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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2,12-14.27-31ㄱ>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젊은이야, 일어나라.”>
오늘 복음인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루카 8,40-56)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요한 11,17-44)와 함께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물론 죽은 이를 살리신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1열왕 17,17-24)라든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2열왕 4,32-37),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린 이야기(사도 9,36-43)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 이야기와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다른 이야기들은 그들이 하느님께 간청해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일어나라.”는 한 마디의 말씀으로 죽은 이를 손수 살리십니다.
곧 당신의 신적 권능으로 살리시면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일 중에 가장 슬픈 일 중의 하나는 아마도 소중한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일일 것입니다.
불의의 사고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슬픈 일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간 자식을 잃었을 때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오로지 외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가 이제 그 외아들마저 잃었으니 그 슬픔이 오죽하였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하시며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야, 일어나라.”
(루카 7,14)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처럼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단 한마디 ‘말씀’으로 목숨을 살리십니다.
그것은 라자로를 살리실 때처럼 기도를 드리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처럼 간청을 받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당신께서는 순전히 당신의 진정한 마음, 곧 ‘가엾은 마음’으로 신적인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곧 드러난 것은 신적인 권능이지만, 그 권능을 불러온 것은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상한, 아픈 마음 곧 상심이 불러온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단장의 아픔’을 그대로 받으신 예수님의 ‘심장이 찢기어지면서’ 흘러나온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아픈 가슴에 가 닿은, 그 아픔과 분리되지 않은 상한 마음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죽음을 이기는 권능을 불러왔습니다.
이는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이루는 힘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사랑이 목숨을 살리는 힘이요, 구원의 힘임을 말해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10)
그렇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듯이, 우리의 사랑 역시 이웃과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어줍니다.
하오니, 주님!
저에게 아파하는 마음을 주소서!
제 마음이 당신 마음 같게 하시고, 제 마음이 상하고 찢기어지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젊은이야, 일어나라.”
(루카 7,14)
주님!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이를 일으켜 세우시듯, 당신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누워 잠들어 있는 저를 일으켜 세우소서!
죽음의 길 벗어나 생명의 길 걷게 하소서!
쪼개어 나누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상처도 축복이 되게 하시고 아픔도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은 기적을 낳는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좀 더 확실히 보여주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또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 생활을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여주면 오히려 두려움을 느낄까요?
어찌 되었든 당장 내가 요구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기적을 행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니셨지만,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어디에서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면 기어이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현상을 보고 믿음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때뿐입니다.
열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기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알맹이에는 관심이 없고 기이한 현상에만 눈길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실천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기적이 믿음을 성장시키기보다는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을 보거들랑 하느님께 대한 합당한 두려움으로 죄를 피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새롭게 눈뜨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루카 7,13)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백성을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파하는 당신 백성을 보시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슬픔을 없애 주십니다.
우리도 제대로 보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줘봤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예’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 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 ’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그들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의 필요를 채워주었듯이 우리도 '보고' 마음의 공명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에 찬 말씀으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면 능력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4),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 3,7)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힘입어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믿음으로 그들을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행동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비한 현상은 어디에나 있어도 믿음은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께로 모아지길 바랍니다.
은총 덩어리보다 은총의 주관자를 만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사랑을 외치는 예언자이셨듯이 우리도 세상의 예언자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이사 40,31)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청하는 것을 무조건 얻는 법: 거룩한 무기력감>
박보영 목사 밑에서 자라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사랑이 너무도 커서 자주 신발 없이 맨발로 집에 오곤 하였습니다.
거지가 신발이 없어 벗어주고 오는 것입니다.
옷과 자기 도시락 등 먹을 것을 주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길고양이가 버스에 치였습니다.
그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버스에서 내려 고양이를 찾았습니다.
고양이는 죽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핏자국이 보였습니다.
고양이는 컨테이너 밑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고양이를 끌어내어 치료해 주려고 컨테이너 밑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그러자 고양이는 소리를 지르며 그 손을 할퀴었습니다.
그래도 그 청년은 피를 흘리면서도 고양이를 잡아 끌어내었습니다.
