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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학사는 길희성선생님이 평생 모은 사재를 바쳐 세운 공부와 명상의 집이다. 선생님은 이 민족이 감정적이라 진리에 대해서도 깊은 공부와 생각이 부족하여 쉽게 답을 찾은 것처럼 뿌리 깊지 못하고 경박한 것에 대해 안타까와 하셨다. 도를 이미 찾은 것처럼 물음이 없고 도를 추구하는 열정이 없이 앵무새처럼 답을 외우며 도사인척 하는 것을 경계하셨다. 심도라는 말 자체가 도를 찾는다는 뜻이다. 선생님 자신도 강화도 시골에 와 심도학사를 세우신 이유가 남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전에 자신이 좀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 했다. 진리는 죽을 때까지 찾아가는 것이다.
그 동안 전국에서 심도학사를 찾은 분들이 수백명이다. 선생님의 강의에 감동한 사람들이 동영상을 찍어 올리거나 강의 요약을 올리자는 건의를 했으나 선생님은 이를 거절하셨다. 그 이유는 진리는 단지 지식이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서로 만나 마음과 삶을 나누고 명상을 통해 체득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묻지도 않는데 답부터 주는 것을 경계하셨다.
심도학사가 좋아 은퇴 후 곧바로 강화에 이사온 나는 한 종교에 매이지 않고 기독교, 불교, 유교, 힌두교, 천도교, 노자 등을 열린 마음으로 배우며 초종교적 영성을 추구하는 심도학사가 미래의 종교를 여는 세계사적 시발점이라고 여겼다. 심도학사는 이런 공부를 학교에서 그러듯 지적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걸고 자기에게 묻고 명상하며 참자기를 발견하는데 목표를 두고 한다. 지난 2년간 거의 매주 금토일 심도학사 강좌에 참여한 나는 심도학사에서의 공부가 동호인들끼리 골방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선포하는 진리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공개를 주저하셨지만 나는 이것을 알리는 것을 나의 사명이라고까지 여기게 되었다.
가능한한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려 했으나 나도 배움의 객체가 아니라 선생님의 강의에 진리를 찾아 한 주체로 참여한다는 자세로 임했기 때문에 무례를 무릅쓰고 강의 말미에 나의 감상과 소견을 덧붙였다. 금토일 3일에 걸쳐 열시간 가까이 하시는 강의와 토론이므로 분량이 방대하여 생략하거나 요약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전문적거나 난해한 대목은 내식으로 이해하여 쉽게 풀어쓰려 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진의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함께 강의를 들은 도반님들의 수정이나 첨삭을 부탁드리고 싶다.
제1강. 기독인을 위한 불교강좌
1. 강좌의 취지와 성격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르는 사람이다’(막스 뮐러). 궁극적 실재는 절대적이지만 그 실재와 관계하는 종교는 역사적 문화적 현상이므로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한 종교를 믿는 사람은 다른 종교를 배움으로써 자신의 종교를 더 잘 알 수 있고 자신의 부족을 보완할 수 있다. 특히 배타적인 기독교인은 하느님을 기독교에 가두어서는 안된다. 하느님은 인류의 하느님이라 하느님의 진리를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둘 수 없다. 하느님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모습을 지역별로 시대별로 각기 다르게 나타내셔서 기독교, 불교, 유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으로 자신을 표현하셨다. 예수만이 아니라 석가,공자,노자도 하느님의 아들이다. 따라서 불교 공부가 곧 그리스도교 공부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보살이다. 하느님과 예수를 기독교와 교회의 독점에서 해방시켜 다른 종교, 문화,사상, 역사에서, 심지어 무신론자에게서도 발견할 때 우리는 더 풍부하고 심오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종교에 철저하지 않으면 다른 종교도 알 수 없다. 각 종교의 좋은 점을 모아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는 것이 종교다원주의는 아니다. 나(선생님)는 기독교를 가지고 평생 씨름을 했고 40대 후반이 되서야 지적으로 정직한 신앙을 갖게 됬다. ‘머리로도 믿지 못하는 것을 가슴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비교종교학자인 나는 다른 종교들을 통해 하느님과 예수에 대한 이해를 보다 깊고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처음 두 강좌인 기독인을 위한 불교강좌와 불교인을 위한 기독교 강좌는 나의 공부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감상과 소견; 나는 선생님을 통해 조금이라도 불교를 알 수 있었던 것을 천행으로 여긴다. 나는 평생 기독인이고 지금도 예수님이 제일 가깝지만 예수 안에서 부처와 노자 공자가 하나임을 발견한다. 아니 예수와 내가 하나라고 믿는 나는 내 안에 그분들이 다 하나로 있음을 발견한다. 각 종교들의 교리와 의식이 달라 각각의 종교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각종교의 교리와 의식, 제도를 벗겨내고 알멩이를 보면 거부할만한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그분들은 나의 참나며 나의 속알 중의 속알이다. 그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심도학사에 오는, 아니 진리를 진정으로 사모하는 이들에게서 나는 나의 참모습을 본다. 그들과 나는 둘이 아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너와 나 속에 살아계신 하느님이다.
