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시산제 가는 광덕산 외암 민속 마을 일부
다음은 일만이 2004년에 찾았던 외송리 마을과 광덕사 입구 일부 모습입니다.
*.외암 온천에서
온천에 얽힌 전설을 고마운 아산 회원께 드립니다.
절름발이 노파 아들 혼인 길이 막혀서
열심히 절에 가서 빌고 또 빌었더니
관세음
나타나시어
한 말씀 하시더랍니다.
내일 낮 들판에 가 학 한 마리를 살펴보라.
절름발이 학 한 마리 논 가 물에 발을 담고
사흘 뒤
다리 고친 학처럼
노파도 소원 성취를 하였답니다
*. 외암 민속마을에서
외암 민속 마을을 찾아갑니다. 마을 입구 냇가 반석에는 외암동천(巍巖洞泉), 동화수석(東華水石)이란 석각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반석정과 물래방아가 있습니다.
마을은 아산 유지이신 홍병선 충남예총 부회장님 안내이어서 “열려라 깨!”하면 닫친 문도 저절로 열립니다.
옛날이 숨쉬는 민속마을 외암이다.
집집마다 설화산 계류로 흘러내리는
그 고택
그 돌담 속에
고운 이들 살고 있네
돌담 따라 꽃길 따라 가는 길은 외암 민속마을은 집집마다 설화산 계류를 이용한 도랑물과 연못이 있는 마을입니다.
ㄱ자도 아닙니다. ㄷ자 집도 아닙니다.
바람이 휭휭 통하라고 11자 집이랍니다.
장독과
아름다운 뒷간이
머물은 자리입니다
건재고택(영암댁)은 충남의 대표적인 반가로 정원수, 자연석과 연못이 어울려 한국의 미를 만들고 있습니다.
*. 광덕산 입구에서
아산의 6월은 호두가 익어가는 시절이었습니다. 966m의 광덕산 기슭에 광덕사가 있고 입구에 호두 기념비까지 있었습니다. 비명에 하였으되
'호두나무가 우리나라에 전래 된 것은 고려 충렬왕 16년 류청신 선생이 원나라로부터 왕가(王駕)를 모시고 올 때, 열매와 묘목을 가져와 묘목은 광덕사 경내에 심고 열매는 광덕면 매당리 고향의 집 앞뜰에 심은 것이 시도이며 그 후 선생의 후손 및 지역주민들이 정성껏 가꾼 결과 호두의 주산지가 되었다. 이 고장 호두의 효능으로는 머리를 맑게 하여 주고 살결을 곱게 할 뿐 아니라, 노쇠를 방지하여 주며 독특한 맛과 높은 영양가로 인하여 식품의 원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이곳의 오밀한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소리와 어미 품속 같은 아늑함을 간직한 699m의 광덕산 가슭 아래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광덕사와 더불어 이 고장의 자랑이라 하겠다.'
일주문을 지나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천안 광덕사 나무 뒤로 광덕사가 보입니다.
층계를 오르니 대웅전이 보이는데, 한 여인이 카메라에 그 아름다움을 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하도 멋있어서 여인에게 이 절의 소개를 하여 주고 싶습니다.
“대웅전이란 궁궐에서 나라님이 정사를 보는 곳이기도 하지만요, 절에서는 본존 불상을 모신 법당을 말하는 것이지요. 본존(本尊)이란 주불로서의 석가모니를 말하구요. 석가(釋迦)란 이름이 아니라 인도의 한 종족을 말하는 것이고, 모니(牟尼)란 출가하여 마음을 닦고 도를 배우는 사람을 높여 일컫는 말이지만 원래는 각자(覺者) 즉 깨달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석가의 본명은 고다마 싯다르타랍니다.
주불인 석가모니의 오른쪽에 아미타여래, 왼쪽에는 약사여래를 모시었더구요. 약사여래는 항상 오른 손에 약병을 들고 있지요. 그러니까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어원적인 뜻은 석가족 중에 깨달은 사람이란 뜻이지요.
층계 좌우로 있는 석등 아래를 자세히 보세요. 자세히 보면 두 개의 ‘광덕사 석사자’(문화재 자료 제252호)가 있습니다. 풍우에 연마되었지만 사람처럼 하늘을 보는 모습으로 구름 모양의 머리털을 하고 있지요. 조선 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랍니다.
