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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본 늦봄의 공부인생
감옥조차 연구실로… 진정한 '평생 학습자'
나의 신학적인 사고는 아직도 유동하고 있다. 나이가 40에서 50 고개를 넘는 중턱에서 아직도 나 자신의 사고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아직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고 있는 형편이다. 부끄럽다면 부끄럽고, 가련하다면 가련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원체 타고난 보헤미안 기질 때문에 죽기까지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바탕이라고 하면 죽기까지 자기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보다 깊은 것을 찾아 헤매다가 말망정 그것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닐까 하고 자위도 해본다.
─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의 저서」 (문익환 1963)
문익환 목사는 ‘공부꾼’이다. 그것도 한 분야에 정착하지 않고 이리저리 표류하는 평생 학습자이다. 스승 김재준 목사의 좌우명 중 하나가 ‘평생 학도로서 지낸다’인데 그 말처럼 살았다. 『월간 문익환』 9월호에서는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들을 통해 그의 공부 인생을 살펴본다.
21세때 도쿄에서 신학공부 시작▲신학(1938년 이후)
◇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교정 stuart hall 앞에서 책을 들고 서있는 문익환 목사
문익환 목사가 본격적으로 신학도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은 21세 때 도쿄 일본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그후 만주 봉천신학교, 조선신학교(한신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유니온신학교에서도 수학하였다. 신학생 문익환의 학업 성취도는 어땠을까? 일본신학교 시절 성적표와 유니온 신학교 시절 리포트로 성적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도쿄신학대학 성적표(1938~1941)와 유니온 신학교 논문 초고(1966)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1955년부터 모교 한신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쳤는데 이 당시에 『기독교 사상』, 『신학 연구』, 『제3일』, 『한국신학대 학보』, 『세계와 선교』, 『한국기독교장로회 회보』 등에 그의 글이 실렸고 기고한 글의 원고가 원고지와 노트 형태로 다수 남아있다. 발행된 글은 현재도 DBpia와 같은 학술 정보 포털 사이트에서 읽어볼 수 있다. 또 구약학 강의 노트와 중부교회, 한빛교회 등에서 설교한 설교문 노트도 50권 가량 보존되어 있다.
◇<예언서 개론> 강의 노트
신구교 공동번역성서 구약 담당▲성서번역(1957년 이후)
1977년 발행한 신구교 『공동번역 성서』의 구약 부분을 문익환 목사가 번역했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약 20년 전에 이미 문익환 목사는 <복음동지회>활동을 하면서 <새로 옮긴 신약성서 Ⅰ: 마태의 복음서>를 쓰기도 했다. 복음동지회 성서번역위원회의 제1회 회의록을 보면 “어체는 중학교 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하되, 평이하고도 장중함을 잊지말 것”이라는 사항이 언급되어 ‘우리말로 쉽게 번역해야 한다’는 원칙이 이미 오래전에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1968년부터 8년간 『공동번역 성서』의 구약 번역위원으로 일했는데 이때의 초고, 교정본 등이 남아있다. 실제 출판은 국어 교사와 대한성서공회의 신학자들의 교열·검수를 거쳐 다소 수정이 되었기 때문에 번역 원고가 문익환 목사의 번역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제1회 복음동지회 성서번역위원회 회의록(1957.5.13)과 『공동번역 성서』 <시편> 148편 번역 초고
한편, 김이곤 명예교수(한신대)는 문익환 목사의 구약학 연구활동을 다음의 다섯 시기로 구분한다(김이곤, 1999).
① 히브리 언어학과 구약 개론학을 가르치며 구약 비평학의 기초를 다지는 시기
② 예언자 신학을 성찰하는 시기
③ 폰 라드의 통시적(diachronic)인 구원사 신학을 비판하던 시기
④ 신학을 발전시키면서 신·구교 공동 번역 성서 사업에 몰두했던 시기
⑤ 민족의 아픔을 껴안은 채로 펴낸 『히브리 민중사』를 체계화했던 시기
특히 다섯 번째는 민주화·통일 운동으로 수감된 시기인데 이때 연구하고 깨달은 바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히브리 민중사』(1990)이다.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 중심에서 눈을 돌려 히브리(유대인) 민족 민중들의 역사, ‘발바닥 얼굴’들에 집중한 것이다. 학계의 신학자들이 보기에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점이야말로 학문의 경계 없이 탐구하고, 현실에 맞닿아 있는 늦봄의 연구 자세를 보여주는 점이 아닐까 한다.
