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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문학관 강의(6월7일)
1999년 5월 타임지 기사에 ‘모든 아시아인들은 생각(사유)을 하지 않는다.’라고 쓰고, 못 미더웠던지 이것은 사실이다.(It's true)이라고 강조했다.
설명에 아시아인들은 ‘정답’을 정해 놓고, 그 답을 찾아가려 할 뿐이고 새로운 답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정답을 미리 정해 놓고, 그 정답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정답을 정해 놓으면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정답을 넘어 설 수가 없다.
그래서 정답을 정해놓지 않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보자. 찾아가는 방법으로 몇 가지를 사용한다.
첫째 - 동물과 비교함으로(차이로)
둘째 - 인간 그 자체로(속성으로)
셋째 - 이성을 가진 존재로(철학적 사유이다
넷째 - 욕망을 가진 존재로-심층심리 차원에서
(보기 ; 2020년 통계 한국 국적 취득 외국인 197만 명
출산아 3명 중 1 명이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며칠 전 조선일보 — 어느 지역이 초등학교 교실의 70%가 한국어를 모르는 다문화 가정(우즈베키스탄) 출생 아라서, 교사가 오히려 그쪽 언어를 익혀야 수업이 가능하다고 했다.
보기 : 민족 ---> 국가로 바뀌었다.(세계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국가에 대한 맹세문(2007년에 바꾸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하여)
사회 현실과 가치관이 언제든지 바뀌고 있습니다.
*데스먼 모리스(1925 ~ )는 영국 동물학자로
1967년에 ‘털 없는 원숭이’를 출판했다.
193종의 유인원 중 192종은 털로 덮여있다.
털 없는 1종은 다른 종과 다른 점이라면, 발달된 두뇌로 영리한 결정을 보다 빨리하고, 행동으로 옮기더라. 이로서 다른 유인원보다 뛰어난 사냥 기술을 찾아내더라. 그래서 오늘의 인간으로 발전했다.
1. 파스칼 피크라는 생물학자이며, 고인류학자는 ‘인간이란 동물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동물과 인간을 비교하여 다른 점을 찾았다.(차이)
인간은 동물에 비해 늦게 걷고, 말도 늦게 하고, 학습능력도 늦게 나타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뇌의 차이였다. 인간은 동물보다 ‘뇌’가 크고, 뇌 기능이 발달되어 있더라고 했다. 이 차이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한다고 보았다.
뇌 기능의 발달이 사고하고, 운동을 정밀하게 하고, 생활을 동물과 다르게 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구분을 할 때는 차이를 가지고 한다.)
(고생 인류 - 네안델탈인 - 크로마뇽인의 순서로 뇌 용적이 커져 왔다.)
그렇다면 만약에 교통사고 등으로 뇌신경이 마비되어,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한다면 인간이 아닌가? 대답은 그래도 ‘사람이다.’이다.
2. 리차드 토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진화생물학자인 토킨스가 ‘이기적 유전자(1959 )’라는 책을 출간했다.(1989년에 개정판)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여 적자생존론을 고수했다.
“인간이란 유전자의 자기 보존 욕구를 수행하는 생존기계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DNA의 의해 급조된 기계에 불과하다.”
개체(인간) - 기관 - 조직 - 세포 - 핵->유전자DNA)로 구성된다.
DNA(DeriboNucleic Acid)-->모여서 염색체가 된다.(사람은 22쌍 +XY)
이 말은 유전자가 자기보존을 위해 운전하는 데로 사람의 몸(자동차의 몸체)은 움직일 뿐이다. 라는 뜻이다.
유전자의 진화를 보면 인간 생존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이 말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욕구와 욕망을 본능으로 이해하지만 본능과는 다르다. 본능은 생존하기 위한 욕구이다.)
(*우리는 본능과 욕구를 나쁘다고 배웠다. 그러나 본능과 육구는 내가 생존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유전자는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본능과 욕구 쪽으로)
다시 인간의 삶으로 확대하면 인간이 스스로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진화해야 한다.(환경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이 이론은 문화학자들이 반대한다.