2. 기독교란 무엇인가?
1)하느님은 누군가?
하느님은 존재와 가치와 의미의 원천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기도 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기도 하지만(특수하고 구체적으로 현현하지만) 동시에 온 우주와 인류의 하느님이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뿌리는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하느님을 떠날 수 없다.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그 존재의 뿌리를 하느님에게 두고 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신성하며 생명은 특히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에카르트의 말 대로 벌레 한 마리 속에도 하느님이 가득하다. 물질은 생명을 낳고 생명은 의식을 낳고, 의식은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낳았다. 예수, 부처와 같은 하느님을 닮은 성인의 출현이 137억년의 우주진화, 생명진화의 귀결이다.
하느님은 모든 가치의 원천이다. 무슨 종교를 믿든 안믿든 진선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며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들이다. 요즘 두드러지게 하느님의 자녀 노릇을 잘 하는 사람들은 종교인들이라기 보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애쓰거나 정의를 위해 약자들을 위해 애쓰는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람들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 후원회비 내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참으로 헌금을 내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은 의미의 원천이다. 인생은 의미와 무의미의 거대한 싸움이다. 물질만을 추구하고 정신을 잃은 현대인은 무의미의 늪에 빠졌다. 참자기를 찾는 일이 의미를 회복하는 길이다.
나의 감상과 소견; 나는 하느님에 대한 선생님의 이런 정의를 보고 종교 안에 갖혀 있던 하느님만 보던 눈에서 벗어나 세상에 충만한 하느님을 보았다. 나는 특히 세상에 가득한 존재와 생명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감탄하는 일을 나의 예배로 삼았다. 강화의 산과 들 바다, 거기 있는 생명들과 더불어 나는 존재의 희열을 만끽하고 풀 한포기 꽃 한 송이에서 존재의 거룩함, 하느님의 거룩함을 보았다. 하물며 내 존재와 다른 사람에게서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특히 진선미가, 진리와 사랑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동안 내가 하느님을 얼마나 좁은 세계에 가두어 두었는가를 절감했다. 예배나 기도와 같은 종교의식 넘어에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 진정한 종교가, 하느님의 일이 말없이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강화에 와서 콩 한 알이라도 나누어 먹으려는 농부 할머니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다.
2)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나는 크리스쳔을 기독교라는 명사를 사용하여 기독교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리스도와 같은(Christ-like)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그냥 기독인이라고 불렀으면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라는 종교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그리스도 답지 않은 목사나 교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마음이 청정한 불자가 탐욕스런 기독교인 보다 더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머리 속과 가슴 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나온 분이라고 본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그 뜻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를 이루신 분이다. 그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 실현하는 일이었다. 유영모 선생님 말씀처럼 그는 하느님의 효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다가 십자가에서 순직한 분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예수의 정신, 영을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이 참된 하느님의 자녀이며,참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며 목적이다.
