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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俗 분리와 일치를 향한 거대한 실험들, 무슬림과 인류 문명의 미래 좌우한다” |
문화의 안과 밖 시즌. 김호동 서울대 교수의 ‘이슬람 문명의 모험: 몽골의 충격과 그 이후’ |
필자가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오늘날 이슬람의 벤처가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무슬림들의 미래는 물론, 21세기 인류 문명 전체의 운명도 좌우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슬람 문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28일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5회차 강연은 이런 관심을 좀 더 체계화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김호동 서울대 교수(동양사학과)의 ‘이슬람 문명의 모험: 몽골의 충격과 그 이후’는 지적으로도, 시의적으로 흥미로운 강연이었다.
이번 강연의 주인공인 김 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내륙아시아 및 알타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중앙유라시아연구소 소장, 제23대 동양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스웨덴 웁살라대 교환교수, 독일 뮌헨대 교환교수 등을 지내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몽골제국과 고려』(2015),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2010),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공저·2007),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2002), 『황하에서 천산까지』(2002),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1999) 등이 있다.
김 교수의 이번 강연은 제목 그대로 ‘이슬람과 몽골’을 아우르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이슬람과 몽골을 한데 묶은 것일까. 김 교수는 무엇보다 13세기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 사건을 주시했다. 즉, 오늘날 이슬람권 전체가 구미 기독교권 국가들보다 뒤처지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13세기 몽골이 이슬람의 심장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이들을 지배한 게 크게 작용한다는 이슬람권 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몽골의 지배를 변수로 한 김 교수의 이슬람 문명과 역사의 굴절 이해는, 이들 이슬람 문명의 ‘모험’이 이슬람 문명만의 문제가 아닌 21세기 인류문명 전체의 어떤 운명과 직결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김 교수는 이슬람 문명의 모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강연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마셜 호지슨(Marshall G. Hodgson)의 The Venture of Islam은 이슬람 문명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독실한 퀘이커 교도였던 호지슨 교수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그것을 믿는 인류 공동체가 그 등장 시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변용돼 갔으며, 이들이 이룩한 놀라운 성취가 인류 문명과 역사에 어떠한 기여를 했는가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슬람은 기독교·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늦게 출현했다. 이슬람의 교리들을 살펴보면 확실히 선행 주자들의 부족한 점들이 개선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태교나 기독교는 모두 유일신을 내세우면서도 그 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절대화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반면 이슬람은 유태교의 선민사상을 배격하고 알라 앞에서는 민족·성별·계급의 차별이 없다는 절대적 평등을 표방했다.
기독교와 비교해 볼 때 이슬람이 나타내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방식이 아니라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것이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혀 다른 초기 역사의 궤적은 이 두 종교를 신봉하는 사회에 각기 다른 세계관, 종교관, 사회적 규범을 가져왔다. 기독교도들에게 순교는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위해 겪어야 하는 것이라면, 무슬림들에게 순교는 이슬람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성전(jihad)’을 하다가 당하는 죽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성경 구절(막 12:17)이 말하듯이 聖俗의 두 세계는 서로 섞이지 않고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661년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Mu’awiya)가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마지막 정통 칼리프인 알리를 꺾고 권좌에 오른 뒤부터 칼리프의 지위는 그의 집안 즉 우마이야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세습했다.
종교적 교리라는 측면에서 비교할 때 기독교와 이슬람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종교가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보면 아주 대조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는 가능하면 사회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종교와 사회 양자가 불가분의 단일체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샤리아(shari‘ah)’라고 불리는 이슬람의 율법은 단순히 종교법이 아니었다. 샤리아는 개종과 전도, 기도와 금식 등 종교적인 사항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무슬림 사회 전반에 관한 규범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민사와 형사에 관한 모든 규정을 포괄하는 법체계였다.
이렇게 볼 때 몽골의 등장은 그러한 체제를 일거에 무너뜨린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몽골 기마군대가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서아시아로 들어왔을 때 당시 무슬림들이 느꼈던 공포와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학살 못지않게 당대의 무슬림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칼리프 체제의 붕괴였다. 몽골의 바그다드 점령과 칼리프 무스타심의 처형은 성속 일치의 이슬람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한 사건이었다. 칼리프는 이슬람이라는 계시 종교와 그것을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연결해 주는 상징적인 고리였다. 그러나 몽골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계는 과거와 같은 성속 일치의 체제를 허물어뜨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슬람 세계는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까.
몽골인들은 이슬람권을 정복하고 그 지배자가 됐을 때 자신들의 통치를 효율적으로 뒷받침해줄 법률적 체계가 필요로 했다. 그들은 이슬람을 믿지 않았고 유목사회에서 흔히 통용되던 무속적인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몽골의 지배는 이슬람 세계에 샤리아와는 별도의 세속법 체계가 도입되고 그것을 통해 성속의 분리가 이뤄질 기회였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샤리아는 여전히 이슬람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법적 규제로서 효력을 발휘했고 세속법의 영향력은 극히 미미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샤리아 체제의 강고성이고 또 하나는 몽골인들이 표방했던 ‘본속주의’라는 독특한 정책이다.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는 쿠란과 하디스를 가장 중요한 ‘법원’으로 삼고, 그것을 기초로 이뤄진 ‘유추’와 ‘합의’를 통해서 형성된 법체계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샤리아야말로 성속 일치의 이슬람 세계가 기반을 두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지주였다. 칼리프는 샤리아를 수호하고 집행하는 상징적인 최고의 존재이기는 하지만 샤리아의 실질적인 수호자는 ‘학자들’ 즉 울라마(ulama)라고 불리는 집단이었다.
몽골인들이 정복지를 통치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의 하나는 ‘본속주의’였다. 역사상 최대의 육상제국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다양한 집단들이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됐고, 이들을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어떤 획일적인 기준이나 법제가 아니라 각자 이제까지 행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인정했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제국은 문화적·민족적으로 다원주의의 원칙에 따라 운용됐다. 이런 연유로 몽골 유목민이 이슬람 세계를 정복하고 1세기 이상 그곳을 지배했지만 이슬람 사회가 갖고 있던 성속 일치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14세기 중반 몽골제국의 세계 지배가 종언을 고하게 될 무렵 중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에서 몽골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말았다.
근대 이후 무슬림 사상가·개혁가들은 바로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그것을 믿는 신자들로 구성된 사회, 이 양자 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를 두고 많은 대안을 제시해 왔다. 이러한 여러 시도는 크게 두 가지의 전혀 상반된 입장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종교와 세속의 분리를 통해서 서구적 근대화를 성취하려는 시도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붕괴한 뒤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도됐고 현재 터키가 추구하는 방향이다. 다른 하나는 초기 이슬람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종교와 세속의 일체성을 더욱 강화하려는 시도다. 이는 호메이니 혁명 이래 이란이 취하고 있는 방향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극단적인 것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IS인데, 그들은 아예 칼리프 체제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서는 성속의 분리와 일치를 향한 이러한 거대한 실험들, 나아가 다양하고 심지어 극단적인 변주들도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이 처음 탄생했을 때 기성의 대제국과 세계종교들에 도전하면서 아무도 가지 않았던 바다를 향해 항해했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이슬람도 새로운 ‘모험’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시도가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 알 수는 없지만, 필자가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오늘날 이슬람의 벤처가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무슬림들의 미래는 물론이지만 21세기 인류 문명 전체의 운명도 좌우될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