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類가 감사해야 할 大人物의 착한 심성은 가족, 친구, 고향,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趙甲濟
'미하일 고르바초프 회고록'(Doubleday, 1996)을 읽었다. 770 페이지나 되는 책인데, 전엔 필요한 부분만 읽다가 이번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기 전까지를 읽었다.
나는 늘 고르바초프를 '人類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착한 심성과 善意 덕분에 東歐 및 소련 공산 帝國이 평화적으로 해체되었다. 만약 1985년에 그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서기장으로 뽑혔더라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세계가 적어도 지금보다 평화롭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아직도 베를린 장벽이 건재하고 東西 냉전이 계속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너졌더라도 피를 훨씬 많이 흘렸을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동구 공산권 국가들이 차례로 민주화되고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뿐 아니라 소련 연방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까지도 관리하였다. 어려운 2중의 해체기, 더구나 엄청난 核무기를 가진 소련의 해체기에 流血사태가 없었다는 점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가장 큰 공로자는 고르바초프이고 특히 그의 인간성이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는 소련 공산체제를 개혁하려고 하였지 공산주의를 해체하려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련 체제는 개혁하기에 너무 늦은 중태임이 드러났다. 개혁을 주도할 집단이 공산주의 체제 안에선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진정한 개혁가들은 공산주의를 개선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망선고를 원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하였으나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았다. 大勢 순응의 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동구 공산국가의 민주화를 소련의 군사력으로 저지하여 왔던 과거 방식을 폐기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사상에 대한 武力탄압을 싫어하였다. 고르바초프의 할아버지는 스탈린의 숙청시절에 反혁명 분자로 몰려 감옥에 가서 고문을 받고 죽다가 살아 나온 이였다. 작은 할아버지는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의지와 착한 인간성이 어디서 생긴 것일까 하고 그의 회고록을 읽어갔다. 몇 가지 해답이 있었다.
모든 偉人들이 다 그러하지만 그의 단란한 가족이 그를 키운 보금자리였다. 세바스토플에서 태어난 그는 농민출신이었고 소년시절부터 農事에 참여하였다. 그의 회고록엔 부모와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찬사가 가득하다. 혁명과 전쟁과 숙청과 대기근 속에서도 가족의 유대는 지속되었고, 그 안에서 고르바초프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人格이 형성된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아버지는 소련-독일 전쟁에 징집되어 5년간 전선에서 싸우다가 부상당하였다. 아버지가 戰死하였다는 통지를 받아 온 가족이 3일간 흐느끼는데 '살았다'는 통보가 와서 기뻐 날뛴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르바초프 자신은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면서 5년간 보낸 세월이 자신의 미래를 만들었다고 썼다. 知的 開眼과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직시할 수 있는 의식화가 이뤄진 시기이자 부인 라이사를 만난 곳이었다.
지금은 他界한 라이사에 대한 그의 묘사는 순정 소설을 방불하게 한다. 악마의 이데올로기였던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협력하였던(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愛妻家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르바초프의 人格형성에 보다 근본적 영향을 준 것은 세바스토플이란 고향에 대한 사랑과 특히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는 틈만 나면 자연 속으로 들어가 生氣를 느끼고 일체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가족이 여러 번 '어머니 자연'의 덕분으로 대기근 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경험을 감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라이사(부인)와 나는 자연을 사랑하는 열정을 공유하였다. 우리는 함께 걷고 또 걸었다. 날씨를 상관하지 않고 자연속으로 걸었다. 暴雪속에서도 시골 길을 걸었다. 길을 잃어 목숨을 잃을 뻔도 하였다. 세바스토플의 草原, 특히 6월말의 草原을 좋아하였다. 초원, 곡식들, 풀냄새, 노래하는 새,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것의 쾌감은 교회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과 같을 것이다. 그런 감정을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자연속에서 존재하고 자연이 나 속에서 존재한다는 감정 말이다. 자연에 대한 나의 열정은 내가 어릴 때 과수원에서 자란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자연을 고르바초프처럼 사랑한 사람이 박정희였다. 한국의 綠化성공은 그의 자연사랑의 정책화였다. 자연을 사랑하는 이는 모든 생명체, 특히 인간을 사랑한다. 그런 朴正熙, 고르비였으므로 그 격동기에서도 최소한의 人命피해를 내고 위대한 개혁과 전환을 이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관료제도 속에서 생존에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서기장까지 오른 이다. 생존법을 터득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늘 '인간이 이런 식으로 살 순 없다'는 문제의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가든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改善하려고 하였다.
그의 이런 자세를 높게 평가한 사람들이 그의 출세를 도왔다. 특히 브레즈네프 시절의 2인자였던 KGB 의장 겸 정치국원 안드로포프가 고르비의 후원자였다. 아무리 惡의 집단이라도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에겐 동지가 생기는 모양이다.
