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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55·사진)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삼성 사장단 회의에서 강의한 '노자에게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 내용을 지난주에 이어 소개한다. 최진석 교수는 베이징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저서로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인간이 그리는 무늬'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등이 있다.
길거리에 귀걸이를 하고 옅은 화장까지 한 채 마치 여자처럼 꾸미고 지나가는 젊은 남자를 봤다고 하자. 매우 낯선 풍경이다. 여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대개는 '좋다' 아니면 '나쁘다'고 판단할 것이다. 만약 이 정도에 그쳤다면, 미안하지만 리더의 자격을 아직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리더는 '조짐'을 읽는 사람
리더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가치관이나 신념, 자기 취향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현상이 반영하는 맥락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이 생경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풍경을 '조짐' 혹은 '신호'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좋다' '나쁘다'는 자신에게 이미 있는 이념이나 신념을 근거로 할 뿐이다. 신념에 맞으면 '좋다' 하고, 맞지 않으면 '나쁘다' 한다. 정치적 판단의 전형이다. 이런 판단이 많으면 이념과 신념들 사이 충돌만 있지 화해는 없다. 제3의 창조는 불가능하다.
조짐을 읽으려면 질문해야 한다. 전에는 없던 일이 지금 일어났다면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해야 한다. 이 궁금증이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이다.
조짐을 읽는 더듬이는 '질문'
리더는 질문이라는 덕목에 유념해야 한다. 대답이라는 건 이미 있는 지식이나 이론을 흡수한 다음,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뱉어내는 일이다. 이때는 누가 많이 혹은 원형 그대로 뱉어낼 수 있는가가 승부를 가른다. 대답을 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오직 지식이나 이론이 지나다니는 통로나 중간역일 뿐이다. 반면 질문은 궁금증이나 호기심 즉 자신의 욕망이 튀어나오는 행위다. 질문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신념이나 이념의 맹목적인 지배를 받거나 지식이나 이론의 전달자 혹은 수용자로 남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하는 궁금증의 주인, 욕망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기서 인문적 통찰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업가는 경계에서 결단하는 존재
기업가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다. 자신의 의사 결정이 승패를 바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아니 생사를 결정하기도 한다. 생사의 경계에 있는 유일한 직종이다. 공직자, 정치인, 교수에겐 이 정도 긴장감은 없다. 경계에 서 있다는 건 어느 한 편에도 의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모든 이념과 신념은 모두 한 편에 서는 것들이다. 기업가가 경계에 있다는 말은 바로 어느 한 편에도 서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념이나 신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특정한 기준이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사람은 경계에 서서 고도의 불안을 감당하는데, 이 불안이 그 사람을 예민하게 유지해 준다. 이 예민함이 바로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더듬이'가 된다. 지식, 감각, 경험, 욕망, 기억이 한 덩어리로 폭발해 나오는 통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다. 이 더듬이는 매우 성숙한 상태의 자유이자 자발성이다.
우리가 차근차근 축적하는 모든 지적 작업은 바로 이 더듬이가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는 정확성을 기대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말하는 더듬이는 이미 정해진 것들로부터 제한을 받거나 지배를 받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때만 빛을 발할 수 있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리더는 기존의 지식이나 이론의 수행자가 아니라, 욕망의 자발적 발휘자로 등장한다. 바로 대답이 아니라 질문하게 되면서 조짐을 읽게 되는 것이다.
노자 리더십의 핵심은 결국 조짐을 읽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있다면 정해진 것을 강요하지 않고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유위(有爲)가 아니라 무위(無爲)로서 가능해진다.
최고의 정치 리더십은 무위
무위는 정치 리더십에도 적용된다. 노자는 "가장 훌륭한 통치는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만 안다. 그다음 단계는 통치자를 친밀하게 느끼며 찬미한다. 더 낮은 단계에서는 통치자를 두려워한다. 가장 낮은 단계는 백성들이 통치자를 비웃는 상황이다(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라고 말했다.
