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청소년기를 거친 뒤 어른이 된다. 내가 아이였을 때 세계는 둥근 공처럼 나를 감싸고 있지만, 어느 순간 원형의 완벽함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날카로운 바늘이 삐죽삐죽 공 안으로 침범해 들어온다. 그리고 위와 아래가 혹은 앞과 뒤가 뒤섞이면서 혼돈상태로 빠져든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헤세의 말대로 하나의 껍질이 깨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나와 주위의 가족에서, 친구들과 그 밖의 세상 사람들에게로 관계망이 확장되어 간다.
그러므로 모든 성장영화는 성인이 되기 전의 미성년의 혼돈에 대해서, 그 시절의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가장 창조적 에너지가 왕성할 때도 혼돈 상태 속에서다. 모든 것이 정돈되고 나면 세계는 안정감 있게 규칙적으로 움직여지지만 오히려 상상력은 축소되고 생산력은 감퇴된다. 시스템이 갖춰진다는 것은 창조적 에너지 대신 기계적 동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미성년의 혼돈은 그러므로 세계를 창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서 특히 몸살을 앓는다.
2003년 베를린 영화제 특별상을 받았고, 2002년 몬트리올 영화제 그랑프리 후보작이었던 이마놀 유리베 감독의 [마이 러브](원제:CAROL'S JOURNEY)도 성장 영화 중 하나다.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격동기의 시대적 변혁 속에서 세상에 대해 눈을 뜨는 열두 살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1936년 프랑코 장군의 반란군이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를 향해 쿠테타를 선언하자 힘없는 민중들이 연대해서 파시스트들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의 지식인들은 [국제여단]을 결성해서 공화파의 일원으로 참전을 선언했다. 1939년 프랑코 군대의 승리로 끝난 스페인 내전은 자유를 위해 총을 들고 [국제여단]에 참여해서 전선에서 싸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앙드레 말로의 [희망] 등의 소설을 탄생시켰다.
[마이 러브]는 1938년 스페인 내전 후반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 소녀 캐롤은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인 스페인 시골마을을 찾아온다. 캐롤의 아버지는 파시스트들에 대항해서 국제여단에 비행사로 참전중이다. 그러나 몸이 약한 캐롤의 어머니는 고향에서 세상을 떠나고, 캐롤은 이모 집에 맡겨진다. 파시스트인 이모부와의 갈등, 그 속에서도 캐롤을 지켜주려는 외할아버지의 사랑이 전개된다.
캐롤은 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마을의 개구쟁이 토미체를 비롯한 삼총사와 친구가 된다. 특히 개구쟁이 토미체에게서 이성을 느끼며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간 첫 키스, 토미체의 은밀한 은신처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캐롤을 성숙하게 만들어간다. 그러나 밤이 되면 파시스트들은 시민들을 트럭에 세워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처형한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고 싶지 않은 캐롤은 마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대신 어머니인 것처럼 편지를 써서 부친다.
캐롤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로부터 캐롤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남아 있는 캐롤을 위로하기 위해 비행기를 몰고 마을을 찾아온다. 그리고 파시스트들의 위협적 총격 속에서도 낙하산으로 작은 선물 상자를 떨어트린다. 그 속에는 캐롤에게 전해주는 모형 비행기가 들어 있었다.
프랑코 군대가 마드리드를 점령하고 전쟁이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을 때, 아버지는 몰래 탈출해서 캐롤이 외할아버지와 살고 있는 집으로 숨어든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은 그것을 알고 캐롤의 집을 수색한다.
[마이 러브]는 성장기의 고통스러운 통과제의를 맑은 서정적 감성으로 그리고 있다. 캐롤의 위치가 스페인 내전이라는 격변기의 암흑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의 탐욕과 거리가 있는 소년 소녀의 눈은 더욱 맑게 빛나고 있다.
보이시한 매력이 돋보이는 캐롤 역의 클라라 라고는 [마이 러브]를 통해 영화에 데뷔했으며 이 영화로 스페인 최고의 영화제인 고야영화제에서 신인여배우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두 번째 작품인 2004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후보작 [넥스트 라이프]에서도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토미체 역의 후안 호세 발리스타는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아역배우다. [엘 보라](2000년)로 데뷔한 이후 각종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신인남우상을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다. [마이 러브]에서는 거칠게 자랐지만 따뜻한 감성을 지닌 소년 토미체로 등장해서 항상 캐롤을 보호해준다.
황규덕 감독의 [철수, 영희]도 [마이 러브]의 아이들과 비슷한 연령층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장 영화다. 철수와 영희는 모두 초등학교 4학년, 우리나이로는 11살이지만 [마이 러브]의 아이들과 비교하면 2,3년 아래다. 그러나 가족으로 둘러싸인 소울타리에서 벗어나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면서 이성에게서 첫사랑을 느낀다는 것, 개인적 상처를 극복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큰 흐름은 서로 통하고 있다.
[마이 러브]나 [철수, 영희]처럼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성장 영화들에서,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성인 영화보다 크다. 내러티브가 성인 영화에 비해서 단순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배우들의 울림 있는 연기력이 관객들에게 훨씬 호소력을 갖고 전달되는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최근 국내 개봉한 어떤 물량주의 영화보다도 훨씬 깊은 영화적 진정성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