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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천해(先生天海)
선생은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先 : 먼저 선(儿/4)
生 : 날 생(生/0)
天 : 하늘 천(大/1)
海 : 바다 해(氵/7)
조선 말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이 있었다. 그는 산청군(山淸郡) 단성면(丹城面) 남사(南沙)에서 태어났다. 이후 삼가(三嘉), 봉화(奉化)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1896년 거창군(居昌郡) 가북면(加北面) 다전(茶田) 마을에 정착하여 일생을 마쳤다.
면우(俛宇)는 조선 말기 우리나라의 학문을 집대성하였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제자이므로, 학통적으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학통을 이었지만, 생장한 곳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거처와 가까워 남명도 크게 존모했다.
두 선생의 우수한 점을 다 흡수하여 융합적인 학문을 하였다. 그리고 천문 지리는 물론이고, 그리스 철학, 서양의 역사 지리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학술사(學術史)에 있어서 저서가 가장 많은 학자다. 지금 문집 이외의 많은 저서는 거의 다 찾을 수 없지만, 문집만 해도 177권 63책에 이른다. 주자가 평생 지은 문장이 3200여편 정도인데, 면우(俛宇)가 지은 문장은 4700편에 이른다. 면우(俛宇)는 숨어서 학문만 하는 학자가 아니었고, 늘 국가민족을 생각하는 현실적인 학자였다.
1919년 양력 3월 1일 삼일독립선언서가 낭송되고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이 들어 있는데, 불교, 기독교, 천도교 대표만 있고 유교 대표는 한 사람도 들어 있지 않다.
조선 500년 동안 국가에서 유교를 숭상하여 선비를 양성했는데, 국가를 되찾겠다는 의거에 유림 대표가 한 사람도 들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다. 유림은 국가민족 앞에 정말 할 말이 없게 되어 버렸다.
그때 면우(俛宇)의 제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의 발의로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글을 보내어 호소하기로 계획하고, 유림 대표로 면우(俛宇)를 추대하였다. 그러자 면우(俛宇)는 "망한 나라의 늙은이가 죽을 곳을 얻었다"라며 기꺼이 응낙하였다.
당시 유림 대표 137명이 서명하였는데, 목숨을 건 결단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일로 면우(俛宇)는 음력 4월 대구 감옥에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6월에 풀려나왔지만, 8월 24일 다전 마을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비의 대표답게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이다.
지난 8월 25일 다전 마을에서 독립운동가 후손, 관계 학자, 군민들이 모인 가운데 강학하던 집인 여재(如齋)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유학과 한문학이 종합되어 있는 그의 문집인 '면우집'은 아직 번역할 계획도 못 하고 있다. 워낙 방대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학의 균형적인 연구를 위해서 면우집의 번역 보급은 시급하다고 본다.
김창숙은 신도비문(神道碑文)에서 면우의 학문과 덕행을 칭송하여 "선생은 하늘같이 높고 바다처럼 깊다(先生天海)"라고 표현했다. 정말 여타 학자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뛰어난 학자요, 애국자였다.
[참고]
곽종석(郭鍾錫, 1846 ~ 1919)
정의
조선후기 한주집(寒洲集), 면우문집(俛宇文集)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개설
본관은 현풍(玄風). 아명은 곽석산(郭石山), 경술국치 후에는 곽도(郭鋾)라고도 하였다.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 경상도 단성(丹城) 출신. 아버지는 곽원조(郭源兆)이다.
생애
4살 때부터 아버지와 이홍렬(李鴻烈)에게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을 배웠다. 12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난 뒤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유가 경전은 물론,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경전까지 섭렵하였다.
그 뒤 송학(주자학)에 관심을 가지며 회와(晦窩)라는 당호를 짓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여 20대 초반에 이미 학자의 명성을 떨쳤다. 25세 때 이진상(李震相)의 문하에 들어간 뒤로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이 더욱 심화되었다.
