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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대천역에서 내렸다 내가 고등학교 삼학년때이다
저멀리 앞쪽에서 아가씨 하나가 무거운 가방을 끙끙거리며 무겁게 들고간다
도와주겠다는 생각에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땀을 흘리며 달려가 덜썩 가방을 잡았다
마주보는 순간 둘이는 잠시 얼어 붙은양 말을 건네지 못한채 한참을 바라 보았다
윤정자!
바로 초등학교때 한반에서 6년간을 같이 공부한 여자 아이였다
쪼그마하던 여자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몰라볼 정도로 자라 숙녀가 되여 내앞에 있다니 실로 놀랍다
당시만해도 남녀칠세 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하여 6년이라는 오랜세월을 서로가 말한마디 걸어보지 못하고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굴을 외면하고 지나친채 졸업하고 헤어지면서도 아무것도 모른채 지났다
그후 나날이 바쁘게 살아야 했던 나는 정자라는 이름조차도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다
- 아니 이게 누구야 정자가 아냐 ! 코흘리개가 이제는 멋쟁이 숙녀가 되였네 -
억지로 긴장을 풀면서 간신히 말한마디 건네고는 가방을 뺏다시피 받아들고 프랫트홈을 빠저 나왔다
- 네도 멋쟁이 서울학생이로구나 가방은 이리줘 내가 가지고 갈게 -
정자는 미안한지 나의 책가방을 들고 뒤따라 온다
산듯한 베이지색 원피스위에 분홍자킷을입고 목에는 스카이칼라 스카프를 하고있다
8년은 아주 긴세월이라면 긴 세월이기도 하다 이제는 어느새 성년이 되였다
대천에서 화성까지 하루 한두번 다니는 뻐스는 마침 장날이라서인지 짐차라기보다는 차라리 콩나물 시루처럼 서로간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할만큼이나 복잡했다
좁은 자갈길 위를 달리는 버스는 덜커덩거리며 온몸을 흔들고 있다
그럴때마다정자와 나는 서로 이마와 이마 코와 코를 바싹 마주한채 땀을 뻘뻘 흘렸고 나는 보호자라도 되는양 땀을 흘리며 정자가 편하도록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려고 비지땀을 흘렸다
졸업후 처음으로 마주한 정자는 그옛날 솜털이 뽀송뽀송한 얼굴이 아니고 오이향이 풍기는 화장을 하고 있었다
동그란 얼굴 두뺨에 볼우물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동그란 눈은 놀란 토끼처럼 나를 빤히 처다보고 있다
정자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볼뿐 그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정자는 나의 신상명세서를 조사한것처럼 빤히 알고 있었든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 큰아버지께서 시골 수령으로 계시고 게다가 나는 학교에서도 공부를 제법 잘하여 해마다 우등상을 받는데다 출석부를때도 60여명중에 제일먼저인 1번이라는 관계로 해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리를 뒤덮는다는 속담이 있드시 큰아버지의 이름하나로도 누구 부럽지 않았다
어쩌다 방학이나 명절때 시골에 내려가면 좁은 장터에는 서울학생은 여러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족했다
얼굴도 예쁘지 공부도 잘하지 얌전한데다가 서울에서 학교다니는 면장 조카이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남들은 그렇게도 부러워 하건만 다른애들은 떳떳하게 외지에서 학교도 잘다니는데 정작 나는 겨우 서울에서 가난한 고학생이라는것에 여전히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구경왔어 ? -
