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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도서로 선정된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에 이어 출간된 '현오와 걷는 지리산'이 산꾼들로부터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의견이 모이는 걸 보면 산꾼들은 그동안 지리산에 대한 앎의 욕구가 컸던 것 같습니다.
혹자들은 산은 그냥 가면 되는 것이지 뭘 알고 자시고 할 게 있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냥 내가 좋아서 가는 산 그저 가면 되는 것이지 뭘 복잡하게 사느냐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냥 멍하니 걷고 온 것과 내가 알고 가서 확인하고 느끼고 온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동네 뒷산도 아니고 적어도 원거리 산행이라면 뭔가를 배우고 와야 하는 목적산행이 되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학교는 안 가는 것보다 가는 게 사회생활 하는데 아무래도 도움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공부 잘 하고 못 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죠.
요즈음 산꾼의 입장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좀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산행과 반대 입장이라할 낚시는 유튜브다 방송이다 뭐다 난리법석인데 산이나 둘레길 같은 트레킹 분야는 조용합니다.
가치가 떨어져서 인가요?
몇 가지 요인이 있겠죠.
여하튼 나서는 분들이 없는 유튜브의 '산 관련 방송'.
몇 분이 조심스럽게 의사를 타진해 오십니다.
조만간 유튜브 방송을 하는 그림이 그려질 것 같습니다.
오늘은 지리산 쌍계사와 불일암으로 갑니다.
지리산 전체가 산방기간에 잡혀 있으니 딱히 갈 곳도 만만치 않은 요즘입니다.
광명에서 05:25에 출발하는 첫 차를 타고 익산에서 환승하여 구례구에 도착을 하니 08:13입니다.
08:35에 구례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고 08:50에 화개로 들어갑니다.
아침 날씨가 좀 쌀쌀하니 아직 벚꽃이 피어 있지않아 벚골 길을 걸을 필요가 없으니 택시를 이용합니다.
택시(8,000원)로 쌍계사까지 이동합니다.
오늘 산행은 선인들의 유람록과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을 적당히 믹스하여 진행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노란 박스는 선인들의 기록, 갈색 박스는 제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지도 #1
- 1618년 양경우의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 상쌍계신흥기행록
다리를 건넙니다.
쌍계사로 들어간다. 원래 쌍계사는 주차장으로 바로 오르지 않고 지금의 석문광장에서 좌회전하여 옛 백운장 여관(현 단야 식당)을 보고 왼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275쪽
그 단야 식당 내부 정경입니다.
그렇게 좌측 계곡 방향으로 들어가야 예전 계곡을 건너 들어오는 동문東門에서 쌍계雙磎와 석문石門이라고 각자된 커다란 바위 두 개를 만날 수 있다. 정말 고대하고 고대하던 고운 최치원(857 ~ ? )과의 만남이다. 이 글자는 고운 최치원이 쇠지팡이로 썼다하여 철장서鐵杖書라 불린다.
고운 최치원과 혜소 진감선사의 쌍계사
다소 어눌한 이 서체를 보고 탁영 김일손(1464~1498)은 “광제암문廣濟嵒門이란 글씨와 비교하건대. 크기는 훨씬 더 커서 말斗만 하지만 글씨체는 그보다 못하여 아동이 습자習字한 것과 같았다”고 폄하하였으나 이후의 선인들은 고운의 필체임을 인정하면서 탁영과는 달리 품평하였다. 가령 유몽인(1559 ~ 1623)은 위 탁영의 평가에 “(탁영은) 글은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면서 “그 글씨를 보건대,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르다.”고 하였으며, 양경우(1568 ~ ? )는 “안진경의 글씨보다 우월한데 (고운이) 당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은 외국인에 대한 차별 때문”이라고 하였다. 감수재 박여량(1554 ~ 1611)은 “나는 한 번만이라도 ‘쌍계석문’의 큰 네 글자를 손으로 만져보고. 팔영루 아래의 맑은 물에 발을 씻고, 아득한 옛날의 유선儒仙을 불러보고, 천 길 절벽에서 학의 등에 올라타고서는 선경을 유람하여 내 평생의 숙원을 풀고 싶었다.”고 한 곳이 바로 이곳 아니었던가!
물론 여기에서 유선은 고운일 것이며 절벽은 학소대를 이르는 말이겠다. 남명 조식의 유람 코스도 우리와 같지만 방향을 달리하여 이 쌍계사에 도착하였다. 그러니 그가 쌍계사에서 제일 먼저 본 것도 바로 이 쌍계석문이었다.
“김홍지와 이강이가 먼저 석문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바로 쌍계사 동문이다. 검푸른 빛깔의 바위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서 한 길 남짓 열려 있는데, 그 옛날 학사 최치원이 오른쪽에는 ‘쌍계’ 왼쪽에는 ‘석문’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놓았다. 글자의 획을 사슴 정강이만큼 크고 깊게 새겨놓았다. 지금까지 천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앞으로 몇 천 년이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 졸저 전게서 275쪽 이하
이렇듯 의미 있는 쌍계석문의 각자를 보며 과거를 회고하고 고운을 그릴 때 눈은 자연스럽게 바위의 뒷면으로 간다. 이 유서 깊은 조형물의 뒷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씨가 보이고 그 우측에 ‘순상국이공호준유혜불망巡相國李公鎬俊遺惠不忘’이라는 글이 보이고 그 우측에 ‘자子 참판參判 윤용’ 그리고 그 우측에 대교待敎 완용‘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을사오적 이완용인가?
도솔산인 이영규에 의하면 이것은 이완용(1858~1926)이 1882년부터 1886년까지 규장각 대교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1886년 6월 부父 이호준(1821~1901)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내려와 각자한 것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일제에 전투기 2대를 헌납한 진주사람 김기태金琪邰, 서양화가 김창섭, 백정 출신 조동혁, 권재풍 등 다양한 만무방들이 이름을 올렸다. 아주 불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2,500원 시주를 하고 쌍계사로 향합니다.
공사를 하여 우회를 하게 되어 있군요.
맑은 아침 지리의 공기가 가슴 깊이 들어옵니다.
이 맛에 산행을 하고 지리에 오는 것이죠.
오늘 코스 중 불일암까지는 가본 곳이지만 청학봉을 넘어 소은암(소은산막)은 초행길이라 지도만 가지고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 지 모르겠군요.
09:31
계류 좌측으로 일주문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는,
여러 개의 비석들이 모여져 있는데 거의 공덕비입니다.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것라는 얘깁니다.
그 분들이 시주하여 불사를 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죠.
그 쌍계사로 들어가 보자. 쌍계사의 일주문은 다른 사찰의 그것과는 달리 일주一柱가 아닌 쌍주雙柱로 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일주문의 현판에는 ‘삼신산 쌍계사’로 적혀있다.
