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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제1독서 : 호세 14,2-10
복 음 : 마태 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시詩같은 인생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실천이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잘 살기도 힘들지만 잘 죽기는 정말 힘듭니다.
잘 죽는 것은 생각 있는 누구나의 간절한 소원일 것입니다.
아주 예전 개신교 목사님과 대화중 나눈 문답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참으로 만족했던 답변입니다. 지금 물어도 이 대답뿐일 것입니다.
마지막 마침표를 잘 찍는 죽음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요!
마치 인생은 하나의 문장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합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말마디는 명화名畫, 명품名品, 명작名作, 명국名局입니다.
이런 아름답고 깊은 인생은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이런 분을 가끔 만나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살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진선미眞善美의 명화인생입니다.
절대 하느님 없이는 이런 명품인생, 명국인생은 불가능합니다.
바둑이 더 실감이 갑니다. 삶은 흡사 바둑 같습니다.
저의 바둑 실력은 아마 아마 2급은 될 것입니다.
예전 고등학교 시절 공부보다도 바둑에 빠져 지냈던 적이 많습니다.
지금은 아예 바둑을 두지 않은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 때는 바둑에 밤새운 적도 꽤 많았습니다.
은총과 더불어 끝까지 한 수 한 수 노력을 다해야 명국입니다.
아무리 잘 두어도 한 수 삐긋하여 악수나 패착을 두면 그대로 바둑은 끝납니다.
실수를 하더라도 결정적 패착을 두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기회는 오고 명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족한 바둑이 드물듯이 만족한 삶도 드뭅니다.
저 역시 신의 한 수를 두듯 하루하루 강론 쓰기로 하루를 엽니다. 하루하루가 한 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참으로 감사하게도 악수를, 패착을 두지 않고 하루하루 후회없는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방심이나 교만은 금물입니다. 깨어 겸손히 하루하루 ‘신의 한 수’를 찾듯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선종善終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깨어 최선의 한 수를 두듯 살아가는 것입니다.
해인총림 방장 벽산원각 대종사의 경자면 하안거 결제 법어 마지막 싯구입니다.
-“고요하고 고요한 본마음 바탕이 나의 고향이요
성성惺惺이 깨어 있는 삶이 나의 집이로다”
하루하루 매순간 참으로 깨어 있을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한 순간에 무너지는 패착이 문제입니다.
무사無私, 무아無我, 무욕無慾의 순수한 마음으로 임할 때 명국인생입니다.
주변에서 잘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한 순간에 무너져 목숨을 잃는 사람이나
사고나 중병으로 누워있는 분들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새벽 인터넷을 여는 순간,
“<속보> 박원순 시장 삼청각 인근서 숨진 채 발견”이란 비보가 톱뉴스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노희찬 전 정치가, 정대협 쉼터소장 손영미 엘리사벳도 이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마침표로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평생 삶을 잘 살기도 힘들지만 잘 마치기는 정말 힘듭니다.
아주 예전 시처럼 살고 싶은 마음에 써놨던 시가 있습니다.
22년 전 써놨던 시입니다만 지금도 여전히 희구希求하는 삶입니다.
-“시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의 종이 위에 시처럼
침묵沈默의 여백餘白의 시공時空안에 시처럼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 시처럼 살고 싶다”-1998.1.24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기도에 맛들이고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살 때
각자 고유의 명화, 명시, 명품, 명국, 명작인생입니다.
각자 고유의 명시 같은 인생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가 답입니다.
보십시오. 성서의 사람들은 예외없이 시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편을 참으로 사랑하고 시편을 살았습니다.
하여 우리가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고백과 기도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가 그렇게도 좋습니다.
시처럼 깊고 아름다운 명시 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시편은총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생명과 빛, 희망 가득한 찬미와 감사의 시편들보다 더 좋은 시도 없습니다.
성서의 예언자들 역시 시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외 없이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인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서도 참 깊고 아름다운 시입니다.
시 같은 인생을 살았던 호세아입니다. 회개의 은총이 참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회개로 살아나는 사랑에 마음의 순수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이런 회개의 촉구에 응답한 이들에게 쏟아지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은
그대로 미사은총을, 시편성무일도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 은혜로움 가득한 시인지요.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누구나 시인이자 신비가가 될 수 있습니다.
