舍)에서 자고 있을 때, 공자 비가 문객을 보내 암살하였다.
공자 비는 희공이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고 발표하고, 자신의 아우 가(嘉)를 군위에 세웠다. 그가 정간공(鄭簡公)이다. 공자 비는 사신을 楚軍에 보내 말하게 했다.
“晉을 따른 것은 곤완의 뜻이었는데, 이제 곤완이 죽었습니다. 楚나라와 맹약을 맺고자 하니, 군대를 물려주십시오.”
楚나라 공자 정은 鄭나라와 맹약하고 회군하였다.
첫댓글 이시대는 도데체가 전쟁을 안하면 안되는 시대 인가보다
전쟁에 끌려 나가서 죽음을 당하는 국민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이래저래 서민들만 불쌍하구나
진(陳)과 정(鄭) 약소국들 정신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