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교육공동체가 주의해야 할 몇 가지
하정호
광주어린이청소년친화도시추진협의회 대표, 청소년플랫폼 마당집 대표
논술 강사 10년, 작은 대안학교 3년, 교육청 공무원 1.5년, 사회복지재단 1년.
아내는 나더러 일을 하면 제대로 끝을 못 맺는다 하고 지인은 나더러 늘 한결같다 하지만, 나는 내가 농부처럼 살 수 있을까 궁금하다. 밭을 갈고 씨 뿌리는 것은 농부의 일이지만 기르는 것은 하늘의 일이고 그 결실은 모두의 것이다.
지역사회교육운동에서 배우는 교훈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속담은 이제 아프리카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잘 알려진 듯하다. 마을에 있는 다양한 자원과 관계망들이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데 묵시적이거나 직접적으로 기여한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인지 마을교육공동체 사업에서도 이 말이 표어처럼 자주 쓰인다. 경기도교육청에서 처음 시작한 마을교육공동체 사업은 광주시교육청, 세종시교육청으로 옮아가며 혁신학교 사업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혁신학교 운동은 그 동안 많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배움의 공동체가 학교의 담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학교급간의 연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혁신교육 지구’를 지정해 혁신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인근의 혁신 중학교로 진학하게 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일부 혁신학교 교사들의 열정만으로는 경쟁 교육의 병폐를 극복해 내기가 어렵다. 다수의 시민들이 새로운 교육의 동조자로, 주체로 나서게 해야 한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먼 길이지만, 경기도교육청은 마을교육공동체가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끄는 핵심 고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과연 이런 기대는 실현될 수 있을까? 꿈이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할까?
경기도교육청이 마을교육공동체 사업을 처음 시작했다고 했지만, 사실 이는 잘못된 말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반세기 넘게 ‘지역사회교육’운동을 해왔다.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 지역 사회를 재건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 학교에 강조되는 상황에서 지역사회교육이 시작되었다. 1956년에는 ‘지역 사회를 건설하자’라는 것이 경기도의 장학 방침이었고, 4.19가 일어난 직후에는 지역사회학교라는 이념이 문교부의 장학 목표로도 채택되었다. (권두승(1999), 〈지역사회교육운동이 한국사회의 발전에 미친 영향과 성과〉,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 30주년 기념 제17차 사회교육심포지엄 《지역사회교육운동 30년-회고와 전망》 자료집, 5쪽.) 하지만 이는 국가 주도의 교육운동이었고 민간 영역에서 지역사회교육운동이 촉발된 것은 1969년에 ‘한국지역사회학교후원회’가 결성되면서부터였다. 지금은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30개 지부를 두고 있는데, “학교를 주민의 평생교육의 장으로 개방함으로써 지역 주민의 성장을 돕고 지역 주민은 학교의 협력자가 되게 함으로써 자기 지역과 학교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학교 중심의 교육공동체운동”(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 홈페이지(http://kace.or.kr/p01_02)에서 인용)이 지역사회교육운동이라고 이 단체는 규정한다. 권두승 교수는 이런 지역사회교육운동이 “학교와 지역 사회의 상호협력 운동이고, 학교개방운동이고, 지역주민의 사회교육운동이고, 지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개발운동이고, 지역민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새이웃 형성운동이며, 교육실천운동”(앞의 책, 14쪽.)이라고 정리한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마을교육공동체의 구상이 이런 지역사회교육운동에 모두 담겨 있다. 역사적으로는 지역사회교육운동의 끄트머리에 마을교육공동체운동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아야 공정하다. 새롭게 마을교육공동체운동을 시작하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간 지역사회교육운동이 걸어온 전철을 살피고 이를 되밟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한다. 이 점에서 한숭희 교수의 비판은 늘 곁에 두고 따라야 할 만큼 뼈아프다. 그만큼 가치가 있는 말이니 길더라도 여기에 옮긴다.
