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선택사상과 그레마스의 구조주의
하나님의 선택 (3) - 다윗언약 2 중에서)
97,3,31 이근호 (이명호 정리)
◈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천주교의 이론 [ 하나님과 인간의 이항 대립 ] - 서로 마주 보면서도 정반합을 할 수 있는 그 중간 매체가 되는 것을 이항 대립이라 한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거론한다. 인간은 자기 의, 혹은 자기 의, 자기 선함을 가지고 이 세상의 정복에 나선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본다.
* 개신교 - 죄(인간)와 의(하나님)의 대립
* 천주교 - 인간 존엄성에서 출발
* 천주교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 이 관계를 언약이라 하는데, 이렇게 천주교처럼 되어 버리면 하나님의 존재도 긍정이 됨과 동시에 인간 존재도 긍정되어야, 둘 사이에 하나님의 계약이 성립된다. 인간존재가 긍정되면 생명의 존중사상이 나온다. 낙태 반대, 인간 존엄성 등,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다 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왜곡된 하나님 상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으로 본다.
* 개신교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 계약적으로 본다. 예수님은 의인이면서 죄를 짊어지신 분이시다.
개신교의 설교는 인간의 죄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천주교의 설교는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라는 생명존중 사상에서 출발한다. 개신교는 심판을 강조하고, 천주교는 사랑을 강조한다. 그러나 지금은 개신교가 천주교화 되고 말았다. 다 같이 인간긍정, 생명존중이다.
◈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 는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그것을 의(義)로 본다.
* 존재의 긍정에서 출발하고, 내가 있는 것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비록 죄는 죄이지만, 죄를 지어서 미안하지만, 그러나 죽을 존재는 아니란 것이다. 즉, 내가 있음으로 다른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이다. 강도사 시절에는 목사를 욕하고, 목사 시절에는 교인이나 전도사를 욕한다. 내 소속의 의미를 찾는, 자기 정체성 확립이다. 단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긍정하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진다.
* 자식이 없는 부인은 버스 안에서 아이들 떠드는 것이 싫다가 자기가 아이를 가지면 이해한다고 한다. 엄마라는 공동체 정체성에 들어가서 자기를 부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가재는 게 편이다. 자기 조직의 정체성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자기가 소속된 집단을 항상 변명하는 것이다.
* 나는 죽어서는 안 된다 ! - 자기에게 의미와 가치를 아무 의미 없이 주어 버린다. 목사가 되어 버리면 자신도 모르게 목사를 변호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집단에 들어섰을 때 자기 집단을 변호하게 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사라지게 된다.
* 부활절 설교 - 주제는 언제나 그리운 예수님이다.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안 그립다. 인간은 자기 사랑에 미쳐 있다. 예수님이 보고 싶은 사람이 없다. 예수님이 안 보고 싶고 자기 애인이 그립다.
☞ 선택, 123 페이지
⊙ 그러면 다윗의 죄 때문에 주님에 의해 꺾여진 뼈는 누구인가? (책)
* 모세언약의 출애굽기에서는 사람이 꺾도록 되어 있다. 시편51편에서는 주께서 친히 꺾으신 뼈이다.
◈ 제물에 대해서
* 바치는 제물이 갈수록 달라진다. 유월절 맥추절, 대속죄일의 제물이 달라지는데, 왜 달라지는가? 우리는 현재까지 제사법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 지금까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제사를 씻는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더란 말이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목적이 인간의 죄를 씻는 것이 아닌데, 이런 개념이 나온 것은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접근을 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제사의 참 목적은 무엇인가? - 예수님의 희생 제물이라는 것은 죄를 씻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성소를 정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런 차원에서 봐야 한다.
◈ 성전에서의 제물은 죄를 씻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거룩한 공간을 정화하는데 있다. 거룩을 계속 거룩 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철조망을 쳐놓고 들어오면 폭파한다는 것이다. 폭파될 놈은 폭파될 때 거룩이 만개 되는 것이다.
* 레위기 9장에 보면 속죄제를 드리고 난 뒤에 제물을 태운다.