영미에게
… 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단다. 다시 나서 그런 공부를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이젠 나이가 너무 들어서. 요새는 한편으로는 인도 철학, 불교, 요가를 뒤적이면서 한편으로는 네 아버지가 들여보내 준 아프리카 신학을 읽으면서, 한 극에서 한 극으로 왔다갔다하는 내 자신이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하지만, 호랑이에게 잡혀 가도 정신만 잃지 말랬다고, 오늘 우리가 놓여 있는 우리의 현실만 떠나지 않으면 무언가 세상을 보는 새 눈이 열리지 않을까도 싶다. -큰아버지(옥중편지 1986. 7. 4)
영어-일어는 기본…불어-히브리어-중국어도▲언어 공부(1931년 이후)
문익환 목사는 여러 언어 익히는 것을 즐기고 또 탁월한 습득 능력을 보인 ‘언어의 달인’이자 ‘언어 능력자’였다. 최초의 외국어 학습은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해성소학교(1931~1932)에서 1년간 재학하며 일본어를 배운 것이었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 후 ‘일본 말’을 배척하던 은진중학교의 민족주의적 교육 영향으로 5학년 졸업반이 되어서야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는데 이때 비로소 일본어로 번역된 세계 문학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일본 말을 일본 말이라고 멸시하던 철저한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받느라고 일본 말 공부를 퍽 늦게 했다. 덕분에 세계 문학에 접할 기회를 중학교 졸업반까지 놓쳐 버리고 말았다. 겨우 일본 책을 뜯어 읽기 시작한 것이 중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었다(문익환 1963).
일본 신학교에서는 신학을 접하며 영어, 독일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정신없이 공부했다. 아직 한국어로 된 신학서적이 많지 않을 때여서 원서를 읽으려면 외국어가 필수였을 것이다. 그후 미국 유학 중에 전쟁이 발발하여 남북 휴전 회담에서 유엔군 소속 통역관으로 일하고, 히브리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으니 그가 상당한 수준의 ‘언어능력자’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내 나이 스물세 살 때
일본에서 신학생으로 영어 독일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공부하느라고 정신 없다가
폐병에 걸려 죽을 판이었거든
- 문익환 <나의 기도>(1989.12.3)
감옥에서는 62세 때 불어를 공부해보려고 애썼으나 발음은 독학으로 하기가 어려워 그만두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69세 때는 중국어에 도전한다. 얼마나 열을 올렸는지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는데 옥중편지에 그의 외국어 학습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난 지금 요가로 몸을 단련시키며 불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통일에 관한 명상은 꾸준히 계속하고 있소. … 다음 번은 당신의 생일날에나 만나겠군요. 남편이 불어 공부하러 파리로 유학을 갔다고 생각하구려. 불어는 발음은 까다로워도 낱말이 영어와 같은 어원에서 온 말이 많아서 독어보다는 유리한 것 같군요. 그러면 다시 만날 때까지 매일 편지나 쓰시오. (옥중편지 1979. 8. 2)
문칠에게
… 두번째 징역 사는 기간 동안 프랑스어를 공부해 보았는데, 발음이 자신이 없으니까, 프랑스어는 혼자서 공부하는 것이 잘 안 되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중국 말을 공부하는데, 중국 말은 발음이 자신이 있기도 하고 기초도 되어 있어서 쉽게 될 것 같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 않구나. 어학은 무서워하지 않았었는데 나이가 많으니까 전 같지 않다. 그래도 이번엔 중국 말만은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해볼 참이다. 할아버지 씀 (옥중편지 1986. 6. 24)
당신에게
… 지금 이렇게 나와 편지를 쓰다 보니까 이번에 내가 앓은 것은 신경성 몸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얼마 동안 정말 몸살 날 정도로 중국어 공부를 했거든요. 상당히 몸이 부대낀다는 걸 느끼고 있었어요. 이제 정말 슬슬 공부해야겠소. … (옥중편지 1986. 7. 25)
요가-민중의학-묵자-주역에 바둑까지 ▲편지는 늦봄의 공부 기록
문익환 목사의 연구 여정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기록은 논문이나 저술·저서가 대표적이지만, 약 50여 년에 걸쳐 쓴 편지에서도 그의 연구활동이 광범위하게 녹아있다. 1940년대 초 병약한 신학생이었던 문익환은 금강산에서 요양하면서 아내 박용길과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결혼의 걸림돌이었던 건강이 회복되어 안심시키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당시 읽은 책과 감상에 관한 기록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또 미국 유학 시절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학업의 진행상황을 나누고 공부에 필요한 책을 요청하기도 했다.
