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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무덥다. 어제도 그제도, 내일도 모레도.
덥다고 마냥 넋놓고 있자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써렛발 씻은 마당에 다시 그 혼란스런 생존경쟁의 틈바구니에 발을 담글 수도 없고, 생각없이 맨땅을 판다는 것도 더위먹을 일이다.
문득 남은 삶을 계산해 보았다. 전체 내게 주어진 수명에서 이만큼을 빼고나면 요만큼 남을 불확실성. 그런데 이 무더위 기간을 다시 공제해 버린다면...
맥 빠지는 일이다. 이 무너위에 썰렁한 애길 것임에도 오래사는 법을 생각해 보았다.
오래 사는법, 진시황이 그토록 꿈꾸었던 방법을 드디어 오늘 내가 찾아낸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우선 그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두 가지 모두가 시간을 붙잡아 매는 것이다.
첫째는 무지 즐겁게 생각을 갖는 방법이다. 천재적인 두뇌를 갖고 온갓 시험에서 줄곳 일등만 차지하며, 부와 명예를 독차지 하며 살아가는 형태로, 때론 일국의 통치자가 되고, 일류 재벌의 오너가 되어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마지막엔 우주전쟁의 총 지휘자가 되어 인류를 악으로부터 구해내게 된다. 물론 오랫동안 꿈에서 깨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두번 째는 하루를 아주 지루하게 보내는 방법이다. 그 중 하나는 귀신에 쫏기거나 가장 힘들었던 군대생활의 한 가운데서 반복되는 행동으로 악몽에서 깨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낮술에 취해 더위도 아랑곳 하지않고 이마에 땀 흘려가며 아주 깊은 낮잠을 자거나, 도박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돈을 잃은 후 그 휴유증으로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고 천정의 벽지 무뉘만 그려보는 것, 싫은 사람과 마주한 식탁에서 평소 기피하던 음식을 앞에 두고도 다음 일정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을 하는 것, 본의 아니게 지독한 투병생활을 하거나 요즘처럼 무더운 날 처음부터 혼자 하기에 벅찬 일거리를 두고 땀흘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순간들이다.
참으로 한심하고 쓸데없는 생각들이다. 그래도 등뒤에서 소리없이 풍구질 해대는 선풍기에게 미안해서 턱 괴고 손가락 움직이는대로 두들겨본 글이다. 한 때는 우리 인간들도 곰처럼 사용 빈도가 적을 때에는 겨울잠이나 여름잠을 자게해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한다거나 인체를 냉동보관 하였다 다시 꺼내어 활용도를 높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었다.
그래도 어느 사람들의 소견에 따르면 이 같이 더운 여름철엔 약간의 경비지출 감수 하더라도 신체가 제대로 보전된다면 그게 에지간히 남는 장사일 것이라 말하였다.
아무튼 허황된 생각, 더위먹은 소리.
문득 그 맘때 시절엔 누구나 그랬듯, 문학삶을 꿈꾸며 읽었던 이호철님의 '무너앉는 소리'라는 소설 생각이 나서 문고를 검색하였더니, 너무 오랜 세월탓인지 품절소식만 접했다. 겨우 어느 카페에서 내용을 발견하고 옮겨 다시 읽어 보았다.
무너앉는 소리
사흘째 계속해서 저녁이면 선재를 찾아오는 여인이 있었다. 오늘 저녁은 초저녁부터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머리까지 뒤집어쓴 남색 레인코트가 빗물에 젖어 있고 손에는 물색 우산을 접어들고 있었다.
빗물에 젖어 물씬한 큰 문 빗장을 벗겼을 때 음영이 짙은 그녀 뒤로 동편 하늘이 벗겨지고 있었다. 금세 소나기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고 하더니 씻은 듯이 멎어 있고 사위는 싱그러웠다. 정애는 구면이기나 한 듯이 익숙하게 어서 들어오라고 하였다. 그녀도 별반 어색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로 해서 집안에는 새로 듬성듬성 틈이 생겼다. 영희는 선재 방에 박혀 나오지 않고, 성식은 응접실에 내려와서 트럼프 패만 떼고, 식모조차 전기세를 받으러 왔는데 줄 돈이 없다느니, 조간이나 석간이나 한가지만 볼 것이지 일요신문까지 본다는니 제 분수에 맞지 않는 푸념을 쭝얼쭝얼거리며 이 방 저 방 돌아다니고 짜증을 부리고 하였다. 요즈음에는 신문마다 2층 선재 방에 올라 갔다가 내려오는 것이 딴에는 못마땅하다는 것인가. 정애는 흰 블라우스 차림으로 시아버지 곁에 앉아 씁쓰무레하게 웃는다.
응접실의 벽시계가 열시 십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페인트칠을 새로 한 사방벽은 두치가 넘게 두텁고 이래서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뜨듯하였다. 그러나 아늑하기는커녕 형광등 불빛 밑에서 무엇인가 잔뜩 고여서 출구를 찾는 기운으로 차 있었다. 무슨 일이건 처리하고 치러낸다는 것에 이미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깥은 바람이 세고 노상 소용돌이가 친다. 그러나 시간은 이 집채에 닿아서는 서서히 굼벵이 걸음을 걷다가 무참히도 정지되어 물큰물큰한 열기를 뿜는다. 시간은 그렇게 살이 찌고 부어오르고, 그리고 이 집안 사람들은 지치고, 어떤 사소한 일이건 무겁게 무겁게 감당을 해야 한다.
