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이 오면 봄소식을 알리는 만물은 ‘나, 여기 있소!’ 라며 고개를 하나둘씩 내민다. 생명의 기쁨을 노래하는 봄은 나로 하여금 종달새로 살게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꽃과 신록을 보고도 어찌 즐거움을 노래하지 않겠는가.
봄 산천은 그야말로 한 폭의 거대한 수채화의 공간이다. 하여 봄은 발길 닿는 곳마다 탄성이고 환희이며, 살아 있는 자체가 곧 기쁨인 참으로 이상한 열락의 계절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과 처녀의 유두처럼 앙증맞게 돋아나는 나무의 움은 추운 겨울을 이겨낸 전우애처럼 반가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난히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편이다.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의리 있고 든든한 친구처럼 우직한 믿음이 간다. 또한 화사하게 피어난 꽃을 눈이 아닌 가슴으로 보게 되면, 마치 성공했을 때의 기쁨처럼 벅찬 미소가 가슴 가득 퍼지곤 한다.
특히 무리 지어 핀 영산홍이나 불두화를 보고 있노라면, 득도한 사람처럼 환희심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게 아닌가.
산 정상에 올라 환희하는 꽃 무리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 사는 재미를 느낀다. 늙어갈수록 모든 것이 시들해지지만, 내겐 꽃과 나무만은 그렇지 않다. 언제 보아도 싱싱하고 활기찬 에너지를 받곤 한다. 특히 4월의 신록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황홀하다.
내게는 선물 같은 농막 한 채가 있다. 시부모가 살던 집이자 남편이 태어난 고향 집이다. 중년이 조금 지나 시절 인연으로 다가온 이 시골집에, 나는 그동안 많은 관심과 정성을 들였었다. 해마다 4월이 되면 기십만 원 넘게 꽃과 나무를 심어 왔다.
남편은 부모의 인생이 담긴 농토이기에 곡식을 정성스럽게 심곤 한다. 하지만 나는 마당이나 뒤뜰에 꽃나무 심는 것을 재미로 여기곤 했다.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마음의 물기가 마를 때는 지체 없이 자연의 들숨이 필요하듯 시골 농막을 찾았다. 묘목은 갈 때마다 카멜레온처럼 다른 수채화를 내게 선물하는 재미가 가장 큰 이유였으리.
2021년 4월의 봄은 애별리고(愛別離苦)로 슬픈 봄을 보내고 있다. 다른 작물은 모두 다 일어나 물을 주니 ‘주인님, 나 여기 있소!’ 하며 출석 체크가 되는데,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캄캄한 동굴 속에서 감감무소식인 나무 한 그루로 인해 주인 마음자리가 너무나 심란스럽다.
바로 십 년도 훌쩍 넘은 세월을 석가탄신일을 앞뒤로 두고, 집안을 남포 등불처럼 환하게 불 밝히던 꽃, 부처님 머리처럼 생긴 불두화의 생사가 백척간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 좋은 일이 있는 해는 꽃이 두 번 피어 경사를 알려주던 꽃등대가 아니던가.
그전부터 조금은 이상했다. 예감이 좋지는 않았다. 시기심이 많은 손이 몇 번을 우리 집 꽃나무를 죽인 일이 있곤 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그냥 넘어갔다. 지인끼리 얼굴 붉힐 일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넘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상황이 매우 다르지 않은가.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닮아가곤 한다. 친정아버지는 좋은 부모이자 훌륭한 스승이었다. 그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는 태산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알게 된 깨달음 하나는, 아버지는 내 안에 자라고 있는 불두화 나무였다.
두 사람의 강력한 끈인 복력 (福力)의 흐름 때문이어서일까. 불두화의 꽃말이 은혜와 베풂인 것을 보면, 꽃과의 업연(業緣)도 적다 하지 않을 수 없겠다.
4월 어느 날,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났다. 나쁜 사람이 자그마치 10년도 훨씬 지난 불두화를 고사하게 했다. 농촌에서 제초제로 사용하는 근사미를 작년 가을쯤 그 나무에 부은 것이었다.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올 그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 들어와, 담장 삼아 심어놓은 그 아버지 같은 불두화에 농약을 붓고 돌아간 것이었다.
오늘 꺾어보니 뚝뚝 끊어지는 것이 뿌리까지 완전히 말라 있었다. ‘누가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아무 이유도 없이, 죄 없는 나무에. ’ 누가 한 짓인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말은 할 수 없었다. 그 누군가가 심술 (心術)을 부린 것인데, 우리가 말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선 참아야 했다.
내가 그동안 그렇게 잘해주었건만. 사람 사이 관계의 어려움이, 보살의 수행 단계를 높이는 계기라고 하더니 그런 이유였을까. 아까운 고민이 깊은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살다 보면 악연도 아니고 선연도 아닌, 그저 불특정 다수인을 도구 삼아 자신의 화풀이 대상을 물색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현재에도 선한 이웃에게 해코지나 심술 그리고 묻지마식 살인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다.
사이코패스적인 성격을 가진 짐승 같은 사람들이 저지른 사고를 매스컴에서 접할 때가 아니던가. 이런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악업의 고리처럼 이 세상에 끊임없이 이어져 올 때, 나는 인간으로서 참담한 마음 금할 길 없다.
도저히 사람으로 보기에는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경우, 즉 혐오 사건을 매스컴에서 시청할 때는 우울감이 극에 달한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것일까?' 하는 불쾌지수가 높아갈 때, 그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힐링이 바로, 꽃과 신록의 마중이지 싶다.