고양이는 하반신이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청년은 고양이를 안고 울면서 동물병원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동물병원은 고양이를 살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으로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해 손을 내미십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것인 줄 알고 손을 피하거나 그 손을 할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도움을 주실 수가 없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신 기적을 세 번 하셨는데, 이번이 유일하게 청하지도 않았는데 살려주신 예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야이로의 청으로, 라자로는 동생 마리아와 마르타의 믿음을 요구하시며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지만 나인 고을의 과부의 아들은 그냥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살려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청하지도 않았는데 은총을 쏟아부어 주신 것일까요?
세상에는 많은 고양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왜 버스에 치인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을까요?
바로 불쌍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불쌍합니까?
청할 힘조차도 없는 무기력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심지어 과부였습니다.
그녀는 우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그냥 지나치실 수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거부한다면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길거리에서 살던 가출청소년들을 박보영 목사는 집에 데려와 키웠습니다.
처음에는 따듯한 잠자리와 먹을 것, 깨끗한 옷을 입으면 그 아이들은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면 다시 바깥세상의 자유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박 목사는 그들이 처음에 입고 있었던 지린내 나는 옷을 다시 입으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코를 틀어막고 그것을 입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손으로 그 옷을 가져다 버립니다.
그다음 목욕을 세 시간씩 한다고 합니다.
박 목사는 이러한 예식을 통해 자신이 아니면 그들은 아무 존재도 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무엇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자꾸 밖으로 나가면 자신들이 무엇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고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어떠한 신앙과 가르침도 줄 수 없습니다.
움직이는 아이에게 예방주사를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은총은 이렇게 그 주사가 아니면 자신은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자신을 무기력하게 맡기는 이들의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가 꿈을 꾸었습니다.
기도와 희생을 통해 모두가 완덕의 계단으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도 어린 수도자로서 소화 데레사는 한 계단도 못 올랐습니다.
심지어 꿈에서는 자기 나이보다 더 어렸습니다.
아기였습니다.
아기가 오르고 싶은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소화 데레사를 들어 제일 꼭대기에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가장 먼저 완덕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착각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없으십니다.
당신은 그저 우리 보조자가 되기 때문이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내가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처지처럼 거룩한 무기력감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은총은 이미 받았다고 보아도 됩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야 모든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 하느님이시여, 만사에 있어 당신께 영광이 있어지이다!>
오늘은 교회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탁월한 명강론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349~407)의 축일입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 정통 교부로 유명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직을 역임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요한이었지만, 뛰어난 강론가이자 성서학자로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명세만큼 혹독한 시련과 고통이 생애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성 바실리오와 절친했던 요한은 그를 따라 은수자로서의 수도 생활을 꿈꿨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잠시 꿈을 접었습니다.
자신의 계획을 중단한 그는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며 효도를 다 하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즉시 광야로 들어가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과 십자가의 길을 깊이 묵상하며 고행과 극기의 생활로 뛰어들었지만, 결코 균형 감각을 상실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주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철야나 단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불타오르는 하느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모든 고행을 그 사랑의 불꽃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간의 철저한 고행은 요한의 건강을 크게 악화시켰습니다.
몸이 너무 아파 더이상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광야를 떠나 고향 안티오티아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요한은 운명적인 만남, 즉 당시 안티오키아의 멜레시오 주교를 만나게 됩니다.
멜레시오 주교는 요한을 보자마자 즉시 범상치 않은 청년임을 확인하고, 즉시 그를 부제로 서품하였습니다.
부제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요한은 오랜 기간 광야에서 갈고 닦았던 성덕과 인품을 자연스럽게 만천하에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4년 후 멜레시오 주교는 극구 사양하는 요한이었지만 사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사제품을 받게 한 후 안티오키아 주교좌 성당 주임 설교가로 임명하게 됩니다.
6년간의 광야 생활 가운데 쌓아 올린 탁월한 성경에 대한 요한의 강론은 사람들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강론을 들은 사람들은 혹시 바오로 사도가 환생하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할 정도로 사목자로서 그의 인품과 학덕, 겸손의 덕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397년 콘스탄티노플 네그다리오 총대주교가 선종하자, 요한은 황제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교직을 승계합니다.