뱀처럼 슬기로운 분별의 지혜에 비둘기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저절로 사람들을 분별하여 다치지 않을 수 있고 난국에 처해서도 답변의 길이 열립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젠가의 지인의 질문에 대한 답도 성령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건강하십니까?”
“노력합니다!”-
대답하니 이보다 더 좋은 대답도 없고 성령의 지혜로운 답변이라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기다리며 인내를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끝까지 견뎌내며, 버텨내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미이자 결론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는 작품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다시 정성을 다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정성과 노력은 그대로 내 인생 작품에 반영될 것이고
주님도 이런 과정을 눈여겨보실 것입니다.
마지막 선종과 더불어 주님께 바칠 내 명화 같은, 명국 같은, 명시 같은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루하루 ‘신의 한 수’ 같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사회에서 전염병처럼 퍼지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혐오’입니다.
누군가를 또 어떤 집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물론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이 폭력적인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성지에서 어떤 아이가 친구와 대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극혐’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강도가 더 심할 때, ‘극혐’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하더군요.
아마 ‘혐오’라는 말로도 부족했나 봅니다.
어린아이도 쓸 정도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에 대한 타협과 조율 없이 무조건 싫다면서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별것 없습니다.
그냥 자기감정 표현으로 ‘극혐’이라고 말 한마디 하고는, 혐오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혐오의 생각이 ‘묻지마’ 공격으로 나아갑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그리고 다른 집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살아감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하느님을 멀리하면서 함께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아마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향해서도 ‘극혐’이라고 외치지 않을까요?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제자들에게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런 것들을 이겨 낼 수 있는 더 큰 은총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디서 기도하든지, 심지어 자신들이 하느님께 봉사하고 있다고 믿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의 순간에서도 주님께서는 지켜 주신다고 하시지요.
분명히 박해의 고통은 죽음까지도 나아갈 수 있는 커다란 크기입니다.
그런 박해의 고통을 주셨다고 하느님을 혐오하면 과연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안에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 시대처럼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많은 유혹이 바로 우리의 박해자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혐오하고 반대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선물이 멀리에 있지 않게 됩니다.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먼저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교회도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에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서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19-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2)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주님!
가슴 깊이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슬기로움을 주소서.
목숨이 노략질 당하는 굴욕 속에서도 믿고 희망하는 순박함을 주소서.
십자가에서 지니신 그 순박함과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아멘.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마태 10,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무더위 속에서도
꽃은 피어납니다.
삶을 살지만
아직도
삶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슬기와 순박은
이와 같이
삶 안에서
함께 이어져 있으며
삶 안에서
함께 걸어갑니다.
어려움의 반복이
우리 삶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지혜와 슬기
정직과 투명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삶을
끝까지 끈기 있게
견디게 하는 것은
우리의 길을
가게 하는
오롯한 믿음입니다.
오롯한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먼저
하느님 안에서
제대로 보게 합니다.
삶의
문제 해결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시는
믿음의 주체이신
하느님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뱀 같은 슬기를
비둘기 같은 순박을 배웁니다.
고통 없는
지혜가 없고
고통 없는
순수가 없습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슬기롭게 견디는
기도의 삶입니다.
꽃을 피우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가 될 때 세상에서 뱀의 지혜를 발휘하게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양이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이리입니다.
이리들이 대다수인 세상에서 양들이 살아남으려면 지혜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여기서 뱀은 죄를 짓게 만드는 본성이나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슬기와 지혜를 갖추어 위험한 이리들의 덫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뱀처럼 슬기로울 수 있을까요?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처럼 순박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일 수 있어야 사람들 앞에서 뱀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비둘기이면 하느님 앞에서 뱀이 됩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 순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사람들 앞에서 지혜롭습니다.
로마의 건국신화를 소재로 한 영화 ‘퍼스트 킹’(2020)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로마는 늑대로부터 키워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형 로물루스는 신을 공경하는 인물이었고 동생 레무스는 자신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형은 육체적으로는 약했고 동생은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형제는 매우 우애가 깊었습니다.
서로를 위해 주저 없이 목숨을 내던질 정도였습니다.
기원전 753년, 두 형제는 그 지역의 가장 강력한 민족 알바롱가 인들에게 사로잡힙니다.
알바롱가 인들은 자신들이 사로잡은 이들을 서로 싸우게 해서 지는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동생이 누군가와 싸움을 해야 했을 때 형은 자진해서 동생의 상대가 됩니다.