부엌 쪽에서는 찝찌름한 마늘장아찌같은 내음새가 풍겨오고 밭은 칼도마 소리가 들려왔다. 그 칼도마 소리 사이사이 이따금 온 집채가 울듯이 쿵쿵하고 속 깊이 울리는 소리가 나곤 했다. 허한 기운이 도는, 그러나 여운이 깊숙한 울림소리였다. 집채 어느 근처에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환청같기도 하고, 분명한 소리는 아니었으나 정애에게는 그 소리가 울릴 때마다 이 방에 앉아 있는 사람들 누구나가 아득히 멀리로 이를테면 하늘에서 나는 소리같은 것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듯이 보였다. ‘저게 무슨 소리유?’ 하고 건너편의 남편에게 물어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래지지가 않았다. 휑뎅그렁한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이 이런 경우에는 몸서리가 쳐질 것이었다. 쿵 쿵,그렇다, 그 그늘진 둔탁한 소리는 두달 전, 5월 어느날 저녁의 꽝 당 꽝 당 하던 그 먼 쇠붙이 소리가 어느새 슬금슬금 이 집채 안으로 기어들어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쇠붙이 소리는 그날밤 하루밤뿐이었다. 이튿날 저녁부터는 부신 듯이 없어져 있었다. 반짝반짝한 초조로움과 일정한 거리감을 더불고 있던 그 5월 밤의 쇠붙이 소리는 어느덧 이렇게 끈끈하고 그늘진 부피를 더해 이 집채 안으로 수울 들어와 있었다. ‘집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던데’ 하고 문득 정애는 생각하였다.
성식은 물색 파자마에 러닝 바람으로 벌써 한시간 가량이나 트럼프 패만 떼고 앉아 있었다. 늙은 주인은 이편 소파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두달 전보다 더 축 늘어졌으나 부성부성 살이 찌고 혈색도 더 좋아 보였다. 코 앞 사마귀를 여전히 만지고 있었다. 선재를 찾아온 여인은 멍청하게 앉아 성식의 트럼프 패를 구경하고 있었다. 벽의 남색 커튼이 바람에 펄러덕펄러덕거렸다. 식모가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식모의 어딘가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것이 번뜩이는 눈길이 선재를 기다리는 그 여인에게 가 있었다. 정애는 웬일인지 그런 눈길만 접해도 가슴이 하들하들 떨려왔다.
정애가 물었다.
“언니 2층에 있니?”
“녜.”
“저녁 먹었니?”
“아직 안 먹겠대나봐요.”
“왜?”
“……”
여전히 식모의 눈길은 그 여인에게 가 있었다. 문을 닫고 도로 나갔다.
하기는 선재라는 사람은 어느 구석인가 이렇게 뒤가 깨끗지 못한 싱거운 사람이기는 하였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물어물 집에 들어와 눌러앉았을 뿐, 그의 지나온 내력을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이 집에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도 꽤나 헐렁헐렁해지고 무척 외로움이 돋아 보였다. 역시 집안에는 덕성스러운 어머니라는 풍채가 필요하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3년상을 치르던 날은 누구보다도 서럽게 울었다. 그 우는 모습은 차라리 이 집과 선재와의 짙은 연줄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눈물 한방울 안 흘리고 햇볕 밑에서 안경알만 메마르게 번쩍이던 남편 성식이에 비해서 그 소박한 위인이 어쩐지 부럽기도 하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졌었다. 생각하면 어이가 없기도 하였다. 하기는 10여년 동안 혼자 살아왔으니 선재라고 가다오다 만나게 된 여인이 없으라는 법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를 찾아온 여인과 이렇게 마주 앉자 생소하게 별 특색이라고는 없는 그녀와 더불어 선재라는 위인도 새삼스럽게 생판 남이었다는 것이 선명하게 확인되었다. 이 집안에 들어오게 된 내력과 들어와서의 행적이 하나하나 냉정하게 돌아보였다. 그리고 세상이란, 삶이란 결국 이런 것인가부다 싶었다.
두달 전 영희와 그런 관계가 있은 연후부터 선재는 갑자기 속취(俗臭)가 풍기기 시작하였다. 밤늦게 돌아온 선재에게 이 하찮다면 하찮은 일을 곧이곧대로 전했을 법도 했었을 텐데, 이틀 저녁을 그냥 넘긴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을 것이었다. 선재는 이틀 저녁을 내리 열한시가 넘어서 들어와 괜스레 기분이 좋아 있었다. 그저 호인풍이기만 한 그 단순하고 부피가 얇은 위인이 어쩐지 처량해 보였다. 포켓에서 바나나를 내놓고 검을 내놓고 피우다 남은 담배 꽁다리에 섞여 땅콩이며 새우 부스러기가 나오곤 했다. 영희는 흡사 어린 아기의 재롱 피우는 것을 좋아하듯이 지극히 단순하게 깔깔대고 웃곤 하였다. 그 모습에는 어떤 역설, 차라리 절대절명으로 절망한 사람의 깊은 슬픔, 체념이 어려 있었다.