그런데 지리산은 방장산일까? 아니면 삼신산일까? 아니면 방장산이면서 삼신산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필자는 지리산, 금강산, 한라산을 엮어 삼신산이라고 하는 견해에 반대한다. 오직 방장산만이 지리산이요 삼신산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쌍계사 일주문의 현판이 그걸 얘기해 준다.
지리산은 방장산이요 삼신산이다. 생각해보면 삼신산은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산으로 봉래산, 방장산, 연주산 등을 일컫는 말이다. ‘사기史記’에 처음 언급되었는데 이곳에 신선이 살고 있으며, 불사약이 있다 하여 시황제와 한 무제가 이것을 구하려고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으나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사마천이 방장산을 언급한 후, 어딘가에 있을 방장산은 사마천 이후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한번은 필히 가봐야 할 곳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모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우리나라 사대부에게 그곳이 어찌 그런 대상이 아니었겠는가?
다행히 그 방장산은 우리나라에 있었다. 이 방장산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알려준 이가 바로 당나라 사람 두보(712~770)였다. 필경 그 시작은 두보의 시 봉증태상장경기이십운奉贈太常張卿垍二十韻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보는 그 시의 초장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 바다 밖 삼한三韓에 있다 즉 方丈三韓外’라고 읊으면서, ‘방장산은 조선의 대방군帶方郡 남쪽에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중국에는 방장산이 없고 대방군은 남원의 이전 이름이니 방장산이 두류산임에 틀림없다고 한 남계 신명구(1666~1742)의 말이 이해를 돕는다.
이쯤 되면 조선의 사대부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이 방장산을 그들의 유식遊息의 길이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향한 배움의 길 그리고 공자나 남명 조식을 닮아가고자 하는 목적을 향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지리산을 방장산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삼신산 즉 중국 전설 속의 신성한 세 개의 산 중 유일한 산이니 이참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삼신산으로 못을 박는 게 나을 성 싶다.
- 졸저 전게서 281쪽
문화재의 보고 쌍계사
다시 쌍계사로 간다. 한편 쌍계사 일주문의 이 현판은 그 유명한 해강 김규진(1868∼1933) 선생의 예서체 작품이다. 화가이자 서예가인데 우리나라 큰 사찰의 많은 현판이 해강 선생의 작품이다. 청나라에 유학하여 익힌 서법으로 선생은 모든 서체에 능했다고 한다. 이 현판은 사본이고 원본은 성보불교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 졸저 전게서 290쪽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 그리고 금강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천왕문을 지나,
금강문을 나오면,
작은 계류 우측으로,
천왕문을 지나 내청교를 건너 8각 9층 석탑을 본다. 이 탑은 오대산 월정사 9층 석탑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8각은 불교의 실천 수행에 기본이 되는 8정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탑 안에는 고산스님(1933 ~ )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3과와 이웃한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2과 등 5과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 졸저 전게서 290쪽
그 뒤로 팔영루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 팔영루는 840년 진감선사가 창건한 것인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몇 차례 중수한 것입니다.
지금은 樓의 모습이 아닌 칸을 다 막아놓은 방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우측으로 돌아 올라갑니다.
계단 두 개 가 있고 ,
아래에는 국보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가 있습니다.
- 1489년 탁영 김일손 선생의 두류산기행록
- 1902년 송병순 유방장록
아무래도 산꾼이 보는 쌍계사의 하이라이트는 이 절집 대웅전 앞에 있는 886년 최치원이 쓰고 이듬해 승려 환영이 글을 새긴 국보 제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에 있다. 누누이 얘기하듯이 고운 최치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신라 말의 대사상가였다. 또한 한국 유학의 종조宗祖이자 한국 한문학의 비조鼻祖로 추앙받는 사람이니 만큼 수려한 그 글은 일독할 가치가 충분하다 하겠다. 육당 최남선은 이 글씨를 보고 “구양순체 격에 안진경 풍미가 있다.”고 하였다.
읽어볼까? 내용인즉슨 혜소의 집안 내력과 그의 남다른 효심, 당나라에 들어가 불가에 입문하게 되는 과정, 신라 구산선문 가지산파의 개조 도의선사를 만나 도반을 얻게 되는 과정,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 ‘어산魚山’이라는 불교 음악(범패梵唄)을 작곡했다는 얘기와 그때 팔영루를 건축했다는 내용, 귀국하여 지리산 아래에 있는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즉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을 찾아 헤매다 결국은 범虎의 인도로 쌍계사 터로 와서는 절을 건립한 내역, 후에 절의 이름이 옥천사에서 쌍계사로 바뀌게 되는 과정 등을 상세히 적었다. 그리고 혜소 본인이 입적한 다음에 절대로 탑塔을 세워 내 형체를 간직하지 말고 명銘을 지어 내 행적을 기록하지 말라고 한 유언까지도 기록하였다.
- 졸저 전게서 290쪽 이하
고운 최치원이 쓰고 승려 환영이 각자한 이 진감선사비문은 여러 가지를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인들의 기록에 관한 한 ‘지리산 박사’라 일컬어지는 도솔산인 이영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즉 ‘지리’는 'Giri‘ 즉 산이라는 산스크리스트어의 보통명사였다는 것이다. 불교가 가야에 들어오면서(남방전래설) Giri를 한자의 음을 빌려 시대와 기록한 사람에 따라 知異, 地理, 地異, 智理, 地利, 智異 등으로 표기했는데, 조선조에 들어 비로소 '智異'라는 명칭으로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어원을 '불교신앙설'로 추정한다. 이 설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이영규는 계족산을 거론한다.
계족산은 인도 동북부 비하르Bihar주에 있는 꿋꾸따빠다산屈屈晫播陁山Kukkutapada-giri을 당나라 현장법사가 대당서역기에서 계족산으로 번역을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계족산은 마하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받은 가사袈裟를 미래에 오실 미륵불에 전하기 위해 이 산의 바위틈에 들어가 선을 행하면서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산이다.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결국 이 얘기는 불교남방전래설로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려온다. 하지만 이 설은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유신 일가의 창작이라는 주장’에 의하여 '설화'로서의 기능밖에 수행하지를 못하니 좀 안타까운 감이 없지 않다. 뒤에 둘레길 제15구간, 제15-A구간, 제18구간을 진행할 때 칠불사, 연곡사, 화엄사에 들러 더 자세히 보도록 한다.