당시 교회 상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리우스파 이단이 기승을 부려 교회에 큰 충격을 가했습니다.
사도 시대의 열렬했던 신앙과 청빈한 삶은 사라지고, 사치스러운데다 게으르고 냉담한 신자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평소 엄격한 고행, 그리고 은수 수도자로서의 삶을 추구했던 요한은 그러한 교회 현실 앞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콘스탄티노플 교구 안에서만큼은 그런 폐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며, 요란스럽고 호화스런 모임을 폐지했습니다.
웅장한 주교관 대신 여행자 숙소나 환자들의 수용소를 건립했습니다.
악습에 깊이 빠져버린 사람들 눈에 요한의 모습은 즉시 반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고위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주교, 사제들 가운데서도 성인의 대쪽같은 삶에 큰 불만을 가지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자신의 노선을 꿋꿋이 유지했습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릇된 처신을 하면 인정사정없이 강력한 경고의 조언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에우도시아 황후의 재정적 일탈 앞에서도 직언(直言)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요한은 황제와 황후의 눈에 벗어나게 되었으며, 이런저런 무고와 모함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당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교로 추대될 때의 엄청난 환영과 박수갈채는 온데간데 없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비참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복권되었다가 재차 추방당하는 과정에서 체포되는 순간, 주교좌 성당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바친 후 신자들에게 건넨 요한의 고별사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저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 길을 달렸습니다.
이제 더는 다시 여러분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최후로 나는 여러분들이 가끔 나를 위해 간단한 기도나마 바쳐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요한의 말년은 참으로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유배를 떠나서 어느 정도 정착하려 하면 황제는 더 열악한 유배지로 그를 유배시켰습니다.
그런 유배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요한은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슬퍼하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였습니다.
또 다른 유배지로 떠나는 여행길에 여독에 지친 요한은 길 위에서 세상을 떠나는데,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아, 하느님이시여, 만사에 있어 당신께 영광이 있어지이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생명의 주인’이라는 말은 사람을 살리거나 죽이는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권한과 권능은 육신의 생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도 작용하는 권한과 권능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의 생명에 대해서도, 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도, 그 생명을 주거나 주지 않을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의 출발점은 예수님만 믿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2코린 5,1)
우리는 임시 거처일 뿐인 ‘천막집’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가서 살 ‘자격’을 얻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 집을 마련하셨지만, 아무나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젊은 외아들’이라는 말에서 ‘십자가 밑에 서 계신 성모님’이 연상됩니다.
성모님도 과부였고, 예수님도 ‘젊은 외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의 관을 따라가며 울고 있는 과부의 심정은 십자가 밑에 서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성모님의 심정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은 어쩌면 당신의 십자가 수난 때 성모님이 겪게 될 고통을 미리 생각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엾게 여기신 사람은 ‘죽은 젊은이’가 아니라 그 젊은이의 어머니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가장 크게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성모님이 예수님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죽은 사람 자신이 얼마나 슬퍼하는지를 모르긴 합니다.
죽은 사람 자신도 슬퍼할 것이고 고통스러워하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저쪽 세상에서의 일입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의 죽음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라면,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일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고 뜻이었다면, 다시 살리려고 일부러 죽게 하신 것인가?”
하느님과 예수님은 항상 하나로 일치되어 있고, 예수님의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요한 5,19).
따라서 ‘예수님의 일’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려고 그 사람을 일부러 죽게 한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바치신 기도가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1,41-42).”
이 기도로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기도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다면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예수님께 맡겨 드려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아직까지도 인간 세상의 슬픔과 고통은 수수께끼(신비)로 남아 있는데, 그 수수께끼를 풀 열쇠를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루카 7,16-17)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라는 말은 당연한 ‘진리’인데, 당시 사람들이 이 말을 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내렸다.” 정도의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하느님 대신에 전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 - 생명, 일치, 찬양>
강론 쓰기 전 우선 생각하는 것이 강론 주제를 나타내는 제목입니다.