(레 9:1) 제 팔 일에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레 9:2) 아론에게 이르되 흠 없는 송아지를 속죄제를 위하여 취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를 위하여 취하여 여호와 앞에 드리고
* 그리고,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다가 죽는다. 그 다음이 어려운 부분인데, 아론의 제사법과 모세의 제사법이 다르다. 모세가 하는 말이 제사장은 속죄 제물을 먹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 율법에는 생활법(시민법)과 제사법이 있는데, 생활법에서 제사법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속죄제이다. 그러면 속죄제가 왜 통로인가?
* 제사드릴 때, 처음에는 번제가 나오고, 그 다음에 소제가 나오고, 화목제가 나오고, 속죄제가 나오고 속건제가 나온다. 왜 이렇게 되어 있느냐 하면은,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처음에 제사는 번제와 화목제밖에 없다. 아니 처음에는 화목제라는 것도 없다. 창세기 3장에는 오직 번제만 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사이에 속죄제가 있음은 번제를 번제답게 만드는 하나의 준비작업인 것이다.
* 그러니까 생활법에서 제사법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속죄제라고 하는 것은, 지금 제사법의 대표가 속죄제이고, 생활법의 대표가 속죄제인데, 속죄제를 먼저 드리고, 그 드린 속죄제가 타고 난 그 위에, 번제를 드리고, 그 번제가 타고 난 위에 겹치기로 화목제를 드린다는 것이다.
◈ 그러면 화목제와 번제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 화목제는 하나님이 하나님 쪽에서 베풀어주는 잔치이다. 다른 제사는 제물 드리는 사람이 참여하지를 못한다. 흔히 화목제를 모든 백성이 다 먹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오직 자원해서 드린 사람만 제사장과 함께 먹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먹는 고기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먹는 것이다.
* 제물 - 원래 제물이란 것은 하나님의 음식이고, 성소는 하나님이 주무시는 침실, 즉 안방인 것이다. 이 안방의 음식은 상에 차리도록 되어 있는데, 그 상에 12개의 떡이 있는데, 그것이 무교병이다. 그리고 성소에는 제사장만 만나도록 되어 있다. 백성들은 오직 제단 앞까지만 오게 되어 있다.
* 성소 구성이 3단계인데, 1단계-제단, 2단계-성소, 3단계-지성소이다. 이 지성소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 원래는 제사장도 못 들어가는데, 7월 10일에는 하나님이 특별히 봐주어서 들어가는 것이다.
◈ 에스겔 성전과 솔로몬 성전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 솔로몬 성전은 앞에 기둥(야긴과 보아스)이 있다. 앞에 기둥이 있는데, 높이가 60M이고, 이 안에 방이 있다. 제물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한다.
* 그런데 에스겔 성전에는 방이 총 30개가 있다. 부엌 북쪽에는 방이 없고 1층에는 방이 각 방면에 10개씩, 총 30개가 있다. 3층으로 되어 있다. 방이 총 90개에다가 성소 제단은 4층으로 되어 있다. 방은 제사장이 기거하는 방이다. 지성소는 못 들어가게 되어 있다. 지성소는 제사장이 기거하는 방이 아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침실이고, 하나님만 있을 수 있다.
* 그래서 예수님이 성소의 휘장을 찢어지시고 들어 가셨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이다' 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리를 찾아서 들어가시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제사를 죄를 씻어 주는 것으로 단순히 생각하면, 레위기, 민수기 26장, 28장 등, 전부가 거짓말 해석이 되고, 출애굽기, 에스겔도 다 거짓말 해석이 된다.
* 절기 - 절기에 제물이 들어가는데, 그래서 절기가 바뀐다. 생활법과 제사법의 다리는 속죄제이다. 원래 없었는데 생기는 것이다. 없었는데, 대 제사장이 속죄일 할 때에 처음 등장한다. 레위기 9장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처음 절기가 3가지 절기인데, 처음 절기가 유월절이고, 유월절 안에 그 다음 맥추절이 들어 있고, 맥추절 안에 수장절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밖에 대 속죄일이 있다.