오늘 저녁도 선재는 늦을 모양이었다.
문득 정애가 말했다.
“선재씨와 아신 지가 오래 되셨나요?”
그 여인과 성식이가 동시에 화들짝 놀라며 트럼프에서 눈길을 돌렸다.
“녜, 한 3년 됐어요.f"
"녜에, 그러셨군!“
정애는 흔한 사교가 투로 머리까지 크게 주억거리였다. 남편이 다시 트럼프장을 젖혀갔다. 늙은 주인은 놀라듯이 정애와 건너편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였다. 한 쪽 입 가생이로 끈끈한 침이 흘러내렸다.
벽시계가 열시를 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선재를 찾아온 그 여인만이 세 사람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정애가 다시 말했다.
“같은 고향이라고요?”
“아아뇨.”
하고 여인은 두 눈을 커다랗게 벌려뜨며 되물었다.
“그럼 이 집은 그이 집이 아니나요?”
옳아, 선재를 이 집 한가족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애는 비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선재씨 집은 아니지요.”
“그럼 아주머니하고는 어떻게 되시나요?”
“네에, 그저 그렇게 되지요.”
어차피 얘기가 길어질 듯해서 또 이렇게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여인은 또 조금 바보같은 어리둥절한 눈길로 성식이와 정애를 번갈아 건너다보았다. 그 어리뚱하게 실망한 듯한 표정은 애누리없는 그녀의 실체 그대로를 느끼게 해주었다.
정애가 또 물었다.
“같은 회사에 계시나요 ?”
“네, 있었는데 전 3개월 전에 나왔어요. 교환수로 있었는데요, 하루이틀이지 1년, 2년 하면 지겹고 힘들어요. 잘못 정신 팔다가는 욕 듣지요, 구찮지요, 싱거운 남자들한테 쓸데없는 희롱당하지요,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니까요. 집은 경기도 여주야요. 가족은 6-25 때 다 없어졌어요. 숙부님이 한분 계시구. 여주에서 살고는 있지만 남이나 마찬가지야요.”
그 여인은 이렇게 또박또박 쓸데없는 얘기까지 늘어놓았다. 위인이 역시 조금 주책이 없어 보였다. 남편이 트럼프 패를 떼다 말고 돌아다보며 히죽이 웃었다. 늙은 주인은 이번에는 뚜릿뚜릿한 눈길로 그 여인을 건너다보았다.
“저, 실례지만……”
정애가 말했다.
“네.”
“선재씨와……이를테면 연애하시는 관계군요.”
“뭐, 뭐가 뭔지 전 모르겠어요. 요새 왜 흔히 그런 일 많지 않아요? 그저 그런 거지요. 정말 뭐가 뭔지 전 모르겠어요.”
꺽죽꺽죽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곁에 앉아 있는 성식을 돌아보며 비위살 좋게 동의나 구하듯이 또 웃었다. 정애의 눈길이 흔들리는 그녀의 아랫배 언저리에 가 있었다. 그녀는 또 히죽이 혼자 웃고는 그 근처 옷매무새를 고쳤다. 두세시간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몇마디 시작되자마자 그녀는 그녀다운 본색을 알알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정애가 또 말했다.
“선재씨에겐 무슨 급한 용무가 있으신가보군요. 이를테면……”
“네, 벌써 다섯달인걸요.”
선뜻 말하고는 약간 얼굴을 붉히기는 했다. 잠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다가 비로소 정애는,
“선재씨의……”
“……”
물론이지,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냐는 투의 결연한 것이 번뜩였다. 정애는 또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딱히 이 정도까지 짐작했던 것은 아닌데, 별반 이렇다 할 아무런 느꺼움도 일어오르지 않았다. 그쯤 되어 있었군, 그저 이렇게 생각했다.
열린 문 저편 뜨락에서는 달이 뜬 7월 밤의 짙은 나무 냄새가 밀려왔다. 흠뻑 젖은 싱그러운 나무 냄새는 말 그대로 수목을 느끼게 하였다. 찬 빗물 머금은 바람이 불어 안쪽 벽의 자락이 긴 하늘색 커튼이 펄러덕펄러덕했다. 천정이 높아서 커튼의 밑자락은 서서히 흔들거렸다. 늙은 주인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펄러덕거리는 커튼을 뚜릿뚜릿한 눈길로 이따금 쳐다보았다. 정애는 커튼과 시아버지를 번갈아 건너다보며 흔들리는 커튼에서 꿈틀거리는 짐승을 보았다. ‘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임관을 끝내고 저런 커튼을 쳤었지. 그때두 짐승처럼 보였어’ 하고 정애는 생각하며, 와락 왁자지껄 요란해지고 싶어 시아버지의 귀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요오.”
목소리가 횅하게 울렸다.
늙은 주인은 화들짝 놀랐으나 금세 따뜻한 눈길로 정애를 돌아보며 뜻은 없이 머리를 크게 주억거렸다. 선재의 그 여인도 의아해 하는 눈길로 이편을 건너다 보았다. 정애는 커튼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런 커튼을 쳤었지요.”
또 늙은 주인이 머리를 주억거리고 백치같은 만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웃으면서 또 커튼을 쳐다보고 되풀이하여 머리를 주억거렸다.