기독교는 이런 예수가 하느님 앞에서는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사람 앞에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완전하게 보여주셨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를 하느님으로까지 숭배하게 되었다. 예수는 전지전능한 신이다. 그는 피조물인 우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다. 이런 믿음으로 인해 예수는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분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예수처럼 십자가를 질 수도 없고 질 필요도 없고, 그의 십자가를 믿고 그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값싼 은총을 거부하고 대속 보다는 대신 고난을 져주는 代苦 사상을 말한다.
나의 감상과 소견; 유영모, 함석헌의 씨알사상에 몰입했던 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선생님의 이런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주체적인 인격이 남을 위해서는 자기 손에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남이 흘린 피를 믿어 구원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자기 짐은 자기가 지고 남을 위해 작은 짐이라도 지려는 사람이 참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구원이 있다. 물론 남의 은혜로 살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런 사람들에게, 특히 의를 위해 우리 대신 앞장서 고난을 받은 사람들에게 당연히 감사해야 겠지만
3). 기독교적 신관에 대한 새로운 이해
a) 초자연주의적 신관; 초자연적 신관은 창조주와 피조물, 무한과 유한, 초자연과 자연, 하느님과 인간, 계시와 이성, 성과 속, 교회와 국가, 종교와 문화를 엄격히 구분한다. 이런 신관은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인간과 세상,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거나 만든 그 어떤 것도 언제나 죄악으로 물들고 왜곡될 수 있음을 알기에 절대시하지 않고 우상을 타파하듯 비판하고 제거할 수 있게 해주는 예언자적 정신이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나는 신의 내재성을 믿지만 인간의 죄나 한계를 깊이 자각함이 없이 인간과 신을 동일시하고 쉽게 신인합일을 말하거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신과 인간의 단절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지닌 신성을 부정하고 신인합일의 길을 차단하고 무조건적인 신앙만을 강조하는 것 또한 반대한다. 이성과 지성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대가를 받는다.
계몽주의도 거치지 않은 유치한 관습적 신앙에 빠져 초자연적 신관만을 고집할 때 독선과 배타주의에 빠지게 되고 미신과 기복신앙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처해 있는 상황이다. 서구 기독교가 그런 것처럼 이런 방식의 미신적인 신앙은 결국 시대의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나는 동양종교들이 이런 초자연적 신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동양의 자연주의는 한번도 무신론적인 적이 없었다.
b)인격신관; 인간이 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닮은 것 처럼 생각하는 인격신관은 신에게 인간의 온갖 욕망을 투사함으로써 신을 희화시키고 저질화시킬 위험이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일희일비하며 질투하는 구약의 하느님은 인간과 친근해 좋은 것 같지만 신을 인간중심의 희생물이 되게한다. 온갖 이야기로 가득차 있는 성경이 인격신 하느님의 뜻에 대한 복종과 신앙을 강조하는 반면에 동양의 경전들은 철학적 지혜를 닮고 있어 깨달음을 강조한다.
c) 전지전능한 하느님;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인간사나 역사에 일일이 개입하신다는 신앙은 악의 문제나 도덕적 부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기도의 응답이나 기적의 문제 또한 해결하기 어렵다. 왜 하느님이 불의한 자의 기도는 들어주는 것처럼 그들에게 세상에서 좋은 일이 많고, 의로운 자들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신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동양종교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런 기독교의 신관이 수정 보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의 감상과 소견; 기독교의 전통적 신관이 예언적 전통을 계승할 때는 힘이 있었으나 개인의 기복신앙에 이용당함으로서 기독교는 미신에 빠지고 타락하여 지성인의 외면을 받기에 이르렀다고 나는 믿는다. 종교가 참사람의 길을 제시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데 기여하려면 동양종교의 영성, 깨달음을 강조해야 한다. 다만 사회정의라는 예언자적 전통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3.불교란 무엇인가?
1) 불교의 보편적 요소
a)三寶;佛,法,僧; 불교란 깨달은 覺者인 부처님과, 영원한 진리인 불법과 그 불법이 전해지는 경전, 그리고 그 불법을 실천하는 스님을 세가지 보배로 삼고 있는 종교다.