토킨스 이론은 인간을 기계로 본 것이고(이 관점은 양의사의 관점이기도 하다.) 문화인류학자는, 인간이란 단순히 기계가 아니다. 문화적 여건에 따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환경을 바꾸고, 자기도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인간은 바뀐 환경에 어떻게 적응할까.
3.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1947)’
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태리인으로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졸업후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나치에 체포(1944) 되었다. 24세 때다.
아우수비치 수용소에 수용되어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화학 전공자라 하여 차출되어 수용소 내의 화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그는 수용된 자의 시선으로 수용소 내의 수용자를 관찰했다.
1945년에 수용소에서 풀려나서, 1947년에 수용소 생활을 증언하는 ‘이것이 인간인가’를 출판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증언문학’ 중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존 더 코만도스’ - 수용된 자로서 구성된 조직으로, 나치의 수용소 관리를 도우는 자이다.
가스실의 사체를 꺼내어 처리한다든지, 청소라라든지 등등.
프리모 레비나 이들은 당장은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지만, 조직에서 떨어지면 언제든지 끌려갈 수 있다. 나치 관리의 눈치를 살피면서 살아간다.
이들은 나치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나치보다 더 잔인한 행동을 하더라.
(생존 본능이다.)
‘억압을 당하는 것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이후의 여러 연구에서 나치로 복무한 자들이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더라. 나치 뿐 아니고, 조직에 소속되면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끼지 않더라는 많은 논문이 나와 있다. 조직의 규칙이 죄의식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증언문학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성을 따진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도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문화에 따라 다르다.)
(프리모 레비는 살아남았다는 사실로 트라우마(수치심과 죄의식)에 시달렸다. 말하자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87년에 3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의 책에서 독일인에 대한 증오나 원한도 복수심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용서한 것인가?
“내가 보기에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다. 증오는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 어떤 얼굴에
향한다.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파시즘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4.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06년 종교가 없는 유대계 집안으로, 독일에서 출생했다.
마르크 대학에서 하이데커에게 철학을 배우고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다.(17세 차이) 하데커가 나치 치하의 대학총장으로 나가자. 결별한다.
야스퍼스에게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자이다.
1933년에 나치에 체포되어 8일간 구금후 풀려나자 파리로 탈출한다.(무국적자가 된다)
국적을 박탈당한다.(37)
1941년에 파리가 히틀러에 점령당하자 나치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탈출하여 미국으로 도망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벤야민과)
스페인으로 --> 미국으로
1950년에 미국 국적 취득 —18년 간 년 간 무국적자로 살았다.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라는 말을 한다.
1975년 -- 대학교수를 생활을 하다가 이 해에 사망한다.
(두 번의 결혼이 있었다.)
*예루살렘의 이이히만
아이히만이 알젠틴에서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받을 때 8개월 간 참관한다. 이 저서에서 ‘악의 평범성’과 ‘사유의 무능성’ 그리고 ‘인간의 복수성’을 말한다.
아이히만은 군에 들어오기 전에는 은행원으로서, 아주 평범한 가장이었고, 가족을 사랑하며, 가정에 충실한 아주 평범한 독일 남자였다.
아이히만은 자기변호에서 자기는 조직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한다.
이 사실을 알고, 악이란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의 어디에라도 스며들어 있다고 말하였다.
(악의 평범성). 이 말 때문에 아렌트는 숱한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악’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보면 나도 지금 악을 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렌트는 그래도 아이히만이 ‘유죄’라고 말한다. 이유는 바로 사유의 무능성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조직의 규칙을 수동적으로 수용하였을 뿐이었고, 능동적인 사유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유를 확장하여 나의 입장, 타인의 입장 등등에서 사유를 한 후에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하는데 (‘사유하는 인간의 삶’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동적으로, 아무런 사유도 없이(사유하지 않는 삶을 산 사유의 무능력자이다.) 행동한 것은 유죄이다. 라고 했다.
칸트는 ‘확장성 심성’이라고 했다. (칸트는 가치 판단 능력은 선험적이다. 라고 했다.)
