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출신의
한사람으로써 양심에 기준을 두고 입을 열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거듭되는 고민 속에서 남편 모르게 혼자만의 속알이도 꽤 오래 해왔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의 회장님과 성원들이 먼저 나서서 총대를 멘 것은 사실이지만 비록 늦은 지금이라도 내 자신이 담당해야 될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또 그 일에 소신껏 뛰어들고 싶었다. 나도 나서서 힘을 보태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이 아마 작년(2008년) 12월
중순경이었다. 주일예배를 보기 위해 교회에 갔는데 전도사님을 통해서 목사님께서 설교가 끝난 다음에 사무실에서 잠깐 보잔다고 연락이 왔다. 예배가
끝난 뒤에 목사님의 사무실로 찾아 갔더니 목사님께서 인터넷에서 프린터 한 A4용지 두 장짜리 기사를 내놓으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자매님 북한에 있을 때 여군 장교로 복무하셨지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목사님께서 나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시면서 느닷없이 5.18광주소리를 문뜩 꺼내시는 것이었다. "1980년 5월에 우리나라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시민들의 폭동을 혹시 북한에서 들어 본적이 있으세요?" 5.18이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목사님께 알고 있다고 대답을
했다. "북한군 출신들이 5.18광주사건 때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이 내려왔었다고 양심선언을 한 기자회견 내용을
나도 보았는데 그것이 백 프로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저도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목사님께서는 프린터 한 기사 두 장을 보이시며 "이 기사를 읽어 보세요. 월간조선의 조갑제라는 사람이 쓴 글인데
보수진영에서는 대표적인 논객으로 불릴 만큼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예요. 광주사건 당시 기자신분으로 현장을 취재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글이 그 사람의 손에서 나오지요?" 나는 목사님이 내미는 A4용지 두 장의 기사를 읽어보고 깜짝 놀았다. "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는 제목으로 시작된 글에서 월간조선의 조갑제씨는 "광주사태를 취재했던 수백 명의 기자들 중 탈북군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북한특수부대사람이라고 의심을 할 만한 사람을 단 한명이라도 찾아내거나 본적이 없다." "...광주사태 현장에 한 개 대대의 인원이 등장할
무대가 없었다." "...나도 직접 현장을 취재했지만 내 눈에도 의심할 만한 증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해괴망칙하고 황당한 기사였다.
Sunset by Bridport By:
Chris Spracklen
좀처럼 남들 앞에서 자기감정을
내색하거나 보이지 않는 나로써도 그 자리에서만은 몸에 배인 군인체질에서 저도 모르게 돌발적으로 생기는 격한 흥분을 감출수가 없었다.
"목사님 훈련된 정보요원들의 투시력으로도 찾아 내지 못하는 북한군특수부대원들을 기자라는 사람이 무슨 재주로
찾아내지요. 이 사람이 보수논객이라는 간판을 떠나서 공정성이 투명해야 되는 언론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맞긴 맞는지 의심이
드네요. 자기 눈에 안보였다고 숱한 사람의 눈길이 거쳐
가는 언론에다가 대고 함부로 이런 기사를 낼 수가 있습니까?" "나도 지금까지 조갑제씨를 보수쪽을 대변하는 훌륭한 언론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부분은 나로써도 이해가 안 돼서 북한에서 장교로 군복무를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목사님, 이 글을 보면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양심선언이고 뭐고를 떠나서 전부 다 사기꾼처럼 평가하는 것 같은데 정말 신경질 나고 황당하네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중차대한 일을 개인만의 추측을 가지고 함부로 기사화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좀 의도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광주사태가 숨기고 있는 검은 비밀은 아무리 보자기로 가려도 절대로 가릴 수 없는 것인데 조갑제라는 이상한
사람이 그런 일은 전혀 가당치도 않는다고 한마디 한다고 해서 두리뭉실하게 미봉되고 넘어갈 것 같은가요? 이 사람이 하는 짓을 보면 결국 김정일을
도와주는 취지로 밖에 해석이 안 되잖아요."
Sundown at
Burrow Hump By: Chris Spracklen
살다가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고 감정의 기복이 생기는 순간이었고 단단한 쇠망치에 되게 머리를 한방 얻어맞은 것 같은 뗑 한 기분의 한순간이었다. 전후사연을 떠나서 이
글을 읽으실 독자들에게 한마디 꼭 하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독재정권과 수령만을 위해서 육탄을 바쳐야 하는, 정신 도덕적으로
변질된 군사집단이 바로 북한의 조선인민군이라고 우리 자신들도 충분히 인정하는 바지만 나쁜 부분은 잠시 옆에 접어두고 북한 군인들이 특이하게
가지고 있는 별도의 장점이 하나 있다. 폐쇄되고 봉쇄된 제도에서 장기간의 군사복무생활을 거치면서 강압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무조건적인 복종으로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체질화 되고 의무화 된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상명하복의 절차를 떠나서 자기의무에 고지식하고 두리뭉실하지
않는 점이다. 에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표현하면 어떠한 극악한 경우나 상황이라도 삶과 죽음의 중간에서 혼선하지 않고 의무에 따라 자기 중심을
지키며 절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고지식한 군인정신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공격하는 법만 알고 뒤로 후퇴할 줄 모르는 자기들만의 투철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북한체제에서 지옥과
같은 10년 이상의 고된 군복무생활을 거치면서 훈련되고 교육된 군인들이다. 북한에 사는 일반인들도 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만 특히 군사집단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군사작전과는 별도로 체제
내에서만은 남에게 속는 방법만 배우지 남을 속이는 방법은 절대로 배우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방법을 알게 되면 김정일 정권이 어떤
정권이라는 것을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군인들 스스로가 한 번에 금방 알아차리게 되고 군사복무에 대한 기피가 확산될 수 있기 때문에 북한체제
자체가 군사집단 내에서는 훈련과정과는 별개로 절대로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남한에 내려온 탈북군인출신들이 바로 속는
법에만 익숙하고 거짓에는 절대로 눈이 트지 못한 순진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