‘교육운동’은 실천운동이며, 거기에는 뚜렷한 목적성과 예상결과가 그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의 아이디어가 개개의 구체적 참여자들의 의식과 활동 속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선 지역사회 협력학교들의 사정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심각한 회의가 듭니다. 예컨대 이 운동을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교육과 학교행사 및 학교업무에 노동력을 제공받는 학부모 봉사단체’로 이용하고 있었고 참여자들도 ‘자신의 자녀교육을 위하여 뭔가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며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교사들은 이것을 또 하나의 잡무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제가 조사한 경기도 지역 몇몇 초등학교의 경우 지역사회교육에 관하여 관계 교사들의 의견은 ‘일을 벌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식이었습니다. 예컨대 중앙협의회의 진보적이고 체계적인 운영방식에 비하여 일선의 현실은 냉담한 편이었다는 것이 저의 ‘편향된’ 소견입니다.
토론자가 보기에, 이제 지역사회교육운동이 예전에 ‘거점(據點)’으로 확보했던 ‘학교’라는 센터를 포기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봅니다. 농촌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겠습니다만, 특히 도시지역에서의 학교는 지역사회교육운동을 벌이기에 구조적인 취약성을 노정하고 있습니다. 우선 개방할만한 시설과 여유공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개방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교육청과 지자체가 엄밀히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학교가 지역사회에 봉사할 아무런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취미교실 등은 백화점 문화센터교육과 다름없이 진행됩니다. 학교는 여전히 학보모의 참여를 ‘간섭’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지난 30여 년간 변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문제는 ‘학교’를 변화시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라는 ‘학교 밖’ 모습을 변화시킴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컨대 이제는 가난하고, 협소하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학교 안에 머물면서 지역사회교육운동을 펼치려는 생각보다는 보다 거시적으로 한국지역사회교육의 중심을 진정 지역사회 중심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믿습니다.
-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 30주년 기념 제17차 사회교육심포지엄《지역사회교육운동 30년-회고와 전망》 자료집, 17쪽.
혁신학교운동이 있기 직전인 1999년의 글이지만, 학교가 ‘가난하고 협소’하다는 지적만 빼놓는다면 오늘날 혁신학교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글이라고 내어 놓아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는 여전히 학부모를 봉사자로만 여기고 학교의 한 주체로 생각지 않는다. 학교나 교사가 제안한 것 이상을 하려는 학부모의 노력은 ‘간섭’으로 여겨져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만다. 혁신학교라 하더라도 별 다를 바 없지만 30년 동안의 노력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일이라 하니 혁신학교만 탓할 것도 아니다. 업무량이 늘어나는 문제 때문에 다양한 행정 지원을 펼치지만 교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끄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한숭희 교수는 과감하게,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학교’를 변화시키려는 헛된 노력을 하느니 ‘학교 밖’을 변화시키는 지역사회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제안한다.
경기도교육청에서 마을교육공동체 사업을 시작하는 첫해에도, 멀리 내다보고 마을의 교육력을 높여 학교를 변화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마을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학교로 스며들게 하겠다는 취지에서 예산도 마을로 지원하고 학교로는 마을교육공동체와 관련한 공문조차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와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교사들의 비판에 맞닥뜨려서 한 해도 못 버티고 방침을 바꾸어야 했다. 경기도교육청의 시도가 앞으로 어떻게 결실을 맺을지는 더 지켜보아야 한다. 어쩌면 마을교육공동체를 만드는 일에도 30년이라는 세월 그 이상이 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마을교육공동체운동이 그간의 지역사회교육운동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몇 가지를 말해 보려 한다.
아이들에게 더 많은 프로그램이 필요할까?