감옥 생활이 시작된 1976년 이후에는 감방이 그의 연구실이자 공부방이 되었다. 옥중편지를 보면 그때그때 관심사와 깨달은 것들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알리느라 지면이 부족해 보인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설렘과 흥분이 그의 정돈되지 않은 필체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감방에서의 관심은 요가와 민중의학, 헌법, 한글 풀어쓰기(1970년대 말), 주역(1986년), 묵자, 바둑(1990년대 초) 등으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확장된다. 감옥에서 깨우친 요가·경혈·파스치료 등의 민중의학은 『더욱 젊게』(1994)로, 묵자 권위자 기세춘 선생과 나눈 편지는 『예수와 묵자』(1994)로 출간되었다.
박성준 벗에게
… 벗이여! 난 어제 바둑 책 13권 한 질을 주문했습니다. 통일을 앞두고 우리가 극복해야 할 최대의 장애물이 흑백 논리 아닙니까? 그런데 바둑판의 흑백 대결은 나에게는 황홀하게까지 느껴지거든요. 내가 바둑의 상당한 경지에까지 들어갔다고 오해하지는 마세요. 조남철 씨의 『바둑 입문』부터 공부할 참이니까요. … (옥중편지 1990. 3. 15)
40-50년대 편지 해독에도 어려움▲아카이브의 과제
평생에 걸쳐 다양한 주제를 탐구한 문익환 목사이기에 남겨진 사료 또한 그 양이 방대하다.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지원으로 3회에 걸쳐 사료 정리사업을 진행한 바 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사료를 주요 사업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신학과 같은 주제의 사료는 표면적인 목록화가 되어 있을 뿐 내용 해제나 사료 이해를 바탕으로 한 활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사료를 정리하다보면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흥미로운 연구주제나 이야깃거리들이 다양하다. 한국교회사, 구약학, 성서번역 등의 주제에 관심있는 한신대 후배나 신학생들이 아카이브 활동에 동참하기를 기대한다.
연구 관련 사료는 정리 작업이 특히 어렵고 더딘데 ‘방대한 양’과 ‘전문적인 주제’라는 이유도 있지만 사료 자체를 해독하지 못한다는 또다른 어려움이 존재한다. 1940년대 사료에는 한국어, 한자, 일본어 혼용의 편지가 있고, 신학 주제로 넘어가면 1건의 사료에도 한국어, 영어, 히브리어, 독일어 등 여러 언어가 뒤섞여있다. 언어 능력자의 재능기부로 몇몇 사료는 더디지만 조금씩 해제를 위한 전사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요즘은 50플러스 디지털기록지원단(1기)이 1940~50년대 편지의 전사 작업을 하고 있는데 한자, 일본어, 영어를 읽을 수 있는 이들 3인이 한 팀이 되어 편지를 읽고 한 줄 한 줄 텍스트화하고 있다. 막막해 보이지만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하여 암호와 같은 글씨를 해독하는 수준인데 그 과정이 나름대로 재미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여러 문자로 작성된 편지(1941)와 히브리어 강의 노트(1950~60년대)
늦봄의 공부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대단한 공부꾼이라고 감탄하면서 어느샌가 같이 공부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는 독자를 비롯한 여러 이용자들이 함께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늦봄과 함께 ‘스터디’하고자 하는 다양한 분야의 아카이브 활동가를 기다린다. 아직 풀리지 않은 보물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글: 박에바>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쓰는 것 보다는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동적 내향인, ISTP.
[참고문헌]
김이곤(1999) 「작품 해제: 문익환의 신학 세계」, 『문익환 전집 10권』 신학 1. 사계절출판사
문익환(1963)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의 저서」, 『기독교사상』 1963년 12월호
문익환(1999) 「나의 기도」, 『문익환 전집 2권』 시집 1. 사계절출판사
월간 문익환_9월<학자 문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