우측에 고탑이 하나있지요?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에 세워졌다고 생각되는 3층 석탑(문화재자료252호)이랍니다.
탑이란 원래는 부처님의 사리나 유품을 모시기 위하여 만든 것이랍니다."
입구에서 광덕사 길 말고 우측 길로 3.0km의 거리에 장군바위와 장군 약수터가 있고 거기가 699m의 육산의 50평 정도의 널찍한 광덕산 정상이 있지만 우리의 일정은 등산로 입구에 있는 김부용의 시비를 보는 것입니다.
김이양은 대감이요, 부용은 기생이며 소실이지만 생전부귀(生前富貴)요 사후문장(死後文章)이기에 지금은 간판에서의 크기처럼 부용이 더 유명한 사람입니다.
다음 한시는 부용(芙蓉)을 보고 반한 당시 어느 시인의 글입니다.
芙蓉當上芙蓉立 人芙蓉勝花芙蓉 부용당상부용입 인부용승화부용
정자 위 부용이 서서 부용꽃 바라보니
부용꽃보다 부용이 더 어여쁘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꽃이 먼저 지나보다
일만 시조역
요번 여행에서 아산 회원들이 베풀어 주는 자리마다 일행 중에 술을 제일 많이 먹고, 가장 행복해한 사람이 일만이었습니다. 그걸 부용(芙蓉) 시인이 오언절구로 이렇게 나무라고 있었습니다. 그걸 시조로 의역해 보았습니다.
戒酒戒詩
酒過能伐性 주과능벌성
詩巧反窮人 시교반궁인
詩酒雖爲反 시주수위반
不疏亦不親 불소역불친
-김부용
술이 지나치면 천성을 해치고
꾸민 시 오히려 사람을 궁하게 하네
詩酒를
멋으로 하려면
詩酒有別 할 꺼나.
-일만 시조역
같은 시대 어사 박내겸이 부용(芙蓉)의 인품을 이렇게 평한 글이 전합니다.
"가락과 품격이 맑고 아름다우며 생각과 마음이 속세를 벗어났으니, 참으로 당대에 견줄 바가 없는 신이 내려준 재주꾼이로다."
김부용의 자는 운초(雲楚)요, 호는 부용(芙蓉)이다. 성천 몰락한 양반가의 태생인 미색으로 가무와 시문에 능하였습니다. 12살에 기적에 올라 당시 시인 묵객들과 풍류를 나누었습니다.
성천 신임 사또의 소개로 19살에 영천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을 만나 그 소실이 되었습니다. 15년간 모시다가 92세로 낭군이 돌아가시자 그때 쓴 낭군의 묘에서 쓴 한시가 비석에 있는 시입니다.
아깝게도 부용이 황진이, 계랑. 매창 등과 같이 유명한 기녀 시인이면서도 우리에게 생소한 사람이었던 것은 그와 함께 한 김이양 등이 시조를 멀리 산 분들이어서 뛰어난 문재를 갖고도 시조 한 수를 남기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부용 시인의 시비 앞에서 시조 한 수 읊으며 고마운 우림 이상목 시인이 베푸는 점심을 찍으러 계곡가든을 향합니다.
부용(芙蓉) 예 있는데 이제와 처음 보네
여성이 두려워서 멀리하고 살았으니
이 몸은
어느 부용(芙蓉) 있어
서로 부르며 살 꺼나
첫댓글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일만 선생님께서도 이렇게 한 시대 한 물의 흐름을 타고 계시는 님들게 아름다운 꾸지람을 자진하여 들으실 수 도 있으셨네요 저는 선생님은 이 세상 그누구도 책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당신을 자책을 하시고 계셨네요 선생님 늘 건강 하세요 그리고 오래오래 사세요
첫댓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일만 선생님께서도 이렇게 한 시대 한 물의 흐름을 타고 계시는 님들게 아름다운 꾸지람을 자진하여 들으실 수 도 있으셨네요 저는 선생님은 이 세상 그누구도 책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당신을 자책을 하시고 계셨네요 선생님 늘 건강 하세요 그리고 오래오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