우선 아이들을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묶어 두는 일을 줄여 가야 한다. 마을교육공동체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모사업은 예산 지원을 받기 위해 사전에 사업 계획서를 내고, 그 계획대로 진행하였는지 각종 증빙을 제출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프로그램대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어 아이들이 수동적인 객체로 머무르고 마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수업과 관련되지 않은 다른 행동을 못하게 막으면서 ‘진도’를 빼야 하는 제도교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아이들은 학교에서, 방과후학교에서, 돌봄 교실에서, 학원에서, 각종 공모사업에서도 프로그램의 대상이 되어 정형화된 ‘바코드 인간’으로 자라난다. 체험과 참여 위주로 구성된다고는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유사한 프로그램들만 늘어나고, 아이들은 부모가 쇼핑해 오는 프로그램을 소비하며 창의성을 잃어가고 있다. 저소득 계층 아이들에게도 각종 복지사업들이 중복되지만 그럴수록 아이들은 프로그램 수혜자로만 길들여지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맘껏 할 수 있는 기회는 오히려 줄어든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배움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 ‘기다림’의 시간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이 배움의 욕구가 원초적인 자생력의 바탕이다. 그러니 배움의 의지가 없는 곳에서는 어떠한 창조 활동도 일어날 수 없다. 마을교육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사람들까지, 아이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배움의 욕구를 빼앗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아이의 내면에서 무언가 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댈 때까지 어른은 기다려야 한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는 그것을 함께할 사람이 필요할 텐데, 그때 가장 가까이 있는 이는 친구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여유조차 주지 않은 채 각종 과제를 들이밀고 있다. 왕따의 이면에는 친구를 빼앗은 어른들의 과도한 욕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 가와사키시의 아동인권조례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인 것, 휴식하여 자신을 되찾는 것, 자유롭게 놀고 활동하는 것, 안심하고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들이 가능한 거점을 시에서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마을교육공동체가 필요하다면, 학교 밖에 또 다른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두어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원하는 활동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일을 우리가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마을교육공동체가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주체가 되어버리면 ‘마을’도, ‘교육’도, ‘공동체’도 이루지 못하는 허무맹랑한 결과를 낳을 우려가 크다.
공모 방식보다는 주민 참여 예산으로 운영하자.
마을의 삶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아이들을 함께 돌보려면, 마을의 생활 기반이 먼저 탄탄해져야 한다. 학교 앞 문구점은 마트보다 물건을 비싸게 파는 가게인 것만이 아니라, 매일 그 자리에 있으면서 지나가는 아이들을 돌보고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기도 하다. 대형 마트와 슈퍼마켓이 들어서고 동네 점방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은 신경 쓰지 않으면서 ‘마을교육’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가게가 망한 뒤 일부러 누군가 다시 그 자리를 지키게 하려면 배움터 지킴이가 그러하듯이 별도의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 학교 앞 문방구가 살아남아서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을 지켜보게 하는 것이 단체에 프로그램 예산을 지원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곳의 운영을 지원해줄 수는 없을까? 학교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그곳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문방구는 쉽게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불편부당함’이라는 잣대 때문에 그럴 마음을 못 낸다. 행정의 지원은 정의의 여신처럼 눈을 가리고 이루어지기에 어느 누구에게만 특혜를 줄 수가 없다. 결국 경쟁 입찰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이길 가능성이 없고 혜택은 큰 업체에게만 돌아간다. 시장에서의 지나친 경쟁이 사람들의 삶을 옥죄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도 국가(행정)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시장과 국가의 체계는 ‘경쟁’과 ‘규율’이라는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마을 주민들이 학교 앞 문방구를 살리자는 운동에 나서고, 마을 골목길에 주차한 차들을 없애 아이들에게 놀이공간을 만들어 주자고 나서면 어떨까? 주민들의 표를 의식하는 단체장들로서는 굳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독자적인 생존 능력을 잃고 있는 동네 점방이나 문방구를 협동조합으로 바꾸어내는 일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 자체가 마을의 자생력과 교육력을 높이는 과정이다. 마땅히 배울 것도 없는 마을에서 마을교육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한 과정이 없는 마을교육공동체는 마을도, 공동체도 없이 프로그램으로만 교육을 하려는 것이기에 별다른 소득을 얻기 힘들다. 마을교육공동체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주민들 간의 소통과 협의가 이루어지는 공론장이 있어야만 생활 세계를 보호하는 일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참여 자치를 가르치는 민주시민교육의 길이 자연스레 열릴 수 있다.