잠시 뒤, 정애는 혼자 가만히 울기 시작했다. 소리없이 손수건만 눈으로 가져가 얼른 보아서는 우는지 어쩌는지 알 수 없었다. 식모가 안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와 또 꿍얼꿍얼 혼자 푸념을 하다가 우는 정애를 쳐다보고는 혀를 끌끌 차며 도로 나갔다. 선재를 찾아온 여인은 정애를 마주 보면서도 우는 눈치를 모르고 있었다.
늙은 주인은 어딘지 모르게 더 늙어 있었으나 혈색은 더 좋아 보였다. 그냥 그렇게 아무렇게나 소파에 버려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미 늙은 주인은 완전히 오관의 문마다 막혀있는 듯하였다. 두달 전만 하여도 정애와 영희는 늙은 주인 곁에서 떠나지 않고, 그만한 분수의 건강이나마 간절하게 붙들어두려는 듯한 투가 어려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포기하고 있는 듯하였다. 늙은 주인의 이 완전히 내팽개쳐진 모습은 이 집안의 어제 오늘의 실체를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도 하였다. 눈을 떴다가 잠이 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다가, 이런 연속이었다. 요즈음에는 문안 드리러 오는 손님도 없었다.
문이 열렸다. 영희가 들어서고 있었다. 허리를 바싹 졸라맨 까만 원피스에 가느다란 맨다리였다. 선뜩해질 만큼 단단한 광물질을 느끼게 하였다.
성식은 다시 급하게 트럼프를 잡았다.
“아직 저인 안 갔었수?”
영희는 아무렇게나 턱으로 그 여인을 가리키며 정애에게 물었다. 비천한 시위조로 느껴질법도 한데 너무나 너무나 그렇지가 않았다.
“……”
정애는 일순 선재라는 사내를 두고 두 여인을 맞겨루듯이 여긴 것이 혼자 생각에도 여간 섭섭하고 억울하지가 않았다. 영희라는 위인은 확실히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저 여인쯤으로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부피가 두터웠다.
영희는 아버지 옆 소파에 털석 기대어 앉았다.
“아버지, 안 주무셨수?”
늙은 주인은 또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서도 머리를 주억거렸다.
“참, 오빠.”
“……”
“오늘 복덕방 들렀었수?”
“……”
성식은 트럼프를 놓고 위태위태한 눈길로 겉의 안경을 집어 썼다. 파삭파삭한 얼굴이 조금 윤기가 나 보였다. 선재를 찾아온 그 여인이 이상하게 얼굴을 찌그러뜨렸다. 어느새 문 소리도 없이 식모가 들어와 앉아 있었다. 또 시작이구나 하는 투로 노골적으로 웃고 있었다. 그런 식모의 표정이 돋보였다.
“대관절 어쩐다는 거유?”
“……”
“우리 여자들이 다녀야 하나요?”
“……”
영희는 또 왈칵하면서,
“오빠, 오빠는 오늘 저녁 기분이 좋죠. 난 알아, 그 이유를.”
“……”
“참 이상한 일이우. 난 지금 그 누구보다도 신경에 거슬리는 게 오빠야. 어쩌면 이런 법이 있수.”
영희의 이런 투의 푸념은 이제는 어떤 상투적인 때가 묻어 있었다. 정애가 아득한 표정으로 외면을 하였다. 그런 정애의 표정이 영희의 마음을 더욱 짓쑤셔 놓았다. 이제는 영희의 이런 종류의 신랄한 푸념도 노상 그저 그럴 뿐 신랄한 맛이 가셔 있었다.
늙은 주인은 멍하게 영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성식은 눈을 내리깔고,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트럼프장을 톡톡 튀기며 젖혀갔다. 구석켠에 앉았던 식모가 키들키들 소리내어 웃었다. 꽤나 이색적인 강건한 것이 풍겼다. 선재를 찾아온 여인이 화들짝 놀라는 눈길로 그 식모를 건너다보았다. 그러나 영희는 묵살하며 전혀 반응이 없었다. 정애를 돌아보며 또 말했다.
“아이 참, 언니두 언니유. 무슨 생각으루 저이를 몇시간씩 잡아두는 거유? 그이에게 알려서 내일 만나도록 하면 될걸. 하는 일들이 그렇게들 답답하누?”
선재를 찾아온 여인이 두 눈알을 천천히 디룩거렸다.
듣고보니 그렇기는 했다. 정애는 다소곳이 얼굴을 붉히며 사과하듯이 영희를 건너다 보았다.
결국 이 집안 사람들은 무슨 일이건 처리하고 치러낸다는 것에 이미 절망하고 있는 셈이었다. 바깥은 바람이 세고 노상 소용돌이가 친다. 그러나 시간은 이 집채에 닿아서는 서서히 굼벵이 걸음을 걷다가 무참히도 정지되어 물큰물큰 열기를 뿜는다. 시간은 그렇게 살이 찌고 부어오르고, 그리고 이 집안 사람들은 지치고, 어떤 사소한 일이건 무겁게 무겁게 감당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정애는 알고 있었다. 영희가 자기와 단둘이만 마주 앉으면 말할 수 없이 약해지고 따뜻하게 감상적으로 부드러워지고 감미롭게 슬픈 모습을 지니는 것을. 정애는 또 눈물을 글썽였다.
