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를 한자리에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점심 손님이 떠난 후 저녁 손님이 밀어닥치기 전, 잠시 짬을 낼 수 있다는 시간에 두 사람을 연달아 찾아가 만났다. 백선필 조리장은 20명에 이르는 주방 식구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에 다부진 몸의 백 조리장은 “태권도가 공인 4단이고, 경주에 있을 때는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까지 달리기를 했다”고 말한다. 요즘도 쉬는 날이면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내달린다. 열다섯 살이던 1970년부터 요리사 한길을 걸어왔지만, 그가 추구하는 삶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요리도 그렇게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스시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것도 재료에 따라, 먹는 사람에 따라 무궁무진 달라지는 ‘자유로움’ 때문이다.
백선필 씨의 고등어 스시 |
“산과 들, 강, 바다에서 나는 모든 것들이 스시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스시의 종류는 수천, 수만 가지에 이르지요. 스시는 먹는 사람의 건강 상태와 식성에 따라 재료도, 만드는 방법도 달라야 합니다. 공장에서 찍어 내듯 균일하게 만드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그저 기술일 뿐이지 거기에 진정한 스시 정신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맛보시라”며 6월에서 8월까지만 삼천포에서 잡히는 갯장어로 만든 스시를 내놓았다. 살 속에 구석구석 박힌 잔가시에 일일이 칼집을 내느라 손질하는 데 몇 시간씩 걸린다는 스시는 잡맛 없이 담백했다.
‘모모야마’의 요리사들에게 “조리장이 무슨 잔소리를 가장 많이 하시냐?”고 묻자 하나같이 “청결”이라고 외친다. 맨손으로 밥을 주무르는 요리사에게 청결은 기본 중 기본이라는 것. 하루에도 수십 번씩 비누로 손을 씻고 알코올 소독까지 한다. 청결 그리고 손님을 조상 모시듯 하는 정성을 중시하는 그는 “간단해 보이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1950~60년대에 유명했던 일식집 ‘이학’과 ‘미조리’에서 지배인으로 일하다 직접 무교동에 일식집을 열어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가세가 기울었고, 아버지 추천으로 명동에 있는 호텔 일식집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기술이 있으면 뭘 해도 굶지 않는다”고 했다. 연탄 갈고, 냄비 닦고, 그러다 생선 비늘 치고, 머리 자르고…. 각종 허드렛일을 하다 곁눈질로 요리를 배워 요리사로 행세하기까지는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설움도 당하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 코리아나 호텔과 미국 LA에 있는 호텔을 거쳐 부산 조선비치 호텔 일식당의 주방장으로 스카우트된 게 1982년. 그 후 부산 롯데호텔로 옮기면서 부산의 대표적인 일식 요리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중학교 졸업 후 일식집 들어가 허드렛일하며 요리 배워
백선일 씨가 만든 갯장어 스시 |
그는 자신의 ‘스승’으로 코리아나 호텔 일식집 ‘사카에’에서 만난 강도용 씨를 든다. 지금은 ‘사카에’의 사장이 된 강씨는 야단맞고 풀이 죽어 있는 그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손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 사람에게 맞는 스시를 만들어 주는 스시의 장인에게는 요리뿐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수. 외국인 손님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라 일어와 영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일본인 손님에게 얻은 일본 교과서로 공부한 일어는 의사소통에 막힘이 없을 정도.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영산대 호텔경영학과 대학원까지 마치고, 일본을 주기적으로 다니며 요리사범 자격을 따기도 했다. 그래서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고 한다.