* 이 대속죄일과 수장절을 보통 같이 본다. 7월 10일, 그리고 7월 15일에서 1주일간은 초막(텐트)생활을 한다. 그 이유는 처음 민수기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유월절의 모습, 즉 양을 바침으로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아서 추수를 하게 되는데, 이 추수곡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곡식이다' 라는 의미이다. '어린양의 희생 때문에 우리가 추수를 했기에 도로 돌려 드립니다' 라는 것이다. - 맏물(첫 수확물)
* 십일조 -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이 곡식을 돌려 드립니다. - 이것을 맏물이라 한다. 맏물을 십일조라 한다. 맏물은 이 모든 곡식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 사이의 계약에 의해서 주어진 그러한 곡식입니다' 라는 뜻에서 제사 드리는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은 전적으로 제사장 몫으로 드리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드린다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모든 십일조는 제사장에게 다 모이게 되어 있다. 비록 제사장은 땅이 없지만, 그러나 땅이 없어도 얼마든지 이렇게 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 에스겔에서의 새 성전 개념
* 그런데 에스겔에 보면 이것이 뒤바뀐다. 대 속죄일이 유월절로 바뀐다. 유월절이 대속죄일로 바뀐다. 그래서 대속죄일은 그 의미가 희미해 져 버린다. 이 유월절이 강화되어, 에스겔에서 새로운 성전은 기존의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는 차원에서, 새로운 성전이 등장하는 것이다.
◈ 새로운 성전의 특징 - 기존의 성전에서는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지만, 새로운 성전에서는 왕이 드린다.
(겔 44: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 동향한 바깥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히었더라
(겔 44: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겔 44:3)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 에스겔 성전은 다윗언약 이후의 성전이기에, 즉 계약 이후의 성전이기에 다른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오직 왕만을 상대한다.
(겔 45:22) 그 날에 왕은 자기와 이 땅 모든 백성을 위하여 송아지 하나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겔 46:4) 안식일에 왕이 여호와께 드릴 번제는 흠 없는 어린 양 여섯과 흠없는 수양 하나라
* 에스겔 성전의 특징은 우리를 보고 성전을 지으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내가 지었다는 것이다. 측량을 하는데, 이 측량은 하나님과 다윗하고 둘이 하고 짓는 것이다.
(겔 37:24) 내 조상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겔 37:25)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겔 37: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겔 37:27)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겔 37: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 성전의 깨어짐 - 제대로 된 왕만 있다면, 그 왕이 있는 곳에 뛰어 들어서 내가 영원히 처소가 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개판이 되고, 왕도 없어지고, 지금 에스겔은 지금 포로 잡혀 있는 상태, 즉 하나님의 성전이 깨어진 상태이다.
◈ 그렇다면, 기존의 하나님의 성전이 깨어 졌다면, '참 하나님의 성전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겔 11: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 그들에게 잠시동안 성소가 되는데, 그런데 성소란 것은 반드시 왕이 있고 난 뒤에 존재한다. - 다윗 성전이후에는 왕이 있고 난 뒤, 왕에 의해서 세워지는 성전이어야 한다. - 그런데 기존의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들이었다. 그래서 성전이 깨어 졌다. 지금은 왕이 없다. 포로로 잡혀 간 상태다.
* 그러면 하나님이 성전을 세우기 전에 어떤 조치를 먼저 취해야 하는가? - 에스겔 34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왕과 계약을 먼저 맺어서, 다윗을 다시, 새로운 다윗(다윗의 후손)을 주어 계약을 맺어서, 그 왕이 자기 마음대로 성전을 세우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그 새로운 성전에는 누구만 들어 갈 수 있는가? - 그것은 오직 왕의 자비에 의해서만 들어 갈 수 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은, 옛날에는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면서 유월절이 중심이었다. 백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속죄제, 그래서 제사 제도가 필요했다. 그런데 에스겔 성전에서는 왕이 백성의 죄를 몽땅 대속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백성의 죄를 다 짊어지고 성소를 정화를 해주고, 정결을 시켜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백성이 더럽다면, 이것을 하나님의 성전을 정화할 책임이 왕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 축제는 1월 1일이 있고, 1월 7일이 따로 있는 것이다.