1883년 안동부 춘양(春陽: 지금의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으로 옮기며, 퇴계학문의 문적과 형세를 분석할 기회를 가졌다. 이 때 이항로(李恒老)의 주리설을 변론하면서 기호학계의 논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1895년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때마침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안동과 제천 지역의 의병 진영을 살피기도 하였다. 1896년에는 거창의 다전(茶田)으로 옮겨 살았다.
옮긴 직후에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공관에, 열국의 각축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발송하였다. 당시의 유학자가 위정척사적(衛正斥邪的)이어서 의병을 일으켰던 것과 비교할 때, 만국공법(국제법)에 호소하는 특수성을 보이고 있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뒤, 전국에서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이 때 1899년 중추원 의관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집(寒洲集)'을 편찬하였으며, '남명집(南冥集)'도 교열하였다.
이는 학문 성향이 주리설의 종통인 퇴계학에 묶여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그것은 기호학계의 논쟁이던 호락시비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관여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03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고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제수되었다. 이 때 신기선(申箕善) 등 고관들의 수없는 서찰도 있어, 일단 상경하여 10여 일간 어전(御前) 독대(獨對)하며 구국의 의견만을 상주하였다.
주로 도덕성의 회복과 사회 기강의 확립으로 내수자강하여 대외적으로도 국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고종의 감복을 얻어 곧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고 삼세(三世) 추존까지 있었다.
그러나 거듭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도 소명이 있었으나 상소로써 사양하였다. 그런데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오적 처단의 상소를 올리고 상경하였으나 배알의 기회는 얻지 못하였다.
1906년 전해에 일어난 을사의병이 확산될 때,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신기선이 유교학회 설립(후일의 大東學會)을 제의해 왔지마는 이것도 사양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름을 '곽도'라 하고 자를 연길(淵吉)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도잠(陶潛)과 김이상(金履祥)의 성을 따서 이름을 만들고, 도잠의 자인 연명(淵明)과 김이상의 자인 길보(吉父)의 앞글자를 딴 것이었다.
그 뒤 영남은 물론, 호남의 전우(田愚)와 기정진(奇正鎭), 기호의 이항로· 김복한(金福漢) 등의 유문(儒門)과 또 양명학계의 황원(黃瑗)과 개성 출신 김택영(金澤榮) 등과도 교유하였으며,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교리까지 탐구하면서 심즉리설을 발전시켜갔다.
한편, 조식(曺植)과 이진상을 비롯한 경상우도 유림의 문적과 유적을 정리하여 이 지방 학풍의 위치를 확립해 놓았다. 그때 '한주집(寒洲集)' 간행을 계기로, 곽종석이 주장한 심즉리설이 주기설(主氣說)측에서는 물론, 안동을 중심한 주리설측으로부터도 이단시되는 논란이 있었지만, 이론적으로 설복함으로써 자신이 쌓은 학설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학자적 명성은 더욱 널리 알려졌고, 따라서 3·1운동 때 137인의 파리장서에서 대표로 추대된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2년형의 옥고를 겪던 중에 옥사 직전에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여독으로 곧 죽었다.
활동사항
이와 같이 곽종석은 먼저 한국유학사를 일단 결산한 학자로서 주목된다. 이진상의 학설을 이어 심즉리설을 확립시켰다. 그런데 그것이 왕양명(王陽明)의 주기설의 심즉리설과 다른 것은 물론, 같은 주리설이면서도 이황(李滉)의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과도 같지 않았다.