백선필 씨 역시 방송통신고를 거쳐 영산대 호텔경영학과를 졸업, 형님 뒤를 따랐다. 일본에서 6개월간 요리 연수를 하고 오기도 했다. 열다섯 살 때인 1985년, 서울 청담동 일식집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일을 시작한 첫날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루만 더 하자’고 했던 게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한다. 일찍이 사회로 나가는 사람이 많았던 형님 때와 달리 1970년생인 그의 경우, 비슷한 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친구들이 학교나 대학입시 이야기를 할 때는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아침 7시부터 부지런을 떨며 미리 자신의 일을 마쳐 놓고, 선배 뒤에 서서 뭐라도 배우려 했지만 잘 가르쳐 주지 않으면 서럽기도 했다. ‘요리가 내 길’이란 확신이 든 것은 4~5년 후.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으며 고객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희열이 솟았고, 요리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 제대한 후 형님 추천으로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스시 조리장을 하다 2004년 자신의 일식집 ‘젠(善)스시’를 열었다. 호텔을 찾는 손님은 아무래도 제한적이라 다양한 층의 손님들을 만나고 싶었고, ‘나만의 요리’를 내놓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고 한다. 선(善)은 형제들 이름에 모두 들어가는 돌림자로, ‘진실된 요리를 만들겠다’는 처음 자세를 담은 이름이라 한다.
그에게 “스시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자 “마음”이라고 말한다. 한번 온 손님 취향을 머릿속에 넣어 뒀다 각각 손님에 맞춰 스시를 내기도 하는데, 그러러면 머리 회전이 빠르고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고.
새로운 재료를 시도하고, 같은 재료도 어떻게 달리 만들까, 연구를 쉬지 않아야 하는 게 스시 장인의 자세. 백선필 씨는 ‘젠스시’만의 메뉴로 유명한 고등어 스시를 내왔다. 싱싱한 고등어를 포 뜬 후 2시간 소금에 절였다 씻어 내고 다시 다시마, 대파를 넣은 식초에 15분 담갔다 4~5시간 냉장고에서 숙성시켜 만드는 스시. 소금에 절일 때 고등어 기름이 단맛으로 바뀌고, 숙성되는 동안 식초가 고등어 살 사이사이에 들어가 지방분과 비린내가 가신다고 했다.
비린 생선인 고등어로 스시를 만들다니, 한입 넣어 보았다. 탱탱한 고등어 살이 씹히면서도 비린 맛이 별로 없고 구수했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식초가 잡맛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석쇠에 살짝 구워 불 냄새가 나는 연어 초밥이나 입 안에서 눈처럼 녹는 바닷장어 초밥의 맛도 특별했다.
그는 “각 재료가 최고의 제 맛을 내도록 하는 게 스시의 핵심”이라고 했다. 스시를 만들 때는 밥을 꽉 쥐지 않는다. 공기가 들어가도록 슬쩍 쥐어야 입 안에 들어갔을 때 밥알이 부드럽게 퍼진다는 것. 5초 안에 스시를 만들어 내놓아야 밥은 밥대로, 위에 올린 재료는 재료대로 최고의 상태에서 먹을 수 있다. 스시 카운터에서 요리사가 손님과 마주 보며 만들어 내놓는 게 맛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백선필 씨의 꿈은 일본 요리를 기반으로 하되 세계 각국 요리들의 요소까지 모두 들여와 새로운 ‘백선필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 자신의 요리를 이해하는 손님들만 예약제로 받아 전복, 대게, 복, 송이 등 제철 재료를 가지고 코스 요리를 만들어 내놓고 싶다고 한다. 이를 위해 첫째, 셋째 일요일엔 ‘젠스시’의 문을 닫고 가족들과 함께 맛집 탐방에 나선다. 그에게 “너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느냐?”고 물었다.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요리업계는 외형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깊이는 부족한 것 같아요. 어렵게 하나하나 단계를 밟은 우리와 달리 쉽게 배우려고만 하니까요. 손님을 대하는 깊이 있는 마음, 장인정신은 빠지기 쉽지요.”
백선필 씨에게 “당신 요리에서 최고의 스승이 누구냐?”고 묻자 “형님”이라고 대답한다. 요리하는 기본자세나 목표를 명확히 한 후 계획을 잘 짜서 생활하도록 독려해 온 형님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 바람대로 다른 형제들도 장인의 길에 뛰어들어 한 형은 제과제빵사를 거쳐 사업을 하고 있고, 또 다른 형은 살롱화로 유명한 구두 장인이 됐다고 한다.
사진 : 김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