지리는 ‘둠/두르’라는 순수한 우리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에 상관없이 국어 학자들은 '지리'의 어원을 순수한 우리말에서 찾는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두류’는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즉 두류는 옛 우리말 ‘두르’였다. ‘병풍처럼 크게 둘렀다’라는 의미이다. 곧 ‘큰 산줄기’라는 말로 ‘두름/ 둠’의 형태였던 것이다. 이 ‘두르〉두류’로 변천된 것에 적당하고 그럴싸한 한자 頭流를 갖다 붙인 것이다. 또한 ‘지리’는 ‘두르〉드르〉드리〉디리〉지리’의 과정을 거쳐 변하게 된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 ‘지리’에 적당한 한자인 智異를 갖다 붙여 오늘날의 한자어 지리산(智異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구개음화와 전설모음화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의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頭流’·‘豆流’·‘頭留’·‘斗星’·‘斗流’ 등으로 한자를 붙여 지명이 된 것은 그 어원이 ‘두르다’의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렇듯 지명은 땅과 지역의 특성을 제일 먼저 드러내 보여주는 얼굴이다. 거기에는 땅의 생김새와 장소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고, 그 지명을 붙인 당시의 사람들의 지리적 사고도 담겨 있을 것이다. 당연히 거기에는 자연적 특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속성도 가미되어 있을 것이고 역사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는 역사지리적인 성격도 담겨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지명은 사용하는 그 당시 사회의 주체에 따라 이름이 변하기도 하며 그 의미와 범위가 달라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지리산을 智異山이라고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 유래를 찾기 위해서는 이 쌍계사 대웅전 앞에 있는 진감선사 대공탑비를 눈여겨 봐야한다. 이 비碑는 광계3년인 887년 7월에 세워진 것으로 고운孤雲 최치원(857 ~ ? )이 글을 썼고 승僧 환영이 각자刻字했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국보 제47호인 이 비에는 "(진감)선사는 처음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가서 주석駐錫하였다. 명의의 집에 환자가 많듯,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절간이 넓었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좁게 여겼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康州의 지리산知異山에 이르렀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니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지리산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와 리利를 따서 지리산이 되었다가 지금의 한자어에 따라 지리산智異山으로 바뀌었다는 소위 ‘智利山 설’은 억지로 만든 얘기라 보인다.
책에 나온 기록으로는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가 처음이다. 사기의 통일신라 흥덕왕조에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를 보면 삼국사기나 기타 문서의 기사에도 한자어는 地理山으로 되어 있어 발음은 같으나 한자어 표기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 이르러서야 智異山으로 오늘날과 같이 표기되게 된다. 그러니 지리산이라는 발음만큼은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불렸었고 그때부터 지금의 지리산으로 불렸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 이는 국어학자들의 분석과 같이 '둠/두름'에서 두류>지리로 음운변화를 일으켰고 이후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런저런 한자어로 적당한 표기를 하다 고려사高麗史 이후 智異山으로 정착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 졸저 전게서 286쪽 이하
이 비석의 두전頭篆에는 ‘양해동고진감선사비敭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아홉 글자가 전자체篆字體로 새겨져 있다. 여기서 敭은 揚의 옛글자古字이다. 어떤 글에는 쌍계사고진감선사비雙磎寺故眞鑑禪師碑로 잘못 기록된 것이 있음.
- 졸저 전게서 290쪽 각주 33)
서두에 진감선사 비라는 글과,
말미에 승려 환영이 각자한 것이라 분명히 나옵니다.
대웅전 우측으로 돌아,
명부전 사이로 나가,
대웅전 뒤를 보니 예전에 행사가 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커다란 밥통을 볼 수 있으며,
그 뒤의 화엄전의 양옆에는,
명부전을 지나 화엄전에 이른다. 화엄전은 양 측면에 불경 목판본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다. 해인사의 장경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 진감선사 대공탑비를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이곳에 그 내용을 각자한 판본이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고는 화엄전 뒤에 있는 삼성각으로 오른다. 그런데 보통은 탱화 속의 인물이 범과 같이 앉아 있는 남자 산신이어야 하는데 여기는 여자 산신이 앉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지리산산신 만큼은 여신이었으니 마고할머니였고 성모였다.
이 '마고 할머니'는 동학농민혁명 때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등장하게 된다. 즉 마고 할머니가 산신으로서 군주사회의 대항마 역할을 하여야 하였으며, 여성이었기 때문에 남성 위주의 봉건제도에 대한 반발하는 배역을 맡아야만 하였다. 그러니 이 신이 노고단에 있으면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되고 마고 할머니가 되며 천왕봉으로 가면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황후가 되고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인 것이다.
- 졸저 전게서 293쪽
범종각을 지나....
직진하여 계단을 오르면 금당이다.
우측 계류를 한 번 보고....
돈오문이라...
頓悟란 자기 자신이 부처라는 깨달음을 찾는 것이라는 얘기니....
그러니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것은 깨달으면 따로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겠고,
돈오점수頓悟漸修란 일단 먼저 깨닫고 그 다음에 점차로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일 겁니다.
보조국사 지눌은 이따 불일암에서 다시 보기로 하고....
우측으로 가면 불일암과 지리 남부능선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이정표입니다.
세석까지 갈 수 있으니 횡천지맥을 만나고 낙남정맥과도 삼신산에서 이어지게 된다는 얘기겠죠.
청학루 옆의 계단을 오르면서 쌍계사를 봅니다.
옛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 자리에는 금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직진하여 계단을 오르면 금당이다. 이 금당 자리가 원래 옥천사가 있던 자리이다. 옥천사 즉 쌍계사의 건립 과정은 이미 얘기했다. 좌측의 ‘육조정상탑’이라는 것은 중국 선종 제6조인 혜능대사의 정상 즉 머리가 모셔져 있는 탑이 있다는 얘기고,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는 편액은 중국 당나라 시인 왕유가 지은 '육조혜능선사비명'에서 따온 글귀로 '세계는 하나의 꽃이며, 조사의 종풍은 여섯 잎'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글과 육조정상탑이라는 글 등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쌍계사의 만허 스님이 내온 차 맛을 보고는 예전에 맛을 봤던 중국의 명차 용봉승설을 떠올리며 쓴 글이라고 한다.
그런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쌍계사의 창립자는 의상대사의 제자인 대비, 삼법 등 두 화상和尙이다. 이 두 분이 723년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선사의 정상頂相을 모시고 와서 이 절을 창건할 때의 사찰명은 옥천사였다. 그리고 이 혜능선사의 정상은 ‘육조정상탑’에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이 정상이 어떻게 쌍계사로 들어오게 된 걸까?
이 쌍계사 창립자인 삼법스님은 진불(眞佛)로 알려진 혜능과 그의 법어집 ‘육조단경’을 깊이 흠모했다. 그런데 ‘육조단경’을 읽다가 “내가 입적한 뒤 5~6년 뒤에 어떤 사람이 나의 머리를 탈취해 갈 것이다”라는 혜능의 예언(懺)을 보고는 “선사의 정상이 다른 사람의 손에 탈취되기 전에 선사의 정상을 모시고 와서 우리나라 만대의 복전이 되도록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김유신 장군의 미망인인 법정스님을 찾아가 사실을 고하고 2만금을 건네받는다, 그 돈으로 당나라로 가서는 중국인 장정만이라는 사람을 매수하여 선사의 정상을 절취하는데 성공한다. 신라로 돌아온 삼법은 꿈속에 나타난 혜능의 지시에 의해 현재의 쌍계사 금당자리에 터를 잡고 석함을 만들어 혜능의 정상을 모신 뒤, 17년 동안 선정을 닦았으며 입적하는 순간까지 ‘육조단경’을 독송했다고 한다. 이른바 절취기수설이다.
