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읍 곽지리郭支里는 곽오름 밑이 되므로 곽오름 또는 과오름·곽지라고 불렀고, 그 서쪽에 묘련사妙蓮寺라는 절이 있다가 지금은 사라졌다. 그 절을 두고 지은혜일慧日스님의 시 한 편이 남아 옛날을 회고하게 한다.
남쪽 지방 날씨가 자주 흐르는데,
이 밤은 유독 맑아 나그네 마음 씻어 준다.
인생의 영고성쇠 꿈과 같지만
가을빛 예나 지금이나
아득한 물가에 멀리 와 보니
대 숲속 집 깊숙이 드리운 그림자.
밤이 깊어 갈수록 생각이 맑아
머리를 돌려 시 한 수 읊을 수밖에.
곽지 동북쪽의 큰길가에 있는 천덕열녀비天德烈女碑는 종이었던 곽연근郭連根의 아내 김천덕金天德의 열녀비다. 선조 10년(1577)에 목사 임진林晋이 정문을 세웠다. 지금은 헐리고 비만 남아 있는데, 이곳을 찾았던 조선 중기의 문장가 백호 임제가《천덕전》을 지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얼굴이 예뻤다. 결혼 뒤에는 부부가 물 긷고 절구질하며 바야흐로 20년이 되었다. 남편이 공물을 수송하기 위하여 육지로 향하던 중 화탈도 와 추자도 사이에서 침몰되어 죽었다. 천덕은 남편을 잃은 고통으로 눈물이 다하여 피로 이어졌다. 통곡한 지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영좌에 드리는 음식을 폐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초하루와 보름 및 계절에 따라 차례를 지내는 날에는 화탈섬을 향하여 위(位) 를 차려 놓고 자세를 지내며 하늘을 부르고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다. 원근에서 듣고 보는 사람은 불쌍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뒤에 죄를 지어 귀양 온 사람이 있었는데, 천덕을 더럽히고자 유혹하였으나 따르지 않으니 관가에 알려서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매로 볼기를 치는 형벌로 80대를 내리자 겉으로는 순종하겠다고 말하고 물러 나와서는 그의 친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놈은 분명히 재물을 탐내어 그러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뒤에 옷 한 벌, 소 한 마리, 무명 30단을 바친 뒤 애걸하여 벌을 면할 수 있었다.
또한 명월소의 조방장이 그의 권세를 믿고 사람을 시켜서 달콤한 말로 그의 아버지인 김청(金淸)을 달랬다. 아버지가 다시 시집보낼 것을 허락했는데 천덕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결혼하는 날 저녁에야 천덕은 그 사실을 알고 목을 놓아 통곡하고, 스스로 그 집을 헐어 불을 지른 뒤 다음 날 아침 목을 매어 죽으려 하였다.
그 집 사람들이 천덕을 발견하여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천덕은 스스로 두 발을 자르고 더러운 옷을 입고 죽기를 맹세하자 아버지는 다시는 강요할 수가 없었다. 그의 나이 39세에 남편을 잃고 지금 60세가 되었다. (……)천덕은 남쪽 거친 땅에 한 하녀일 뿐이다. 농사일을 일삼으니 처음부터 여자가 지켜야 할 기본이 없었을 것이요, 길쌈을 업으로 하였으니 어찌 여자를 가르치는 규범을 익혔겠는가? 그러나 그 일심(一心)으로 남편을 섬기고 절개와 지조가 두드러짐이 심상한 자 가히 빗대어 논할 바가 아니다. 이 어찌 천부 된 자질이 순정하여 배우지 아니하여도 능함이 아니랴. 오호라! 세상에 이른바 남자라는 자가 하나의 이해관계를 사이에 놓고 형제가 서로 다투고, 친구 간에도 서로 배신하기에 이른다. 크게는 나라의 정치(國政)가 어려운 때나 나라가 위태롭고 어려운 때에 나라를 팔아먹는 자도 있고, 어버이를 저버리는 자도 있도다. 그 천덕에게 죄인이 되지 않을 자가 적으리로다. 가히 슬픈 일이다.
그 표현이 벼슬을 받아 가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에서 시를 지었던 임제답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제주도 편에서
이런 사랑도 있고, 저런 사랑도 있다. 제주도의 역사 속에서 홍윤애나 김천덕 같이 지고지순한 사랑, 목숨까지 내 놓은 전제를 거는 그런 사랑은 현재에는 가능하지 않다. 그냥 지나간 역사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슬픈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