뒤에서 누군가가 나의 팔을 잡기에 뒤돌아보니 뜻밖에도 생각지 못하던 정자가 옆에 서있다
- 응 너도 구경왔구나 ?- 학교운동회하는 날이였다
천여명이나 되는 시골 학교의 운동회 날이면 모처럼 나온 구경꾼들로 입추의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였다
모두가 소풍이라도 나온듯 점심 보따리를 잔뜩 싸들고 나온 학부형과 그틈을 비집고 한푼이라도 챙기려고 여기저기 펼처놓은 장사군 사이로 너른 운동장안에는 학생들이 홍군과 청군으로 나뉘여 경기를 치룬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시골 작은 동네에는 잔치날을 방불할 정도였다
어느새 우린 익숙한 사이처럼 누구가 먼저랄것없이 많은 사람들 사이로끼고들어가 서로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마주한 손에서 이상하게도 짜릿한 전류가 분내음과 함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 야 ! 느그덜 여기서 남몰래 숨어서 뭘하는거야 둘이서 연애라도 하는거야 ? -
뒤돌아보니 철주 병익 중세 천기 등 몇명이 지나다 우리를 보며 다가오면서 내어깨를 툭친다
- 자식들 하고는 ! 연애는 무슨 연애 ! 우린 모두 그냥 친구잖아 ! 왜 느그들 눈에는 우리가 연애라도 하는것처럼 보이냐 ? -
- 야 그럼 왜 둘이 손잡고 있어 녀석아 ! 느그덜 잘해봐라 어쩌면 동창생이니 잘되였다 -
오랫만에 왁자지껄 떠들자 어느새 정자가 보이지 않는다
- 미안하다 성소야 괜히 남의 청춘사업을 방해했네 -
녀석들이 사라지자 두리번거리며 정자를 찾으려고 운동장을 두어바퀴 돌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둘이서 손을 잡고있던것을 들키자 챙피하여 달아나 집으로 간것 같다
가을날씨지만 여름날씨 처럼 덥다
당시만해도 교복은 하복과 동복만이 있어 4월1일부터 하복을입고 10월1일부터 동복을 입은 관계로 등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한참을 두리번 거리며 찾아 헤맷지만 끝내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왠지 허전한 마음에 구경이 눈에 들어올리가 없어 슬며시 운동장을 빠저나와 학교앞 커다란 다리를 건넜다
어쩌다 여름에 큰비라도 내리면 다리 밑까지 황토물이 넘실거리든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냇물에서 송사리도 잡고 모래를 헤치고 모시 조개를 잡아 까망 고무신에 담았다
어쩌다 재수있는날은 커다란 오리알도줍고 가재도 잡았다
머리를 멋대로 숭숭 깎은 머슴애들의 기억이 떠오르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옆에 하늘을 가릴듯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고 그아래는 다 낡은 밀집방석을 깔고 동네사람들의 시원한 쉼터이다
아 ! 어쩌면 정자를 다시 만나기 힘들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왠지 허전한 느낌이다
물론 정자가 내마음을 휘젓을 정도는 아니였지만 모처럼 친해지는가 싶었는데 조금은 아쉽다
아~니 정자가 !
느티나무 그늘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고있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시작하며 어찌할바 모르고 부지런히 앞으로 다가갔다
- 정자야 너 여기 있었던거야 ? 그런줄 모르고 운동장을 몇바퀴 돌다가 네가 보이지 않아 가려는 참이였는데 잘되였다 - 정자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덥석 손을 잡았다
- 누가보면 어쩌려고 -
전혀싫지 않은듯 잡은손을 놓지않고있다
-볼테면 보라지 우리가 무슨 흉이라도있나 -
- 그래 ? 그건그래 친구일 뿐인데 그런데 나를 그렇게 찾았다구 ? 고마워 여기앉아 여긴 사람이 없어 조용하네 -