한편 이능화의 불교통사에는 “김대비(金大悲) 즉 법정스님이 위 장정만에게 2만금을 주어 육조대사의 머리를 가져오게 하여 해동으로 돌아가서 공양을 하니 이것이 쌍계사 육조정상탑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고는 사견이라고 전제한 뒤 진감선사비에서 육조영당을 지었다고 한 것을 세인世人이 육조대사의 두골을 공양하는 곳으로 여기게 된 게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비고란에는 ‘미수에 그쳤다.’고 기록했다. 이른바 미수설이다.
생각건대 분명 옥천사가 건립된 해는 723년이고 진감선사 비문을 쓴 해는 887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육조정상탑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옥천사가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정강왕이 탑비를 왕명으로 세우게 하면서 인근의 옥천사와 이름을 헷갈리지 않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고운은 존영을 모셨지 정상이라는 얘기는 언급조차 없다. 고운의 진감선사 비문을 보면 분명히 육조영당을 건립하여 선사의 진영을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고운은 정상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한 간접정황으로 지금도 중국 광동성 소관시의 남화사에는 혜능의 불괴법신(不壞法身)이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 측의 고문헌들은 송ㆍ명ㆍ청대에 걸쳐서 이 정상이 봉안되었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고, 1981년 10월에 보수되어 지금도 신도들의 경배를 받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사건은 혜능선사 정상 절취사건과 영당 건립 사실이 후에 적당히 결합되어 만들어진 해프닝으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 이루어진 고려 중기 이후에 생긴 내용이라고 보는 게 맞다.
- 졸저 전게서 293쪽 이하
그런데 육조 혜능을 흠모한 사람이 어디 삼법뿐이겠습니까?
보조국사 지눌 역시 평소 중국 선종의 육조六祖 혜능을 흠모하여 그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평생 육조단경을 꿰고 살았다고 합니다.
뒤에 득도를 한뒤 순천 송광산에 길상사를 창건한 뒤, 육조 혜능이 머물렀던 조계산의 이름을 따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개칭을 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조계란 혜능의 별호이기도 하고...
- 1727년 김도수의 남유기
지금과는 좀 다른 쌍계사와 금당의 풍경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서방장은 영주각이었고 동방장은 방장실이었다는 애깁니다.
그리고 1727년 경 새롭게 대웅전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죠.
금당 안의 이 육조정상탑.
그러니까 이 탑을 새로 지을때 육조의 정상 즉 머리가 없었음은 확실할 것 같으니 미수설이 맞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되돌아 내려갑니다.
10:14
청학루의 버팀목.
나무를 통째로 다듬지 않은 체 사용했습니다.
불일암 삼거리로 나갑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너른 길을 따라 오릅니다.
10:18
지도 #1 '가'의 국사암 삼거리를 지나 우틀하면,
이렇게 멋진 길을 지나게 됩니다.
10:23
지도 #1의 '나'를 지나고,
10:24
나무 다리를 건너,
마른 이끼가 붙은 돌이 자주 눈에 띄는군요.
10:31
2번째 나무다리를 건넙니다.
10:36
지도 #1의 '다'에 이르러 커다란 바위와 이정목을 만납니다.
나무 의자 옆에 비석이 하나 보이는군요.
경주최씨의 시조인 최고운이 지리산에 은거할 때 여기서 학鶴을 불러喚 타고 다녔다는 바위臺라는 취지의 글입니다.
경주최씨 문중에서 1996. 9. 17. 세운 것이군요.
바위 앞면 쪽을 보니,
喚鶴臺라는 각자가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다시 다리를 건너니,
개울 좌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보입니다.
10:48
그 상단부인데 아마 여기가 마족대馬足臺입니다.
고운孤雲이 말을 타고 가다 머물렀던 흔적이라고도 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출병하였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1598]이 말을 타고 오를 때 생긴 말발굽 자국이 바위에 새겨진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여송이 여기까지 왔나요?
혹시 유정이라면 몰라도......
어쨌든 말발굽 흔적을 봅니다.
지도 #2
이어지는 산죽길에 아침 햇살이 반사되어 동공을 오므리게 됩니다.
정원강 님이 낫을 들고 작업을 마무리한 뒤 보았던 노을 속의 황금능선이 이런 모양이었을까요?
- 졸저 전게서 201쪽
10:55
눈이 확 트입니다.
쌍계의 동쪽을 타서 다시 지팡이를 짚고, 돌층계를 오르기도 하고, 위잔危棧(위태로운 잔도)을 기어오르기도 하여 두어 마장을 가니, 꽤 넓고 평평하여 농사짓고 살만한 곳이 나왔다. 세상이 여기를 들어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눌러 생각해보니 우리가 여기를 올 수 있는데, 이미수李眉守는 어찌하여 오지 못했던가. 미수가 여기를 오고도 기억을 못했던가. 그렇지 않으면 과연 청학동이란 것은 없는데 세상에서 서로 전하기만 하는 것인가.
- 김일손 유두류록
부언하거니와 이 청학동이라는 곳이 지금의 불일평전이다. 점필재 김종직도 영신암에서 언급한 청학동은 세석평전이 아니라 이 불일평전이라 했다. 이 정도 규모의 터에 사람이 살만한 곳이어서 청학동이라고 했으니 세석평전 또한 청학동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러니 이 불일평전, 세석평전 그리고 지금의 청학동 등 세 곳을 지리의 청학동으로 보면 될 것인가? 청학靑鶴은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으며 신선이 타고 다니는 학을 말한다. 태평 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니 고운 최치원을 지리신선으로 보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싶다.
정감록에서는 청학동을 어떤 곳으로 봤을까? 위치는 진주에서 80리, 하동 북쪽 60리, 함양 남쪽 120리 지점으로 아주 세밀하게 나타내고 있다. “뇌파석문雷破石門을 지나 물이 흐르는 동굴 몇 리를 들어가면 수백 수천 명이 넉넉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지역이 나오며 그곳에는 식수와 농경이 가능한 석천石泉이 솟는다.”고 그리고 있다. 남명 조식도 이 불일평전을 청학동이라 여겼다.
- 졸저 전게서 300쪽
평전입구 우측으로 아름드리 소나무와 목장승이 도열해 있고,
좌측으로 예전 취사장.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습니다.
세 개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그윽하게 변규화님을 생각합니다.
