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의정 민암이 함이완의 일을 아뢰고
조사를 청하기에 윤허했지만 민암이 홀로 .....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다
삭탈관직하여 문외출송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절도에 안치하라! "
비망기는 엄청난 과장이었다.
관련해 죽은 이가 아직 없을뿐더러,
끌어댄 진신이라 봐야 관련자들의 아비들 정도.
다른 때 같았으면 충분히 역옥을
구성할 정도의 진술들도 나온 터였지만,
왕은 이렇게 사건을 일단락 지운다.
"한중혁 등은 사형을 감해 변방에 정배하고
이시회 등을 석방하라.
함이완은 형신을 5차례 한 뒤 절도에 정배하라! "
영의정 권대운 이하 남인들이 좇겨난 자리들은
즉각 서인들로 채워졌다. 갑술환국이다.
기사환국의 본질이 남인으로의 권력 교체보다
희빈으로의 중전 교체였듯이 갑술환국의 본질은
희빈의 강등과 폐비의 복위에 있었다.
처음에는 이와 무관한 듯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지만
"세자를 흔드는자,
폐비를 신구하는 자는 역률로 논할 것이다"
불과 며칠 뒤 입장을 바꾸기 시작한다.
다시 사흘 뒤.
"전비가 별궁에 들어가 살게된 것은
슬프고 뉘우치는 뜻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신구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전일의 분부를 거두노라"
별궁으로 옮기는 날에는 직접 편지를 썼다.
비가 답장을 했다.
아울러 보내온 의대를 사양했다.
답장을 받아본 왕은 왈칵 그리움이 솟구쳤다.
또다시 사랑의 편지가 오갔다.
"답장을 보니 만나서 이야기 하는것과
다를 바 없어서 열 번이나 펴보면서 매번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소.
보낸 의대를 착용하고 옥교를 타고 들어오오.
그리고 몇 글자로 답장해주오 "
"감히 당돌하게 사양하면 성의를 어겨
그 죄가 더욱 커지는 건 아옵니다만
옥교 의대 다 분수에 넘쳐 감히 감당할수 없나이다.
굽어 살피시어....... "
그렇게 연애편지가 오가는 사이 하루가 지났다.
마침내 옥교를 타고 의장을 갖춰 집을 나섰고
왕이 기다리다 비를 맞았다.
"첩의 죄 진실로 죽어 마땅한데 ....."
"아니요 아니오. 다 내가 경솔했던 허물이니
회한이 그지없소.
비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요?"
그리고 이날로 마음을 바꿔 중전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켜 별당으로 옮기게 하고
인현왕후를 다시 중궁전의 주인으로 삼았다.
그녀의 복위에 누구보다도 기뻐한 이는 최씨였다.
보통 그녀에 대한 기록은 인현왕후에 대한
정성과 의리의 여인이라는 시각에서 주로 묘사된다.
그 때문에 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지만,
단지 수동적인 여인만은 아니었다.
천한 신분 출신인 그녀로서는 대궐 안팎에
힘이 되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형편.
그런데 중전 장씨가 도끼눈을 하고 그녀를 핍박해 왔다.
그러나 폐비를 끌어들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는 더욱더 인현왕후의 덕과 풍모를
추켜세우며 왕의 그리움에 불을 지폈다.
그럴수록 왕은 질투 없이 진정으로 폐비를
흠모하는 최씨 그녀가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중전 장씨로서는 폐비가 필생의 라이벌로
경계 대상 1순위였지만,
중전 욕심이 없는 최씨에겐 달랐다.
과연 복위한 인현왕후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고
환국이 있던 그해 가을 최씨는
뒷날 영조가 되는 왕자까지 낳는다.
왕과 중전의 사랑이 더욱 돈독해졌음은 물론이다.
-장희빈 사사-
밀려난 희빈은 울분의 나날을 보냈다.
왕과 왕비에게 문안도 가지 않았다.
세자가 문안을 오면 눈물을 쏟았다.
그렇다고 낙담만 하고 있을 그녀는 아니었다.
장희재는 비록 제주에 유배된 상태였지만
그의 첩 숙정이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그 옛날의 정난정처럼 겁 없는 여인.
일가와 남인 잔당들을 직접 불러 모아서
대책을 논의하곤 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인 이홍발은 갑술환국 때
죽은 이의징의 아들.
그는 종들을 시켜 희빈의 아비 비석을 훼손하고
저주의 뜻으로 나무 인형, 나무 칼 등을
무덤에 묻어놓게 했다.
그런 다음 장희재 집안의 종 업동으로 하여
이를 발견케 하고 고발토록 했다.
국청이 열리고 왕이 친국했다.
서인 일각은 아연 긴장했는데,
다행히 응선이 모진 고문에도 관련성을
극구 부인하다 죽는다.
국문은 행해졌고 전모가 드러났다.
주모자인 이홍발 이하 관련자들 일곱이 복주되었다.
다만 장희재 집안과 장희빈으로까지
수사가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에 장희빈과 숙정이 택한 다음 계책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저주!
몰래 신당을 설치해 연일 저주 굿을 벌였고,
저주를 비는 물건을 땅에 묻었다.
중전은 병이 계속되자 희빈을 의심했다.
중전의 병이 깊어가자 궁녀들도 머지않아 희빈이
복귀할 것으로 보고 중궁전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과연 인현왕후는 숙종 27년,
복귀한 뒤 7년만에 눈을 감았다.
실권자인 남인도 집권자인 서인도 모두 긴장에 횝싸였는데
누구보다도 긴장한 이는 최씨였다.
그녀는 왕에게 그간의 일을 고해바친다.
중전이 죽고 40일이 지났을 때다.
그 사이 국청을 통해 희빈의 휘하 상궁과 나인들,
무녀들, 장희재의 종들이 실토하면서
장희빈은 사약을 받았다.
장희재의 첩 숙정과 관련된 무녀, 궁녀,
종들도 모두 죽음을 맞았다.
장희재의 본처는 남편으로부터
본처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니, 거의 원수 취급을 받았고,
첩 숙정이 본처인 양 행세했다.
그러나 그녀는 똑똑한 여인, 장희재의 본처라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죄다 털어놓기로 한다.
특히 근래 이의징의 아들, 김덕원의 손자 등
남인들이 숙정의 집에 모여 모의하곤 했던 일,
묘비 훼손 자작극의 전말,
중전 승하 뒤 남인 오시복이 궁중의 동태를
알아봐 달라고 청했던 일 등...
이항, 장희재가 부인하자 구체적인 정황을
생생히 들이대며 반박할 수 없도록 했다.
그리하여 이항, 장희재는 물론
그녀가 거론한 이들이 다수 복주되었다.
앞서 유배에 그쳤던 종 업동도 끌려와
국문을 받고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