정자는 목에 걸었던 스카프를 풀러 옆자리에 깔아준다
- 우리 일어나서 걸어가면서 이야기하자 - 나는 정자의 손을잡고 일으키였다
- 어디로 가지 ?-
- 발걸음 내키는대로 그냥 걸어가지 바람도 시원하군 -
시냇물 따라 논틀로 밭틀로 언덕으로 한참을 가다보니 눈아래 조그마한 호수가 보인다
- 여기가 어디야 -
- 응 너는 이쪽을 와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구나 그러나 걱정마 늦기전에 학교앞까지 다시 데려다 줄테니까 -
정자는 학교 졸업후 서울 장위동에 사는 이종언니가 미장원을 하고있어 일을 도와주고 배우면서 면허증을 따서 미용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물을 먹은 이유랄가 제법세련되고 활달한것같다
- 너는 재주가 좋구나 -
- 그래도 너는 학교에 다니고 있잖아 언제올라갈거야 -
- 응 빨리가야해 내일 모레 토요일에 올라가려고해 아침 첫차로 -
더이상 할말을 찾지못하고 손만 꼭쥔채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수 저건너엔 고산이 높다랗게 자리하고 호수를 감싼 나즈막한 산이 양쪽에있어 아늑한 느낌이다
여기서 조그만 올라가면 내가 다니던 서당이 나온다
집안 종조할아버지벌 되시는 분에게 2년간이나 한문을 배웠다
천자문도 계몽편도 명심보감도 소학도 그리고 맹자를 배울무렵 가까운곳으로 이사하면서 서당을 그만두었다
- 너 한문 많이 알겠구나 -
- 응 아마도 ! 우리또래중에서는 제일 많이 아는 편이겠지-
-그럼 언제 서울에 올라간거야 -
- 나에겐 그동안 참으로 사연이 많았지 어려움도 많았고 -
서당을 다니다 이사를 오면서 할일없어 나무나 하고 세월을 보내였다
서울에가면 눈없으면 코도 베어간다는 말과 깡패 도둑놈이 우굴우굴 하다는 말이 무서워 서울은 엄두도 못내였다
특히나 어머니는 지나친 자식 사랑에 자식들이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날가 싶어 치마폭에 안다시피 하셨다
우연히 시골에서 뒤늦게 중학교과정을 겨우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누님이 계셔서 올라갔지만 공무원 말단으로 계신 매형댁에 머물기에는 너무나 불편하였다
좁아터진 삭월세방에 홀어머니를 뫼시고 사촌여식 생질까지 와서 북새통이였다
아기자기 깨소금이 쏟아저야할 신혼방은 객식구들로해서 두다리를 쭉펴고 잘수가 없었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였고 이런 구속이 따로 없었다
우연이랄가 아니면 나에게 로또라도 맞은걸가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정열이란 친구를 만나 녀석의 주선으로해서 녀석이 다니는 야간 고등학교에 들어간것이다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하여 잠자리를 구할수 있는 돈도 없었고 등록금 조달하는데 어려움도 많았다
다행히 아르바이트도 할수있는 기회도 생겼다
그러나 여전히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면서 살다보니 언제나 열등의식에 쌓여 있었다
타고난 소심한 성격에다 자신감이 없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도 이따금 학교 교지를 통하여 나의 작품이 발표되면서 교장선생님은 물론 선생님이나 주야간 학생들까지도 내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프린트나 차트에 다소의 재주가 있어 선생님으로부터 남달리 좋은 인상을받었다
- 여학생들과 연애를 해봤어 ? -
- 글쎄 나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어 여자앞에만 가면 말문이 막히고 수줍어서 고개만 뺏지 -
나의 작품을 본 선배로부터 어거지로 끌려가다시피해서 동아리에 가입을 하기도 했다