불일佛日은 지눌의 시호이다
탁영 김일손이 청학동이라 칭한 곳이 바로 하불下佛이라 불렸던 지금의 불일평전이다. 불일평전, 불일암, 불일폭포..... 이 불일佛日은 천재 승려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이곳에서 도를 깨우쳤다고 하여 왕이었던 희종(1181~1237)이 내린 시호에서 유래한다. 그 불일평전에는 오두막이 하나 있었고 ‘봉명산방’이라는 휘호가 걸려 있었다. 이는 소설가 정비석이 찾아와 붙여준 이름이라 한다. ‘봉명산방’은 고려말 학자 이첨이 지리산을 찾아와 지은 시에 이 지리산을 '산 중의 산'이라 하여 '봉황명(鳳凰鳴)'이라 쓴 구절이 있다. ‘깨달음의 완성’이라는 뜻의 ‘봉황명鳳凰鳴’에서 따온 이름으로 2007년 6월까지 지리산 4대 전설 중 한 분인 고 변규화 선생(2007년 작고)이 자리를 지키던 곳이었다. 1987년경에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국사암과 봉명산방을 오가며 기거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 깊게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도올 선생도 떠나고 주인은 작고하여 황량해진 불일평전과 봉명산방 더욱이 한국 지도 모형의 반도지半島池와 소망탑素望塔이 선생의 빈자리를 더 크게 느끼게 한다.
- 졸저 전게서 297쪽
돌탑.
所望이 아니고 素望이다. 선생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바람을 기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는 취지란다.
- 졸저 전게서 298쪽 각주46)
봉명산방에서 보면 한반도 모양의 연못 즉 반도지가 내려다보인다. 이는 변규화 선생의 통일을 바라는 마음과 만주땅이 우리 땅이라는 인식을 잃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 졸저 전게서 298쪽 각주 45)
봉명산방.
이제 주인은 떠났고...
주인과 두터운 정을 나누던 도올 선생도 이곳을 가끔은 찾을까?
쇠락해 가고 있는 봉명산방을 보수하여 지리산 전설들의 기념관 같은 것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지리산의 전설이라 하면 허만수, 함태식, 김경렬 그리고 변규화를 꼽아야 하지 않을까? 한편 이들을 그렇게도 흠모하던 ‘지리산 365일’의 최화수(1947~2017)님도 작년에 유명을 달리했다. 지리산이 큰 별을 또 잃었다.
- 졸저 전게서 297쪽 각주 44)
좌측은 공단에서 지원센터로 정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일암으로 향합니다.
11:05
상불재 즉 세석으로 가는 정규 등로는 막혀있습니다.
4. 30.까지는 산방기간이니....
우틀합니다.
대여섯 걸음 가는 사이에 어깨를 바꾸고 다리를 바꾸며,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미는 통에 왼쪽으로 거꾸러지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니 가마 타는 고통이 가마 메는 것보다 뒤지지 않았다.
- 1618년, 조위한 유두류산록
순천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이종수 교수는 당시 승려의 면면을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 지로승指勞僧으로 사대부나 관리들이 산행 시 길을 안내하는 승려로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보면 해공과 법종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남여승藍輿僧으로 이런 저런 이유로 힘든 산행을 할 수 없거나 기피하는 이들을 위해 가마를 이는 이들을 말하고,
셋째 수행승은 고유 의미의 승려를 얘기한다 할 것인 바, 위 조위한의 기록에 나오는 승려는 바로 남여승을 얘기합니다.
그럼 등로를 따라 탁영 김일손과 함께 불일암을 가볼까? 1489년 4월 28일 병진일이다.
쌍계의 동쪽을 타서 다시 지팡이를 짚고, 돌층계를 오르기도 하고, 위잔危棧(위태로운 잔도)을 기어오르기도 하여 두어 마장을 가니, 꽤 넓고 평평하여 농사짓고 살만한 곳이 나왔다. 세상이 여기를 들어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눌러 생각해보니 우리가 여기를 올 수 있는데, 이미수李眉守는 어찌하여 오지 못했던가. 미수가 여기를 오고도 기억을 못했던가. 그렇지 않으면 과연 청학동이란 것은 없는데 세상에서 서로 전하기만 하는 것인가.
앞으로 수십 보를 걸어 나가 동떨어진 골짝을 내려다보며 잔도棧道를 지나니 암자 하나가 있는데 이름은 불일암佛日庵이다. 절벽 위에 있어 앞을 내려다보면 땅이 없고, 사방의 산이 기묘하게 솟아서 상쾌하기 이를 데가 없다. 동서쪽에 향로봉香爐峯이 있어 좌우로 마주 대하고, 아래는 용추龍湫와 학연鶴淵이 있는데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암자 중이 말하기를 “매년 6월이면 몸뚱이는 파랗고, 이마는 붉고, 다리는 긴 새가 향로봉 소나무에 모였다가 날아 내려와 못물 마시고 바로 간다.”고 한다. 여기 사는 중들이 자꾸 보는데, 이것이 청학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잡아다가 거문고와 함께 짝을 만들 수 있으랴.
- 졸저 전게서 296쪽
우측으로 비로봉이 따라오고...
좌측으로는 향로봉이 고개를 내밉니다.
11:13
그러고는 불일암입니다.
보조국사 지눌이 위 불일암에서 득도를 했다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異說에 의하면 지눌이 지리산을 이 지리산 삼정산 상무주암에서 40세 때인 1198년부터 1200년까지 3년을 머물렀던 기록은 있으나 이 불일암에 머물렀던 흔적은 없다하여 위 설을 부인합니다.
즉 불일이란 시호라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불가에서는 부처를 '불일(佛日)'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이죠.
그런데 요사채 뒤의 대웅전으로 가서
대웅전의 주련을 보면,
폭포 정상에 있는 불일암이라는 얘기와 신라시대 진감선사가 머물렀던 곳이며,
보조국사가 잠시 쉬었다 갔던 곳이라는 얘기도 보입니다.
여기서 득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들른 곳은 맞는 것 같습니다.
불일폭포로 내려갑니다.
안내판을 보고....
상당히 시끄럽습니다.
불일암 가는 곳의 불일폭포는 60여m가 되는 낙차가 큰 폭포다. 폭포는 청학연이라는 소를 만들었다. 폭포에 살던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쳐 청학봉과 백학봉을 만들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이 폭포가 되었단다. 용추바위는 욕심 많은 스님의 쌀 나오는 구멍과 관련한 전설이 있다. 이런 곳이니 어우당 유몽인이 이곳을 찾지 않았을 리 없다.
드디어 불일암(佛日菴)에 도착하였다. 암자 앞에 평평한 대(臺)가 있고, 벼랑에 완폭대(玩瀑臺)라고 새겨져 있었다. 폭포수가 검푸른 봉우리 푸른 절벽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길이가 수백 자는 되어 보였다. 여산(廬山)의 폭포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긴 폭포로는 개성(開城)의 박연폭포(朴淵瀑布)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폭포는 박연폭포와 비교해 몇 길이나 더 긴 듯하고, 물이 쏟아지는 길이도 더 긴 듯했다. 다만 걸림이 없이 곧장 떨어지는 것은 이 폭포가 박연폭포만 못한 것 같았다.