아득한 2층에서 따르르따르르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성식의 방일 것이었다. 하루 한번을 쓰기가 힘든 전화기는 성식의 방에서 먼지가 부옇게 앉아 있을 것이다. 부연 먼지를 쓰고 따르르따르르 첨예한 금속성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사실은 식모가 아침마다 빤질빤질하게 닦아두었다. 전화기는 텅 빈 큰 방에 까맣게 윤기를 내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먼지가 부옇게 앉아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식모가 쿵쿵거리며 뛰어올라갔다. 전화벨 소리가 멎었다. 물론 선재일 것이다. 영희를 찾을 것이었다. 식모가 다시 내려왔다.
“누구냐?”
영희가 물었다.
“……”
식모는 그냥 건너편 선재를 찾아온 여인을 흘낏 쳐다보았다. 여인은 또 성식의 트럼프 패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자세를 고쳤다. 시계를 쳐다보고, 정애를 쳐다보고, 일어섰다. 방이 스멀스멀거렸다. 늙은 주인의 눈길이 놀란 듯이 이 사람 저 사람 둘러보고 있었다. 영희는 2층으로 올라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선재였다.
보이지는 않지만 저편에서는 또 싱글벙글 웃고 있을 것이다. 작금의 선재는 이렇게 걸핏하면 밤중에라도 전화를 걸 술 있을 만큼 뻔뻔해지고 활달해져 있었다. 식모와 맞장난도 않고, 속취가 나는 위엄을 부리고, 성식이나 정애를 대하는 것도 되잖게 건방지고 되바라져 있었다. 술이 취해서 들어오면 제 침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영희가 괜찮다는 것일 뿐 그 이상 더 바랄 것도 없고 따질 것도 없다는 투였다. 결국 요 맛쯤의 일조차 정작 처리하기를 꺼리고 귀찮게 여기는 그런 위인이었다. 이 집채 안에 사는 사람 가운데 그나마 오로지 건강한 풍모를 느끼게 하고 비교적 풋풋한 떫은 맛을 느끼게 하던 단 한 사람뿐인 선재조차 어느새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이 집의 분위기에 휘어들어 무너지고 흐늘흐늘해지는 것이 영희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두달 전 집을 나가자고 할 때 나갔던들 하고 생각했다.
“나야.”
잠시 뜸했다가 저편에서 다시 선재가 되풀이하여 말했다. 비로소 영희는.
“또 술. 아휴, 술 내음새……”
저편에서도 웃고 있었다. 전화로서는 어쩐지 편하게 상투적으로 이래질 수가 있었다.
“아기는 잘 크나?”
두달밖에 안 된 배속의 아기를 두고 익살이랍시고 하는 말이었다.
“음, 잘 커. 아빠가 보구 싶대.”
이런 경우, 늘 그렇듯이, 영희는 같은 수준의 익살로 받아넘겼다. 그리고 쓰무레하게 웃었다. ‘밤낮 같은 투여서 아주 상투화해버렸어’ 하고 내심 생각하면서.
“참, 오늘 복덕방에 들렀었지. 이즈음 통 거래가 없다는군. 우리만이라도 오긴 나와야 할 텐데……”
역시 할 텐데 정도다.
“……"
"여보세요.”
“듣구 있어요.”
“별일은 없었나?”
“네.”
“오빠는 여전히 집에 있구?”
“……”
여전히라는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러나 영희는 급하게,
“참, 손님이 한분 왔어요.”
“누구?”
“글세, 들어온 다음에 얘기하지요.”
결국 싱거운 전화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이렇게 전화통을 잡고는 피차 배속의 아기 얘기라든지, 살림 처리, 살 궁리같은 것을 얘기만으로라도 건네는데, 정작 집에 들어와 마주 앉으면 그런 문제는 까마득해졌다. 그것은 피차가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선재에게 임신을 알린 것도 잠자리에서가 아니라 전화로 였다. 우스운 일이었다.
어느새 영희는 전재 방으로 돌아와서 선재의 좁은 침대에 널찌감치 엎디어 달빛이 찬 뜨락을 향해 선글라스를 썼다 벗었다 하며 혼자 장난을 했다. 선재를 찾아왔던 그 여인이 큰 문을 막 나서고 있었다. 문 빗장을 걸고 어둠 속에서 식모가 엉뚱하게 “노란 샤쓰”를 휘파람으로 잠깐 불었다. 영희는 ‘기집애, 미쳤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혼자 히죽이 웃었다. 선글라스 속에서 뜨락의 젖은 나무 숲이 유현(幽玄)하게 깊숙이 내려다보였다가 다시 반짝하고 살아왔다가 했다. 스물아홉이나 먹은 노처녀인 주제에, 게다가 선재의 아기까지 배속에 든 주제에 이렇게 어린애마냥 어둠 속에서 선글라스나 썼다 벗었다 하고 있는 스스로가 약간 어이없게 느껴지기는 했다.
