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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의병장 해운당(海雲堂) 김하락(金河洛)
1846년 12월 14일 경북 의성군 의성읍(義城邑) 원당(院堂) 3리에서
부 김운휘(金運輝)와 모 덕수 이씨(德水李氏) 사이에서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계삼(季三), 호는 해운당(海雲堂), 초명은 길주(吉周), 이명은 일길(日吉), 혹은 길굴(吉窟)이다.
김하락(金河洛)이라는 이름은 훗날 개명한 것으로 본명은 김길주(金吉周), 혹은 김일길(金日吉)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서울에 이거하여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 이정배(李庭培)의 따님과 결혼하였고, 슬하에는 장녀 영규(榮奎)와 아들 병우(秉宇)를 두었다.
김하락
김하락의 19대조 김거두(金居斗)는 공조전서(고려), 16대조 김한계(金漢啓)는 승무원사, 12대조 김근(金近)은 성균진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붕당정치의 폐해로 인해 벼슬길이 막히자 증조부 김기수(金琦洙) ・ 조부 김동화(金東和) ・ 부 김운휘(金運輝) 이래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유천(柳川)이 편찬한 『의성지(義城誌)』에 의하면, “근 40세 가까이 되어 처음 경서와 병서를 옥산(玉山) 성동(城洞)의 암혈에서 읽기 시작하여 수년 만에 통달하고 자칭 길굴(吉窟)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중일기(陣中日記)」에서는 “황학산에서 공부했다.”고 하여 누구에게 수학했는지 학통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영남유생으로 상경했던 재야유생의 신분이었다.
인상에 대해서는 김도현(金道鉉)의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에서 “키가 크고 시원스러우며, 그의 말은 쾌활하고 씩씩하다.”고 적고 있는데, 무인적 기질도 겸비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진중일지』.
1895년 12월 31일(11.16 음력) 조성학(趙性學) ・ 구연영(具然英) ・ 김태원(金泰元) ・ 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창의를 결심하고, 활동지역을 경기 이천으로 정했다. 1896년 1월 1일(11.17 음력) 경기 이천에 도착하여 당시 이천군의 화포군(火砲軍) 도령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의 협조 하에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처음 함께 창의한 인물들 중 조성학은 이종제(姨從弟)인데, 의병부대에 참여할 것을 직접 권유하였다. 조성학의 본집은 경북 풍기 백운동이고, 비슷한 처지의 영남출신 재야유생이었다.
그 외 구연영 ・ 김태원 ・ 신용희 등은 모두 경기 출신의 인사들이었다.
방춘식과 상의하여 이천군의 포진도안(砲陣都案)에 수록된 포군 100여 명을 선발하여 수대(數隊)로 나누어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의병 모집에 착수하였다. 우선 구연영은 2대군(二隊軍)을 인솔하여 양근(陽根) ・ 지평(砥平)에서 군사 300여 명, 조성학은 2대군(二隊軍)을 인솔하여 광주(廣州)에서 남한산성의 별패진포군 300여 명, 신용희는 음죽(陰竹) ・ 죽산(竹山)에서 화포군 300여 명 등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김태원은 안성(安城)으로 들어가 이미 창의했던 민승천(閔承天)과 합세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이천의 창의 소식을 들은 용인 ・ 안성 ・ 포천 ・ 시흥 ・ 수원 ・ 안산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이천으로 모여들었다.
1896년 1월 17일(12.3 음력)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의 기치 아래 결성된 의병부대의 편제는 창의대장 민승천(閔承天), 각군도지휘 김하락, 도총 조성학, 좌군장 김귀성(金龜性), 우군장 신용희, 선봉장 김태원, 중군장 구연영, 후군장 박주영(朴周英), 소모 전귀석(全貴錫), 유격장 김경성(金敬誠), 돌격장 심종만(沈鍾萬), 도지휘종사 안옥희(安玉熙), 대장종사 최순룡(崔順龍) ・ 김명신(金明信), 도총종사 조순희(趙舜熙) , 중군종사 최진엽(崔鎭曄) 등이다.