그것은 퇴계학설의 수정 또는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한국 유학을 종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실은 조식의 학풍이 가득한 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성장 배경에서 조식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진상 문하에 들어가면서 이황의 성리학이 아우러져 곽종석의 학문세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처음에 제자백자(諸子百家)와 불가의 경서까지 탐색한 뒤에, 주자학을 공부했으므로 성리학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교조주의에 함몰될 위험이 적었다. 그러므로 기호학계나 호남학계와 폭넓게 교우할 수 있었고, 서양철학까지 탐문하는 폭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한 특징은 을미의병 때 당시의 유학자들이 서양을 오랑캐로 본 것과는 달리, 서양 각국에 공한을 발송한 데에서나 '파리장서'를 서두른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조선조의 당색(黨色)을 논함에 있어서도 어느 당색에도 속할 이유가 없다는 점까지 밝히면서 어떤 틀에 구속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곽종석의 학문은 21세 때의 '회와삼도(晦窩三圖)'와 25세 때의 '사단십정경위도(四端十情經緯圖)'가 기초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이란 성(性)과 기(氣)를 합쳐서 말하는 것인데, 기라 함은 오행(五行)의 기이고 성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이(理)로서, 이와 기가 발함에 있어서는 이는 근본이고 기는 수단으로서 이가 기를 타는[乘]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이가 기를 바르게 타면 날[經]이 되는 것이니 그것이 사단(四端)이고, 그것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 씨[緯]로서 십정(十情)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단은 이를 주로 하고 십정은 기를 주로 하는 것인데, 모두가 이가 기를 타는 것은 같은 것이라 하여 주리설의 입장을 보여줬다.
그뒤 32세 때 '이결(理訣)'을, 54세 때 '이기론(理氣論)'을 지으면서 주리설이 강화되었다. 그와 동시에 각종 주기설을 배격하였다. 또한 곽종석은 성리학에 머물지 않았다. 특히, 전국 유림과의 서한을 통해 남긴 예학이나 경학, 그리고 한문학의 업적도 컸을 뿐만 아니라, 지리· 농업· 산학(算學)· 병법에 관한 저술도 남겼다.
양명학자와도 사귀었고, 또 서양의 국제법 책인 공법회통(公法會通)이나 고대희랍철학고변(古代希臘哲學攷辨)의 후서(後書)를 쓰는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문자를 남기고 있다.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유학자의 태도는 망명(亡命)· 기의(起義)· 자정(自靖)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곽종석은 넓은 의미에서 자정론자였다. 을미의병 당시 안동에 살았는데, 그때 권세연(權世淵)이나 김도화(金道和)의 의진에서 부장(副將)으로 추대되었으나 응하지 않았고, 을사의병 때는 최익현(崔益鉉)의 제의가 있었으나 역시 응하지 않았다.
곽종석의 자정론은 즉각으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자중 고행하며 깨끗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때문에 글은 가르쳐도 문인록을 작성하지 못하게 했다(承敎錄은 후세에 작성한 것임).
그리고 국왕의 신하로서 국왕의 군대와 싸울 수 없다는 철저한 군주옹위론의 처지를 지켰으니, 이것은 의병을 일으킨 뒤 순창(淳昌)에서 국왕의 군대에 총을 쏠 수 없어 해병한 최익현과 같은 논리였다. 그리고 자정론의 성격에서는 전우와 논리적 궤를 같이하였으나, 위정척사의식에 묶여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1908년에 간도로 망명한 이승희(李承熙)와 그뒤 장석영(張錫英)이 망명을 제의해왔을 때, 그것도 거절하고 국내에서 죄인으로서 고행의 길을 고집했다. 3·1운동 때 파리장서는 74세 때의 일로 최후의 업적이었다.
'파리장서'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로 서양을 가리켜 '대명지조(大明之照) 대화지행(大化之行)'이라 하고 있다. 조선 유학의 전통적 척사의식에서 본다면 서양 오랑캐를 대명 대화라 한 것이니, 결국 척사의식을 청산한 뜻이고 그 문서가 '파리장서'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 후기 이래 고양된 위정척사사상을 청산하기 위한 작업을 주도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위치를 조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술활동
면우문집(俛宇文集)이 있다. 본집이 63책 165권, 속집이 13권, 연보 4권, 승교록 1권, 도합 183권의 영인본이 나와 있다.
