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그 이름은 가슴을 설레게 하고 이유 없이 눈가에 눈물을 맺히게 하며 영원한 젊음을 안겨주고 우리들에게 용기, 무한한 가능성, 희망을 주는 멋진 빨간 명찰 사나이의 이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준비에 열중하던 때 나의 경우 보충병으로 편입되어 군대가 면제되는 줄 알았더니, 뜻하지 않게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 그러나 이때 해병 36기 사관후보생 모집이 있어 지원하였다.
당시 서울에 있는 용산구 후암동 해병대사령부에서 해병학교에 입교하라는 통보를 받고, 1966년 6월 난생 처음 경상도 땅을 밟고 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처음에 가입교라고 하는데, 가입교생에게 집합하여 일장 훈시를 하는 해병 중위가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우리를 교육시킬 구대장이라고 한다.
그때 해병대 구대장님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대한민국 해병대 장교의 완전한 모델이었다. 칼날 같은 팔각모, 주름이 잘 잡힌 해병전투복, 그리고 멋진 쎄무화, 잘 단련된 해병장교의 몸매, 박력 있는 언동, 40년 전 내 머리 속에 그려진 김흔중 구대장님의 모습은 어느 하나 해병으로서 손색이 없다.
나는 그때를 생각한다. 나도 김흔중 구대장 같은 멋진 해병이 될 수 있을까? ‘나도 저렇게 멋진 해병이 되어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1966년 6월은 30년 만에 가장 무더웠다. 찌는 듯한 더위 속의 여름에 해병학교에서 36기 동기생은 해병혼이 담긴 혹독한 무적해병의 교육을 받았다. 상륙작전의 특수성에 비추어 볼 때 상륙 후 바다를 떠나면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는 해병대 특성상 죽기 아니면 살기의 작전 수행일 뿐이다. 이러한 목표달성을 위해서인지 내가 느끼는 해병대 교육은 수시로 죽음을 넘나들고 어떤 경우는 죽기 일보직전까지 가차 없이 몰고 갔다.
특히 김흔중 구대장의 교육은 아무리 힘들게 몰아붙여도 합리적인 교육으로 모든 동기생이 해병으로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멋진 교육이었다. 다행이 낙오 없이 자랑스러운 해병대 장교로 임관하였다.
내가 해병학교에 입교할 때는 원래 재무병과였는데 이것이 임관 시에는 바뀌어서 보병병과로 임관되었다. 나는 해병대다운 키가 큰 늠름한 체격도 아닌데 보병 전투병과로 임명된 것을 보면 내게도 보병장교 자질이 다소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보병으로서 최일선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실무에 근무하게 되었다.
1969년 당시 월남전이 상당히 고조되어 있는 상황으로 나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 월남에 파병되었다.
월남으로 향하는 가이거호 수송선에서 난생 처음 몇 천 명이 승선한 큰 배를 타고 가는 중에 적도 인근을 지나갈 때다. 코발트빛 쪽빛 푸른 바다에 물결 하나 없이 거울을 그대로 깔아놓은 듯한 바다의 신비스러운 평면, 더욱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 끝으로부터 태양이 뜨고 그리고 지는 그 모습은 신이 주신 큰 선물이기도 하였다.
당시 사병 중에는 같이 갔던 유명 연예인으로 남진(본명 김남진), 진송남, 태원 등이 있었는데, 남진이 배 밑창에서 로링 피칭이 심해 어려움을 겪고 있어 딱한 마음에 규정위반이지만 장교 침실에서 좀 잘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가이거호는 계속 남쪽으로 남지나해의 파도를 가르며 밤낮 없이 가고 있었다. 밤에 가끔 배 갑판의 브릿지에 나는 혼자 올라와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하늘에 총총거리는 별을 보며 ‘내가 타고 있는 이 배에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인가?’ 라는 의문점을 던지기도 한다. 앞서가는 동기생들, 선배들을 생각해볼 때 돌아오지 못한 동기생들, 선배들도 있었으니 나도 그 속에 속할 것인지 아닌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는 문제이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작전 중 해병학교에서 배운 전술과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 지략을 총동원해서 적과 싸워 반드시 이겨야하고, 필요하면 나와 나의 부하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이국땅에서 불필요한 개죽음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월남 땅에 도착하여 부대 배치를 받게 되는데 ‘어디로 지원할까?’ 망설이는 가운데 특공중대 소대장으로 지원했다.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고 특공중대는 여단 외곽방어 임무와 특수전 상황 발생 시나 여단부대 위급 시에는 특수전을 치러야 할 위험도는 있지만 좀 매력적인 부대로 여겨 지원하여 일선 소대장으로 배속되었다.
