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 편____이경희
작은 걸음으로 걷고 싶다
이경희
1박 2일의 짧은 여정을 위한 25리터 배낭에는 일상의 잡동사니들이 가득 채워진다. 덜어내기 위한 일탈은 늘 그렇게 채움으로 시작된다. 10월의 하루는 아주 작은 걸음으로 걷고 싶다. 날고 싶었다. 환한 날개에 매달려 서울을 벗어났다. 쭉 뻗은 도로 양쪽으로 펼쳐진 금빛세상은 퍽이나 여유로운 승자의 얼굴로 반겨준다. 보낼 것과 남아야 할 것들을 정리한 노년의 모습이 연상된다. 농토 곳곳에 볏단 대신 생뚱맞은 비닐뭉치들이 널브러져 있는 이유를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되었다. 베어낸 남은 뿌리는 땅으로 돌아가 다음 생의 마중물이 되고, 토실한 알곡은 인간들의 양식으로, 남은 볏단은 허연 비닐 속에서 발효되어 겨우내 소여물로 쓰인다는 것을, 버릴 것 하나 없이 모든걸 주고 가는 벼의 생, 그것들은 그들을 위한 터전이라는 것을, 그들은 진즉 알았나 보다.
두어 시간 만에 괴산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함초롬한 낭만을 꿈꾸며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닌 듯 달려온 길, 남성미 물씬 풍기는 기사님의 입담 덕에 좁은 산길이 툴툴거려도 주위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우람하고 장엄한 산세와 가을빛 가득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원색의 지붕들, 색 고운 한복을 곱게 입은 아낙이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올 듯 하다. 발 담근 채 가녀린 몸매로 흐느끼는 억새들의 몸부림, 간밤에 내린 비로 질척이는 좁은 산길, 보라색 구절초의 애잔한 모습이 작은 행복을 안겨준다. 처녀 젖가슴처럼 탱탱한 사과들이 주렁주렁 달린 과수원을 기웃거린다. 알록달록 등산복의 사람들이 연신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사유지임에도 관광객에게 개방한 젊은 농군의 여유로운 모습에선 풋풋한 사과향이 배어나온다.
눈길이 당기는 곳은 푸릇한 물내음이 물씬 풍기는 선착장! 달천 강 물줄기를 막아 건설한 괴산호이다. 고즈넉한 풍경의 마을과 유난히 많은 소나무랑 호수가 멋지게 어우러져 머물러 살고 싶어졌다. 1957년 순수한 우리 기술로 준공되어 충북의 자랑거리라고 한다. 괴산호수를 가만히 바라보니 속 깊은 산들이 자신의 몸 일부를 기꺼이 내 주어준 듯 보인다. 화목해 보이는 일가 친척이 차가운 물 속에서 냉탕을 즐기는 듯, 둘러 모여 앉은 품에 물을 가둔 모습의 괴산호! 성냥개비로 만든 듯 작은 유람선에 실려 몸을 탐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간간이 코끝을 스치는 싫지 않는 가을바람에 몸을 맡긴 체 머릿속은 오래전 보았던 무협영화 <소오강호>를 떠올린다. 줄거리는 아물거리지만 무림을 벗어난 고수들이 야인의 세계로 돌아가면서 배에서 부르던 호탕함과 시원함이 느껴지던 가락이 절로 흥얼거려진다. 시간여행을 하는 동안 도착한 선착장! 급조한 듯 어설픈 소나무 군락들과 뻘겋게 익은 감나무들 뒤로 수월정이 반가이 맞아준다. 조선 중기 문신 노수신 유배지로 연화동 적소가 댐 건설로 잠기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퍽이나 외로운 모습으로 댐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예전부터 이곳은 물안개와 노을이 빚는 절경으로 연화구곡으로 불렸다고 한다. 연화구곡은 조선 후기 노성도란 선비가 설정하고 각 곡曲마다 정경을 읊은 연화 구곡가를 남겨 놓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일부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채 ‘전설 속 절경’이 돼가고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도 멋진 이곳 풍광에 반하였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 이 곳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리란 것을 예견하여 포기하고 이웃 화양구곡으로 정착하였다니 참으로 우암 선생의 예지력이 놀라웠다.
고즈넉한 산골의 밤이 소리 없이 가버리자 바지런한 새들의 속삭임과 함께 아침은 찾아왔다. 애써 지워왔던 작은 기억이 능개비에 젖어 고개를 든다. 오래 전 서해 덕적도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던 살붙이 하나, 싸늘한 주검을 보듬던 귓전에 울부짖던 파도소리와 짭짜름한 바다 내음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워 한동안 멀리했었다. 서해바다를 지나 괴산호수를 찾아 누이를 마중온 듯 느껴졌다. 물안개 자욱한 물가를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서성이게 되었다. 누군가가 아침을 짓기 위해 커다란 호수 밑바닥에 군불을 지피는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잔잔해 보이며 흐트러짐 없는 모습 저 편에 숨겨진 뜨거운 열정, 모든 걸 보듬으면서도 일순 내치는 그 무서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때마침 지나던 억센 바람 한 점이 자욱한 안개 속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핸드폰도 뉴스도 신문도 잠시 접어두고 일상에서 멀어져 바라보았다. 몸과 마음은 많은 것을 담고 다니기에 버거워 한다.
2011년 10월의 어느 날, 그것들을 덜어내 듯 작은 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었다.
이경희 /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10년 『국보문학』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