* 1월1일이란? - 모세가 성막을 최초로 세운 정월 초하루 날이 바로 이 날이다. 이스라엘의 정월달이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정월달이 날자가 바뀐다. 희한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출12: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12: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 이스라엘과 시간 -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은 시간 속의 나라가 아니고, 시간을 가지고 노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국가가 먼저이고, 시간은 그 국가가 하는 일을 보여 주기 위한 종속되는 것이다.
◈ 안식일 개념의 변화 - 안식일 개념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전에도 안식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이후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되게 하는 안식일로 바뀐다. 그것이 바로 제삿날로 바뀐다. 전에는 쉬는 날이지만, 이제는 제삿날로 바뀐다. 즉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시간을 말한다. 지금은 안식일 없다. 영원한 제사가 있기 때문에 모든 날이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자 하는 것은 시간 개념이 남아 있을 때이고,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되면, 시간이 이 국가에 종속된다.
◈ 신약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되면, 기존의 구약의 안식일 개념을 적용을 하면 안 된다. 시간도 종속된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 된다.
* 제사하는 날 - 유월절인 1월 1일이 이제 축제일로 정해 버렸기 때문에, 1월 1일이고 1월 7일이고, 모든 날들에 다 똑 같은 제물이 들어간다.
◈ 유월절의 참 의미 - 그런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은 속죄일에 드릴 제물을 유월절에다가 엎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유월절이 무슨 날이 되는가 하면, 이제부터는 어린양을 잡는 날이 아니고, '우리 잘못으로 성전이 깨어졌다. 그래서 우리가 남의 나라로 쫓겨났다!', '다 우리 잘못이다!' 이렇게 자기 죄부터 먼저 회개하는 날이 되고, 또한 그러한 새로운 성전이 등장하는 것이다.
◈ 참 교회 - 그러면 신약에서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의 십자가 바라보면서, 우리의 죄부터 회개하는 그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우리가 오죽 못났으면 주님이 십자가 달렸겠는가?' 이렇게 자기 죄를 생각하는 이것이다. - 이것이 새로운 제물인데, 바로 예수님이 제물이고, 성전이고, 제사장이다. 마침내 율법의 마침이 되셨던 것이다. 새로운 의가 시작되는 것이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율법의 중심은 제사법인데, 여기에는 세 요소가 있어야 한다. - 성전, 제물, 제사장
* 이 세 가지 요소가 하나님이 있는 침실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의 죄를 씻는 차원이 아니다.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의 모든 제물은, '내가 감히 여기에 있는데 어디에 더러운 것이 감히 들어와 있느냐, 빨리 청소 안하느냐!' 라는 하나님의 호통에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이것이 제물의 역할이 되는 것이다. 즉 정결하게 하기 위한 제물이다. 여기 성전에서는 거룩을 계속 유지하라는 것이다.
◈ 율법의 마침 - 그런데 이 세 가지가 히브리서에 보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면 이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 믿으면 의가 되는 것이다. - 오직 예수!!
* 우리가 주님과 동거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런 근거이다. 이런 근거가 바로 구약 모세언약이 더 개화되어서 에스겔에 가보면, 용서하는 것인데, 그 용서는 바로 괜찮은 왕 때문이다. 왕은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왕이다. 이 왕에 의해서 새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 에스겔에서 성전은 문이 동쪽으로 나 있다. - 오직 하나님만이 출입하시고, 제사장은 안 된다.
(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여기서 맑은 물과 새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 그러면 왜 새롭게 해야만 되는가? - 기존의 인간들이 알아서 자기들의 손과 발로 만들면 안 되는가? 왜 맑은 물과 새 영을 주어야 하는가? 이 물과 영은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구약의 이스라엘의 보면 알 수가 있다. 오직 새 왕이 등장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 분만이 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 요한복음 7장 - 내가 돌아온 왕이고, 성전이다. 이는 에스겔의 완성이다. - 기존의 제사 치워라!!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 요한복음 4장 - 예수님이 진리와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니까, 여자는 그렇게 되려면 메시야가 먼저와야 한다고 한다. 이는 에스겔서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에스겔에 의하면, 반드시 새 왕이 있어야 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즉 성령이 오려면, 그 앞에 반드시 새 왕(메시야)가 와야 하는데, 예수님은 '내가 왕이다', '내가 메시야이다' 라고 선언을 하시는 것이다. - 심봤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 에스겔 성전 - 이 성전은 인간이 짓는 성전이 아니다. 그런데 헤롯은 자기가 왕이란 것이다. 그것은 헤롯 성전에 불과하다. 헤롯이라는 왕과 아기 예수와의 대결이다.