국가의 행정은 마을의 자조 모임을 ‘지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힘을 갉아먹는다. 문화예술단체들이 각종 공모 사업에 의존하게 하는 것은 손쉬운 일을 하느라 그들 자신의 역량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하고, 결국 지원이 끊기면 마을교육의 자산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 각종 공모 사업 계획서에는 늘 지난 2~3년간의 공모 사업 실적을 써넣으라고 하는데, 그런 행동은 자력으로 어렵게 버텨 가던 단체들을 자괴감에 빠지게 하고, 다른 단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공모 사업에 뛰어들도록 만든다. 마을에서 자연스럽게 주민들이 모였던 동네 점방이나 문방구가 사라지는 대신 인위적인 북 카페나 플랫폼들이 늘어난다. 자생력 없이 행정의 지원을 업고 단체장의 치적처럼 만들어진 이런 공간들은 지원이 끊기면 지속되기 힘들다.
행정이 거버넌스 기구를 만들고 각종 공모사업으로 예산을 나눠주는 것이 한편으로는 공정한 절차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행정이 마땅히 책임져야 하는 일을 주민들에게 떠넘긴 것이기도 하다. 공모 사업에 선정된 주민들은 프로그램 진행하고 정산하느라 정작 여유 있게 마을사람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진다. 자기 일만 바쁘게 하는 사람보다는 남의 일도 거들고 같이 노닥거리며 신세한탄이라도 더 들어줄 사람이 마을에 필요하다. 신뢰 없이 마을은 형성될 수 없다. 그런 신뢰는 행정의 지원이 아니라 주민들이 서로를 챙겨 주는 데서 나온다. 예산은 마을로 쏟아지고 사람들은 분주한데, 제대로 마을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은 잘 들리지 않는다. 마을교육공동체라고 해서 이런 문제가 없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마을공동체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며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돌보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관이 주도해 민간 영역의 질서를 교란하는 일을 줄이려면 마을의 교육력을 높여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마을교육 지원 사업은 말 그대로 ‘마을교육’을 ‘지원’하는 데 그쳐야 한다. 있지도 않은, 누군가 하지도 않은 일을 ‘지원’할 수는 없다. 쇠락해 가는 마을의 기운을 북돋울 수는 있겠지만, 없는 마을까지 만들어낼 수는 없다. ‘마을 만들기’가 아니라 ‘마을 살리기’가 필요하다. 마을교육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미 있는 마을의 교육 역량을 어떻게 강화해갈 것인지 면밀히 살피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런 눈도 없으면서 누가 무엇을 하든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공모 사업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행정에는 그런 눈이 없다. 설사 그런 눈이 있더라도 손이 묶여 있어 특정 단체만 지원해주기가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이 주도하지 않고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합의하고 결정하는 문화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마을마다 자생적인 마을교육 협의회를 만들어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교육 활동들을 두루 살피게 하자. 그래서 지원해야 할 단체가 있으면 지원해 주고, 퇴출시켜야 할 단체가 있으면 퇴출시키기도 해야 한다. 그런 마을교육협의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대표자 회의를 열고 차년도 마을교육 예산을 주민이 스스로 짜게 하자. 그래야만 학교에서도 그런 계획들을 학교의 교육 계획에 반영할 수가 있다. 학기가 시작된 이후에나 실행되는 공모 사업들은 학교 행정을 힘들게만 할 뿐이다. 주민들이 함께 모여 마을교육을 고민하게 된다면 마을에서 벌어지는 각종 공모 사업을 두루 살필 수 있어 예산의 효율성도 높아지고 그 혜택이 더 많은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는 원래 불편한 것
이쯤에서 우리는 왜 굳이 ‘마을교육’을 말하는가, 도대체 정체불명의 ‘마을교육’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다시 논의를 시작해야겠다. 경기도교육청은 이를 ‘마을을 통한, 마을에 관한, 마을을 위한 교육’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지역 사회의 인적, 문화적, 환경적, 역사적 자산을 적극 활용하고, 학생들이 마을에 대해 배우며, 그 결과 마을의 삶을 고민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교육에 대한 이러한 구상은 마을과 교육을 떼어 놓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마을을 통하든, 마을에 대해서 하든, 마을을 위해서 하든, 마을이 교육의 수단이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마을 자체가 교육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학교가 교사의 입장에서 마을을 바라보기에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교사는 