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학자들이 본 제청권 vs 임명권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앞에서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 착한법 만드는 사람들,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 등 법조인들이 사법부 독립수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재명과 조희대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자 재(再)제청 문제로 충돌하면서 대법관 제청·임명을 둘러싼 헌법 해석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대법관 임명과 관련한 법 조문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헌법 제104조 2항이 전부다. 이 때문에 이재명과 대법원은 그동안 사전 협의를 거쳐 후보를 정한 뒤 대법원장이 대통령을 직접 만나 제청하고 대통령은 이를 수용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재명은 임명권을 앞세워 재제청을 요구하고 대법원장은 사법부 독립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며 맞서고 있다.
성기홍은 29일 “사법부 독립은 대법원장이 시키고 싶은 사람을 대법관으로 마음대로 앉히는 것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반면 헌법학계에서는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실질적인 권한으로 존중돼야 한다”는 의견이 적잖다.
노경필(대법관) 법원행정처장이 지난 28일 국회에서 “(이재명의 재제청 요청이) 대법원장에게 제청을 철회하고 다른 사람을 제청하라는 요구라면 헌법적 근거가 없어 응할 수 없다”고 한 것도 이런 취지로 풀이된다.
①제청권과 임명권, 우선순위는
이재명 측은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이재명의 임명 행위를 보조하는 권한”이라는 입장이다. 민주당 사람들은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국민이 선출한 이재명의 임명권을 뒷받침하는 권한”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재현 동아대 교수는 “제청권, 동의권, 임명권은 모두 대등하고 실질적인 권한”이라고 했다. 김대환 서울시립대 교수도 “제청권과 임명권을 나눈 건 사법부 독립을 지키면서,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임명해 대법관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취지”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한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관추천위원회가 대법원장에게 대법관 후보를 4명 추천하는 이유도 이재명과 대법원장이 제청 협의 과정에서 의견이 맞지 않을 경우 제3의 후보로 절충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라며 “이는 대법관 인사에서 대법원장과 이재명 권한이 대등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②이재명은 제청 거부할 수 있나
이재명의 임명권에는 대법원장이 제청한 후보자 임명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 해도 이재명이 임명을 거부할 때는 후보자의 결격 사유 등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김대환 교수는 “이재명의 임명권은 대법관으로 누구를 고를 수 있는 권한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재명 측은 조 대법원장이 제청한 손봉기 판사 임명을 거부한 것과 관련해 “임명 의사가 없다는 것이 거부 사유”라고 밝혔다. 그러나 차진아 고려대 교수는 “임명을 거부하려면 후보자의 직무 능력이나 도덕성 등에 관한 합당한 사유를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조 대법원장이 지난 23일 “재제청 요청의 근거와 사유가 명확하지 않아 응할 수 없다”고 한 것도 같은 취지로 보인다.
법조계 일각에는 “이재명의 대법관 임명권은 ‘형식적 권한’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도 있다. 한 원로 법조인은 “헌법 문언상 이재명에게 임명권을 부여한 것에는 대법원장의 제청과 국회의 동의를 얻은 후보자를 국민이 선출한 이재명이 임명하도록 해 대법관에 권위와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형식적 성격이 있다”고 했다.
③국무총리 제청권과 다른가
헌법학계에서는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은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이나 감사원장의 감사위원 제청권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차진아 교수는 “헌법상 대통령의 명을 받는 자리인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은 이재명의 임명권을 뒷받침하는 권한으로 봐야 하지만 대법원장은 독립된 사법부의 수장이기에 달리 봐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장은 이재명과 상하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감사원장 시절 감사위원 제청을 두고 이재명 측과 9개월 가까이 대립했던 최재형 전 의원은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은 사법부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여서 대통령의 뜻을 거의 반영하는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④대법관 제청권 어떻게 변해왔나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이 처음 헌법에 들어간 것은 1962년 5차 개헌 때다. 당시 개정 헌법은 대법원장이 법관추천회의 동의를 얻어 제청하면 대통령은 ‘임명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후 1972년 7차 개헌(유신헌법) 때는 대통령이 ‘임명한다’로 바뀌었고 법관추천회의 동의 절차도 사라졌다. 그러다 1987년 9차 개헌(현행 헌법) 때 국회 동의 절차가 추가됐다. 1988~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일규 당시 대법원장이 사전 협의 없이 대법관 9명을 단수 추천했을 때 거부하지 않고 모두 임명했다.
현 민주당권 일각에선 “헌법에 대통령의 임명권이 먼저 규정되고 대법원장 제청권, 국회 동의권이 뒤에 추가됐기 때문에 임명권이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김대환 교수는 “사법부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도입된 취지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차진아 교수는 “우리 헌법에 이재명이 원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대법관에 임명하는 시스템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