어우당의 눈에 비친 불일폭포는 나라 안에서 제일 긴 폭포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는 김덕령 장군을 따라 종군하기도 했던 玄谷 조위한(趙緯韓, 1567 ~ 1649)은 1618년 4월 14일 친구들과 불일암을 찾았다.
절 앞에 십여 명 정도 앉을 만한 누대가 있는데 바위에 ‘완폭대(翫瀑臺)’ 세 글자를 새겨놓았으니 역시 고운이 직접 쓴 것이었다. 다섯 사람이 누대 위에 둘러 앉아 잔을 씻어 술을 따르고 기생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악공에게 피리를 불게 하니 그 소리가 구름을 뚫고 나가 골짜기에서 메아리로 화답하였다.
현곡玄谷은 그 바위는 불일폭포와 청학동을 조망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된 곳인데 크기가 10여 명이 둘러앉아 술자리를 펼 수 있을 만한 공간이며 불일암 바로 앞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 그들이 본 완폭대玩瀑臺라는 각자가 쓰인 돌은 어디에 있을까? 어우당 유몽인은 벼랑에 玩瀑臺라고 쓰여 있다 했고, 현곡 조위한은 바위 위에 翫瀑臺라고 쓰인 글을 봤다고 했다.
2018년 3월 25일 지리산꾼 도솔산인 이영규는 이 선인들의 유람기에 나온 내용을 보고 고운 최치원이 썼다는 翫瀑臺라는 각자의 바위를 ‘지리산역사문화지원단’의 일원으로 찾아 나선다. 집요한 탐사 끝에 위 바위를 발견하였고 이는 공단 직원 조봉근에 의해 공단은 물론 하동군에 보고되었고 2018. 5. 10. KBS9 뉴스에도 보도되었다. 도솔산인 이영규 자신의 쾌거를 공단직원의 공으로 돌리는 배려가 아름답기만 하다. 결과적으로 ‘탐사 보도’가 된 영상물을 보는 도솔산인의 흡족한 미소가 떠올려진다. 선인들이 남긴 이러한 흔적을 찾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오늘도 지리산 구석구석을 헤매고 있을 ‘도솔산인’이나 ‘지리99팀’ 그리고 ‘최화수님의 후예’들에게 경의의 박수를 보낸다.
- 졸저 전게서 298쪽
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면 동쪽의 봉우리가 청학봉 그리고 서쪽의 봉우리가 백학봉으로 그려져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선인들의 산행기를 보면 대부분 향로봉은 백학봉이라는 이름으로 폭포 동쪽 그리고 청학봉은 비로봉이라는 이름으로 폭포 서쪽에 위치한다고 보는 게 다수설 같습니다.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곧 청학동이다. 이 암자는 허공에 매달린 듯한 바위 위에 있어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동쪽에 높고 가파르게 떠받치듯 솟아 조금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향로봉이고, 서쪽에 푸른 벼량을 깎아내어 만 길 낭떠러지로 우뚝 솟은 것은 비로봉이다.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여 살면서 가끔 날아올라 빙빙 돌기도 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한다.
아래에는 학연이 있는데 까마득하여 밑이 보이질
않았다. 좌우 상하에는 절벽에 빙 둘러 있고, 층층으로 이루어진 폭포는 문득 소용돌이치며 쏜살같이 쏟아져내리다가 문득 합치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수초가
우리거지고 초목이 무성하여 물고기나 새도 오르내릴 수 없었다.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약수도 이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바람과 우레 같은 폭포소리가 뒤얽혀 서로 싸우니, 마치 천지가 개벽하려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문득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 안에
신선, 거령, 큰 교룡, 작은 거북 등이 살면서 영원히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베어 다리를 만들어놓아서, 겨우 그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를 걷어내고 벽면을 살펴보니 ‘삼선동’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우옹과 내 동생 및 원생 등 몇 사람이 나무를
부여잡고 내려가 서성이며 이리저리 둘러보고서 올라왔다. 나이가 젊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은 모두 향로봉까지 올라갔다.
다시 불일암에
모여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절 문 밖 소나무 밑에 나와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껏 술을 마셨다. 아울러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부니, 그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산봉우리에도 메아리쳤다.
동쪽에 있는 폭포는 나는 듯 백 길 낭떠러지로
쏟아내려 학담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이우옹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물이란 만 길이나 가파른 골짜기를 만나면 아래로만 곧장 내려가려고 하여,
다시는 의심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니, 여기가 바로 그런 곳일세”라고 하였더니, 이우옹도 그렇다고 하였다. 정신과 기운이 매우
상쾌하였으나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
남명의 글이 중요한 게 '학담鶴潭'을 거론한 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학담은 곧 학연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불일폭포 아래에 있는 소沼가 아니고 여기서 우측으로 더 내려가면 나오는 용추폭포와의 사이에 있는 소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신선이나 아니면 학 혹은 자일을 이용하여 갈 수 있는 곳이니 말입니다.
도솔산인 이영규님은 이곳이 청학동이고 이곳에 소, 연, 담 즉 연못이 있으니 이곳이 청학연이고 곧 청학연못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세석평전 옆에 있는 인공 연못이 '청학연못'이라 불리는 것을 극구 반대합니다.
누대를 오르니 왼편에는 누운 바위가 벼랑을 이루고 있고 정면에는 ‘학동임(鶴洞壬)’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근래에 기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짓인 듯하였다. 아래에는 작은 못을 만들었고, 또 그 몇 보 아래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연수정(延壽井)’이라 하였다. 누대의 뒤에는 촛불 같은 촉봉이 우뚝 솟아나 있었다.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율시 한 편이 새겨져 있었다.
頭流山逈暮雲低(두류산형모운저) 두류산 저 멀리 저녁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으니
萬壑千巖似會稽(만학천암사회계) 만개의 골짝과 천개의 바위가 회계산(會稽山) 같구나.
杖策浴尋靑鶴洞(장책욕심청학동) 지팡이를 짚고 청학동을 찾아가려 하는데
隔林空聽白猿啼(격림공청백원제) 숲 너머로 부질없이 흰 원숭이의 울음소리만 들리네.
樓臺縹緲三山近(누대표묘삼산근) 누대에선 아득히 삼신산이 가깝고
苔蘚依俙四字題(태선의희사자제) 이끼 낀 바위에는 어렴풋한 네 글자가 새겨져 있네.
試問仙源何處是(시문선원하처시) 시험 삼아 선원이 어디냐고 물어보노니
落花流水使人迷(낙화유수사인미) 떨어진 꽃 흐르는 물이 사람을 미혹케 하네.