이천수창의소는 1896년 1월 17일 백현전투(魄峴戰鬪)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2월 12일 이현전투(利峴戰鬪)에서는 크게 패하였다. 이후 의병부대를 수습하여 박주영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896년 2월 28일 광주산성의진(廣州山城義陣) 심진원(沈鎭元)의 요청에 따라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이석용(李錫容)의 양근의진(楊根義陣)과 합세하였고, 세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남한산성의진(南漢山城義陣)을 결성하였다. 남한산성의진은 서울진공작전(進攻作戰)을 수립하여 투쟁하였으나, 3월 22일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1896년 4월 7일경 이천의병부대의 대장에 추대되어 영남으로 이동하였다. 4월 9일 이천을 출발하여 여주(驪州)~흥원(興原)~백운산(白雲山)~제천(堤川)~단양(丹陽)~풍기(豊基)~영천(榮川, 현 영주)을 거쳐 4월 20일 안동 유동역(楡洞驛)에 도착하였다. 당시 예천(醴泉)을 비롯하여 경북 북부지방 일원에서 의병부대의 연합을 모색하고 있던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중군장 서상렬(徐相烈)의 제의에 따라 연합의병을 구성하였다.
곧이어 안동의병부대도 합세하였으나 달성(達城)을 공략하자는 논의 과정에서 의병부대의 연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서상렬은 병력 부족을 이유로 달성 공격을 중단하자는 주장을 하였지만 이에 반대하여 공격을 강행하자는 주장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하고 서상렬과 결별하고 의성으로 의병부대를 옮겨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서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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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병부대는 1896년 4월 28일 의성에 도착하여 금성면(金城面) 금성산(金城山)과 비봉산(飛鳳山)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수정사(水淨寺)에 주둔지를 정하고 군비 확충을 위해 금성면 청로동(淸魯洞)의 김택용(金宅溶)을 영입하여 후군장에 임명하였다. 이때 군위에는 관군 3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5월 9일(3.27 음력) 의흥을 공략하여 무기와 화약을 대여섯 짐 가량 확보하였다.
김하락의병 주둔지였던 의흥관아 터
한편 군위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은 5월 10일(3.28 음력) 의성의병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황산을 공격하였다. 이 황산전투에서 의성의병부대가 크게 패하였다.
5월 11일 의성의병부대의 패보를 듣고 사품(沙品)을 거쳐, 5월 12일 대곡(大谷)에 주둔지를 마련하였다. 이때 관군에 쫓기며 청송으로 들어가던 의성의병부대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다. 이에 의성의병부대를 따라 청송으로 들어가 김상종을 만나 합세하고 관군에 대적할 준비를 하였다.
의성의병부대 김상종의 제의에 따라 이천의병부대와 청송의병부대가 상응하여 의성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이리하여 의성연합의병부대는 청송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와 의성 비봉산전투(飛鳳山戰鬪)를 치렀다. 감은리전투는 1896년 5월 14일(4.2 음력) 의성연합의병부대가 청송군 안덕면(安德面) 감은리(甘隱里)에서 관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이다. 감은리전투에서 연합의병부대는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봉산전투는 5월 20일(4.28 음력) 의성의병부대와 이천의병부대가 관군과 벌인 전투이다. 감은리전투 이후 청송의병부대와 헤어진 의성 ・ 이천 의병부대는 그 본진을 다시 금성산과 비봉산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수정사(水淨寺)로 이동하였다. 수정사에서 전열을 정비한 연합의병부대는 비봉산전투를 치른 이후 5월 26일(4.14 음력)까지 관군과 대적하였다.
의성 ・ 이천 의병부대가 전열을 정비한 수정사
의성연합의병부대는 청송 감은리전투와 의성 비봉산전투를 통해 명실공히 전투의병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비봉산전투 이후 의성의병부대의 김상종은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피신길에 올랐으며, 이천의병부대의 김하락은 경주로 이동하였다.