당시 중대장은 해군사관학교 14기 김정삼 대위였다. 특공중대는 명실 공히 특공수색중대다. 내가 생각했던 그렇게 조용히 여단본부의 외곽방어를 하면서 간헐적으로 특수작전만 치르는 부대가 아니었다. 해병대 청룡 1대대, 2대대, 3대대, 5대대에 있어 작전 중 3대대가 터지면 3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즉시 투입, 특수작전을 지원하고 작전이 끝나고 돌아와 방석에 좀 쉬려고 할 때 5대대가 터지면 또 즉시 투입되는 ‘약방의 감초’ 요, 1대대, 2대대, 3대대, 5대대의 ‘동네 북’이었다. 기타 중대는 작전을 나갔다 오면 일정기간 방석에서 쉬지만 특공중대는 쉰다는 개념이 없다. 특공중대의 소대장으로 보직을 받은 덕분에 1대대에서 5대대까지 호이안 지역 일대의 작전지역 모든 곳에 짧은 기간에 참전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
월남 베리아섬 상륙작전
수행한 여러 작전 중 한두 가지 생각나는 작전은 해외에서 한국 해병대의 고난도 상륙작전인 베리아섬 상륙작전 그리고 매복 작전이다.
베리아섬은 베트콩의 소굴로 상당히 어려운 지역이다. 헬리콥터로 직접 공중에서 병력을 투입하기보다는 상륙하여 적을 투망 식으로 몰고 가는 것이 작전상 효과적인 지역이다.
1969년 중대장이 다른 부대에 파견되어 부득이 내가 중대장 겸 소대장 역할을 하며 베리아섬 상륙작전 준비를 하였다.
난생 처음 미 7함대 소속 LSD21에 승선하여 미 해군 함장과 작전준비에 협조하여, 이 함대에 특공중대 상륙주정 등을 모두 싣고 남지나 해역을 약 5일간 선회하는 동안 밤낮없이 미 해군 측 상황실에서 영어로 지역상황, 지역위치를 브리핑 했다. 드디어 새벽 4시를 기하여 베트콩 소굴인 베리아에 상륙할 수 있는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 함대를 떠날 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미 해군 대위가 나에게 “그곳은 위험한 곳이라는데 당신의 행운을 빈다.” 고 마지막 악수를 하며 5일간의 전우애를 뒤로 하고 7함대 LSD를 떠났다.
D데이 새벽 상륙주정은 남지나해의 푸른 물결을 가로 지르며 베리아섬을 향해 내달린다. 미 7함대 지함에서는 함포로 계속 베리아섬에 지원사격을 하며 우리는 계속 적진을 향하여 질주한다. 베리아섬 모래밭에 상륙하자마자 베트콩의 스나이핑(저격)이 여기저기서 날아오기 시작한다. 목표는 없는 듯 산발적으로 교차사격인지 분간을 할 수 없으나, 계속 날아와 전진할 방법이 없다.
일단 모든 대원들에게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그 자리에서 전진하다간 희생이 따를 것 같아 전술적 지혜를 활용하고 가능한 한 그 자리에서 모래를 신속히 파고 은폐 엄폐할 수 있도록 하면서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함에 따라 적을 밀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다가올 적 상황을 파악하고 하루 종일 적과 교전공격하며 전진하였는데 그 거리는 불과 약 500m밖에 가지 못했다. 워낙 우거진 정글에다가 적 지역에 대한 상황 판단이 쉽지 않았다.
한편 월남에서 야간 작전은 주로 매복 작전이 주된 작전임을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매복 작전에서 자칫 소대장의 판단 여하에 따라 적을 섬멸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 아군도 희생이 날 수도 있다.
내가 지휘하는 특공중대 소대에서 매복 작전을 대과 없이 수행한 것은 해병학교에서 배운 원칙 그대로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1969년 8월 중대본부는 128고지를 두고 동기생 황의석 중위는 포병장교이므로 중대장 김정삼 대위와 같이 중대 지휘부에 있었다. 특히 초급장교일 때에 포병장교는 적과 조우 전투 시 보병장교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나는 소대장으로 명에 의해 128고지 하단부에 3개 소대와 밸런스를 유지하며 매복을 하게 되었다.
