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1786년 프랑스 리옹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겸손하고 충실한 목자로 존경받았다. 그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산 그에게 해마다 이 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1859년 선종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시성하고, 년 뒤에는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복된 요한 마리아 사제에게 놀라운 열정으로 양 떼를 보살피게 하셨으니
그의 모범과 전구로
저희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많은 형제들을 얻어
그들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제1독서
<너희는 주님의 축일들에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23,1.4-11.15-16.27.34ㄴ-37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4 “너희가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은 이러하다.
5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주님의 파스카를 지켜야 한다.
6 이달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는데,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7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8 그리고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9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0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11 사제는 그 곡식 단이 너희를 위하여 호의로 받아들여지도록
주님 앞에 흔들어 바친다.
사제는 그것을 안식일 다음 날 흔들어 바친다.
15 너희는 안식일 다음 날부터,
곧 곡식 단을 흔들어 바친 날부터 일곱 주간을 꽉 차게 헤아린다.
16 이렇게 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오십 일을 헤아려,
새로운 곡식 제물을 주님에게 바친다.’
27 또한 일곱째 달 초열흘날은 속죄일이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34 ‘이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은 주님을 위한 초막절이다.
35 그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6 너희는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이날은 집회일이므로, 너희는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7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
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
복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기도를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도 믿지 않는 것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확 달라져 오신 예수님을 보고 놀랍니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묻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어디서 얻으셨는지 잘 압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코로나도 그 성장을 꺾지 못한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국민 가게라 불리는 ‘다이소’입니다. 보통 다이소는 일본 것이라고 여기고 팔리지 않는 싸구려 제품을 파는 곳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1,000원짜리로 질 좋은 제품을 팔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이소가 전국 모든 백화점과 대형할인점을 합친 숫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1,500여 매장에서 연 매출 3조 원에 달하는 성과를 냅니다. 1,000~5,000원짜리를 팔아서 그정도 매출이 나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1997년 천호동에 1호점을 열 때, 한국에서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이 팽배했고 ‘1,000원짜리 팔아서 뭐가 남겠어!’라는 생각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50대 이상보다 2330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라이프스타일숍이 되었습니다. 저도 ‘1,000원짜리가 뭐 품질이 좋겠어?’라고 생각했다가 실제로 방문해보고는 깜짝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없는 게 없고 가격에 비해 품질이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이소 신화를 이룩한 박정부 회장의 그러한 지혜와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지혜와 힘은 자신 안에서 샘솟지 못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저절로 똑똑해지는 사람 없고 음식을 먹지 않고 에너지가 솟는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지혜와 힘은 외부로부터 온 것입니다.
박정부 회장은 45세에 회사를 사퇴하고 먹고살 일이 막연하여 무역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다 일본 100엔숍을 접하게 됩니다. 미국엔 1달러숍이 있고 유럽에도 그러한 회사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일본 다이소에 납품하며 배운 것과 유럽을 다니며 공부한 것들을 바탕으로 10년을 준비하여 천호동 1호점을 엽니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가게가 될 리가 없다고, 특별히 서울 잘 사는 동네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라고 말렸지만, 반응은 의외로 폭발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용기는 오히려 잘사는 나라에서 더 건전한 소비를 한다는 지혜를 획득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입니다.
이런 지혜와 힘은 분명 이미 그러한 사업으로 성공하고 있는 선진국의 상황을 보고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적은 믿음의 힘으로 이뤄집니다. 믿음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고 누군가의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박 회장의 지혜와 기적 같은 힘은 바로 외국의 성공을 믿고 잘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노력한 결과가 지금의 다이소를 만들었습니다.
박정부 회장이 한국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역업을 하며 외국의 상황을 공부하고 배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만 하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고향에만 갇혀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배우고 공부하셨습니다. 그런 시간을 무엇이라 할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지혜와 힘을 얻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바로 이 기도의 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쇄국정책으로 잘 살 수 있을까요? 기도는 하느님의 지혜와 힘을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기도의 힘을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기도의 힘을 믿을 수 있어야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마더 데레사에게 한 수녀님이 먹을 것이 떨어졌다고 할 때 “그럼 가서 성체 앞에서 기도하세요”라고 하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러자 정말 학교 파업으로 남게 된 부식을 수녀원에 가져온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과 기도를 믿는 것은 하나입니다. 기도를 통해 모든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을 수 있음을 믿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기도하면 다 깨달을 수 있고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음을 믿읍시다. 기도를 믿음과 주님을 믿음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악령을 쫓아내시고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한겨울에 길고양이가 불쌍하다며 물과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길고양이가 너무 많다면서 학대하고 죽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부모는 거리의 환경미화원을 가리키며 아이한테 저분 덕분에 깨끗이 산다고 말하고, 어떤 부모는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합니다. 돈이 많아도 티 내지 않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부자도 아니면서 돈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밖에도 곳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러한 차이를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또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자기의 마음이 끌리는 모습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름을 각자 가지고 있기에 더 나은 가치를 찾으면서 살 수 있는 것도 될 것입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서로 부정하기만 하면 함께 사는 방법이 사라지고 맙니다.
나와 다름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은 혼자서 여행을 가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하고도 말하지 말고 딱 일주일만 지내보십시오.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 해지는지 모릅니다. 평소 과묵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혼자만의 삶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스스로 외로움 안으로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특히 주님과도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 없이 우리는 외로움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과 함께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아직은 더 세상의 것에 집중할 시간이라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함께할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목수라는 천한 직업을 가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 성경 공부에 전념하지도 않았고, 율법학자도 아니었기에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라면서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니 당연히 함께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함께하지 못하는 곳에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함께하길 바라는 주님의 뜻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혼자 살 수 없는 우리를 위해 함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도 함께할 수 없는 이유를 찾겠습니까? 주님과도 함께해야 하며, 나의 이웃과도 함께해야 합니다. 나의 뜻과 맞지 않다고 해서 거부하는 삶이 아닌, 어떻게든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항구로 향하는지 모르는 선장에게는 어떤 바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세네카).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