고르바초프의 정신적 지도자는 흐루시초프였다. 흐루시초프가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연설을 하였을 때 고르비는 黑海 연안 세바스토플市 콤소몰(청년공산당 조직)의 젊은 간부였다. 그는 흐루시초프의 연설문을 읽고 흥분했다. 개혁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흐루시초프의 조치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나는 내 생각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黨의 조직간부들은 흐루시초프의 연설에 대해서 복잡한 생각을 갖고 있었고,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한 지구당 책임자는 나에게 「인민들은 개인숭배를 규탄한 연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나는 당에서 말하는 「인민들」은 보통 당 조직간부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직접 부딪쳐 보기로 했다.
나는 공산당원들 및 청년당원들과 매일 만나 대화를 나눠 보았다. 젊고 교육을 잘 받은 그룹은 흐루시초프 연설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다른 사람들은 흐루시초프가 인용한 사실들을 믿지 않으려 했다. 제3의 그룹은 사실들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왜 하필 이때 그런 사실들을 공개하여 黨을 곤란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 스탈린이 자신들을 탄압한 간부들을 숙청했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스탈린에 의한 숙청이 자신들을 쥐어짠 악덕 간부들에 대한 응징이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흐루시초프의 보고연설이 너무 개인적이고 감정적이었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정치·사회·경제적인 현상을 지도자의 개인 성격에만 너무 결부시킨 점도 있었다.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르비는 흐루시초프의 개혁이 守舊세력에 밀려 실패하는 것을 보고, 가장 큰 이유는 '인민들을 깨우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개혁은 실패한다'라고 생각하였다.
고르바초프 회고록엔 출세한 다음에도 늘 과거의 친구들을 찾아가 만나는 모습이 나온다. 권력을 쥐고도 가족, 친구, 고향, 자연을 잊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이었기에 피비리린내를 뿜으면서 탄생한 공산주의 체제를 평화롭게 해체해 간 것이리라.
나는 1996~7년에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에서 '역사의 교훈'이란 제목의 강좌를 들었다. 세 교수 중 한 사람이 부시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회의에서 독일통일 담당으로 일하였던 필립 제리코 교수였다. 그는 나중에 미국 국무장관이 되는 라이스와 함께 1996년에 '독일이 통일되니 유럽이 바뀌었다'는 名著를 낸 이다. 그에게 내가 질문한 적이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독일통일 협상과정에서 많은 카드를 쥐고 있으면서 이를 쓰지 않았습니다. 콜 서독 수상을 만났을 때 통일과 관련된 모든 사안에 대하여 다 동의해준 뒤 비로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바보짓을 했고 이 때문에 1년 뒤 쿠데타를 초래한 셈인데, 왜 이랬을까요?'
젤리코 교수의 대답은 의외였다.
'고르바초프의 좋은 성격 때문입니다. 그는 독일 통일을 미끼로 하여 돈을 뜯어낸다는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북한정권의 반대를 묵살하고 서울 올림픽에 소련이 참여하도록 결정하였고, 韓蘇 수교도 일찍 결단하였다. 한국인이 감사해야 할 인물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고르바초프 같은 인물이 나올까? 장성택이 그런 인물일까? 김정일의 死後에도 고르바초프나 등소평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북한政權은 더 오래 지속되거나 루마니아 모델의 피바람이 나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
목소리2013-06-09 오전 4:07 |
지구상에서 공산 국가라 하지만 북괴 정권과 같은 <악의 축>인 정권은 북괴가 유일하다. 북괴 정권은 공산주의를 넘어서 독재자 개인의 종교집단이라 하지 않는가? 정치가가 통치를 하되 종교화하여 인민들을 세뇌하여 저렇듯이 만든정권은 북괴 가 유일하다.
전무후무한 북괴식 정권이라면 지구상에서 영원히 퇴출해야만 한다. 정치의 목표는 국민을 행복하게 살도록 인도하는 것일진대 북괴 정권은 오직 독재자 한 사람을 위한 도구로 노예화로 만드는 북괴식 정권은 그야말로 <악의 축>인데 이를 어찌 용납할수가 있는가? 전지구상 모든 나라들이 북괴 공산당 정권이 망가지기를 학수고대 하는바 기상천에한 정권이다.
인간의 힘으로 이같은 정권을 만들수 있다함이 기상천예한 일이다. 하루속히 도말되어야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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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592013-06-08 오후 11:58 |
결국 집안의 來歷이 그 인간의 됨됨이를 결정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남자는 그 아버지를 보면 알고, 여자는 그 어머니를 보면 안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요.
인간의 생명을 새털처럼 가볍게 여기는 북의 김일성왕조를 보면 동아일보의 황호택논설위원이 분석한대로 북한지역의 冥堂으로 소문난 평양 만수대 부근에서 세도가들 묘를 지킨 '고지기'출신의 賤民인 게 확실해 보입니다. 하는 짓을 보면 그 놈의 집안내력이 환히 보이는 법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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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건2013-06-08 오후 10:19 |
정말 입니다. 인간적인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 내가 정치보위부 감옥에 있을 때에도 악착같지만 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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