1896년 5월 26일(4. 14 음력) 비봉산에서 출발한 김하락의 이천의병부대는 경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5월 27일 이천에서부터 함께 활동해 온 구연영이 이천 출신의 부하 30여 명을 이끌고 이천으로 돌아감으로써 전력면에서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결국 김하락은 50~60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두음산(斗音山) ・ 황학산(黃鶴山)~금학산(金鶴山)~황산(黃山)~실업동(實業洞)~청송 화목(和睦)~도동(道洞)~덕현(德峴)~안덕(安德)~유천(柳川店)~입암(立岩) 등지를 거쳐 6월 15일 경주 인비(仁庇)에 도착하였다. 이천의병부대는 경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6월 8일 실업동전투(實業洞戰鬪)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6월 15일 경주 인비에 도착하자 경주지역의 유림 김병문(金炳文) ・ 이시민(李時敏) ・ 서두표(徐斗杓) ・ 박승교(朴承敎) 등이 찾아와 연합의병부대의 결성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편제의 경주연합의병부대가 조직되었다. 그 편제는 창의대장 김하락(金河洛), 경주군도소모장 이채구(李采久), 참모 이준구(李俊九) ・ 이종흡(李鍾翕) ・ 장상홍(張相弘) ・ 이우정(李寓禎) ・ 박승교(朴承敎), 좌봉장 서두표(徐斗杓), 우선봉 홍병태(洪秉泰), 좌익 안옥희(安玉熙), 우익 안재학(安載學), 중군 이익화(李益和), 후군 김두병(金斗柄), 좌봉 이용관(李容觀), 우봉 이상태(李相台), 좌포장 황성학(黃性學), 우포장 이시민(李時敏), 영솔 김병문(金炳文) 등이다.
경주연합의병부대는 경주지역의 인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이천의병부대 ・ 의성의병부대 ・ 청송의병부대 등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참여한 연합의병부대이었다. 물론 의병장은 대부분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활동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의성의병부대나 청송의병부대에서 활동했던 병사들이 경주연합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연합의병 전투지(경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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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연합의병부대는 조직을 정비한 후 1896년 6월 17일(5. 7 음력) 경주성을 공략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20일 대구부 소속의 관군과 안강 주둔 안동친위대(安東親衛隊)가 연합하여 경주성을 공략하자 6월 23일 경주연합의병부대는 3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근세오만분지일 지형도_경주』(1914년~1918년)
경주성전투에서 패전한 후 잔여 병력을 이끌고 달성(達城)~기계(杞溪)~흥해(興海) 등지를 거쳐 영덕을 향해 나아갔다. 이동 중 기계에 이르자 흩어졌던 병사들이 차츰 합세해 왔고,
청송의병부대도 다시 가담해 왔다. 흥해 ・ 청하에서는 다시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흥해 관아의 무기고를 공격하여 탄약을 조달하는 등 의병부대의 진용은 차츰 정비되어 갔다.
이천의병부대는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받으며 영덕으로 진군하였다. 6월 28일(5.18 음력) 청송의병부대와 합세한 뒤 6월 29일 영덕 장사를 거쳐, 7월 2일 영덕읍에 도착하였는데, 영덕의병부대의 의병장 신운석(申運錫)이 합세하였다. 영덕에서 다시 의병 100여 명을 모집하여 더욱 진용을 강화하였다.
이천의병 전적비(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7월 5일(5. 25 음력) 다시 축산으로 이동하였다. 7월 7일 영해의병부대의 선봉과 좌익장이 찾아와 합세할 것을 요청하자 영해부로 들어갔다. 또 7월 9일 안동의병부대의 전군 류시연(柳時淵)이 6개 부대를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자는 요청하였다. 이에 류시연과 함께 안동부로 주둔지를 옮기기로 하였다.
7월 11일(6. 1 음력) 일본군이 청하에서 영덕으로 북상중이라는 첩보를 받았다. 우선 이채구(李采九) ・ 이준구(李準九) ・ 홍병태(洪炳泰)로 하여금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을 향해 선발대로 출발토록 하였다. 그리고 7월 12일 조성학과 함께 영덕으로 들어갔다.
7월 13일과 14일, 양 일간에 걸쳐 일본군과의 접전이 벌어졌다. 첫날 전투에서 의병부대가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음날 7월 14일 수백 명의 일본군이 들이닥쳐 남천쑤(南川藪)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결국 의병부대는 군사적인 열세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전투를 계속하던 중 탄환 2발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러자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여 스스로 강물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고, 병졸 몇 사람도 그 뒤를 따랐다.
이천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한 후 약 7개월 만인 7월 14일 의병활동의 종지부를 찍는 장렬한 순간이었다.
이후 영덕 강구의 한규열(韓奎烈) ・ 손치문(孫致文) 등이 시신을 수습하여 바닷가에 매장하였다. 영덕전투에서 패하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할 당시 장녀 영규는 11세였고, 아들 병우는 5세였다. 1914년 사위 정웅(鄭雄)이 충남 서천의 남산 축향(丑向)으로 반장하였다.