워낙이 수줍음을 많이 타는데다가 열등의식에서 빠저나오지 못하였고 게다가 호주머니는 항상 먼지만 넣고 다녔으니 동아리 회원과 같이 어울려 도나츠 한개 살여유가 없다보니 여학생을 만나도 내가 먼저 피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나를 쫌생원이라고 하였을지 모른다 연애도 맨입으로하는것이 아니였다
이따금은 아이스크림도 사고 도너츠도 사며 영화관에 다닐수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럴 여유가 전혀없었다
토요일 대천역에서 기차표를 사려는데 정자가 불쑥 나타나 내앞에 서드니 표두장을 사서 한장을 내민다
- 내게도 표살돈이 있는데 왜이래 ?-
- 고학생이라며 무슨 돈이 있겠니 -
아무말없이 덜렁덜렁 정자의 뒤를 따라기차에 올랐다
비교적 한산하여 군데군데 늙은이 이가 빠진듯 빈자리가 많이 보인다
오늘도 정자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왔으나 속이 텅비였는지 가볍다며 혼자 들고 올라온다
가을햇볕이 창가에 환히비치는 창문쪽에 앉은 정자의 얼굴이 햇빛에 반사되여 산듯한 느낌을 준다
- 오늘 따라 네가 너무 예쁘게 보인다 -
- 너 인제는 농담도 할줄 아는구나 많이 세련되였는데 - 싫지 않은듯 정자도 어개에 몸을 기댄다
- 야 느그덜 언제부터 이렇게 되였어 ? -
어디서 나타났는지 명남이가 바싹 다가오며 손을 내민다
- 뭘 언제부터야 지금부터 시작하려는거지 왜 방해부려 -
정자도 지지않으려는듯 한마디 쏘아버린다 명남이 또한 초등학교 한반이다
정자보다는 명남이는 성격이 쾌활하고 내가 다니는 길가에 살았기 때문에 더잘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얼굴을 외면하면서 지내온것은 마찬가지다
- 그래 느그들 둘이서 싫건 이야기해라 - 나는 명남이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뒷자리로 옮기였다
둘이서 무슨 할말이 많은지 계속 소근거리는 소리가 내가있는 뒷자리까지 들릴듯 말듯 넘어온다
- 야 이거먹어 - 명남이가 내자리로 오드니 봉지에서 이것저것 꺼내 내민다
내가 그리도 좋아하던 호빵도있고 감도있고 삶은계란도있다
- 왜 느덜먹지 -
-신경쓰지말고 먹어 우리도 먹고있으니까- 따뜻한 창가에서 배불리 먹고 한참을 졸았다
명남이가 어느새 곁에와서 내어깨에 기대어 창밖으로 흐르는 경치를 바라보며 멍하니있다
- 정자말야 걔 즈그이종언니 미장원에서 청소하고 심부름 하면서 있는가 보더라 -
명남이가 슬며시 팔장을 끼면서 내귀에대고 들릴듯 말듯 소근댄다
-서울 살이가 어디 쉬운게 있겠어 살다보면 좋은일도 있겠지 않그래 ?-
왠지 명남이의 말이 어색한 느낌이든다
영등포에서 내렸다 정자는 서울역에서 내릴것이고 명남이가 따라 내린다
-어디 조용한데서 저녁이나 먹고 영화구경이나 할가 ? - 약간 흥분된 얼굴로 내손을 잡는다
- 무얼 나 그냥 갈거야 -
호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못하고 또 괜히 명남이와 얽키고 싶지도 않다
저녁먹고 또 영화구경하고 어쩌자는거야 ! 아무말없이 조용히 손만 흔들던 정자 얼굴이 떠오른다
- 우리 내년 운동회때 또 만나자구 !
나는 정자에게 약속이라도 하는듯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든 정자의 미소가 슬며시 떠오른다
서운해하는 명남이의 손을 힘있게 꼬옥 쥐어주었다 풀며 귀돌아 보지않고 내갈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늘을 보니 햇님이 방그시 웃고 있다
다음해 운동회날을 잊고 지나첬다
아니 잊기보다는 한가하게 약속놀음이나 할정도로 여유가 있지못하고 나의 삶이 너무나 고단하고 짐이 무거웠다
정자는 혹시라도 하며 운동회날 나를 만나러 가진 않했을가 ? 아님 나처럼 그냥 지나첬을가 ?
왜그리 내가 두고두고 미안해야할가
그후로 정자나 그리고 명남이도 나에게는 잊혀진 이름이 되였다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누구로 부터 소식도 듣지 못했다
아 ! 어느새 백발의 세월에서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