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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가 되었고, 그 뒤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에 시성되었다.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널리 전하도록
복된 이냐시오를 교회에 보내 주셨으니
그의 도움으로 저희가 그를 본받아
이 세상에서 복음을 위하여 열심히 싸우고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그와 함께 승리의 월계관을 받게 하소서.
제1독서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32,15-24.30-34
그 무렵 15 모세는 두 증언판을 손에 들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다.
그 판들은 양면에, 곧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
16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며,
그 글씨는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것이었다.
17 여호수아가 백성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진영에서 전투 소리가 들립니다.” 하고 모세에게 말하였다.
18 그러자 모세가 말하였다.
“승리의 노랫소리도 아니고 패전의 노랫소리도 아니다.
내가 듣기에는 그냥 노랫소리일 뿐이다.”
19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 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 버렸다.
20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그들에게 이렇게 큰 죄악을 끌어들였습니까?”
22 아론이 대답하였다.
“나리, 화내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23 그들이 나에게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빼서 내시오.’ 하였더니,
그들이 그것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불에 던졌더니 이 수송아지가 나온 것입니다.”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큰 죄를 지었다.
행여 너희의 죄를 갚을 수 있는지, 이제 내가 주님께 올라가 보겠다.”
31 모세가 주님께 돌아가서 아뢰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
3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
34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일러 준 곳으로 백성을 이끌어라.
보아라, 내 천사가 네 앞에 서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내 징벌의 날에 나는 그들의 죄를 징벌하겠다.”
복음
<겨자씨는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31-35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강론에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
저는 강론에 항상 비유를 하나 이상 찾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하십니다.
어째서 진리를 깨달은 이는 비유를 통해서만 가르치실 수밖에 없으실까요? 모든 비유를 다 깨달았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비유를 깨달은 율법 학자가 꺼내는 옛것과 새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비유입니다. 옛 비유를 새 비유를 통해 가르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면 왜 강론에 비유가 들어가야만 진정 비유를 이해한 제자가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오늘 비유 말씀을 이해해봅시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비유 중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다른 비유들에 비하면 조금 해석이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해 놓은 해석은 조금은 제각각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처럼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어떤 열매가 맺히느냐면 이웃사랑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드는 것처럼 힘들고 쉴 곳이 없는 이웃들이 나에게 와서 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은 내 안에 들어와 어떤 변화를 일으킵니다. 왜 서 말일까요?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농부가 뿌린 씨가 열매 맺지 못하게 만드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길처럼 교만한 사람과 돌밭처럼 육체적인 사람과 가시밭처럼 돈 걱정 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속, 육신, 마귀의 성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맺을수록 그 성향들이 줄어들고 부드러운 밭이 됩니다. 그래서 30배의 열매를 맺는 밭이 60배를 맺게 되고 나중에는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국 하늘 나라는 생존욕구가 줄어들게 만들어 이웃을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멍에를 주시며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가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은 모기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모기는 이웃을 찔러 달아나게 만듭니다. 쉼을 가진 사람만이 쉬게 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체험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꿀을 먹어본 이가 그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꿀맛에 관해 설명할 때는 어때야 할까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소재들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꿀맛은 마치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고, 설탕물처럼 달며, 꽃의 향기가 납니다.”
그렇다고 꿀이 연인들의 사랑의 맛은 아니고 설탕물도 아니며 꽃향기와는 또 다릅니다. 만약 이것들을 각자 해석하려고 한다면 잘못된 해석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꿀맛은 연인들의 사랑이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설탕물이라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꽃으로부터 왔으니 꽃향기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질을 잊습니다. 먼저 그 사람이 말하려는 추상적인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꿀은 맛있습니다.”
꿀맛을 보지 못한 이들은 꿀이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그냥 자신들을 무시하고 놀리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맛을 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듯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해버립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 꿀은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게 맛있구나! 설탕물처럼 달구나! 꽃향기가 나는 맛있는 무엇이구나!’
하늘 나라의 비유도 상당히 여러 개입니다. 그러나 그 비유도 하나의 개념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하늘 나라는 결국 성령으로 누리는 하느님 자녀의 행복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늘 나라 비유의 개념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는 은총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부모의 희생으로 오는 선물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는지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모든 비유는 그 말하려는 개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개념은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 말하려는 사람을 믿고 사랑할 때 비유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먼저 꿀을 먹어본 사람이 그 꿀이 맛있다는 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비유 말씀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쫓아가서 꿀을 먹어본다면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비유를 이해함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그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비유, 곧 다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모기와 예수’라는 비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비유가 더 쉽게 이해되고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하늘 나라를 순종으로 체험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비유를 모두 이해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진리를 알려주는 율법교사가 됩니다. 율법교사가 되면 먼저 1.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 나라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2. 그 개념을 비유 말씀을 통해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분께 다다르기 위해 비유의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3. 비유를 이해했다면 용기를 내서 그분께 순종하고 자신도 그분이 이끄시려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늘 나라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4. 자신을 이끌어준 비유를 설명하되 새로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5.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신뢰를 주기 위해 희생합니다. 그들이 그 비유를 말하는 이를 신뢰하게 된다면 그들도 비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율법 교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유를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비유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999년 가족 여행으로 태국에 다녀왔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어 해외에 나간 것이지요. 더군다나 부모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서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결정적으로 음식까지도 전혀 다른 나라였습니다. 그때 정말로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음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쌀국수입니다. 워낙 국수를 좋아하는 저였기에 아주 맛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국물에서 심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 쌀국수를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바로 ‘고수’라는 풀 때문이었습니다. 음식에 화장품 냄새 나는 풀을 넣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마치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거의 25년 전의 일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신부들과 종종 베트남 식당에 가서 쌀국수를 먹습니다. 그런데 “고수 빼고요~~~”라고 말하지 않고, “고수 많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고수와 쌀국수가 입에 함께 들어왔을 때의 맛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고수가 있기에 쌀국수의 맛이 배가 된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1999년의 저는 고수를 즐겨 먹는 지금의 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맛의 취향이 이렇게 바뀝니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단정 지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반드시 정답일 리 없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참’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열린 마음이 있어야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너머에 있는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당시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볼 수 있는 것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해 설명해주시지요. 즉, 하늘 나라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지금 삶에서 하늘 나라를 매번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습니다. 너무 작아서 ‘무슨 씨앗이 이렇게 작아?’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자라면 그 작은 씨가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로 변합니다. 누룩 역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적은 양으로 무슨 변화가 있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밀가루 서 말 속에 아주 적은 양만을 넣어도 온통 부풀어 오릅니다.
겨자씨만 가지고 큰 나무를 상상하기 힘듭니다. 누룩만을 가지고도 부풀어 오르는 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도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 결론 내는 것이 아닌,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지혜만이 하느님 나라 안에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있었을까요?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존 드라이든).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