그 옆에는 낙운거사(樂雲居士) 이청련(李靑蓮)이 쓴 여덟 글자가 있었는데 사람들 말로는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의 고적(古迹)이며, 대개 이 산에 청학동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탁영 김일손의 유기에서는, “쌍계의 동쪽으로 몇 리를 가서 한 동네를 발견했는데, 넓고 평평하여 농사를 지을만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청학동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남명(南冥) 조식(曺植)도 또한 이와 같이 말했다.
이 송병선의 글은 몇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 즉 ‘鶴洞壬’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 아래 연못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는 연수정이라는 샘물이 있다는 것과 이 바위 뒤로는 촉봉이 있는데 그 봉우리에는 바위에 율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는 것과 그 옆에 이청련이 쓴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 등이다.
‘촛대 같은 촉봉’은 김종직과 하달홍도 이 봉우리를 촉봉이라 하였으니 이 ‘燭峰’은 지금의 촛대봉이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촛대봉의 여러 개의 바위 중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라고 쓴 각자는 너무 희미하여 찾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바위에서 ‘宣人羅州鄭氏之墓’라는 각자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봉 아래로 촛대봉능선을 따라 15분 정도 내려가면 과연 커다란 너럭바위를 찾을 수 있는데 그 바위에는 ‘鶴洞壬’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인공연못이 있으며 그 아래 조금 내려가면 샘물이 있는 ‘박지泊址’가 있다. 그렇다면 지금 지형과 1879년 송병선이 볼 때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 ‘작은 못小池’이 어떤 이름으로 불렸냐 하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지 않는 이 못의 발견자는 우천 허만수 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우천은 ‘지리산 달인’ 성락건에게 은밀히 얘기해줬고 성락건은 평소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석=청학동’이라는 신념대로 못의 이름을 ‘청학연못’이라고 사람들에게 귀띔을 해준다. 그렇게 전해준 이름이 지리산에 관한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지리99팀’에게 알려지면서 그 이름은 지리산꾼들 사이에 퍼진다.
문제는 축조 시기와 선인들이 답사한 이 청학연못의 정확한 이름을 밝히는 데 있다. ‘지리 99팀’의 ‘가객’은 류성룡의 형 류운룡의 겸암일기의 돌문과 돌샘 즉 '하동의 화개현에 이르러 유숙하고 이른 아침에 떠나 점심 겨를에 등촌에 닿는다. 그곳에서 사흘간 먹을 양식을 마련한 후 노숙을 사흘 동안 하면 커다란 돌문(石門)에 이르고 그 돌문(石門)을 지나 40리가량 가면 1천 섬을 거둘 수 있는 논과 밭이 펼쳐지는데 넓이가 1천 호쯤은 살만하다 했다. 그 골짜기에 돌샘(石泉)이 하나 있는데 고려 때 ‘청련거사’가 20년 동안 속세와 단절하고 이곳에 살았는데 이곳에 살면 병화가 이르지 않아 보신하는데 길지라는 ‘도참’의 글이 새겨져 있다. 대대로 이곳에서만 자라는 청련(靑蓮)을 기르고 살았기에 그를 ‘청련거사’라 불렀다 한다.'는 내용을 들어 1570년경이라고 본다.
반면 도솔산인 이영규는 위 류운룡은 화개동천에서 출발하여 횡천지맥을 거쳐 삼신봉에서 낙남정맥에 들은 다음 세석으로 올랐다고 진행 코스를 설정한다. 그러고는 위 루트 상의 ‘돌문’은 낙남정맥 상의 삼신봉 바로 아래에 있는 지금의 ‘석문’을 이르는 것이고 ‘돌샘’ 역시 지금의 ‘음양수샘’을 말하는 것이니, ‘돌샘’은 이 ‘작은 못’과 전혀 관계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위 송병선에 앞서 이곳을 지났던 하달홍의 1851년 산행기에는 이 ‘작은 못’에 대한 기술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못의 축조 시기는 1862년 진주 단성민란 때 피신을 온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에 인공 못을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못의 이름은 불일폭포에 있는 청학연과 구분하여 이곳 세석평전이 예전에는 적석평積石坪이라는 지명을 가졌음에 착안하여 세석연못 혹은 적석연못이라 부를 것을 제안한다.
생각건대 예전이나 지금이나 산길을 가장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은 여전히 능선이며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다. 또한 특별한 일이 아닌 다음에야 계곡을 건너 마주 보이는 능선을 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니 유운용의 돌문과 돌샘은 지금의 낙남정맥 상의 석문과 음양수샘으로 보는 이영규 의견에 동의한다. 다만 성낙건 선생은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다면 세석 이외에는 불가능하다.”는 평소의 소신을 갖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 연못을 청학연못이라 부른 것은 불일폭포의 청학연과 혼동을 하여서 붙인 게 아니라는 점, 지금은 어느 정도 청학연못이라는 이름으로 세인들에게도 정착된 점 등을 고려해 본다면 그 이름만큼은 지금의 청학연못으로 놔두는 게 낫지 않을까?
- 졸저 전게서 449쪽 이하
불일폭포를 보았으니 이제 백학봉을 들러 소은암으로 가야겠죠.
다시 불일암으로 올라갑니다.
이제부터 초행길이지만 경험상 반대편 봉우리를 가기 위해서는 폭포 상단부로 가야함은 기본 상식!
그렇다면 그 초입은 불일암 정도에서 이어질 것입니다.
불일폭포 철계단을 오르고 좌측 난간 밖으로 기둥 하나가 서 있군요.
'하동군수 한형구가 폭포 주변을 정비하고 세운 기념비'로군요.
세상에....
아마 쌍팔년도에 세운 것 같습니다.
불일암에 다시 들어서서 대웅전 옆으로 올라 암자 밖으로 나섭니다.
따스한 봄 햇살이 퍼지는 곳에 작은 계류 하나를 건너니 산죽 사이로 선명한 길이 보이고,
그러고는 폭포 상단부입니다.
좀 더 가까이 접근을 해보려 했지만 아래에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그냥 사면을 치고 오릅니다.
11:46
향로봉 그러니까 백학봉 정상입니다.
여기서 불일암을 한눈에 볼 수있군요.
그러니까 저 불일암이 이 향로봉과 건너편 비로봉의 호위를 받고 서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아래로는 불일폭포, 용추폭포, 학연 등을 품고 있어 잔도가 아니면 감히 접근을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요새에 놓여져 있는 암자이니 과연 저 같은 문외한이 보더라도 명당 중에 명당 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아마 여름에 오면 이나마도 감상할 수 없으니 지금이 최적기일 것 같습니다.
향로봉에서 바라본 계곡 건너 지도 #2의 '라'의 곳에 있는 비로봉 모습.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군요.