한편 이천의병부대가 영덕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인근에 전해졌다. 이에 김도현 및 안동 ・ 영양 ・ 선성 등지의 의병들이 영덕으로 이동하였으나 이미 이천의병부대가 와해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이천의병부대의 잔여 의병은 산발적이나마 일정 기간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전기의병 초기 경기도 이천에서 창의하여 경북 영덕에 이르는 대장정을 통해 불굴의 항전을 전개하였던 전투의병이었다. 의병전쟁사상 최초로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하여 실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대장정 과정에서 각처 의병부대와의 연합의병진 결성을 결성하였다.
한말 의병장 해운당(海雲堂) 김하락(金河洛)
1856년 ~ 1896년 호(號)는 해운당(海雲堂).
그는 한학을 공부하면서 천문ㆍ지리ㆍ병법ㆍ의학등의 서적을 널리 탐독하였다. 개항 이후 내정 간섭을 일삼으며 우리나라를 침탈하고 있던 일제가 1895년 8월 20 일 러시아 세력을 끝어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하는 만행을 저지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아가 일제는 친일내각으로 하여금 '을미개혁’을 시행케 하고, 그 일환으로 같은 해 11월 15일 단발령(断髮令)을 강제 실시케 하였다. 이는 밖으로 개혁의 모양새를 갖추어 침략의 독수를 드러나지 않게 하면서, 안으로 한국을 반(半)식민지 체제로 개편하려는 일제의 침략 책동이었다.
이와 같은 민족적 수모와 국가적 위기에 당면하여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몰아내고 국모(國母) 복수를 이루고자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평소 의기 투합하였던 이종 동생 조성학과 구연영ㆍ김태원ㆍ신용희 등의 동지들과 경기도 이천에서 거의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을 빠져 나왔다.
1895년 11월 17일 이천에 도착한 선생은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화포군(火砲軍) 도영장(都領將) 방춘식과 협의하여 포군(砲軍) 100여 명을 선발한 뒤 이들을 앞세워 의병모집에 나섰다. 우선 구연영을 양근(陽根)ㆍ지평(砥平), 조성학을 광주(廣州), 김태원을 안성(安城), 신용희를 음죽(陰竹)으로 파견하여 각군 소속 포군들을 의병으로 모집하였다.
그리고 안성에서 창의한 민승천 의진과 합세하여 1896년 1월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라는 연합의진을 꾸렸다. 이 때 선생이 천명한 거의 명분은,
1. 소위 '을미개혁’에 의한 국정의 문란과 일제의 내정 간섭
2. 청일전쟁을 악용한 일제의 불법 무력 침략과 군대주둔
3.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등이었다.
김하락 1846(헌종 12)-1896. 조선 말기의 의병
의진의 지휘부는 창의대장 민승천, 각군 도지휘(各軍都指揮) 김하락, 도총(都摠) 조성학, 좌군장 김귀성, 우군장 신용희, 선봉장 김태원, 중군장 구연영 등으로 조직하였다. 병사들은 '삼기 구대법(三騎九隊法)’으로 편성하였는데, 병력은 900명 정도였다. 이와 같은 선생의 의진은 주로 포군들을 모집하여 조직되었기 때문에 다른 의진보다 훨씬 전투력이 강한 것이 특징이었고, 그것은 이후 의병 활동 과정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의진 편성이 끝나자 선생은 곧 친일정권과 일본군 타도에 나섰다. 그리하여 같은 해 1월 18일 백현(魄峴)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방에서 협공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였고, 패주하는 잔여 병력을 광주 노루목장터까지 추격하여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첫 번째 전투에서 벌인 대대적인 승리의 경험은 이천의진이 최후까지 항전할 수 있는 정신력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의병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백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선생의 의진은 2월12일 새벽 병력을 보충하여 재차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200여 명을 맞아 이현에서 이틀 동안 대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화력이 열세한 상태에서 눈보라까지 몰아쳐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선생은 후일을 기약하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현 전투에서 패전한 선생은 손상된 의진을 정비하고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해 2월 14일 여주에서 거의한 심상희 의병장을 방문하여 이천에서 함께 활동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승낙을 얻은 뒤, 잔여 병사들과 여주의진을 합쳐 제2차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하였다. 이 의진은 승천 대신 박주영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심상희를 여주대장으로 하였으며, 그밖에는 초기 지도부와 조직 편제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이렇게 의진을 재정비한 선생은 2월 28일 근거지를 이천에서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옮겨,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심진원이 이끌던 광주의진과 이석용이 지휘하던 양근의진과 합세하여 남한산성연합의진을 결성하였다. 이 때 병력은 1, 6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이 의진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 국내 정국은 돌변하고 있었다. 1894년 6월 일본 군대가 경복궁에 난입하여 친청(親凊) 민씨정권을 붕괴시킨 '갑오왜란(甲午矮亂)’ 이후, 고종은 일제와 친일내각의 위협과 감시 속에서 그 동안 마지못해 개혁을 재가하여 왔었다. 그러던 중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1896년 2월 11일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신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그리고는 곧 바로 친일내각의 대신들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령을 내리는 한편 민심 수습책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폐지하고 의병 해산조칙을 반포하였다.