2층으로 엇비슷하게 비쳐오는 빗물 머금은 응접실의 불빛은 불빛이라기보다 차라리 사람 내음새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요 맛쯤의 거리만 두고 내려다보아도 아버지, 올케, 오빠, 식모 한 사람 할 사람이 분명한 윤곽으로 따뜻하게 잡혔다. 오빠에게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화닥닥 놀라듯 일어나 앉았다. '대관절 일이 어느만큼 되었는지 차근차근 따져봐야 하겠군’ 하고 중얼댔다. 그러나 따지고 자시고 없이 일은 뻔한 것이었다.
영희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택시가 골목으로 넉넉히 들어올 수 있음에도 어쩐 셈인지 큰길 어귀에서 내려서 걷기로 하였다. 비 개인 끝의 하늘은 맑게 개이고 달이 떠 있었다. 선재 뒤로 거리는 저만큼 물러서 있었다. 모퉁이 길에는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고 멀리에서부터 하이힐 소리가 또깍또깍 가까와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 사람 형체는 안보이고 소리만 들렸다. 저쪽 한길 옆에 약국의 불빛이 안온했다. 점포 문을 닫고 있었다. 닫고 있는 사람은 안 보이고 나무판때기 겹문 닫히는 소리가 날 뿐이고 넓은 공간을 휘저으며 그림자만 아른거렸다. 선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이즈음 유행되는 “새드 무비”를 휘파람으로. 혹은 콧소리로 되풀이하여 흥얼거리며 걸었다. 술이 얼근한 속에 모든 것이 횅뎅그렁했다.
아, 슬픈 영화는 늘 나를 울게 한다.
아, 슬픈 영화는 늘 나를 울게 한다.
그 단조로운 슬픔이 감미롭게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갔다. 또깍또깍 소리는 가까워오면서 어둠 속에 불현듯 여인의 형체가 나타났다. 우산을 들고 레인코트도 접어 들고 있었다. 갑자기 저편에서 섰다.
“어마.”
비로소 선재도 섰다. 잠시 피차 그렇게 서 있었다. 선재가 다가갔다.
“어디서 오나?”
그녀는 턱으로 선재를 가리켰다. 알 만하였다. 그러자 선재는 와락 그녀의 손을 잡고 급하게 도망이나 치듯이 어두운 왼편 쪽 골목으로 꺾어들어갔다. 어두운 속으로 어두운 속으로 흡사 부끄럽고 창피한 질 속을 핥듯이 달음박질을쳤다. 그녀는 흐트러진 하이힐 소리를 뚜꺽뚜꺽 내며 넘어질 듯 자빠질 듯, 그러나 용케도 따랐다. 어느 큰 저택의 어두운 담 밑에 기대어 섰다. 이마에 돋친 땀을 닦고, 또 “새드 무비” 휘파람을 허하게 조금 불다가 앞에 다소곳이 선 그녀의 두 어깨에 비로소 두 손을 얹었다. 눈길은 건너편 하늘에 가 있었다. 아무 얘기도 묻고 싶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이 사내의 내음새 나마 맡는다는 것일까? 여느 때의 그녀답지 않게 쿨쩍쿨쩍 울기 시작했다. 선재는 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사람이란 결국 이렇게 너나없이 가엾고 슬프게 마련되어 있나부다’ 하는 생각을 조금 했다. 선재는 울고 있는 그녀를 맥없이 끌어안았다. 찝찌름한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선재는 전혀 감정의 물결이 곁들임이 없이 그녀의 찝찌름한 볼을 핥고 있었다. ‘결국 이쯤 되었나 부다’ 하고 건너편 하늘을 건너다보며 생각했다. 속삭이듯이 말했다.
“집을 어떻게 알았어?”
“……”
그녀는 대답을 않고 대뜸,
“다섯달 됐어요.”
하고 내뱉듯이 속삭이고 또 울었다.
“알구 있어, 알구말구, 잊어버리구 있을 리가 있나. 잊어버리구 있을 리가 있나.”
선재도 괜히 울멍울멍했다. 뭐 딱히 이 여인을 생각해서라기보다 단순히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슬펐다. 선재라는 사람은 역시 처리한다는 일만 빼놓는다면 사내치고는 퍽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내이기는 하였다. 이 여인과 마주서자 어느새 다시 떫은 풋풋한 맛의 선재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 탓은 아니야. 알겠어? 사람들이 모두 달라져야 할 텐데 말야. 달라질수가 없거든, 뒤에서 붙들어주는 것이 없어서 이런 거야. 규범이래도 좋고 믿음이래도 좋고 신념이래도 좋아. 하여튼 그런 것이 있어야 돼. 가도가도 헤아릴 수 없는 수렁뿐이니 말야. 새로운 기운은 여기와는 다른 아득한 차원에서 일어오르고 있는 것이야, 알겠어?”
지금 그녀의 배속에 다섯달 찬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앞에 이런 얘기는 어차피 개수작일 것이었다. 그녀가 이런 얘기를 알아들을 처지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녀는 선재 가슴에 두 손을 정성스레 포개어 얹으며 선재를 올려다보고 이상하게 웃었다. 선재도 그런대로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맞았어. 그렇지? 뭐가 뭔지 모르겠지?