사유는 지식이 아니다. 선과 악의 판단은 선험적인 것이므로,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 능력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양 철학의 일반적인 개념으로 보면 우리는 이성이 있으므로 판단 능력이 있다고 보며,
또 심층심리학자(정신분석학)는 ‘양심’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온다.
아렌트는 ‘사유’는 이성이 아니다. ‘확장성 심성’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는 ‘인간의 복수성’이다.
복수는 ‘분노 감정’과 관계 있다.(일리아드는 일관되게 분노가 관통한다.)
(일리어드의 주인공 아킬레스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분노이다.)
우리는 어떨 때에 ‘분노’ 하는가?
우리의 기분에는 감정(감각적으로 느끼는 것)과 정서(감정을 자기가 해석하는 것) 있다.
해석의 결과로 분노가 생겨난다.
(동양과 서양은, 감정은 같으나 해석은 다르다.)
분노를 어떻게 조절하는가?
*수용소에서 하는 일(강제 수용소와 죽음의 수용소)
아렌트는 이런 일이 오늘의 독재(전재) 국가에서도 일어난다고 하였다.(히틀러와 스탈린,
김정은도(이동민 생각), )
인간의 자발성을 제거한다.-시키는 데로 한다.(국가 또는 조직의 거시적 가치에)
도덕적 인격을 살해한다.--양심적 결정도 하지 못한다.
개성을 제거한다.--복수성 제거(복수심은 차이에서 분노가 생기면서)
===> (1, 2, 3을 제거하여)인간의 내면이 공허해지면 고통도 못 느낀다.
생각의 자취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을 살아 있는 시체로 만든다
한나 아렌트도 개인보다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자행한다고 했다.
5.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1985년에 초판 2002년에 재판(러시아 출판사에서 출판 거절로 늦어졌다.)
우크라이나 여류 문학가로 이 작품으로 2015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녀는 소설가가 아니고, 잡지사 기자이다. 소설가로 부르기보다는 다큐멘터리 작가이다.
따라서 본인도 ‘목소리 소설’이라고 말한다.
2차 대전이 끝난 수십 년 후인 1980년 대에 전쟁에 참여하였던 여자 200명 이상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했다. 이것은 난픽션이면서도, 소설보다 더 재미가 있다.
뿐만 아니고 우리의 영혼을 아주 깊이 움직인다는 평을 들었다.
이미 아주머니, 할머니가 된 참전 여인들은 잔인하고 비참했던 전쟁 이야기를 깔깔 웃으며
남의 얘기처럼 하더라. 러시아군으로 참전한 용감한 여전사에서, 독일 점령군 하에 독일병사들과 살았던 매국노 여인까지.
여성이 털어놓는 전쟁 회고담은 전쟁 베테랑 군인이나 남성이 털어놓는 전쟁 회고담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온 이야기이다.
남성들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이 용감했던, 정의에 불탔던 이야기이지만 여성은 말한다, 전쟁의 추하고 냉혹한 얼굴, 배고픔, 성폭력, 그들의 분노와 지금까지도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그래서 페미니즘 문학으로 분류한다. 이 책은 1985년 첫 출간되었고, 2002년 저자는 검열에 걸려 내지 못했던 부분까지 추가하여 다시 책을 출간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젊은 독일군 포로 병사 3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던 이야기를 담담히 하더라. 등등
*참고로 말씀드리면 다음해인 2016년에 가수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받으므로 세계 문학계를 발칵 뒤집히도록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만큼 바뀌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밥 딜런은 저항 가수로 베트남 전 반전운동을 하면서 노래 가사에
그런 내용을 담아냈다. 그러나 그가 노벨 문학상을 탄 것은 노래 가사가 아니고,
그의 자서전이었다고 한다.)
6. 한병철의 ‘피로사회’
한병철은 독일로 유학하여 조형예술을 전공하여 교수생활을 한다.