마을의 자원을 써서 마을에 대해 가르치면, 나중에 아이들이 마을을 위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사가 아닌 마을이, 마을의 주민이나 마을이라는 공간과 환경 자체가 이미 교육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려운 조건에서도 ‘학교’협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학교 앞 문방구를 협동조합으로 만드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것은 학교나 교육청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마을교육은 마을과 학교의 담장을 없애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공장과 학교와 가정을 분리시켰던 근대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시 마을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을 의미한다. 들판에 나가 농사를 배우고 집에서 제사를 드리며 예절을 배우고 마을 어른들이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가르치던, 마을에서의 삶 자체가 이미 교육이었던 그 문화를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 마을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이다.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 도덕 교과서에만 실려 있는 얘기가 아니라 마을에서 살아나게 될 때, 진정한 마을교육이 가능해질 것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나쁜 일들은 없애가며 이웃이 서로에게 예의를 차리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간다면, 이보다 더 좋은 학교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 사회가 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각박하기 때문이다. 메마른 땅에 아이들을 심어 두고 땀과 눈물을 짜 내어 키워 내다 보니 정작 마을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없다. 경쟁이 너무 치열하고 모두가 먹고살기에 바쁘다. 그런 고단한 삶에 숨통을 틔우기 위해 교육에 투자하는 것인데, 그럴수록 아이들의 숨구멍은 막힌다. 이럴 때 누군가 나서서 교육을 대행해 주겠다고 하면 뉘라서 지지하지 않을 것인가. 하지만 그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업을 방해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둔다면? 아마 그런 귀찮은 일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은, 공동체는 본래 그렇게 귀찮은 것이다. 아이들에게 불량 식품을 팔지 못하게 하고, 숲을 지키고 모텔이 들어서는 것을 막아내고 하는 것이 마을이다. 그런데 그런 일에는 관심조차 없으면서 마을교육을 하겠다고 한다면? 누구나 지지하고 수긍하는 그런 ‘교육’을 중심으로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마을도 예쁘게 하고 일감도 주는 벽화 그리기를 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마을 만들기는 벽화 그리기가 아니다. 벽화를 많이 그린다고 해서 마을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렇듯, 그 벽화를 아이들이 그리게 한다고 해서 마을교육공동체가 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근대 도시의 역사는 이러한 불편으로부터 도망쳐 온 역사다. 도시의 공기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마을의 공기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때때로 거리 청소와 같은 이런저런 캠페인에 동원되고,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고, 온갖 교육에 불려 다녀야 한다. 마을을 만들려면 익명의 숲에서 누리던 자유를 포기하고 그 숲에서 나와야 한다. 이제는 마을에서 있을 수 있는 이해관계에도 적극 개입하고 싫은 소리도 들어가면서 마을의 교육 환경을 개선해 가야 한다. 만일 그런 의지가 없다면 ‘마을교육공동체’도 이루어내기가 힘들 것이다. 동주민센터, 학교, 마을자치회, 지역아동센터, 마을의 시민단체, 지역의 청소년들이 모여서 ‘마을교육협의회’를 만들고 아이들의 놀이터 문제, 우범지역 문제, 유치원 보육 교사의 노동 환경 문제 등을 협의해 나가자. 이런 공론장이 있어야만 우리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마을에서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신가마을교육공동체와 마당집의 사례
필자는 작년에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지자체와 마을 주민이 함께 ‘마을교육공동체 기본계획’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 바 있다. 수개월의 논의를 거쳐 마을교육협의회에서 주민들이 협의한 내용을 수렴해 구 단위 ‘마을교육 지원 센터’의 마을교육운영위원회에서 차년도 예산을 결정하게 하자고 하였다. 교사, 학부모, 지역아동센터, 학생, 주민자치기구 성원 등이 모여 마을에서 일어나는 배움과 실천 활동을 함께 계획하고 관련 예산을 마을교육 지원 센터에 요청하면, 구청과 교육청이 서로 협의해 이를 다음해 예산에 반영하는 것이다.