중대본부에서 볼 때에는 지형이 어느 정도 좋은 줄 알았는데, 산 아래로 내려와 매복지점을 보니 도저히 매복하기 좋지 않은 지역으로 판단하고 매복지역 변경을 중대장께 건의하였으나, 중대장님은 고집을 꺽지 않고 완강히 밀어 붙여 할 수 없이 소대장인 저는 그 지역 범위 내에서 최대한 지형지물을 살려 매복지를 선정하기 시작하였다.
소대장이 앞장서서 각 분대장을 데리고 분대 매복위치를 선정하고자 부비추랩(지뢰)의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사면에 가보니 성(城 )터와 절터가 있는 곳이라 만약 적이 성터 위에서 사격을 하면 공격하기 어렵고 아군의 희생이 있을 것이고, 좌측에는 대부분 공동묘지라 공격하기 곤란하고 오른쪽은 개활지라 은폐 엄폐도 되지 않고, 어디가든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소대장으로서 나는 결정을 못하고 피 말리는 고독에 사로잡혀 있었다. 매복지 선정에 따라 유사시 작전상황은 확 달라지기 때문에 이는 전적으로 소대장의 책임이다.
또다시 매복지를 답사한 결과, 적과 조우시 적을 사살할 수 있고 우리 소대도 비교적 은폐 엄폐할 수 있는 곳을 찾아내 궁여지책으로 매복지를 선정하였으나, 문제는 농사짓는 물이 흐르는 양쪽 둑이 있는 수로가 있는데 물이 마른 상태라 이곳으로 적이 침투할 가능성이 많아 고민, 고민하면서도 최적지로 보아 결정하였다.
피 말리는 매복지 위치선정을 마치고 각 분대는 정 위치에서 각 각 원형 매복준비를 하였다. 즉 크레모아(전면 쇠구슬이 터지는 지뢰)를 전면에 깔고 조명지뢰도 전면에 깔고 각 분대에서 다 준비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점검을 해본 결과 제 2분대장은 물이 말라있는 수로에 한 개의 조명지뢰를 깔아놓고 이상 없다고 매복준비를 완료했다고 안심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수로를 지키는 영역권에 있는 주민호 2분대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하사, 자네는 월남전 베테랑인데 이렇게 조명지뢰를 설치해도 되느냐?”고 묻자, 그는 “이 정도면 된다.”고 답했다. 그러나 소대장인 내 판단으로서는 만약에 이 수로로 적이 들어오면 적을 신속히 발견할 수 없어 그대로 진(陣)내에까지 들어오게 된다면 우리 소대는 위험이 따를 수 있어 주하사에게 다시 조명지뢰 등 조치를 지시하니 주하사는 그대로 매복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나에게 재건의 하였다. 왜냐하면 조명지뢰가 다 떨어진 상태라 128고지에 있는 중대본부까지 가서 가져오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날도 어두워지고 고지까지 거리가 있어 가는 중 잘못하면 위험이 따를 수 있어 섣불리 움직이는 것도 문제는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냉철히 생각했다. 가이거호 브릿지에서 나는 ‘결코 죽지 않고 살아서 간다. 우리 소대원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은 생과 사의 문제이니 완전한 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 주하사에게 재차 강하게 명하여 어둠이 깔려있는데도 대원 2명을 대동시켜 중대본부에 보냈다. 1시간쯤 지나 무사히 여러 개의 조명지뢰를 가져왔다. 이 조명지뢰를 분대장 초소전방에 있는 물이 마른 수로에 여유 있게 넉넉히 깔아놓고 보니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불쾌지수가 높은 후덥지근한 날씨에 웬 왕모기는 전투복 복장을 뚫고 무는 바람에 독한 미제 모기약을 몸에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원형매복을 시켜 소대장을 가운데 지휘부를 두고 만약 부상병이 나오던가 하면 위생하사를 직접 투입하여야 하므로 위생하사를 소대장 곁에 주어 융통성 있게 투입하는 것이 월남전의 관례다. 그런데 이날따라 위생하사 하는 말이 지난 밤 가족이 보이는 꿈에 예감이 이상해 소대장 곁에 있고 싶지 않고 일선 분대장 곁에 있고 싶다고 해서 나는 즉시 주민호 제2분대장 소속의 물이 마른 농수로 옆에 배치시키고 조용히 매복 중이었다.