* 아기 예수를 만나면 모든 기쁨은 다 보장 된 것인데, 우리는 교회에서 이러한 보상을 바라지 않는가?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 장로인데, 권사인데' 라고 말이다. 버려야 한다.
* 에스겔의 왕(목자)은 기존의 왕과는 다르다. 새로운 왕은 모든 절기를 속죄일로 다 바꾸었다. 회개만 하면 된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짓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 그 신은 다윗언약에 의해서 새로운 왕이 올 때 그 왕에 의해서 주어진다. - 이루어지는 것이다.
◈ 정 리
* 처음 유월절 - 곡식 풍성 - 수장절로 - 그러나 먹고 배부르니 계약이 다 깨진다.
* 다윗언약 -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하나님은 '왕인 네가 짓는 것 말고, 내가 지어서 너에게 줄게!' 라고 하셨다. 여기서 한결같이 학자들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지어주는 성전을 다윗의 가문이라고 한다(삼하7:14). 그런데 그 이상은 침묵한다.
* 성전의 깨어짐과 새로 세우심 - 그런데 다윗 가문은 한결같이 악하다. 그래서 성전이 깨진다. 다윗 가문도 깨진다. 그러면 다윗 가문은 무엇인가? 솔로몬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다윗 가문은 어디에? 돌아온 무법자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하나님이 왕이 되어서, 다윗언약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다시 와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왕으로 세우고, 임의로 새 영을, 맑은 물을, 성신을 공급해서 성전을 세우시는 것이다.
* 대속죄일 -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계약을 맺을 때 피와 살로 계약을 맺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제사 절기가 대속죄일로 바뀌기 때문이다. 모든 제사 절기가 다, 자기의 피와 살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 다 이루었다 - 이것을 새 언약이라 한다. 기존의 언약은 물 건너갔다는 것이다. 이 새 언약 모르면 망한다.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흩어져도 우리 몸이 성전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맑은 물이 있다면 다 이루오지는 것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사라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초대교회가 없다고 아쉬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헌당식이 웬 말인가?
* 우리가 예수님이 성전이 되고 우리도 한 몸인 것을 알기는 알았는데, 그 동안 에스겔서의 새 성전과 재물의 개념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결론만 알았지 연결을 잘 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 에스겔에서 말하는 성전의 연결고리를 안다면, 사마리아 여인도 진리와 영으로 예배드리기 전에 메시야가 먼저 와야 된다는 것을 알았는데, 에스겔서를 꿰뚤고 있었는데, 문둥병자도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즉 다윗언약을 알고 있었는데, 오늘의 목회자는?
* 제사가 보여주는 것 - 성전과 제물과 제사장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우리도 버틸 수 있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 그러면 청소해(제사지내)!
*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하나님 -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서도 죽지 않아서 브니엘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구원에 초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이 목적이다.
* 이 야곱이 확대되어서 이스라엘이 되는 데, 그래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이 지상에서 유일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인간 구원이 아니다.
*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어떻게 청소하는가? - 그냥 회개하면 된다. 회개하라. 주님의 행위, 왕의 행위 자신의 행위에 맞추는 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끊는 차원이 아니고, 계속 땡기는 것이 술이고 여자이다. 오직 성령에 취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땡기면 술이 안 땡긴다. 부자 청년은 돈에 땡겼지, 주님에 안 땡겼던 것이다.
* 질문 - 에스겔의 성전이 보여주는 것은 다윗의 성전에 비해서 인간의 어떠한 면인가?
* 이사야 6장 - 이사야가 6장 1절을 보면, 웃시야 죽던 해, 이사야는 거룩한 이스라엘의 왕을 만나고 난 뒤에 완전히 맛이 가 버렸다. 그래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외친다.