“……”
“그래,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뭐, 밥 먹구 낮잠 자구 저녁엔 나가구 그렇게 지냈지 뭐, 그런데 직장에서도 차츰눈치를 차리는가바. 딴 애들의 눈치두 있구. 손님들두 그렇구……”
그러니까 이제는 직장을 그만둬야겠다는 얘기인 듯했다. 그녀는 OB홀에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긴 그렇겠군.”
“그렇겠군이 뭐야? 여전히 그 모양이군.”
그러나 그녀도 여전히 또 웃었다.
순찰 순경이 자전거를 타고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큰 골목길로 나왔을 때는 약국의 문도 닫히고 한결 더 괴괴해졌다.
그녀는 선재의 손을 잡고 덮어놓고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선재를 정작 만나자 모든 걱정거리가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듯하였다. 둘은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영희가 들어섰을 때 늙은 주인은 앉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바깥쪽 문은 닫혀 있었다. 정애가 눈을 들었다. 영희를 보며 약하디약하게 웃었다. 영희는 계란색 블라우스로 바꾸어 입고 있었다. 정애 옆에 앉으며 정애의 두 손을 따뜻하게 마주 잡았다.
“언니, 아직 안 잤수?”
“……”
정애는 가느다랗게 웃었다.
“어마아, 벌써 열한시유 언니.”
정애는 영희의 이런 부드러움이 오늘 저녁따라 새삼스럽게 가슴이 아팠다. 따뜻한 눈길로 영희를 건너다보았다.
“난 지금 2층에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언니와 나와 친형제면 어떠했을까 하구. 어쩐지 더 친숙해졌을 것같지는 않아. 안 그렇수, 언니? 피차 마음씀이 이토록 자상스러웠을 것같지는 않아. 참 이상한 일이우. 어쩌문 그렇게 오빠라는 사람은 못마땅하기만 하구 신경에 거슬리기만 하우? 생각하면 오빠도 불쌍한 사람이 아니우? 들볶고 쑤셔대기만 한다고 본시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달라질리도 만무한 것인데, 참, 학교 때 이런 얘길 들었어요. 남자 발레리나들 말이우. 보통때도 화장을 한 대. 망칙하잖수? 분을 바르구 연지곤지를 찍구, 얘기하는 것도 얘 쟤 한다지 않수. 거기 비하면 오빠가 월등 낫지 머. 월등이 뭐야? 월등 몇배지 머.”
“……”
정애는 부드럽게 머리를 끄덕이며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렇지요, 언니? 월등 몇배지 머. 하긴 이런 것이 다 우리 탓은 아니지 않겠수? 어슷비슷하지 머. 언니나 나나 오빠나 다아 오십보 백보지 머. 서서히 기울져가는……날로 날로 더 무력해가는……무엇인가 큰 울타리에서 너무나 너무나 멀리 비켜나와 있어요. 싱싱한 것은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곳에서 움터오르고 있어요. 안 그렇수, 언니? 그렇지, 언니? 난 이렇게 늘 얘기가 두서가 없어서 탈이야.”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는 아닐 것이었다. 조금 전에 그 여인이 돌아갔고 영희도 임신 두달인 터였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어차피 꺼내지 않으니만 못할 것이었다. 그러니 영희가 이렇게 무한정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할 것이었다.
“참 언니, 그때 그날 저녁의 그 쇠붙이 소리 말예요. 어째서 그날밤만 그렇게 소리가 났는지 모르겠어. 낮에 저 아래쪽을 다녀봤는데, 철공소나 대장간같은 곳은 아무데도 없습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 아니우. 참, 아버지두 그날 이후루 달라지셨어요. 마지막 바램도 포기하고, 저렇게 잠만 많이 주무시지 않수. 이북에 있는 언니도 찾지 않구, 보채지도 않으시구, 사그라져가는 불길같은데, 식욕은 더 왕성하구. 참 이상한 일 아니우?”
늙은 주인의 잠든 모습은 흡사 대여섯살 난 어린애같았다. 방에 모셔다가 눕힐 법도 한데 어쩐지 이렇게 버릇이 되어 있었다. 그냥 소파에 내팽개쳐두었다.
잠시 조용했다.
“언니.”
“……”
“난 어차피 선재와 결혼해야 할까봐.”
영희가 문득 말했다. 그러자 정애가 영희의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늙은 주인은 가느다랗게 코를 골고 있었다.
“그인 나 아니면 안 될 것같아요. 어쩐지 그럴 것같아. 나 이상으루 약한 사람이야. 언니 언니, 지금 나한테 아무 소리도 마우. 나, 다 알구 있어요. 어떤 규범을 두고 이런 걸 생각할 성질은 아니지 않겠수? 어차피 그런 건 놓치구 있으니까요. 피비린내 나는 내 타산을 두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야. 싸느다랗게, 공정하게 생각해본 연후의 얘기야. 알겠수, 언니? 그인 너무나 너무나 호인이잖수. 무슨 일을 저질러도 미워할 수는 없을 것같아. 차라리 가엾고 처량해 보일 뿐이우. 눈물이 나도록 처량한 사람이우. 알고 보니까 그래. 두어달 동안에 흠뻑 정이 들었나바.”
“……”
정애가 머리를 끄덕였다.