방금 읽은 오늘 복음을 요약하는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이 은혜롭습니다.
“우리 가운데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바로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입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현주 역)은 유대인 랍비 신비주의자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의 작품으로 제가 오랜동안 밑줄치며 메모하며, 열광하며 읽었던 책명이기도 합니다.
읽을 때마다 늘 새로운 가르침과 깨우침을 얻었던 책입니다.
우리 수도자를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하는데, ‘하느님을 찾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사람을 찾는 하느님’도 있습니다.
사람을 찾아오신 하느님이기에 비로소 하느님을 찾는 삶이 가능해졌습니다.
바로 이를 노래한 제 예전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 1997.2
그러니 하느님을 찾는 고단한 구도求道의 삶을 잠시 멈추고 하늘을 담는 호수처럼, 찾아오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관상적 휴식을 즐기자는 요지의 시입니다.
찾아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요 성령님이요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환대하여 마음속 깊이 모시는 참으로 복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기도하듯이 “오소서 예수여”, “오소서 성령님”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이 마음에 오소서.”(성가153)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맘에 오소서.”(성가142)
'오소서, 주 예수님' '오소서, 성령님' 바로 제가 호흡에 맞춰 기도하는 성구(만트라)입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를 호흡하며 사는 삶이 실현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는 일화입니다.
복음의 청중들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역시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오로지 희망을 걸었던 외아들의 죽음은 과부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슬픔이었을까요!
오늘 복음 장면이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죽음의 대열과 생명의 대열이 조우遭遇합니다.
그대로 파스카의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의 대열을 상징하는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과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죽음과 어둠, 절망의 대열을 상징하는 과부 일행의 극적인 만남입니다.
우연이 아닌 분명 과부의 울부짖음이 하느님께 도달되어 마침내 예수님이 찾아오셨으니 그대로 섭리의 은총입니다.
다음 그림처럼 선명한 감동적인 대목은 그대로 예수님을 통한 자비로운 하느님의 개입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얼마나 멋진 예수님이신지요!
바로 하느님은 이런 분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파스카 신비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순간 죽음은 생명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입증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신 하느님의 세 특성이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납니다.
‘가까이 계심(closeness)’, ‘연민(compassion)’, 그리고 ‘부드러움(tenderness)’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예수님처럼 우리도 연민과 부드러움, 겸손과 지혜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 복음의 핵심 말마디이며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일어나라’는 말마디는 부활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상 영혼은 시들어 죽어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이런 우리들을 영적 죽음으로부터 살려내는 말씀입니다.
흡사 나자로를 살려낼 때 “라자로야 나오너라”(요한11,43)는 장면을,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 “탈리타 쿰, 소녀야 일어나라”(마르5,41)는 은혜로운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무기력, 무의욕, 무감각한 마음이 들 때, 좌절감이나 자포자기 절망감이나 원망, 실망하는 마음이 되어 영혼이 시들어 죽어간다 생각될 때 지체없이 “젊은이야, 일어나라.” 주님의 말씀을 연상하여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젊은이’이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대죄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이렇게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영적탄력도 영적감성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우울증이나 치매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곤경에 처할 때 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시기에 이런 파스카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듯이 우리 하나하나를 살리시고, 이어 공동체에 일치와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나인 몸과 여러 지체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에 대해, 또 교회의 다양한 은사에 대해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실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적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로 만들어 주시며 공동체의 세가지 특징은 일치성, 다양성, 연대성입니다.
이런 상호보완의 일치와 평화의 공동체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이어지는 공동체 형제들의 받은 은사가 모두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주님의 선물들로 이뤄진 여기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살아갈수록 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고마움도 날로 커집니다.
그리하여 변함없는 제 고백이 지금도 여전히 게시판에 붙어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똑같은 부활과 생명의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공동체에 일치와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응답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를,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주님을 뵌 군중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했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찬양과 찬미를, 영광을 드립니다.