* 에스겔의 새 성전 - 그런데 에스겔에서는 한 수 더 뜬다. 하나님의 진짜 성전이 1장에서부터 완전히 노골화되는 것이다. 이 성전과 기존의 바꾸기 위해 성전을 빠져나가는데, 그래서 동쪽으로 성신이 빠져나간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성신이 함께, 남은자들과 함께 돌아 와서, 제대로 된 왕이 목자가 되어서 남은자들이 몽땅 예루살렘 본토로 돌아와서 새 성전을 세우는 것이다. 이제는 옛날의 시시한 영광이 아니고, 에스겔 1장, 2장의 그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와 발전과 같은 개념보다도, 하나님의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다.
(사 6:1)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회개 - 죄를 지어서 회개가 아니라, 그 영광이 너무 엄청나서 회개를 하는 차원이다. '아,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모습이다. 십자가 앞에서 피 흘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목회해서 먹고살려는 그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떨구는 것이다. - 죽는 것이 나은데, 살고자 하는 것이 죄구나 !
☞ 선택, 126 페이지
⊙ 하나님께서 장소를 미리 택하셨다는 사실은, 그 택한 장소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장소에서는 하나님의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것이다. 따라서 택한 장소에서는 주님의 이름만 기념되고 높아져야 하는 것이다. 선택된 인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책)
(신 17: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 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정신이 들어 있어야 된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아버지가 왕이라도 자식도 왕이 되는 법은 없다.
* 어떻게 택함을 받은 줄 아는가? -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 달린 문제이지만, 자가의 구원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심이 있다면 택함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택함이란, 구원의 선택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 앞에서 '나는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없고, 주님의 손안에 들어 있다' 라는 정신이 들어 있어야 한다. 옛 사람의 사고 방식은 자기가 잘라서 완전해 지는 줄로 알지만, 택함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
☞ 선택, 127 페이지
⊙ 이 선택은 왕의 권한으로서의 선택이기에 그 누구도 이의를 달수가 없다. 왕으로서 선택성이 잘 나타난 것이 바로 다윗언약이다. (책)
(신 17: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 가문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신다. (책)
(시 78:67)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시 78:68)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시 78:69)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시 78:70)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시 78:71)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시 78:72)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 구약학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사상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분열된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고, 다윗이 너무 융통성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 - 이스라엘에는 노선이 두 개인데, 다윗만을 고수하는 노선과 여호수아 노선이 있었다. 그런데 이 다윗을 고집하는 노선의 독선 때문에 나라가 갈라졌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도, 예수님 스스로가 아니라, 이러한 독선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후대에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조상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편집했다는 것이다. - 총신에서도 이렇게 배우고 있는 것이다.
* 새로운 성전에는 아론 계통이 아니고, 사독 계통만이 제사장이 된다. 왜냐하면 다윗 때는 사독 계열만 지명했듯이, 새 에스겔 성전에도 그대로 사독 계열만 지명했다. - 이것도 구약학자들은 다윗 계통이 에브라임 지파를 미워해서 그렇게 했다고 주장을 한다.
* 구조주의 - 성경을 말씀으로 안 보고, 자세히 살펴서 분석을 하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국어학자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조분석을 해도 안나오게 되어 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이지, 국어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 그레마스의 인물론, 기호론 - 주체와 객체의 인물구조는 주체를 중심으로 만난다.
* 롤랑 바이트 - 하나의 의미가 생기면 그 의미는 부정과 모순의 4가지의 모서리를 가진다. 어떤 문학이던, 성경이라도 이것으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 예) 사람, 사람의 반대-짐승, 사람의 비(非)사람-로버트, 짐승의 반대-하청동물, 이렇게 4가지 모순이 반드시 생긴다는 것이다.
* 노들븝프라 - 신화를 예표와 상징으로 설명했다. 은유, 환유, 상징, 신화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경도 계속해서 파고 들어가 보면, 원래 신화적인 요소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김지찬 교수가 그대로 전하고 있다. 아마추어 국어학자로서 말이다.
* 시편 - 시편강의도 모빙켈, 구켈이 주장한 대로, 왕을 중심으로 축제를 모방해서 시편해석을 하는 것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잠언, 전도서 등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애굽의 잠언집인 '아멘호텝'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을 폰 라드가 주장한 것처럼 구속적 전승만을 생각하지 말고, 창조적 전승도 생각하자는 것이다. 즉 모든 민족에 공통적으로 다 들어있는 창조적 개념을 무시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쓰레기들이다.