나의 감상과 소견; 종교가 참종교이려면 자기들만의 진리가 아니라 누구나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콩볶듯이 나와야 한다. 지금은 깨달은 사람도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도 보기 힘들고 각종교의 주장은 너무나도 교리적이라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암호같은 시대다. 경전의 해석도 시대에 맞게 새로워져야 한다. 한가지 사족을 달면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라 특정한 성직자들만 진리를 독점하는 시대가 아니라 누구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시대다. 우리 각자가 보배인 시대다. 소위 성직자들에게 놀아나 제도종교의 의식과 교리와 제도에 매여 종교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슬프다.
b)三學;戒, 定, 慧; 불교는 계정혜 세가지를 배워 반야(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살자는 종교다. 계란 도덕적인 삶을 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한 止持戒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作持戒가 있다. 정이란 마음의 시끄러운 소리를 끊고 마음을 하나에 집중시켜 깨달음을 얻자는 것이다. 혜란 사물과 인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緣起와 空을 깨달아 집착에 매이지 않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의 감상과 소견; 종교란 복잡하게 말할 것이 아니라 이 세가지가 잘 행해지고 있느냐를 보면 된다. 오늘날의 종교인들이 비종교인들의 도덕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해 ‘저 사람은 기독교인인데 사람은 괜찮아’ 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심도학사 옆엔 수도원(이름만 수도원이지 기도원이다)이 있는데 사람들이 기도하러 오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선생님이 ‘하느님이 귀가 먹었나’ 그러실까? 내면을 향해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많은 종교일수록 참종교고 참신자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2)역사적 다양성
a)상좌불교; 현재 살아 있는 유일한 소승불교로 미얀마,태국,캄보디아 등 주로 남쪽지역에 퍼져 있어 남방불교라고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장경에 보관하고 있어 정통불교를 자처하며 팔리어로 쓰여 있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도 한다. 출가자들이 재가자들을 소홀히 하고 자신들의 수행과 명상에만 치중하는 이기적 경향이 있음을 폄하하여 소승이라 칭해졌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벗어난 불교 아닌 불교(大乘非佛設)라고 비판하며 자신들을 정통으로 자처한다.
b)붓다의 가르침
(1)四聖諦; 苦集滅道; 부처님이 깨달은 후 녹야원에서 행한 최초의 설법으로 불교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괴로움과 그것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것의 소멸과 처방을 제시한다.
(a)苦諦;생노병사가 근원적인 고통이고, 증오스런 사람을 만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 등이 고통이다.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무상한 것 일체가 다 苦이다(一切皆苦)
(b)集諦; 고가 생기는 원인이다. 애착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되는 무상한 것을 갈애하며 집착하는 것이 苦의 원인이며, 그것이 번뇌다. 이런 집착의 근본적 원인은 무상한 것을 무상으로 알지 못하는 無明이다.
(c)滅諦;갈애,무명,탐진치 삼독을 위시한 모든 번뇌 망상이 말끔히 멸한 상태, 無爲法이라고 한다. 욕망과 집착 등의 번뇌의 불이 꺼진 적멸, 절대평안의 경지.
(d)道諦;八正道
正見; 바른 세계관, 인간관
正思;바른 마음 가짐, 결의,의도
正語
正業;바른 행위
正命;바른 생활, 바른 직업
正精進;바른 노력
正念;바른 마음챙김
正定;바른 정신통일,집중,삼매.
정어,정업,정명은 계, 정념,정정은 정, 정견,정사는 혜에 해당된다.