바로 우리의 마땅한 응답이요, 그리하여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은 동방 4대 교부들(아타나시오,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지안죠의 그레고리오)중 하나인 개혁가이자 예언자이자 교회학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학자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전폭적으로 신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파란만장한 삶에 탁월한 설교로 ‘황금의 입’이라 금구金口라는 불리는 성인으로 설교자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수 차례의 유배중 마지막 유배 시 임종 때의 일화도 감동적입니다.
전설적인 신비스런 일화를 소개합니다.
마지막 임종처는 순교자 바실리쿠스(+311) 작은 경당입니다.
임종하던 날 밤, 순교 성인 바실리쿠스가 꿈에 요한 크리소스토모에게 나타나 “마음을 편히 가지시오. 요한 형제, 아침이면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오.” 말했다 하며, 이 꿈에 앞서 바실리쿠스 경당 사제에게도 꿈에 나타나 “요한 형제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게. 그가 오고 있네.”라고 말했다 합니다.
새삼 우연은 없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섭리하에 있는 믿는 이들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임종 시 장면입니다.
요한은 흰 수의를 덮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기 옷은 그가 감격스럽게 읽었던 위대한 은수자 안토니오를 본받아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선사합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임종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또는 이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결국은 같은 내용입니다.
평생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 영광을 돌렸던 삶의 요약과도 같은 임종어는 흡사 수도원 정문의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이란 성규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강요된 고통으로 사망할 당시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나이는 대략 58세였다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새 생명과 일치, 평화를 선물하시며, 우리는 주님께 감사의 찬양으로 응답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동창모임을 다니면서 우리가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먼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새벽형인 저는 4시면 일어나서 움직이는 편입니다.
그런 저의 모습이 다른 동창들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음주에 대해서도 저는 식사를 하면 반주를 즐겨하는 편입니다.
술을 하지 않는 동창들에게 저는 약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저는 여행을 다닐 때도 옷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는 편입니다.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제가 동창들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오랜 만에 만난 동창들에게서 제게는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음식을 뚝딱 금세 만들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국내 정치상황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손재주가 좋았습니다.
만지면 문제가 해결되곤 하였습니다.
저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동창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였습니다.
지루할 것 같은 시간들이 즐거운 시간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배가 산으로 가지 않았던 것은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행렬을 보셨습니다.
슬픔에 찬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둠에 빛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며칠 전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음식을 주문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종업원은 주문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곧 갖다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조금 있으니 주인이 왔습니다.
주인은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주문 한 것 이외의 음식을 더 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른 것으로 보상을 해 주었습니다.
자칫 기분이 나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솔직한 사과를 받은 후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주인은 모든 테이블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 곧 와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음식도 맛이 있었지만 주인의 그런 세심한 배려가 있기에 손님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모든 신경이 아이에게 향해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배고 고픈지, 옷에 실례를 했는지, 자고 싶은지 알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저는 아이가 왜 우는지 모릅니다.
엄마만큼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헐벗은 이, 외로운 이, 슬픔 중에 있는 이들에게 모든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자비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교만함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죄악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먼저 생각한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입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등감은 우리를 영성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누가 사람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앵’하고 태어나, ‘휙’하고 살다가, ‘억’하고 죽더라.”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인생이 긴 것 같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얼마 전에 서울 신학교 동창 신부가 강화에 찾아왔습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신학교 다닐 때의 사건 사고를 이야기했고, 또 재미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실컷 웃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에 하늘 같았던 교수 신부님들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지금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기다릴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 명예? 권력?
그 모든 것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일한 것이 기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억을 많이 간직하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의연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최후의 순간에 어떤 기억을 떠올릴 것 같습니까?
고을 성문에서 두 행렬이 마주쳤습니다.
하나는 마을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일행이었고, 또 하나는 마을에서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죽은 이는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과부는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바라보며 유일한 희망을 걸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제 그 아들마저 잃은 이 여인의 처지는 어떠했을까요?
당시는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던 것입니다.
외아들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죽음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죽음 앞에서 힘든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서 있는 외아들의 어머니를 가엾이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울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원의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께 대한 사랑의 기억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기억만을 만들면, 결국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삶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주님께 대한 기억이 구원의 큰 선물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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