일부러 맞아주다가 죽은 척을 합니다.
죽은 척을 하다 일어난 로물루스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사제인 신녀가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녀를 인질로 잡고 나머지 포로들과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형 로물루스는 심한 상처를 입어 죽음 직전까지 다다릅니다.
신녀를 건드려서 자신들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커지자
동생 레무스는 목숨을 걸고 형을 지킵니다.
그 와중에 신처럼 강한 힘이 자신 안에 있음을 느끼게 된 레무스는 그 무리의 왕이 됩니다.
레무스는 자신의 힘을 믿고 사람들을 제압하며 세력을 키워갑니다.
그러는 중에 신녀가 예언을 합니다.
두 형제가 한 형제를 죽이고 그 피의 힘으로 영원한 도시 로마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당연히 동생 덕에 간신히 생명만 부지하는 형이 동생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동생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런 예언을 한 신녀를 처형합니다.
자신이 신이고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해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처형합니다.
반면 신녀를 처형했다는 말을 들은 형은 매우 마음 아파하며
신녀가 들고 다니는 불씨를 찾아 다시 살려냅니다.
백성은 몸은 약하지만 자비로운 로물루스의 편에 서고
오직 힘에 굴복한 이들만 레무스의 편에 섭니다.
형은 동생이 알바롱가 인들에게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생을 구합니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의 백성들을 마음대로 한다며 형에게 자신을 왕으로 섬기라며 덤비고
형은 쓰러진 척하다가 마지막에 동생을 찌릅니다.
이렇게 로마는 강력한 공포정치를 하려던 레무스가 아니라
신을 공경하던 형 로물루스에 의해 시작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뱀처럼 슬기로우면 사람들에게 비둘기처럼 당합니다.
반면 하느님 앞에서 비둘기가 되면 뱀과 같은 지혜를 주님께서 주십니다.
사람은 비둘기와 같은 마음과 뱀과 같은 마음을 동시에 지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 앞에서 어떠한 성격이 드러나게 할 것인가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루카 10,21)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지혜입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1코린 1,19)
또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1코린 3,18-19)
예수님의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는 말에 집중합시다.
주님께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될 때라야 이 세상에서 진짜 뱀처럼 슬기롭게 됩니다.
자신이 슬기롭다고 믿는 사람은 그 꾀에 자신이 넘어갑니다.
자신을 믿지 맙시다. 이것이 뱀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믿읍시다. 이것이 비둘기의 단순함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경찰관이나 선생님, 의사가 젊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얘기하는 화제에 대해 잘 모른다. 허리를 숙이면 소리가 난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전자기기들의 작동 방법을 잘 모르게 된다.
몸이 뻣뻣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오후에 낮잠을 자야 한다.
몸을 굽힐 때 신음소리가 나온다. 최신 음악 그룹의 이름을 모른다.
관절염이나 병에 대해 많이 얘기한다. 시끄러운 술집을 싫어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중년이라고 합니다.
제게도 해당 되는 점이 있는 걸 보니 저도 중년인가 봅니다.
공자는 40세에 세상의 일에 미혹되지 않았고,
50세에 하늘의 뜻을 알았고, 60세에 마음이 유순해져서 무엇을 듣더라도 거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자가 생각하는 중년이라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의 일에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이치를 따르기보다는 나의 욕심과 욕망을 따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감언이설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무엇을 더 채우려는 생각에서는 중년이지만,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면에서는 중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몸의 중년을 맞이할 것입니다.
생각의 중년, 마음의 중년은 끊임없는 성찰과 수련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의 ‘중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간다고 합니다.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혜와 분별이 충만하여서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간다면
우리는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이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걱정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신앙의 중년을 사는 것입니다.
‘복약 안내서’를 써주는 한의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의사는 색다른 복약 안내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처방된 약이 어떻게 몸을 바꾸어 나갈 것인지, 앞으로 치료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몸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어떤 증상이 나타날 것이며,
스스로 몸을 어떻게 관찰하면 좋을지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복약 안내서를 읽고 기뻐하는 환자들이 있어서,
변화된 몸을 스스로 느끼는 환자들이 있어서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치료는 그저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라는 한의사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제의 강론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안내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제는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본인이 변해야 남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과 표징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에게 머리에 좋은 약을 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 율법학자의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
실천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화려한 언변과 지식으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려는 태도입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견디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