결론적으로 고는 보는 것이며(見), 집은 잘라 내야 할 것이고(斷) 도는 닦아야할 것이고(修) 멸은 증득하고 체험해야할 것이다(證)
나의 감상과 소견;기독교는 죄를 불교는 고를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인간의 죄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런 기독교가 싫어 기독교를 버릴뻔 했으나 다행히 유영모, 함석헌을 만나 그럴 필요가 없었고, 최근에는 길선생님을 만나 기독교에 대한 보다 새롭고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불교가 강조하고 있는 고의 내용이 내가 요즘 목격하고 있는 사회적 불의나 차별, 각종 정신질환이나 스트레스와는 좀 거리가 있는 존재론적,형이상학적인 고임을 알고 놀랐다. 마르크스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의 고통을, 프로이드는 성적인 억압으로 인한 위선과 질병을, 실존주의자들은 세계대전을 전후한 인간의 불안.소외,죽음, 무의미 등을 문제 삼았다. 지금 인간의 고통은 무한 경쟁시대에 인간이 겪는 각종 스트레스와 경쟁 후유증이다.
나는 無常에 집착하는 것이 고의 원천이며, 무상을 깨닫고 탐진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지혜의 길이라는 불교의 진단과 처방에 대해 자본주의 시대에 물질적 탐욕에 병들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영성의 종교, 자기 비움의 종교는 어느 때 보다 더 절박하다. 그러나 탐욕의 문제는 만만한 것이 아니라 스님이라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비움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은퇴하여 시골에서 소박하게 살며 경전공부만 하는 나는 별걱정이 없으나 은행 다니는 나의 딸은 날마다 아우성이다. 내가 무상을 얘기하는 것이 딸에겐 실감이 안간다. 부럽고 팔자 좋은 우리 아버지라고 할뿐이다. 나는 괜히 미안하다.
b)대승불교;1세기 전후로 해서 인도 불교계에 일어난 대중적 불교운동이다. 사원에 안주하며 명상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재가자들이나 중생구제를 소홀히 하는 출가자들을 이기적 집단으로 비판하며 발생한 재가자들의 운동으로 보인다.
1)대중신앙적 운동;보살신앙
보살은 열반을 얻을 수 있지만 자비심 때문에 끝까지 거부하고 생사의 세계에 머물면서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하는 존재이다. 보살은 자기 업 때문이 아니라 중생을 위한 서원을 세우고 수행해서 다시말해 願生으로 보살이 된 것이다. 四弘誓願이 특히 유명하다; 중생은 끝이 없으니 구제하기를 서원합니다. 번뇌는 다함이 없으니 끊기를 서원합니다. 법의 문은 한량 없으니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佛道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으니 이루기를 서원합니다.
2)교리; 철학적으로는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 진과 속을 둘로 보지 않고 眞俗不二의 진리를 주장하며 생사에도 열반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의 경지를 주장했다.
a)空思想;나를 포함한 어떤 사물이나 현상(法)도 다른 것들에 의존하는 조건적, 의타적인 假有이므로 그 자체로는 고유의 본질,본성,自性이 없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주장이다. 공은 相의 차별성을 타파하고 무상의 진리를 보는 言語道斷의 경지다. 공은 만물이 놀자리를 만들어 주는 빈공간과 같고 만물의 상호의존과 열림과 소통과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무 아닌 무, 존재 아닌 존재다.
b)유식사상; 세계는 언어,개념,분별지에 의해 구성되며, 마음(망심과 망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관념의 투사이며 언어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본다. 대상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식이 轉變된 것으로 본다.
c)佛性사상;일체의 관념,망념,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텅비고 고요한 마음의 본바탕. 染心을 싫어하는 淨心, 망심을 거부하는 본래적인 진심. 누구나 지니고 있는 자기 자신의 마음의 본성
c)선불교; 진리를 내 안에서 찾는다,마음이 곧 부처(心卽佛)다. 문자,경전,교리 등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진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선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다. 문자로는 깨우칠 수 없다(不立문자), 가르침 밖에 별도로 전해지는 것이 있다(교외별전), 곧바로 마음을 가리킨다(직지인심),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견성성불)
나의 감상과 소견;나는 공사상을 통해 하느님이 만물 안에, 그리고 내 안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만물과 이웃이 없이는, 하느님이 없이는 내가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은총과 감사를 경험했다. 그리고 겸손이란 실재로 自性이 없이 空한 자신을 문자적으로 인식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불성 사상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신성이 텅비고 공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깨어 빛을 발하고 있는 신령한 빛(空寂靈知)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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