이와 같은 정국변화와 단발령 폐지라는 명분 상실에 따라 다수의 유생 의병장들이 자진하여 의진을 해산하여 갔지만, 선생은 왜적 구축(驅逐)과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의병 해산이란 있을 수 없음을 거듭 주장하면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이 연합 의진은 3월 5일 남한산성을 침공하는 적 500여 명과 공방전을 벌여 일방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고무된 선생 등 남한산성연합의진의 지도부는, 제1단계로 먼저 수원 근방의 의진들이 연합하여 수원성을 점령하고, 제2단계로 남한산성의 진과 춘천ㆍ분원(分院)ㆍ공주ㆍ청주 및 수원의진이 남한산성 주변에 주둔한 일본군을 협공으로 격파하고, 제3단계로 삼남 지방 의병까지 연합하여 서울로 진공하여 일본군을 구축하고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을 환궁시킨다고 하는 3단계의 '서울진공계획’을 수립 추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300여 명의 강화지방대 병사를 증원한 적은 위력을 과시하는 한편 일부 의병장을 벼슬자리로 회유하여 지도부의 분열을 획책하였다. 아울러 성으로 들어가는 양도(糧道)를 끊고 봉쇄하여 병사들의 전의를 상실케 한 뒤, 3월 22일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여 남한산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따라 남한산성연합의진의 서울진공계획은 실행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생이 지휘하던 이천 의진도 의병운동의 인적ㆍ물적 기반을 거의 상실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서울진공계획은 한말 의병투쟁사에 있어서 최초의 서울진공작전일 뿐 아니라 그 규모도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그 인근 지역에서 대규모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연영ㆍ김태원ㆍ신용희 등은 의진의 재건을 위하여 선생이 표면에 나서서 직접 창의대장을 맡아 줄 것을 강청하였다. 그리하여 이천의진의 창의대장으로 추대된 선생은 효과적이며 지속적인 의병 활동의 전개를 위해 영남으로 이동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는 영남이 선생의 연고지라서 의병운동의 활동 기반을 확보 확충하는데 유리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남과 그 인근지역은 당시 의병부대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곳이었던 까닭에 이들과 이합집산하면서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의도에 따라 4월 9일 이천을 출발한 선생의 의진은 여주ㆍ흥원ㆍ백운산 등지를 거쳐 4월 12일 충북 제천에 도착하여 유인석 의진의 환대와 격려를 받았다. 그리고 유인석 휘하의 안승우 의진을 도와 장현전투에서 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유인석으로부터 의병 활동을 같이 할 것을 제의 받기도 하였으나, 선생은 본래의 계획대로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자 사양하였다.
그 뒤 선생의 의진은, 단양ㆍ풍기ㆍ영주 등지를 경유하여 4월 20일 안동에 도착하였다. 이 때 예천에 있던 서상렬 의병장이 연합 활동을 요청함에 따라 이들과 합진(合陳)하였고, 또 안동의진과도 합세하여 연합의진을 구성한 뒤 달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곧 분산하여 선생의 의진은 의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896년 4월 28일 의성에 도착한 선생의 의진은 금성산(金城山)에 위치한 수정사(水淨寺)에 근거지를 정하였다. 그런 다음 인근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병력을 확충하는 한편 5월 9일 의흥(義興)을 공격하여 화약ㆍ무기 등 군수품을 노획하여 화력을 보강하였다. 5월 13일에는 이곳에서 활동중이던 김상종 의진과 합세하고, 이어 청송의진도 가담시켜 선생은 이천ㆍ의성ㆍ청송 등 3의진으로 의성연합의 진을 형성하였다.
