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 2 – 기지아동(箕指我東) 풀향 ・ 8시간 전
성호 이익 선생 초상 출처 네이버 이미지
맹자(孟子)가, “기자(箕子)ㆍ교격(膠鬲)ㆍ미자(微子)ㆍ미중(微仲)ㆍ왕자 비간(王子比干)이다.”라고 했는데, 분명히 기(箕)ㆍ미(微)ㆍ왕(王)은 땅 이름이고, 자(子)는 작(爵)의 칭호요, 교격ㆍ미중ㆍ비간은 이름이다. 맹자는 또, “교격은 고기 잡고 소금 굽는 사람들 틈에서 등용되었다.” 했는데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함께 지적한 것을 보면 이는 해변을 가리킨 것이니, 그가 과거에 서민이었던 까닭인가 보다. 은(殷)의 제도는 왕의 아들일지라도 그를 먼 곳으로 내보내어 민간의 고통을 체험하게 한 일이 있으니, 무정(武丁)의 사적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자도 고기 잡고 소금 굽는 곳에서 등용되지 않았을 줄 어찌 알 수 있으랴? 기(箕)라는 나라는 곧 우리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분야(分野)로 따진다면 우리나라가 기(箕)와 미(尾)의 지점에 해당되고 서쪽 지역이 기의 위치가 된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단군(檀君) 왕조의 말기에 기자가 이 기성(箕星)의 지점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이 땅에서 봉작을 받은 것일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고기 잡고 소금 굽는 바다.”라는 것이 무엇을 지적하여 말했단 말인가? 또 기가 다른 지방이라면 어째서 자기가 봉작을 받은 곳을 버리고 그 칭호를 썼겠는가? 은(殷)의 역사에서 쓴 칭호는 봉작을 받은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지, 봉작을 받기도 전에 이 칭호를 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주(紂)가 멸망하기 이전에 벌써 기자의 교화 은택을 받았던 것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제1권 천지문(天地門) 中 <기지아동(箕指我東)>
부언(附言) 기지아동(箕指我東)은 ‘기(箕)는 곧 동쪽의 우리나라를 가리킨다’는 뜻이다. 중국 고대 은나라 사람 기자가 동(東)으로 와서 조선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학설이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인데, 이익은 이 기자동래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이란 글을 통해서도 기자조선이 실재했음을 대전제로 위만조선이 아닌 마한(馬韓)이 기자조선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중국 진(秦)나라 이전의 문헌에 기자(箕子)에 관하여서는 덕과 학문이 뛰어난 어진 인물로 기술되어 있을 뿐, 조선과 관련된 어떤 서술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한(漢)나라 때 복승(伏勝)의 ≪상서대전(尙書大典)≫에 주나라 무왕이 감옥에 갇혀있던 기자를 석방하자, 고국인 은나라가 망했으므로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조선으로 망명했으며,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이 최초로 등장했다. 이어 사마천(司馬遷)도 ≪사기(史記)≫에 비슷한 내용을 기술하였는데, 다만 기자가 먼저 조선에 나라를 세우고 뒤에 봉함을 받았다고 한 ≪상서대전≫과는 달리 기자가 봉함을 받은 뒤 나라를 열었다고 하였다. 이어 후한(後漢) 때의 ≪한서(漢書)≫ 지리지에서는 낙랑지역의 민속을 기자와 연결시켜 조선의 순후한 풍습은 기자가 팔조금법(八條禁法)으로써 교화시킨 결과라고 단정하였다. 3세기의 ≪위략(魏略)≫과 그것을 근간으로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기자 이후 자손이 40여 대에 걸쳐 조선을 다스리다가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기자조선이 멸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위략≫과 ≪삼국지≫의 기록은 기자에 관한 전설과 고조선의 역사 변천에 관한 전승이 섞여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의 기본적인 뼈대를 갖추게 되었고 이것이 뒷날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의 논거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전승을 토대로 지속해서 많은 윤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까지만 해도 기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고려시대에 이르면서 점차 기자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었는데 관료제도가 정비되고 유교가 정치이념으로서 주도적인 위치를 굳혀감에 따라, 동방 유교문화의 시원으로서 기자에 대한 숭앙심이 높아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고려 숙종 7년인 1102년 평양에 기자 사당이 세워지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조선에 들어서는 16세기 이후 재야 사림(士林)에 기자를 숭배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는데 기자가 시(詩) · 서(書) · 예(禮) · 악(樂) 등을 가르쳐 중국의 문물과 삼강오륜을 알게 했고, 팔조금법으로 교화해 신의와 예절을 숭상하게 했으며, 전쟁을 배격하고 덕으로 다스려 이웃 나라와 화평하게 했다는 설을 주장하며 왕도정치를 구현한 성현으로서의 기자에 대한 숭앙심을 고취시켰다. 그러면서 기자조선의 정통성이 더욱 강조되었고, 성호 이익도 이런 흐름의 연장 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호사설의 첫 글로 <기지아동(箕指我東)>을 배치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남북한의 학계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는 점을 들어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아울러 상황론적으로도 1).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시기는 황하 유역과 고조선 사이에는 황량하고 광대한 지역이 가로놓여 있었고, 그곳에는 많은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어 기자가 쉽게 왕래할 수 없었을 것, 2). 조선에는 당시 토착 정치세력이 있었을 터인데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기자가 이를 복속시킬 수 없었을 것, 3). 주나라의 영토는 그 무렵 황하 유역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조선 땅에 기자를 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라는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문헌 기록상으로도 1). 기자의 동래 기록은 한(漢)나라 이후의 문헌에서 보이기 시작하고, 그 이전의 문헌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 2). 기자의 무덤이 오늘날의 하남성(河南城)과 산동성(山東省)의 경계지역인 몽현(蒙縣) 또는 보청(薄城), 혹은 귀덕부 상구현(歸德府商邱縣) 등지에 있었다는 기록, 3). 은나라가 멸망 뒤 기자가 무왕에게 홍범(洪範)을 전수했다면, 기자는 황하 유역에 있었던 것이 되고, 따라서 기자동래설과는 모순이 된다는 점 등이 기자동래설을 부정하는 견해들이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3 - 4폭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 노란색으로 표시된 곳에 기자릉(箕子陵)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후세에 만든 가공의 것이다] [<평양성도(平壤城圖)> 10폭 병풍 中 8 - 10폭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 평양성의 외성(外城) 구역이 바둑판처럼 구획된 것을 두고 이익은 “기자가 평양(平壤)에 정전(井田)을 구획하였는데, 성인(聖人)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역량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 때의 도시계획 흔적으로 밝혀졌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곳에 기자궁(箕子宮)과 함께 기자 때의 우물이라는 기정(箕井)이 우물 정(井)자로 표시되어 있다.] 성호사설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임창순 역, 1977) 참고 및 인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성호사설 2 – 기지아동(箕指我東) 종심소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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