상훈과 추모
죽은 뒤 단성에 이동서당(尼東書堂), 거창에 다천서당(茶川書堂), 곡성(谷城)에 산앙재(山仰齋)가 곽종석을 기념하여 세워졌으며, 1963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스승의 권위
사람은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스승을 만나도 제자들이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갖지 못한다면 그 스승은 제자들의 인생에 아무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학생들은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의 첫 부분을 보면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라고 되어 있다. 이 가사는 논어 자한편 10장에 기록돼 있는 안회(顔回)라는 인물이 쓴 '스승의 노래'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안회는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수제자였던 인물이다. 그의 자(字)는 자연(子淵)으로 사람들은 그의 자를 따라 그를 안연 혹은 안자연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안자(顔子)라고 높여 불릴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안회가 남긴 ‘스승의 노래’를 보면 자기 스승인 공자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다. 안회가 쓴 스승의 노래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안연이 크게 탄식하며 말하되(顔淵然歎曰), 우러러볼수록 더 높아지고(仰之彌高), 뚫어볼수록 더 단단하다(鑽之彌堅). 앞에 계시더니(瞻之在前) 홀연히 뒤에 계시며(忽焉在後),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는도다(夫子循循然善誘人). 나의 글을 넓혀주시고(博我以文), 나를 예로 잡아주셨도다(約我以禮). 공부를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어(欲罷不能) 나의 있는 재능을 다하고자 하나(旣竭吾才), 어느새 또 새롭게 우뚝 서 계시는도다(如有所立卓爾). 따르고자 하여도(雖欲從之) 어디서 그 실마리를 잡아야 할꼬(末由也已).
요즘 초등학교의 한 젊은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의 죽음의 원인이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학부모의 갑질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스승이 제자를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 회초리를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러다보니 간혹 비인격적인 교사들이 자기감정을 앞세우며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하는 경우가 발생해 그런 무지막지한 교사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동복지법이나 학생 인권조례 등을 제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런 법이 교권을 추락시키고, 몰지각한 학부모들의 갑질과 학생들의 반항을 불러 일으켜 교사의 권위가 짓밟히고 있다. 이것을 견디지 못한 교사들이 정신질환을 앓거나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 끊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스승을 존경하는 법을 가르치고, 교사를 자기가 임의로 부릴 수 있는 종이 아니라 스승으로서 대접해야 한다. 또한, 교육행정 당국은 자신들의 무사안일을 위해 교사를 사무원 취급하지 말고 교육자로서 대우해야 한다.
물론 교사 스스로가 스승으로서 존경받을 만큼의 실력과 인품을 갖춰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이 사회를 향해 던지는 젊은 교사들의 외침일 것이다.