이상적인 체제에서 백성이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만 겨우 아는 건 그가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팔짱 끼고 가만히 있다는 게 아니라, 백성이 과중하게 느낄 통치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통치자가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무장해 이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하되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하려 하지 않는다(爲而弗志)"는 것이다. 통치의 주도권이 통치자가 아니라 백성에게 있을 때 가능한 풍경이고, 이 풍경은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을 때라야 비로소 그려질 수 있다.
구성원들이 지배 권력을 두려워하고 비웃는다는 말은 구성원 자신과 지배 권력 사이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그 구성원들은 조직의 참여자가 아니라 비평가로 남게 되면서 조직은 자체 붕괴를 시작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개인, 조직, 사회, 국가도 외부의 것들이 무너뜨릴 수는 없다. 항상 자체 붕괴가 먼저 시작되면서 외부의 침략자들을 초청하게 되는데, 자체 붕괴의 신호탄은 구성원들이 비평가 행세를 하게 될 때다.
영화가 재미있고 없고를 좌우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주목할 대목은 감독이 관객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핵심이란 점이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의 수준을 믿지 않으면 의도대로 영화가 읽히지 못할 걸 걱정하게 되고, 그러면 불안한 마음에 관객이 읽어야 할 내용까지 모두 영화에 담게 된다. 이때 관객이 그 영화 속으로 들어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여백이 사라진다. 이 여백에서 감독과 관객은 충돌하고, 그 충돌이 감동을 산출하게 되는데, 여백이 사라졌다면 감동의 가능성은 당연히 말살된다.
강한 이념과 기준이 불신의 씨앗
통치자가 백성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통치자가 강한 이념이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기준에 맞출 수 있는 백성은 매우 적다. 기준은 말뚝처럼 박혀 있고, 세계는 움직인다. 백성은 움직이는 세계의 표상이다. 고정된 상태에서 움직이는 표적을 보면서, 표적이 움직인다고 불평하는 바보로 전락하는 일은 순식간이다.
가정에서 부모·자식 간 갈등도 대개 부모의 선의(善意)에서 비롯된다. 자식을 잘되게 하기 위해 부모가 가진 선의가 기준이 되는 순간, 부모는 자식이 그 기준에 부합하면 예뻐하고 그렇지 못하면 미워하게 된다. 선의로 가지는 기대와 희망이 비록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확립되는 순간 자식에게는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말을 아끼라
그래서 노자는 "말을 아끼라(悠兮, 其貴言)"고 한다. 바로 '잔소리'를 줄이는 것이다. 잔소리는 통치자가 백성에게 지켜야 할 것으로 제시하는 이념이나 기준이다. 이것을 줄이는 일은 백성의 자발성이 발휘돼서 이루는 자율적 성취가 바로 세계 변화를 정상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해지는 일이다.
자식이 출세하고 부모에게 공을 돌리는 일은 아름답다. 하지만 거기에 자식 스스로 느끼는 자부심은 자리하기 어렵다. 백성이 공을 이루고 그것을 통치자에게 돌리는 일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런 구조 속에서는 백성 스스로 자발성과 자율성에 대한 동기가 자라나지 못한다. 성취와 공을 자식과 백성에게 돌려줘라. 리더는 공을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다. 공이 이뤄지도록 이끌어주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리더십이다.
위클리비즈와 조선비즈 북클럽이 함께하는 지식 콘서트가 오는 27일 저녁 7시 광화문 조선비즈 연결지성센터에서 ‘충무공 이순신에 관한 오해와 진실’(노승석 순천향대 교수·난중일기 완역자)이란 제목으로 열린다. (02)2038-3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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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최진석 교수님의 저서 '거피취차'를 오늘에야 일독했다. 모든 존재가 서로 이어져 있으며 상호 의존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면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끝에서 읽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개별자들이 뒹구는 구체적 세계의 힘을 향하려는 의욕을 대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