2010년에 독일에서 ‘피로사회’를 출판하여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번역본을 냈다. 문고판 정도의 크기에 100패이지 남짓하여 읽기가 좋다.)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은 계약사회에서 계약에 얽메여 수동적으로 살고 있으면, 계약의 조건에 얽메여 성과를 올리는데 급급하여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울증이 증가하고 있다.
계약사회란 성과를 강조함으로, 우리에게 성과가 제 1의 가치가 되어있다.
한병철은 이 책에서 허먼 멜빌이 1853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 ‘나는 안하기로 했다.’를
길게 인용하여 소개하였다.
소설의 주인공 버틀러는 변호사 사무실에 필경사로 취직했다. 그런데 변호사가 시키는 일을 거부하고 일을 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버틀러가 죽고 난 후에 변호사가 그의 삶을 이해한다는 내용이다.
(전체적인 내용이나 흐름은 소설을 읽어보시고)
결국 안한다. 하지 말자는 안 한다는 것이 아니고, 능동적으로 살자는 것이다. 우리가 계약사회에 얽메여 성과 올리기에 급급한 것은 수동적인 삶으로 보았다. 이에 대비되는 능동적인 삶을 강조한 것이다.
계약이란 타인과 나와의 관계 맺음이다. 부모와 자식, 부부, 친구 등등도 계약이다.
능동적인 삶과 사회 가치의 충돌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버틀러는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죽는다. -- 우리는 찾을 수 있을끼?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노력은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7. 빅터 프랭클(1905-1997)의 ‘죽음의 수용소(1959)’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대계 정신과 의사로서, 철학자인 동시에 심리학자이다.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제자이다.
로고테리아 심리학파를 창설할만큼 유명한 심리학자이다.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자.는 내용이다.)
*로고테라피 치료법
미래에 초점을 두고 현재의 내 삶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니, 치료효과가 있더라.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기의 삶에 의미를 찾아내자.)
1944년에 아우추비치 수용소에 수용되어, 어머니와 아내가 수용소에서 죽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고 풀려났다.
1959년에 수용소 생활을 다룬 ‘죽음의 수용소’를 발간했다.
‘자극과 반응’이라는 이론을 발표했다. 우리는 외부의 자극을 받고 반응하는 사이에 시간의 차가 있더라,
이것을 틈, 또는 공간이라고 했다. 이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활이 달라지더라가 핵심 이론이다.
(즉 어떤 의미를 주니까. 생존율이 높아지더라.)
수용소에서 유태인을 보니,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의연하게 품위를 지키며 사는 사람도 있고, 불안과 공포로 안절부절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더라.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 이 문제를 연구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이 절대로 뻬앗을 수 없는 자유가 있더라. 바로 그 사람이 자기의 삶을 결정하는 태도(또는 자세)이더라.
빅터 프랭클은 이것을 ‘삶의 틀(frame)'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에 무엇으로 채우느냐를 말한다.
그래서 이 공간을 ‘인격 공간’이라고 했다. 어떤 삶의 틀을 선택하였느냐에 따라서 품위 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이 나뉘더라.
수용소에 수감되면서
삶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가장 잘 사는가를 저자는 고민을 하였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수용소 밖에서만의 희망을 보았고, 안에서는 절망을 느꼈지만, 저자의 생각은 안과 밖을 동일시하였다. 그 결과 저자는 하루하루의 삶을 정제되고 계획된 시간으로 채웠다.
수감자의 반응은
1단계는 수감생활이 갖는 고통의 충격을 갖게 된다. 전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느끼면서
괴로움의 시간을 갖는다.
2단계는 적응의 단계이다. 일단 수용소안에서의 생활이 몸에 적응이 되면, 그리움, 혐오감, 무감각의 상태가 이어지게 된다.
종교심을 갖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 (무감각하게 된다.)
“인간의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리고 사랑은 죽음을 넘어서 더 멀리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을 책임지려는 의지가 강할 때 생존율이 높아지더라.
제3단계는 석방이후에 경험한다.
그가 자신의 집의 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그를 기다려 주지 않자,
그는 삶의 의미를 아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되새긴다.