▶️ 先(먼저 선)은 ❶회의문자로 之(지; 가다)와 어진사람인발(儿; 사람의 다리 모양)部의 합자(合字)이다. 어진사람인발(儿)部는 본디 人(인)과 같은 글자이지만 이 모양이 아래에 붙는 글자는 그 위에 쓰는 자형(字形)이 나타내는 말의 기능을 강조하여, 앞으로 나아가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先자는 '먼저'나 '미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先자는 牛(소 우)자와 儿(어진사람 인)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先자의 갑골문을 보면 본래는 牛자가 아닌 止(발 지)자와 儿자가 결합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사람보다 발이 앞서나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先자는 '먼저'라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소전에서는 止자가 牛자로 잘 못 옮겨졌다. 소전에서의 牛자와 止자가 서로 비슷하여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先(선)은 (1)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이어 앞선 먼저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이어 돌아 간의 뜻을 나타내는 말 (3)바닥이나 장기, 고누, 윷놀이 따위에서 맨 처음에 상대편보다 먼저 두는 일, 또는 그 사람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먼저, 미리 ②옛날, 이전 ③앞, 처음, 첫째 ④돌아가신 이, 죽은 아버지 ⑤선구(先驅), 앞선 사람 ⑥조상(祖上) ⑦형수(兄嫂) ⑧앞서다, 뛰어넘다, 이끌다 ⑨나아가다, 앞으로 가다 ⑩높이다, 중(重)히 여기다, 뛰어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앞 전(前)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뒤 후(後)이다. 용례로는 할아버지 이상의 조상을 선조(先祖), 학교나 직장을 먼저 거친 사람 또는 나이나 학식 등이 자기보다 많거나 나은 사람을 선배(先輩), 남의 앞에 서서 인도함 또는 앞장서서 안내함을 선도(先導),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은 열사를 선열(先烈), 맨 앞이나 첫머리를 선두(先頭), 먼저와 나중을 선후(先後),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선산(先山), 다른 문제보다 먼저 해결함 또는 결정함을 선결(先決), 맨 먼저 주창함을 선창(先唱), 선수를 써서 자기에게 이롭도록 먼저 상대방의 행동을 견제함을 선제(先制), 다른 일에 앞서 행함 또는 앞서 행한 행위를 선행(先行), 어떤 임무나 직무 등을 먼저 맡음 또는 그 사람을 선임(先任), 먼저 약속함 또는 그 약속을 선약(先約), 남보다 앞서서 먼저 차지함을 선점(先占), 맨 앞장을 선봉(先鋒), 남보다 앞서 길을 떠나감을 선발(先發), 차례에서의 먼저를 선차(先次), 세상 물정에 대하여 남보다 먼저 깨달음을 선각(先覺), 무엇보다도 먼저를 우선(于先), 다른 것 보다 앞섬을 우선(優先), 남보다 앞서 함을 솔선(率先), 앞장서서 인도함을 수선(帥先), 앞서기를 다툼을 쟁선(爭先), 선조의 덕업을 받듦을 봉선(奉先), 실력이 비슷한 사람끼리 두는 바둑을 상선(相先), 실력이 비금비금한 사람끼리 두는 바둑을 호선(互先), 남보다 앞서 일을 도모하면 능히 남을 누를 수 있다는 뜻으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남보다 앞서 하면 유리함을 이르는 말을 선즉제인(先則制人), 사보다 공을 앞세움이란 뜻으로 사사로운 일이나 이익보다 공익을 앞세움을 일컫는 말을 선공후사(先公後私), 소문을 미리 퍼뜨려 남의 기세를 꺾음 또는 먼저 큰소리를 질러 남의 기세를 꺾음을 일컫는 말을 선성탈인(先聲奪人), 근심할 일은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길 일은 남보다 나중에 즐긴다는 뜻으로 지사志士나 인인仁人의 마음씨를 일컫는 말을 선우후락(先憂後樂),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라는 뜻으로 장래를 미리 예측하는 날카로운 견식을 두고 이르는 말을 선견지명(先見之明), 먼저 들은 이야기에 따른 고정관념으로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을 선입지어(先入之語), 먼저 예의를 배우고 나중에 학문을 배우라는 말을 선례후학(先禮後學), 먼저 의를 따르고 후에 이익을 생각한다는 말을 선의후리(先義後利), 다른 사람의 일보다 자기의 일에 우선 성실해야 한다는 말을 선기후인(先己後人), 먼저 앓아 본 사람이 의원이라는 뜻으로 경험 있는 사람이 남을 인도할 수 있다는 말을 선병자의(先病者醫), 선인의 행위를 들어 후학을 가르침을 일컫는 말을 선행후교(先行後敎), 꽃이 먼저 피고 나중에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딸을 먼저 낳은 다음에 아들을 낳음을 이르는 말을 선화후과(先花後果), 먼저 곽외郭隗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말한 사람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선시어외(先始於隗) 등에 쓰인다.