* 칼 라너의 [ 익명적 그리스도인 ] - 창조와 구속을 다 생각하자. 즉,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 총신대 교수들 - C.C.C., 침례교 출신이다. 가정목회, 목회 상담학 등으로 출발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문제다. 아무리 학문을 해도 본색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선택을 그렇게 싫어한다. 선택되었다면 전도를 안 해도 되는데, 전도하지 말고 도를 전하면 되는데, 실컷 전도해놓고, 배나 지옥 백성 만드는 것이다. 회개만 하면 된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는 암웨이가 아닌 것이다. 전도를 상품화 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선택, 127 페이지
⊙ 가문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신다. (책)
* 다윗언약이 보여주는 것은 일방적인 선택이고, 사랑으로의 접근이다. 유다지파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며, 또한 에브라임지파를 싫어하시는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이 말은 유다지파가 에브라임지파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다는 말도 결코 아니다. 오지 하나님의 선택이다. 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선택만 들어 있으면 된다. 선택해서 사랑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 주기도문의 해석
(마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수 없는 주기도문의 해석이 나왔지만 제대로 보는 것이 없다.
◈ 그러나 주기도문의 해석 - 출애굽의 재현이다. 간단하다. 이것밖에 없다.
◈ 주기도문은 지금 출애굽을 재현하는 것이다. 옛날 광야 같은 세상에서 주신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죄(罪) 문제이다. 죄는 의 앞에서 맥을 못 추게 되기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죄 용서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핵심은 죄용서 위해 회개이다. - 회개! "주여, 회개합니다. 내 이름은 죽이고 주의 이름 높이고, 이름을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 전부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이다. 다만 악(애굽, 죄)에서 건지시옵소서! - 이것이 회개이다.
*주기도문이 바울서신에는 없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주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하옵소서!' 라고 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바울의 기도를 공관복음의 기도와 비교해야 한다.
* 아더 핑크 -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를 좌를 했지만, 그냥 모으는 차원에서 그치고 말았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와 그 고리를 연결해야하는 정작 중요한 것은 못 하고 말았다.
* 신학자들의 성경을 보는 특징 - 이러한 연결을 시도하지 않는다. 각각 따로 지었기 때문에 연결점을 찾지 않는다. 공관복음서도 서로 각각이다. 성령의 영감으로 저술되었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제임스 던의 [신약성서의 다양성과 통일성]에도 보면 다양성만 있지 통일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 그러나 공관복음의 신학과 서신서 신학의 통일성을 연구해야 한다.
* 사도행전 - 이 책을 종교사학적으로 연구를 한 것이다. 그 당시에 팔레스타인파(율법고수), 안디옥 파(율법 타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를 갈라디아서에서 볼 수 있는데, 바울과 베드로 다툼 장면으로, 바울에게 베드로 목사가 면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샌더스는 도덕법은 괜찮다고 한다. 베드로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율법이 몽땅 다 사라졌는데도 말이다.
◈ 신약의 두 가지 전승에 대해서
* 신약에는 두 가지 전승이 계속 대립되어 이어진다고 한다. 조직파와 방랑파라는 것이다.
* 조직파 - 교회 조직 인정하는데, 그러므로 교회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추방을 하는 것이다. - 디도서, 디모데전후서 등이 이러한 노선이고, 그래서 감독의 말을 존경하고, 그래서 이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방랑파 - 돈, 전대 등을 가지지 말고, 그냥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요한일서, 이서, 삼서에 이어진다. 감독을 인정하지 않고, 그냥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합칠 수 없는가? - 요한 계시록에서 합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지금 총신에서 다 배우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이것을 배우려고 미국 가고 있다. 방랑파는 유대의 묵시문학을 배워서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이 따위 소릴 한다. 전혀 근거 없는 역사인데 말이다.
◈ 한 마디로 말해서 선택인데, 교수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 개념이 없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교회이고, 이러한 교회의 특징은 오직 주님의 피와 살로서 우리가 죄 용서를 받아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이것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목사가 되었으면, 목사를 버리게 하시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선택인데, 그 손길만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