이미 밤이 어두워 밤 9시쯤 되자, 전방 분대장으로부터 멀리서 담뱃불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다고 해서 철저히 경계하며 적 출현 시 즉각 응사할 것을 명령하는 등 만반의 사격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20분쯤 흘렀을까, 전방에 깔아둔 조명지뢰가 연속적으로 퍽! 퍽! 퍽! 퍽! 퍽! 터지면서 5명의 베트콩 선발대 첨병이 물이 마른 수로를 따라 소대 매복지로 신속히 전진하는 것이 노출되었다. 베트콩 첨병 5명 중 2명은 진내 크레모아 안쪽까지 들어왔고 3명은 크레모아 지뢰 전방에 들어오는 순간, 마침 전방에 보냈던 위생하사가 적을 보는 순간 고국에 두고 온 자식을 생각하며 크레모아 지뢰를 사정없이 눌렀다. 이렇게 첫 크레모아 지뢰가 ‘꽝!’ 하며 터지자 일단 크레모아 전방에 있던 3명의 베트콩은 크레모아 탄환에 쓰러지고 크레모아 바로 후사면에 와있던 2명의 베트콩은 크레모아 지뢰의 후폭풍에 쓰러졌다. 이들은 죽지는 않았고 꿈틀거리며 베트콩의 전유물인 방망이 수류탄을 우리 소대 매복진지에 바로 던지려고 하는 순간 전 소대원이 일제 사격으로 베트콩 첨병 5명을 사살하였다.
동시에 전방을 보니 적은 아군보다 훨씬 많은 병력으로 여기서 장시간 전투를 하기가 힘든 상태였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5명 사살 후 전방 적에게 적극 공격함에 따라 적이 퇴각되던 중 우리 소대 화력을 과시하여 병력이 많은 것으로 적을 오인시키기 위해 가지고 있던 실탄을 일제 사격 등으로 상당히 소진함에 따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소대 병력을 128고지 중대본부로 이동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월남전에서 특히 야간 작전의 경우 지형지물이 잘 파악되지 않는 곳에서 이동작전은 어려움이 있다. 128고지의 중대본부에 60mm 박격포를 요청했고 상대방 적 병력을 감안할 때 80mm 박격포까지 대대에 지원 요청하였다. 이렇게 공격 중 우리 소대의 야간 이동 행로를 적으로부터 은폐하기 위해서 중대장에게 적극 요청, 비행기를 동원, 적 진지에 비행기 서치라이트를 비추어가며 우리 소대원 전원을 중대본부까지 무사히 이동시켰다.
중대본부에 돌아와서 생각 해 본다. 만약 이번 매복 작전에서 수로에 여러 개의 조명지뢰를 조치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철저한 경계와 작전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 소대는 적 발견에 한발 늦어 심각한 작전이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 느끼고 있다.
36년이 지나 한 세대가 지나가 버린 세월 속에서 한국 해병대의 솔선수범, 용맹성, 군인으로서의 자기임무 철저 수행, 전쟁터에서 상하간 그리고 동료 간의 끊을 수 없는 전우애, 이것이 있기에 세계 전사에 영원히 기록된 외신 기자가 붙여준 한국 해병대의 자랑스러운 명칭 ‘귀신 잡는 해병’ 이 탄생된 것이다.
더욱이 월남전에서는 ‘신화를 남긴 해병’ 으로서 그리고 6. 25전쟁 시 천하의 미 해병대도 해낼 수 없는 한국 해병대의 전과에 감동하여 이승만 전 대통령께서 친필 휘호로 주신 ‘무적 해병’ 등으로 한국 해병대의 이름에는 불가능이 없다. 자유와 정의의 전사로서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 이란 불멸의 이름이 우리 해병 모두에게 가슴 깊이 새겨져 있고 이것이 우리 해병대의 고귀한 자산이기도 하다.
광주일고(34회) 성균관대경상대학 졸업 (경영학사)서울대 공과대학 졸업(AIP)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경영학 석사)미 남가주대 대학원 (교육학 석사)
해병대 특공중대 소대장 베트남 참전, 한국상업은행·대한주택공사 공채 입사
대한주택공사 경기지역 본부장(이사) 역임,해병대 청룡회(장교단) 간사장, 부회장 역임, 재경 광주일고 34회 회장, 총동창회 이사, 아세아 태권도 연맹 자문 위원회위원,- 공인중개사경영지도사 (산자부), 판교지구 전원주택지 개발대표
주요논문 - 부동산마케팅믹스 전략에 관한 연구 - 부동산개발 입시선정 전략에 관한 연구 (서울대 공대(AIP) 졸업시 우수논문선정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