▶️ 生(날 생)은 ❶상형문자로 풀이나 나무가 싹트는 모양에서 생기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만들었다. ❷상형문자로 生자는 '나다'나 '낳다', '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生자의 갑골문을 보면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生자는 본래 '나서 자라다'나 '돋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生자는 후에 '태어나다'나 '살다', '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生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본래의 의미인 '나다'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姓(성 성)자는 태어남은(生)은 여자(女)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生(생)은 (1)생명(生命) (2)삶 (3)어른에게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흔히 편지에 씀 등의 뜻으로 ①나다 ②낳다 ③살다 ④기르다 ⑤서투르다 ⑥싱싱하다 ⑦만들다 ⑧백성(百姓) ⑨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⑩자기의 겸칭 ⑪사람 ⑫날(익지 않음) ⑬삶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날 출(出), 있을 존(存), 살 활(活), 낳을 산(産)이 있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죽을 사(死), 죽일 살(殺)이 있다. 용례로 살아 움직임을 생동(生動), 목숨을 생명(生命), 살아 있는 동안을 생전(生前),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존(生存),말리거나 얼리지 않은 잡은 그대로의 명태를 생태(生太), 자기가 난 집을 생가(生家),생물의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생활 상태를 생태(生態),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사로 잡음을 생포(生捕), 태어남과 죽음을 생사(生死),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생업(生業), 활발하고 생생한 기운을 생기(生氣),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생모(生母), 끓이거나 소독하지 않은 맑은 물을 생수(生水), 어떤 사건이나 사물 현상이 어느 곳 또는 세상에 생겨나거나 나타나는 것을 발생(發生),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先生), 사람이 태어남을 탄생(誕生),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일단 못 쓰게 된 것을 손질하여 다시 쓰게 됨 또는 죄를 뉘우치고 마음이 새로워짐을 갱생(更生), 다시 살아나는 것을 회생(回生), 아우나 손아래 누이를 동생(同生), 사람이 삶을 사는 내내의 동안을 평생(平生), 어렵고 괴로운 가난한 생활을 고생(苦生), 살림을 안정시키거나 넉넉하도록 하는 일을 후생(厚生),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음을 생매장(生埋葬), 생명이 있는 물체를 생명체(生命體), 이유도 없이 공연히 부리는 고집을 생고집(生固執),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세상만사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생자필멸(生者必滅), 불교에서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만 한다는 네 가지 고통 즉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의 고통을 이르는 말을 생로병사(生老病死),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무리 곤궁하여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생구불망(生口不網), 학문을 닦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안다는 뜻으로 생지生知하는 성인을 이르는 말을 생이지지(生而知之), 죽은 자를 살려 백골에 살을 붙인다는 뜻으로 큰 은혜를 베풂을 이르는 말을 생사골육(生死骨肉), 사람이 태어난 뒤 사흘 동안과 죽은 뒤 이레 동안을 부정하다고 꺼리는 기간을 이르는 말을 생삼사칠(生三死七),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져 삶이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는 말을 생불여사(生不如死), 기운이 꺾이지 않고 본디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생생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생동생동(生動生動),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 동안 머물러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죽는 것은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생기사귀(生寄死歸), 산 채로 삼키고 산 채로 껍질을 벗긴다는 뜻으로 남의 시문을 송두리째 인용함을 이르는 말을 생탄활박(生呑活剝), 나면서부터 알아 쉽게 행한다는 뜻으로 배우지 않아도 사물의 도리를 알아 쉽게 그것을 실행한다는 말을 생지안행(生知安行), 일속을 잘 알지 못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을 그릇 책망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생면대책(生面大責), 태어나서 만나 본 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생면부지(生面不知), 살리거나 죽이고 주거나 뺏는다는 뜻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생살여탈(生殺與奪), 거듭나서 유전한다는 뜻으로 만물이 끊이지 않고 변해 감을 이르는 말을 생생유전(生生流轉) 등에 쓰인다.