선생이 지휘하는 이 연합의진은 5월 14일 적 170여 명이 대구 방면에서 공격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청송 성황산(城隍山)주위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을 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사기가 올라간 의성연합의진은 각면(各面)에서 군수 물자를 보충받고, 자발적인 호응 속에서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의진을 확대 개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연합의진은 5월 20일 비봉산(飛鳳山)에서 적군 100여 명과 교전하여 재차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적은 병력을 증원하여 5월 25일 반격을 가해 왔다. 선생이 지휘하는 의성연합의진은 이들과 하루 종일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결국 화력의 열세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선생은 퇴각하여 경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5월 26일 비봉산을 출발한 선생의 의진은, 황학산ㆍ금학산ㆍ황산ㆍ청송ㆍ덕현ㆍ영천 등지를 거쳐 6월 15일 경주에 도착하였다. 선생의 의진은 경주에서 김병문ㆍ이시민ㆍ서두표ㆍ박승교 등 이곳 유림 세력과 다시 연합하여 경주 연합의진을 결성하였다. 이 의진은 조직을 정비한 후 먼저 적군 약 50여 명이 주둔해 있던 경주성 점령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6월 17일 조성학이 선봉이 되어 경주성 동문을 공격하여 갔다. 이에 적군이 일제히 포를 쏘며 대항하자 선생은, "너희들이 의병(義兵)에 대항하니 이것은 역적을 돕는 큰 죄악이다. 만약 끝내 미혹을 고집한다면 옥석구분(玉石俱焚)의 경우를 면치 못할 것이다. 빨리 성문을 열어 후회가 없게 하라”고 호소하여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 의진을 이끌고 성문을 공략하였다. 이러한 강온 양면전략을 구사하여 선생은 적의 전투의욕을 저하시켜 스스로 달아나게 함으로써 손쉽게 경주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경주성을 점령하자 선생은 각면 유지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 활동에 적극 호응케 하는 한편 병사들을 성내 곳곳에 배치하여 철통같은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따라서 선생이 지휘하던 경주연합 의진은 6월22일 대구부에서 파견한 159명의 군사들과 안동진위대의 지원군이 합세한 적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퇴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격에서 패퇴한 적은 총병(銃兵)ㆍ궁수(弓手) 등 대구부의 정예 군사들로 병력을 보충하고, 나아가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의 지원을 받아 6월 23일 다시 경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에 대항하여 경주 연합의진은 30여 명의 전사자를 내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계속된 전투로 말미암아 탄약이 떨어지고 병사들 또한 동요함에 따라 결국 경주성을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달성ㆍ기계ㆍ흥해 등지를 경유하여 6월 29일 영덕에 도착하였다. 이동 중에 선생은 기계에서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으고, 흥해와 영덕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의진을 다시 정비 확충하였다. 그리고 7월 5일 영해의진과 합세하고, 7월 9일 유시연의 안동의진과 합진함에 따라 선생의 의진은 영덕의진ㆍ영해의진ㆍ안동의진 등과 대규모의 연합의진을 형성하였다. 선생은 이 연합의진을 동원하여 영덕 관아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고, 7월 14일 영덕에 도착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때 적군 수백 명이 일시에 기습하여 왔다.
그리하여 선생은 연합의진을 이끌고 이들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선생은 이 와중에서도 전투를 계속 독려하다가 2발의 탄환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에 선생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면서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이리하여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그리고 다시 영남으로 이동하면서 약 7개월 동안 줄기찬 투쟁을 벌였던 선생의 의병 활동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선생의 유고로는 진중일기(陣中日記)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이천 의병을 조직한 사실부터 의병진의 활동상황 및 전투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선생이 영덕 전투에서 순국함으로써 김하락 의진의 조직적 차원에서 활동은 끝을 맺게 되지만 잔여 병사들이 지도자를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산발적으로나마 의병활동을 계속하였고 지도부의 인물들도 1905년 이후 의병 활동, 계몽운동으로 그 맥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