이 역시 지금 아니면 이 정도의 조망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금 전 이 향로봉으로 올 때 좌측으로 흘러내리는 길 흔적을 봐두었습니다.
약 30m 정도를 되돌아 나갑니다.
지도를 보니 좌측 사면을 치고 조금 내려가게끔 그려져 있으니...
11:54
부안 임공지묘를 보고...
제대로 가고 있습니다.
지도 #2의 '마'의 곳입니다.
11:56
지도 #2의 '바'의 곳에 이르러 좌측으로 길이 보이는데 아직 묘를 못 봤으니 조금 더 직진합니다.
11:57
지도 #2의 '사'의 곳입니다.
심율최씨 묘를 확인하고 여기서 왼쪽으로 틀어내리면,
12:01
절터가 보이고..
이곳이 지도 #2의 '아'의 곳의 대은적암 터입니다.
석축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약간 좌측으로 사면을 치고 나아가니,
간간이 이런 돌이 보입니다.
누군가 일부러 바위에 흠집을 낸 겁니다.
소은산막의 소은거사님께서 부인을 위하여 미끄러지지 않게 일부러 그라인더로 이렇게 갈은 것이라고 하는데....
12:14
지도 #2의 '자'의 곳인데 이곳에서 길의 흔적이 뚝 끊기는 느낌입니다.
주의할 것은 이 부근에는 표지띠가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지도를 보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면 내연골로 떨어지는 느낌이고....
오던 방향에서 직진하면 산죽이 막혀있고...
잠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옳커니 이런 돌이 나오고...
약 20m 정도 올라가니 이런 돌이 보이고 우측으로 길이 보입니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우측으로 황장산947.7m이 보이는군요.
그러니 이 줄기는 날라리봉 ~ 불무장등 ~ 당재로 내려와 화개천으로 잠기는 화개단맥으로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가르는 도계가 되는 산줄기입니다.
저 윗쪽으로 능선이 보이는 걸 보니 저기가 활인령活人嶺 같습니다.
12:26
지도 #2의 '차'의 곳으로 활인령 맞군요.
그런데 선답자의 산행기에서 본 나무팻말이 안 보이는군요.
분명히 활인령이라는 산패를 본 거 같은데....
12:30
사람의 손이 탄 나무들이 보이고...
그리고 건물이 보입니다.
그,리고 아까 보았던 그런 돌의 그런 홈....
12:34
소은산막입니다.
소은암이라고도 하고....
그런데 시간은 5시 49분에서 멈췄습니다.
태양열을 이용하여 소규모의 발전은 가능한 거 같습니다.
전기제품도 있고....
菩果農院이라는 팻말도 걸려 있고....
素隱山幕.
황장산 능선인 화개단맥을 보고....
글씨체도 상당히 품격 있는 체하고....
거기에 蒸米堂이라 썼으니 밥을 해서 나눠 먹는 집이라는 얘기니 있는 걸 나눈다는 말인가?
內外明徹은 안과 밖이 함께 밝다는 말이니 안이 밝으면 곧 밖도 밝다는 얘기 같고....
그나저나 사진을 유목민 대장님께 보내니....
소은거사님께서 서울에서 치료 중이라 하시니 언제나 이 소은산막은 다시 문을 열까요?
내원골로 행하는 골.
오던 길을 다시 내려갑니다.
12:46
활인령에서 아까 올라온 루트를 버리고 사면 루트를 택합니다.
산죽 밭으로 들어가면,
우측 바위들이 곧 흘러내릴 것 같이 위험스러운 곳이 산재해 있군요.
비올 때나 해빙기에는 좀 위험할 것 같습니다.
바로 지금이니 위를 주의하며....
12:49
너구리 쌍굴이라....
음 선답자는 이 루트를 이용했군요.
훨씬 쉽습니다.
12:51
접목이 가득한 곳을 지나는데 우측에 암적수라고 표기된 산패를 보지만 음용할 물은 못 되고....
너덜을 지나는데.
무천대無喘臺라..
도대체 왜 이리 어려운 한자를 쓰는 것인지...
산죽밭은 헤쳐지나가다,
계곡이 나오면서 살짝 우측으로 오르면,
12:59
향불암이라는 바위가 나옵니다.
길은 산죽 안으로 나 있고....
13:04
이번에는 돈선암.
13:07
그러고는 아까 무덤을 지나고 만났던 지도 #2의 '마'입니다.
역시 지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군요.
부안 임공 음택을 지나,
향로봉에서 불일암을 다시 보고,
불일폭포 상단부를 건너,
작은 이끼폭포를 봅니다.
13:28
그러고는 다시 불일암.
13:34
상불재 올라가는 길.
13:37
불일평전을 지나,
13:59
국사암 3거리에서 우틀합니다.
호젓한 대나무 숲을 지나,
언덕을 넘으면,
14:04
국사암입니다.
이게 일주문.
대웅전과 칠성암 그리고 명부전이 한 건물에 있군요.
상당히 특이 합니다.
여기는 산신각도 아니고 칠성신앙을 중시하듯 칠성전이 있습니다.
그 뒷건물은 문수전.
문수전에서 내려다 본 국사암 전경.
감로수에서 바라본 문수전.
아니 이 국사암 해우소는 이렇게 풍치가 있는 곳?
대나무 밭을 지나,
연지蓮池를 지납니다.
6월 정도에 오면 볼만하겠습니다.
지리산도 이제 완전히 봄입니다.
음...
멀리 지리 주릉이 보이고....
14:20
목압마을 입구에서 좌틀.
쌍계사 입구를 향합니다.
이 시간이면 화개에서 14:50분에 출발하는 서울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밭.
이곳도 다 쌍계사 터라는 표시.
쌍계초등학교를 지나,
14:34
화개천을 건너면서 계속 화개택시를 호출하지만 받지를 않는군요.
금요일인데 그렇게 관광객들이 많다는 얘기?
시내버스도 바로 떠났고...
하는 수없이 15:15분 버스를 기다려야겠군요.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제 시간에 도착하는 버스를 타고 화개에서 구례로 그리고 구례에서 구례구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우여곡절 끝에 19:20 집에 도착합니다.
지리산 귀신 도솔산인 이영규님이나 유목민님이 그리워집니다.
마침 유목민님이 4. 14. 일정을 제시하십니다.
불가피한 상황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무조건 참석입니다.
이번 주 일요일은 문산지맥을 마무리하고 주중에 지리산 방향으로 한 번 더 가야겠습니다.
첫댓글 자세한 역사 이야기와 더불어 잘 감상하고 갑니다.방대한 이야기가 재미도 있습니다.
선배님과 지맥 산행을 즐겨야 하는데 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 늘 죄송한 마음만 갖습니다.
후기의 모범 이라고 생각 해요 고향의 산을 잘 정리해 주시어 고맙습니다 ㅎㅎㅎㅎ
너무 과대 평가한 느낌입니다. 여하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