▶️ 天(하늘 천)은 ❶회의문자로 사람이 서 있는 모양(大)과 그 위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一)의 뜻을 합(合)한 글자로 하늘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天자는 '하늘'이나 '하느님', '천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天자는 大(큰 대)자와 一(한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天자를 보면 大자 위로 동그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머리 위에 하늘이 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天자는 사람의 머리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 '하늘'을 뜻했었지만 소전에서는 단순히 획을 하나 그은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天(천)은 (1)하늘 (2)범 인도(印度)에서 모든 신을 통들어 이르는 말. 천지 만물을 주재 하는 사람, 곧 조물주(造物主)나 상제(上帝) 등 (3)인간세계보다 훨씬 나은 과보(果報)를 받는 좋은 곳. 곧 욕계친(欲界責), 색계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 등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늘 ②하느님 ③임금, 제왕(帝王), 천자(天子) ④자연(自然) ⑤천체(天體), 천체(天體)의 운행(運行) ⑥성질(性質), 타고난 천성(天性) ⑦운명(運命) ⑧의지(意志) ⑨아버지, 남편(男便) ⑩형벌(刑罰)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하늘 건(乾), 하늘 민(旻), 하늘 호(昊), 하늘 궁(穹),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흙 토(土), 땅 지(地), 땅 곤(坤), 흙덩이 양(壤)이다. 용례로는 타고난 수명을 천수(天壽), 하늘과 땅 또는 온 세상이나 대단히 많음을 천지(天地), 타고난 수명 또는 하늘의 명령을 천명(天命), 사람의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를 천연(天然),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이 곧 황제나 하느님의 아들을 천자(天子), 우주에 존재하는 물체의 총칭을 천체(天體), 부자나 형제 사이의 마땅히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천륜(天倫), 타고난 성품을 천성(天性), 하늘 아래의 온 세상을 천하(天下), 천체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천문(天文), 하늘과 땅을 천양(天壤),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재주를 천재(天才), 하늘에 나타난 조짐을 천기(天氣), 하늘이 정한 운수를 천운(天運), 자연 현상으로 일어나는 재난을 천재(天災),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으로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이 썩 좋은 절기임을 일컫는 말을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과 땅 사이와 같이 엄청난 차이를 일컫는 말을 천양지차(天壤之差), 선녀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성격이나 언동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천의무봉(天衣無縫), 세상에 뛰어난 미인을 일컫는 말을 천하일색(天下一色),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이라는 뜻으로 임금이나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이르는 말을 천붕지통(天崩之痛), 온 세상이 태평함 또는 근심 걱정이 없거나 성질이 느긋하여 세상 근심을 모르고 편안함 또는 그런 사람을 일컫는 말을 천하태평(天下泰平), 하늘과 땅 사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을 이르는 말을 천지지간(天地之間), 하늘 방향이 어디이고 땅의 축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뜻으로 너무 바빠서 두서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 또는 어리석은 사람이 갈 바를 몰라 두리번 거리는 모습을 일컫는 말을 천방지축(天方地軸),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물이 오래오래 계속됨을 이르는 말을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한다는 뜻으로 누구나 분노할 만큼 증오스러움 또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음의 비유를 이르는 말을 천인공노(天人共怒), 하늘에서 정해 준 연분을 일컫는 말을 천생연분(天生緣分), 하늘이 날아가고 땅이 뒤집힌다는 뜻으로 천지에 큰 이변이 일어남을 이르는 말을 천번지복(天翻地覆), 하늘에서 궂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화평한 나라와 태평한 시대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천무음우(天無淫雨), 하늘이 정하고 땅이 받드는 길이라는 뜻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을 떳떳한 이치를 일컫는 말을 천경지위(天經地緯), 천장을 모른다는 뜻으로 물건의 값 따위가 자꾸 오르기만 함을 이르는 말을 천정부지(天井不知),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열린다는 뜻으로 이 세상의 시작을 이르는 말을 천지개벽(天地開闢), 하늘은 그 끝이 없고 바다는 매우 넓다는 뜻으로 도량이 넓고 그 기상이 웅대함을 이르는 말을 천공해활(天空海闊), 하늘에 두 개의 해는 없다는 뜻으로 한 나라에 통치자는 오직 한 사람 뿐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천무이일(天無二日), 멀리 떨어진 낯선 고장에서 혼자 쓸슬히 지낸다는 뜻으로 의지할 곳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천애고독(天涯孤獨), 천진함이 넘친다는 뜻으로 조금도 꾸밈없이 아주 순진하고 참됨을 일컫는 말을 천진난만(天眞爛漫) 등에 쓰인다.