“언니, 언니도 어서 아기를 낳읍시다. 고집도 아니구 대체 뭐유? 하긴 막연하게 알 것두 같구. 언니 경우가 말이우. 그저 무색투명하기만 하게 하루하루를 그렇게 지낼 수만은 없지 않겠수. 언니, 정말 우리 무슨 일이든 일을 잡읍시다. 모두 일이 없구 마음들이 허해서 이래. 일이야 찾으면 없을라구. 하다못해……”
하다못해……그러나 역시 저들이 할 만한 일은 없을 것이었다.
“정말이야. 마음들이 허해서 이래.”
정애와 영희는 한덩어리로 엉겨 있고, 늙은 주인만이 쌔근쌔근 숨을 쉬고 있는 듯하였다. 정애가 영희를 마주 보며 또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여느 때의 단아한 맛이 가셔지고 앳된 소녀같은 모습이었다.
갑자기 정애가 놀라며 영희의 두 손을 다시 힘주어 잡았다. 새파랗게 질리면서,
“어마.”
하고는 다급하게 속삭이는 소리로,
“저 소리 듣수?”
“무슨 소리유?”
영희는 정애의 표정만 보고도 대번에 파랗게 질렸다. 쿵 쿵, 울리고 있었다. 집 속의 깊은 어느 진수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일 것이었다. 흡사 식물질로 몇백년 묵은 나무뿌리같은 것이 맞부딪치는 것같은 소리였다. 쿵 쿵.
“난 모르겠는데. 소리가 무슨 소리유, 언니?”
둘은 어느새 서로 끌어안고 볼을 맞댄 채 먼 곳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표정을 하였다.
“집에서 무슨 소리가 나요.”
정애가 급하게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어마아.”
영희가 대답했다.
“아씨는 안 들리우?”
정애가 속삭였다.
“난 모르겠어요.”
영희가 말했다.
창문 바깥에 무엇인가 어른어른하는 것같았다. 달빛에 7월 중반의 나뭇잎들이 어른거리는 그림자일 것이었다. 벽의 남색 커튼이 어쩐지 생기를 띠어 움찔움찔 움직이는 듯 보였다.
쿵 쿵.
“저거, 저거 또 들려요.”
정애가 또 자지러지듯이 속삭였다.
“아이, 소리가 무슨 소리유?”
영희가 신경질적으로 큰소리로 말했다.
“정말 안 들리우?”
“난 안 들려요.”
순간 전등이 꺼졌다.
2층에서 쿵쾅거리며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성식일 것이었다.
“순자야, 순자야, 순자야.”
여느 때의 성식이답지 않은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숨소리가 헐떡헐떡했다. 식모 방에서 식모가 뛰어나갔다.
“초 어디있니, 초?”
복도에서 웅성웅성댔다.
식모가 요란스럽게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허덕허덕하며 빼닫이 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다시 불이 들어왔다. 좀 전보다 더 환했다. 시미즈 바람의 식모가 천천히 돌아섰다. 위는 알몸 그대로 풍만한 육체였다. 성식은 여전히 숨을 헐떡이면서 복도로 통하는 문을 막고 서 있었다. 눈빛이 거칠은 기운을 띠고 있고 짙어 보였다. 늙은 주인은 그냥 소파에 잠이 들어 있었다. 영희는 성식과 식모를 번갈아 건너다보며 키들키들 웃었다. 정애는 외면을 하고 시아버지의 비뚤어진 머리를 바로잡아드리고 침이 흘러나온 턱밑을 맨손으로 닦아주었다. 시계는 열한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비로소 식모가 쭝얼거렸다.
“어이구, 대관절 이 집안은 어떻게 되어먹은 집안이 이 모양인지 몰라. 등신병신들만 모여 살구 있어.”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이 정도로 대담한 식모의 푸념에도 누구 하나 대꾸를 못하게 되어 있었다.
현관에 또 벨 소리가 났다.
식모가 제 방으로 건너가 윗도리를 걸치고 뛰어나갔다.
성식은 다시 층층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늙은 주인이 억억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번쩍 눈을 뜨고는 몸을 비틀면서 거쉰소리로 엉엉거리었다. 꼭 짐승의 소리같았다. 입에서는 침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꾼 모양이었다. 두 팔을 내저으며 억억거리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정애와 영희를 뚜릿뚜릿한 눈길로 돌아보며 얌전해졌다.
층층계단을 올라가는 선재의 발걸음이 별로 취한 것같지 않았다. 곧 영희가 뒤쫓아 올라갔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선재는 어둠 속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정애는 또 혼자 울고 있었다. 식모 방의 불이 꺼졌다. 열두시 통금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성식은 2층의 큰 방에서 혼자 전축을 틀었다. 불빛이 푸르무레했다. 침대 위에 벌렁 누워 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수?”
영희가 말했다.
“……”
선재는 대답이 없었다.
아래층에서 정애는 알고 있었다. 결국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것을. 선재나 영희나 피차 아무 말도 못 하리라는 것을. 선재의 그 여인은 아득한 어느 곳을 지나가고 있을 것이었다. 제 숙소에 닿아 있을 것이었다.
영희는 알고 있었다. 선재가 그녀와 만났다는 것을. 만나서 대개 피차에 어떤 모습으로 대했으리라는 것을.
영희는 이런 경우, 제김에 미안해서 무뚝뚝해 있는 선재를 다루는 법을 너무나 잘 터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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