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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결코 잊을 수 없는 감동의 봉원사 영산재여!
-우리 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영산재(靈山齋)
어느 도심이 복잡하지 않을까 보냐만, 서울에서도 신촌은 대학들이 밀집한 지역이어선지 유난히 혼잡하다.
연세대학병원을 따라 삼청터널쪽으로 올라가다 이화여대 후문쯤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10여분,
그다지 높지않은 산자락에 한국불교 태고종 봉원사는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추석 명절을 지난 10월 5일 오전, 영산재와 종환 큰 스님 사십구재 천도법회가 시작을 알리고 있었고,
불자들의 참배와 내외국인 관광객의 셔터소리가 여기 저기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빌레라 승무'의 전승지로 알려진 봉원사의 깊은 역사와 문화재인 사찰 건물, 그리고 불교음악과 춤의 세계,
유네스코 지정 세계 중요무형유형문화재인 '영산재'를 봉원사에서 거행된 '학송 정환대화상 사십구재' 행사를 통해 통해 알아 보았다.
' 정환 대종사 사십구재'에서 한국불교 태고종 총본산 봉원사 일운 주지스님은 " 불가의 말씀이 무심이 도라 하지만
한줄기 향과 한 잔의 차로 저희 곁을 떠나신 학성당 정환 대종사님의 발자취는 스님을 존경하고 뒤 따르는
우리 후학들에게 영원한 스승이자 사표로서 가슴이 남아 있다"며 정환 스님의 열반을 못내 아쉬워했으며,
"앞으로도 봉원사 사부대중은 스님의 유훈을 받들어 천년을 이어 새로운 천년에 이르도록 사중 발전과 불교의 중흥에
원융화합하고 단결하여 일심으로 정진해 날 것"이라고 다짐하고
" 오늘 반야암 주지스님의 원력으로 설판되는 영산재'의 큰 공덕으로 안양국에 왕생극락 하시기를 염원한다."고
발원하였다.
이날 사십구재 천도법회는,
시련(侍輦)=> 대령(對靈)=> 관욕(灌浴)=> 신중작법(神衆作法)=> 상단권공(上壇勸供)=>
중단권공(中壇勸供) =>시식(施食)=> 봉송(奉送) 및 소대봉송(燒臺奉送) 순으로 의식을 행하였다.
봉원사는 한국불교태고종 총본산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보존 사찰이다.
봉원사는 신라 진성여왕[889년]때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금화산(金華山) 서쪽에 창건한 뒤 반야사(般若寺)라 했으며,
그뒤 고려말 공민왕 때 태고(太古)보우(普愚)국사께서 중건·보수하신 전통사찰이다다.
특히 조선 정조12년[1788년]에는 승려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승풍(僧風)을 규찰하는 7도 승풍규정소(七糾正所)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며
구한말 격동의 시대에는 개화를 주도한 이동인(李東仁)스님은 봉원사에서 5년간 머물면서
1884년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이었던 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과 교류를 하여 봉원사는 개화사상의 전개와 보급에 일익을 담당했던 유서가 깊은 곳이다.
또한 신라의 진감선사 이전부터 전래되어 오고 있는 범패는 물론 단청과 장엄이라는 1700여년의 한국불교의 전통 의식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유지.
전승되고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많이 보존하고 있었다.
봉원사는 또한 창건이래 여러차례 중건을 거쳐, 1911년 제1주지 이보담 스님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갖췄으며, 1945년 12월 주지 김기월 스님과 화주 김운파 스님이 대규모 광복기념관을 지었으나 6.25때 소실되었다. 이때 영조 친필 현판과 김옥균 이도인 스님의 유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그 자리에 현재의 대방(염불당)을 1966년 제22대 주지 최영월 스님과 화주 김은파 스님에 의해 복원되었다.
이날 전통 승무를 보면서 남다른 감회와 감동이 열길이 넘는 저 밑바닥 심장 속에서 목줄기를 타고 올라와 전율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만큼 비구승과 비구니승의 전통 춤 숨씨는 단아하면서도 급하지 않으면서 하늘하늘 거리는 안개와 이슬, 그리고 구름으로 변해
지켜보는 이의 육체와 정신을 빼앗아 가 혼불이 되게 해주는 깨어난 빛을 보는 것처럼 가슴뭉클하게 해주었다.