▶️ 海(바다 해)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每(매, 해)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每(매)는 母(모)와 같아서 애를 낳는 사람, 출산이나 결혼은 어두운 때와 관계가 있어 每(매)는 어둡다는 뜻도 나타낸다. 또 중국 북방의 사람이 볼 수 있었던 바다는 검고 크고 어두운 것이었다. ❷회의문자로 海자는 '바다'나 '바닷물', '크다', '널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海자는 水(물 수)자와 每(매양 매)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每자는 비녀로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있는 어머니를 그린 것이다. 고대 모계사회에서는 대지나 바다를 '여성'에 비유하곤 했다. 海자는 그러한 인식이 반영된 글자로 '어머니의 물'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중국의 초기국가인 상(商)나라는 내륙 깊숙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갑골문에서는 海자가 등장하지 않았다. 海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금문 이후로 지금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그래서 海(해)는 (1)나라에서 신성시(神聖視)하여 가물 때에 제사(祭祀)를 지내던 세 바다. 동해(東海)는 양양(襄陽)에서, 남해(南海)는 나주(羅州)에서, 서해(西海)는 풍주(豊州)에서 각각 제사를 지냈다. 악(嶽). 독(瀆)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바다 ②바닷물 ③많이 모인 곳 ④물산(物産)이 풍부한 모양 ⑤널리 ⑥크게 ⑦어둡다 ⑧크다, 넓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내 천(川), 강 강(江), 물 하(河), 큰 바다 양(洋), 물결 랑/낭(浪), 시내 계(溪), 바다 명(溟), 큰 바다 창(滄), 바다 영(瀛), 물 수(水),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메 산(山), 뭍 륙/육(陸), 빌 공(空)이다. 용례로는 바다 밖의 다른 나라라는 뜻으로 외국을 일컫는 말로 해외(海外), 넓은 바다를 해양(海洋), 바다에서 전투를 맡아 하는 군대를 해군(海軍), 바다 속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자를 해녀(海女), 바닷가의 언덕이나 기슭을 해안(海岸), 바다 밑바닥을 해저(海底), 바다의 일정한 구역을 해역(海域), 바다로 둘러싸인 육지라는 뜻으로 나라 안을 일컫는 말로 해내(海內), 뭍이나 산이 평균 해면에 비하여 높은 정도를 해발(海拔), 바다 속에서 나는 풀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해초(海草), 육지 사이에 끼여서 양쪽의 넓은 바다로 통하는 좁고 긴 바다를 해협(海峽), 바다와 땅이 서로 잇닿은 곳이나 그 근처를 해변(海邊), 해상의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를 해리(海里), 바다를 다니며 배를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는 도둑을 해적(海賊),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해풍(海風), 얼굴에 웃음을 띰을 해안(海顔), 이룰 수 없는 바람을 해지(海志), 괴로운 인간세계를 고해(苦海), 벼루를 달리 일컫는 말로 묵해(墨海), 넓고 깊은 불교의 세계를 법해(法海), 넓은 지역에 걸쳐 우거져 있어서 바다처럼 보이는 큰 숲을 임해(林海), 동쪽의 바다를 동해(東海), 서쪽에 있는 바다를 서해(西海), 배로 바다 위를 항해함을 항해(航海), 영토에 딸려 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바다를 영해(領海), 육지에 가까운 바다를 근해(近海), 육지 가까이 있는 대륙붕을 덮고 있는 바다를 연해(沿海), 육지와 바다를 육해(陸海), 넓고 큰 바다를 창해(滄海), 넓고 큰 바다를 대해(大海),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음의 뜻으로 임금의 좋은 정치로 백성이 편안하다는 말을 해불양파(海不揚波), 바다에서 천 년 산에서 천 년을 산 뱀은 용이 된다는 뜻으로 오랜 경험으로 세상 안팎을 다 알아 지나치게 약삭빠름 또는 그런 사람을 이르는 말을 해천산천(海千山千), 바다 물은 짜고 민물은 맛이 담백하다는 말을 해함하담(海鹹河淡), 산과 같고 바다와 같이 매우 크고 많다는 말을 여산약해(如山若海), 하늘 같이 높고 바다 같이 깊다는 말을 여천여해(如天如海)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