성인 예수나 부처의 인생을 생각해본다. 아무 죄 없이 단지 질투나 시기심으로 예수를 죽게 만든 로마의 빌라도 황제. 부처 시대에 행인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해하여 죽은 이의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든 네팔의 어느 거리의 대마왕 앙굴라말라를 성자들은 어떻게 대했던가.
또한 톨스토이 소설에 나오는 <바보 이반>은 악마가 쟁기질하거나 형제들을 이간질하여 싸움시킬 때도 말려들지 않고, 오히려 더 꿋꿋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선한 일을 하면서 악마의 유혹이나 어떤 방해에도,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간 성자의 지혜를 생각해 본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아낌없이 다 주었지만, 세상 다 얻은 이반은 과연 바보일까, 성자일까. 현대인은 다시 잘 생각해보아야 하리라.
그때 세상이나 지금 세상도 사람의 마음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바보 이반은 현대인의 롤모델인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라는 성자의 길이 아닌가 한다.
바보 같이 사는 것이 현자의 처세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악마의 유혹에 내 삶이 흔들리거나 정지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성자는 한결같이 조건 없이 ‘용서’하였다. 그들이 스스로 악행을 멈추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 바로 서기를 사랑과 지혜로 깨우쳐 주었다. 그들이 행한 행위에 대해 한없이 불쌍히 여기며, 인과응보 (因果應報)로 나타날 결과를 보며, 무량 겁 (無量 劫)으로 인내하였다.
하여 스스로 일어나는 나쁜 마음을 자재하고, 어서 올바른 마음으로 사는 끝없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가. 수행에 장애가 되는 나쁜 마음인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이 가장 큰 악(惡)임을 설법으로 강조하신 혜안을 깊은 신심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사람은 태생 (胎生)으로 세상 빛을 보지만, 천상 세계는 화생(花生)한다고 한다. 하늘 세계의 하루는 인간 세상의 백 년과 같은 시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지금 이 시각을 기쁨으로 보낸다면, 나는 천상 세계를 사는 것이다.
만일 미워하고 슬퍼하고 괴로움으로 아까운 이 시각을 허비한다면, 나는 지금 지옥에 사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괴로움으로 갈등하는 이 시간은, 분명히 사바세계를 딛고 일어서는 장애이자 디딤돌로 환치되는 수행의 단계이자 보살행의 길이 아닌가 한다.
처음에는 나도 무척 화가 났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가 재미를 느끼고 환희심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를 죽이다니.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나의 재미를 빼앗았을까. 그 사람은 정녕 꽃이 싫은 것일까.
아니면 내가 싫은 것일까. 사람한테 맺힌 인연을 왜 아무런 죄도 없는 꽃에 화풀이하는 그 사람이,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는 많은 계절을 함께했었는데, 그땐 왜 몰랐을까.
사람 관계도 시간이 모든 걸 말해 주곤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만일 좋은 사람이라면, 만나기 이전보다 만나기 이후가 더 좋아지고 발전했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좋은 사람이다. 선(善)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반대로 좋았다가 관계가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 헤어질 때 꼭 뒤통수를 치거나 해코지를 하는 사람은, 분명히 나쁜 이미지를 남기고 떠날 것이다.
연극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위선은 눈사람처럼 끝이 지저분하여 얼룩을 남기고 떠나기 때문에 이미지로 사람 평을 한다면, 최하위 평판에 속한다 하겠다.
관점을 바꾸어 생각하니, 내게도 나쁜 이웃으로 인해 슬픈 수행이 주는 교훈도 없지 않았다. 끝까지 인과응보를 하지 않고 참았다는 사실이, 수행에 플러스가 되었다는 사실에 헝클어진 감정의 앙금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성숙한 삶이 되기 위해선, 인과관계를 인식하는 사고의 관점을 어디에 두고 생활하느냐에 달려 있다. 부정보단 긍정에, 괴로움보다 기쁨에, 지금보다 미래를 지향하는 마음 하나에 따라 마음 창이 다르게 펼쳐지니 말이다.
기쁨이나 환희를 느끼는 날은 천상에서 사는 날이고, 좌절과 미움으로 사는 하루는 인간 세계의 백 년 같은 지옥이구나! 를 알아차리는 일은 삶의 본질과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아름다운 정원과 숲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나고 자라는 잡초를 뽑아 내가 좋아하는 꽃과 나무로 채워가다 보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수목원이자 거대한 아침 숲이 될 것이다.
그런 이상을 가지고 오늘을 사는 한, 내가 조금 더 손해를 보더라도 인격이 자연을 닮은 풍류의 선비들이 모여드는 정자에서 글 향과 솔향이 어우러진 사람이 우선인 세상 숲을 만들고 싶다. 그게 나의 바람이지 않은가.
정 나누고 사랑 나누는 사람끼리 모여서 환담하는 울타리는 나가 바라는 세상 비전이다. 그러자면 앞으로 더 많은 수고와 기다림과 피나는 고행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환희심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오랜 동굴 속에서 피나는 정진과 노동 끝에 피어나는 무지개 같은 정신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기에 조용히 순리를 기다리다가, 내년엔 씨종자가 좋은 불두화를 다시 심으련다. 조그마한 장애가 있다고 해서 불두화 보는 재미인 기쁨을 포기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