승무 / 조지훈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 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조지훈 시인의 '승무'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시로, 누구나 한번 쯤은 승무를 추는 스님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같은 불교무용을 포함해 향연되는 불교공양 의식인 '영산재'가 봉원사에서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여기서 조지훈 시인의 지조론관련 유명한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조지훈 시인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다.
위당은 어느날 육당이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간다는 얘길 들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위당은 이제 자기가 알았던 과거의 육당은 죽었다고 판단했다.
어느날 위당은 육당의 집 대문 앞에 거적데기를 깔고 꿇어 앉았다.
그리고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아이고! 아이고!
육당이 죽었습니다!
내 친구 육당이 죽었습니다! "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 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그런데 김지하 시인의 변절에 대해 알아보면 흥미롭기까지 하다.
시인 김지하.
그는 박정희 독재시대에 민주투사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많은 이들은 오랫동안 ‘타는 목마름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의 이름 앞에 ‘변절자’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기 시작했다.
아마 지난 91년 <조선>에 썼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가 그 시작이 아닌가 싶다.
(* 그 후 언젠가 그는 이 글은 <조선>에서 붙인 제목 때문이라고 해명하기도 했지만...)
정운찬 전 총리가 총리 물망에 올라 국회에서 모 기업인에게서 ‘천만원’ 받은 것 때문에 청문회에서 혼이 났다.
그런데 김 시인은 이걸 두고 ‘개망신’이라고 표현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렇다’고 인정한 정 총리에 대해 아주 호평을 했는데,
정 총리가 개망신 당한 게 “한마디로 'X'같아서 이 글을 쓴다”고 밝힌데서 기인한다.
심지어 정 총리가 사서 개망신을 하고 있다는 지역민심을 전하는 게 ‘애국’이라고까지 말했다..
한 마디로 참담한 일이다.
한때 김 시인에 시에 젖어 노동과 통일 분야에서 열심히 시작을 짓곤 했던 제 정신이 혼미해졌었다.
김지하 시인의 파멸을 지켜보면서 저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을 떠올렸다.
육당은 사학자로, 문인으로, 출판인으로 당대에 걸출한 인문학도였다.
그가 3.1만세의거 때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실도 빼놓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는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결국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잘 알려진 것만 해도 조선사편수회 위원, 중추원참의, 만주건국대학 교수 등등.
심지어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병권유 연설도 했었던 변절자다.
각설하고, 영산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종교의식 가운데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전통과 예술적 경지를 자랑한다.
영산재는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함께 부처의 진리를 깨달아 이고득락(離苦得樂 괴로움 따위에서 벗어나 즐거움이나 행복감을 마음껏 누림)
경지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불가에서는 영산재를 단순한 공연이라기보다 장엄한 불교의식이며, 삶과 죽음으로 갈라진 인간 모두가 불법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세계평화와 남북통일이 성취되기를 염원하며 봉행하기도 한다.
영산재의 구성은 타종(打鐘) 및 시련(侍輦), 괘불이운(掛佛移運)에서 복청게(伏請偈), 천수바라(千手羅), 도량게(道場偈), 법고(法鼓)등을 거쳐
공덕게(功德偈), 법성게(法性偈) 및 회향(回向)까지 크게 12가지 이상의 의식으로 나뉘어 지며, 각 절차에서도 또 세분된다.
내용을 살펴보면 법회를 옹호하는 불법에 귀의한 신중(神衆)을 맞이하는 시련(侍輦)에서 부처님을 법회도량으로 모신다는 괘불이운(掛佛移運),
관세음보살에게 중생의 고뇌를 소멸시킨다는 다라니(多羅尼)를 염송해 줄 것을 청하는 복청게(伏請偈)로 이어진다.
그리고 천수바라(千手羅)라 하여 대중 스님들이 천수경을 독경하는 가운데 바라춤을 추는 의식이 이루어진다.