이 글을 쓴 서울대 심리학 교수의 말에
자기네 동네의 뒷골몰을 청소하는 할아버지에 ‘골목을 쓰나라 힘드시겠습니다.’라고 하니, 저는 서울의 뒷골목을 쓰지 않고, 우주의 한 모서리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힘이 많이 들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자기가 사는 방식은 자기가 선택한다.
7. 케르테스 임레의 ’운명‘(소설-2002년 노벨 문학상)
부다페스트(헝가리)의 유대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1944년에 15세의 나이로 나치 강제수용소(아우슈비츠,부텐발트,짜이츠르)에서 1년간 수용소 생활을 한다.
소설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썼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주인공 좌지르는 15세에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생활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홀로크스트를 다룬 글이 수용소 생활의 잔혹함, 나치인의 잔인함을 다루었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독일인을 칭찬하기도 하여 독자의 분노를 자아낸다.(독자가 분노하도록 하여 역으로 수용소 생활의 잔혹함을 일깨우려 했다고 한다.)
1) 수용소 행 기차가 국경을 넘어갈 때 헝가리 국경 수배대원에 기차에 올라와서 수용소에
가면 소용이 없을테니 귀금속은 차라리 헝가리인에게 희사하라면서 거두어 가더라.
2) 수용소에서 풀려 헝가리로 돌아오자 전차를 타니 차비가 없다고 내리게 하더라.
3) 강제 수용소의 경험담을 함께 출판하자며(돈벌이가 된다고) 신문기자가 접근하더라.
--> 아우슈비츠 사건은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 헝가리에 돌아오자 존경하였던 아버지는 죽었고, 계모는 벌써
재혼했더라. 자기는 계모와 살기로 했다.(운명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운명이란, 자유가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선택하든, 저렇게 선택하든, 또 자유가 없어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던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고 운명이다. 내 자신이 바로 나의 운명인 것이다.
수용소에서 만났던 사람들, 나를 괴롭혔거나, 또는 잘 대해 주었거나. 지금 생각하니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옛 일일 뿐이더라. 오히려 그리움으로 떠오르더라.
15세 소년이 고난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운명에 순응하고, 충실하게 살면서 내일을 기다린 것이다. 그렇게 살다보니 행복이 느껴지더라.
8.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소설-2017년 노벨상 수상)
일본계 영국작가이다. 이 작품은 영국 귀족의 장원을 관리하는 자신의 일과 인생을 세상 전부로 여기고 살아온 한 남자 스티븐스의 인생과 시선을 보여준다.
줄거리는
주인공 제임스 스티븐스는 영국의 명망있는 귀족이자 외교계의 실력자인 달링턴 경의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장이다. 어느날 샐리 켄튼이라는 여인이 하녀장으로 합류한다. 사랑 감정도 느끼나. 그는 자기의 직무에 충실하면서, 사랑 감정도 버린다.
켄튼은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스티븐스에게 지친 나머지, 다른 남자와 교제하다 결혼을 선언하며 하녀장을 그만둔다.
스티븐슨도 집사장 직을 그만 두려고 할 때 캔튼이 보낸 편지를 받는다. 노년이 된 스티븐스는 휴가를 얻는다. 옛 일이 생각나서 스티븐스는 켄튼을 만나기 위해 떠난다. 스티븐스은 20년만에 재회한 켄튼에게 다시 하녀장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하지만, 캔튼은 남편을 사랑하며,가정에 머물고 싶다면서 사양한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음을 확인한 채, 마지막으로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스티븐스의 삶은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더라도 의무와 충성심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스티븐스는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의 벤치에 앉아서 자신을 생각한다. 자기는 자신의 인생에 확실한 믿음을 갖고 살아왔으며, 앞으로 살아갈 자신의 인생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
이 소설은 과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앞으로 살아 갈 나날에 대한 방향을 어떻게 정할까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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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6월7일에 정호승 문학관의 강의 내용입니다.
수필 방에 들어오셔서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고마운 분들께서, 이왕이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면 더 좋으리라 싶습니다.
많은 참석을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