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혜진의 「1990년」 평설 / 김분홍
1990년
진혜진
사랑 같은 건 장식장 속 와인처럼 오래 두지 말 것
방치된 줄 모르고 방치되고 있는 사람의 표정
더는 연명할 수 없는 관계가, 병 속에 고여 있습니다
우리는 액체성
당신은 발효를 끝냈나요
당신의 취향대로 드라이한 감정의 도수는 높아졌나요
실온에서 30년 동안 당신은 자줏빛 몸으로 젖어들지 못합니다
와인과 위스키와 코냑의 차이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의 포도밭으로 시작된 일입니다
우리를 구분하는 것은 색깔입니다 그러니 구분된 우리는 입술입니다
코르크를 따는 데 나는 여전히 서툴고 당신은 유리잔을 잘 부딪칩니다
둘러보니 포도덩굴이 없습니다
내가 알맹이였는지 버려진 껍질이었는지
아니면 흙냄새였는지
저 병 속에 든 사랑 하나
먼 데로 흘러가 다른 이름으로 찾아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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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수십 차례 퇴고를 해나가는 시 쓰기와 온몸을 오므렸다 펼쳤다를 거듭하며 오랜 시간 숙성되어야 완성되는 와인은 유사성이 있다. 진혜진 시인의 「1990년」은 와인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을 표출하고 있다. 흔히들 오래된 친구를 술에 빗대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오래된 관계가 정말 좋은 관계일까?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꼭 오래되어야 하는 걸까?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겪어 본 사람이라면 의문이 드는 대목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가장 힘들게 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으로 포장된 데이트 폭력 또는 가정 폭력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래서 화자는“사랑 같은 건 장식장 속 와인처럼 오래 두지”말라고“더는 연명할 수 없는 관계가, 병 속에 고여”있다고 병 속에 갇힌 관계의 단절을 은유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액체의 속성은 본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무 데나 담기는 온순함까지 갖추고 있다. 액체가 본성을 드러낼 때까지 우리는 속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다. 우물은 퍼 올려도 퍼 올려도 액체성이다. 밑바닥을 드러내기까진 시간이 걸린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나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당신은 괴리감이 있다. 당신은 드라이한 감정인데 비해 나의 감정은 스위트하다. 우리에게 미디엄 드라이한 감정은 없다. 당신과 나의 취향은 극과 극이다. 취향이 너무 다르므로“실온에서 30년 동안 당신은 자줏빛 몸으로 젖어들지”못하는 거다. 30년을 알고 지낸 기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관계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둘러보니 포도덩굴”은 지워지고 없다. 포도 덩굴에 주렁주렁 매달려 익어가던 얼굴들은 제각각 흩어져서 각자의 터전에서 또 다른 덩굴을 뻗고 살아간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보면“내가 알맹이였는지 버려진 껍질”이었는지 정체성에 혼란이 올 때가 있다. 특히 자라온 환경이 다른 타자와 타자가 만나서 살아가는 결혼생활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병목구간에 자리한 코르크 마개를 따는 일도 연습이 필요하듯 결혼생활도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당신에게 나는 알맹이였을까? 껍데기였을까? 처음부터 대답을 듣고 싶어서 질문한 건 아니다. 당신이 나를 껍데기로 생각하든 알맹이로 생각하든 상관없다. 나는 알맹이를 품은 껍데기이었으므로 언제나 당신보다 한수 위다. 껍데기 속에서 나오지 않은 알맹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1990년」은 ‘조지 오웰’ 의 소설 『1984』를 생각나게 만든다. 중의적인 제목은 시를 읽기 전에 다양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 호적에 오르듯 와인의 탄생은 라벨에서 시작된다. 1990년은 화자에게 어떤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난 해일 것이다. 그해 화자는 인생에서 제2의 출발을 했을 것이고 빈티지‘1990’이라는 라벨을 제 몸에 붙이고 숙성을 거듭하면서 누군가에게 부케를 날렸을 것이다.
우리의 삶도 숙성과 부패 사이에 존재한다. 성공하면 숙성이고 실패하면 부패가 되는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혀와 내 혀가 음미했던 그날의 와인 샤또 샤프 스플린(chateau chasse spleen)처럼 발아한 상상력이 잘 숙성돼야 깊이 있는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김분홍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