바라춤(鈑羅舞)은 동으로 만든 심벌즈처럼 생긴 불구(佛具)인 바라를 양 손에 들고 추는 춤으로
천수다라니(千手多羅尼)가 베풀어짐에 경희(驚喜)로운 마음을 몸짓으로 나타내는 남성적인 춤이다.
다음으로 도량게(道場偈)에서는 백색 장삼을 길게 늘어뜨린 홍(紅)가사(袈裟)를 입고 고깔을 쓴 채
양손에 종이꽃을 들고 추는 여성적인 나비춤(着服舞)이 이어진다.
그리고 북춤인 법고(法鼓), 부처님을 예로써 청해 모셔오는 거불(擧佛), 염불과 나비춤으로 공연되는
향화게(香火偈)등으로 이어지며, 마지막 봉송의식에서는 재 도량에 청해 모신 불보살과 제신중(諸神衆)을
차례로 전송하고, 소대의식에서는 각종 장엄과 영가를 위해 준비된 금은전(金銀錢) 및 옷가지 등을 하늘의 입이라
여기는 불에 넣어 살라 법회의 공덕을 영가의 몫으로 회향하며, 영가를 극락세계로 전송하는 의식으로 마친다.
영산재가 진행되는 동안 목탁, 태징 등의 악기에 맞춰 범음(梵音, 불경을 외는 소리)을 짓고, 범패(梵螟, 석가여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와 호적, 취타 등의 전통악기가 어우러져 연주된다.
이는 불교 음악의 전래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을 뿐 아니라, 범패(梵螟), 화청(和唱)등은
한국의 전통 민속음악인 가곡(歌曲), 회심곡(回心曲)등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또한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은 민속무용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전통문화 전래의 중요한 맥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영산재는 월드컵 기간동안 매일 오전 11시 봉행해 우리 전통문화를 외국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봉원사의 이모저모= 봉원사에는 대웅전을 비롯 대방(大房), 삼천불전(三千佛殿), 명부전, 칠성각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이 중 대방은 조선말 흥선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 건물을 이건하면서 일부 변형 및 축소하여 건립한 것이다.
염불수행을 전통으로 해온 봉원사의 염불당인 대방에는 주불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데,
이 아미타불은 300년전 북한 철원군 소재 보개사(심원사)에 있던 불상이나 영험이 있다하여
이곳으로 옮겨 모셔 온 것이다.
대방에는 또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산호벽루(珊湖碧樓)"와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의 행서체현판 "무량수각(無量壽閣)"이 보존되어 있으며,
대방의 문에는 인간문화재 이만봉 스님의 '신장도'작품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못을 쓰지 않고 건축한 삼천불전(三千佛殿)은 단일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210평)를 자랑하고 있다. 대들보 하나의
무게만 7톤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불과 삼천불이 모셔져 있다.
봉원사에는 또한 주요 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보유자 이만봉 스님이 주재하며, 제50호 영산재 보유자 박송암 스님은 2000년 열반에 들었고, 현재 영산재 보유자 이일응 스님과 준 보유자 김구해 스님등이 주석해 있다.
점심공양/ 오신 분 모두 차려 주셨다.
첫댓글 영산제에 대해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 ...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영산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보고 싶군요. 잘 보았습니다. _()_
무형문화재 제50호인 영산재가 정환대사의 사십구재를 통하여 장엄하게 펼쳐졌네요. 제일 위의 사진은 낯익습니다. 감상을 위한 상련순례를 통하여 봉원사를 낱낱이 살핀 바 있어 눈에 잘 들어옵니다. 이 사진을 통해 영산재가 얼마나 지켜 보셨을 민족성지님은을 듯 싶습니다. 여러 가지 글 새기며 잘 보았습니다. _()_
지난 번 연
장엄한 의례인지 느끼게 됩니다. 지난 번 갔을 때도 그 소리의 유려함에 빠져 들기도 했지만 시
감동이 물결처럼 와 닿
잘봤습니다...감사합니다_()_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봉원사 영산재할때 언제 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