교육청에서 정책 사업으로 모든 학교에 일률적으로 내리는 예산은 개별 학교의 의지나 상황과는 무관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예산을 쓰는 것 자체가 일이 되어버린다. 업무는 업무대로 가중되고 예산만 낭비하는 이런 방식의 사업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먼저 있고 그것을 행정이 지원하는 식이어야 학교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키워갈 수 있다. 구청에서 진행하는 공모사업의 방식 또한, 제시한 틀에 맞추어 사업을 짜야 하니 꼭 필요하지 않은 사업도 끼워 넣게 되고 사업의 연속성도 보장받을 수 없어 불안하다. 하지만 마을교육협의회에서 주민들이 자주 만나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마을교육 지원 센터에서 이러한 계획들 가운데 우선순위를 정해 지원한다면, 이와 같은 불합리를 없앨 수 있다. 나아가, 주민이 스스로 배우고 익힌 것을 바탕으로 협동조합을 구성하는 등, 장차 사회적 경제 영역과 배움의 영역이 선순환하는 구조까지 만들어 낸다면 지속 가능한 마을 만들기의 기반을 갖출 수 있어 더 좋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도 재개발 지역인 신가동에서 아이들이 언제든 찾아와 쉴 수 있는 ‘마당집’을 만들고, ‘신가마을교육공동체’를 결성해 주민들과 함께 몇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우선 마을교육 활동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진행해가기 위해 쓰지 않는 농협의 창고를 무상 임대해 ‘예술 창고’를 만들기로 했다. 공공 미술 작가와 함께 청소년들이 마을의 버려진 자원들을 모아 직접 자신들의 놀이 공간을 만들고 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서로 어울리며 휴식과 안정을 취하고,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진행하며 마을 주민들을 만나고, 도시 텃밭이나 화단 조성 등의 참여 활동을 수행해 갈 것이다. 50평이나 되는 넓은 공간이기에 이곳을 또 어떻게 쓰면 좋을지 주민회의를 열어 결정했다. 주민들은 다양한 취미 활동도 진행할 수 있는 북 카페를 만들자고 한다. 이 일 역시 주민들이 힘으로 모아 스스로 해 나갈 것이다.
광주광역시에서 올해 처음 시작한 마을교육공동체 공모 사업에도 참여해 신가초등학교 학생들의 진로체험과 지역 문화 탐방,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의 교육을 지원한다. 그리고 마을 안에 있는 심리 상담소와 연계해 아동들의 심리 치유도 진행하고 마을 가운데에 있는 신가공원을 아름답게 가꾸어 심리 치유 정원으로 변모시켜 갈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을 신가마을교육공동체의 협의를 통해 이루어가고 있다. 이런 노력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행정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교육을 바꾸려면 사회를, 마을을 바꾸어야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우리도 사회를 바꾸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일,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마을을 아이들을 위한 삶의 공간으로 조금씩 바꾸어 가는 일, 그보다 더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교실에서 잠자며 자신의 미래를 죽이고 있는 아이들은, 자신을 죽여 가고 있는 아이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만큼, 교사 또한 가르치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교사는 사물을 대하듯 아이들을 대하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아닌 사물로서의 삶은 제대로 된 삶이 아니다.
‘삶을 위한 교육’은 ‘삶에 대한 교육’과도 다른 길임을 분명히 하자. 이제까지 우리는 비록 아이들을 학원으로 떠밀고 문제집 풀이로 수업을 대신하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는 것만으로 자신을 좋은 어른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다. 이제는 아이들도 그런 거짓과 위선에서 놓여날 때가 되었다.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든다고 해서, 그런 얘기들을 아이들이 아무리 많이 듣는다고 해도, 비정규직의 가난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심정적 위로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위로일 뿐, 제대로 된 교육이 아니다.
교육을 바꾸려면 사회를, 마을을 바꾸어야 한다. 노동자도, 이주민도, 장애인도, 그리고 청소년도 마을 회의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이를 반영해가는 것이 진정한 민주시민교육이고, 마을교육공동체가 해야 할 일이다. 아이들을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싶다면 땅과 사람, 돈까지도 상품으로 사고팔면서 막대한 부를 쌓아가는 거대한 시장 질서와는 다른 그림을 그려야 한다.
‘사회적 안전망’은 유해 환경으로부터 아동들을 보호하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언제라도 실패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언제든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신뢰의 안전망으로도 기여해야 한다. 마을교육공동체가 그러한 삶의 바탕이 될 수는 없을까? 어른이든 아이든 거대 자본에 짓눌리지 않고 먹고살만한 사회를 만드는 일, 그 일을 아이들과 함께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