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의 아그네스>는 종교적인 신념과 성 모렬 등이 얽힌 존 피엘미어(John Pielmeier)의 무대극을 노만 쥬이슨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노만 쥬이슨 감독은 작품을 통해 인간의 고뇌와 양심, 신앙 등의 내면세계를 도출한다.
이 영화는 몬트리얼 쾌벡 교회의 막달라 마리아 수녀원의 젊은 수녀 아그네스가 아기를 낳아 탯줄로 목을 졸라 휴지통에 버림으로 사건의 파문이 시작된다. 재판소는 사건 조사와 아그네스의 정신 감정을 의뢰키 위하여 여성법 정신과의사 마사 리빙스턴(Martha Livingston)을 관상수도회인 막달라 마리아 수도원으로 보낸다. 아그네스의 이모인 루스 (Marian Ruth)원장 수녀는 아그네스가 오상을 받았고 그리고 하느님의 기적으로 수태되었음을 주장한다. 여동생이 수녀원에서 죽은 이후 신앙을 버린 마사 리빙스턴 정신과 의사는 심리학 정형성으로, 논리적으로 조사가 수습이 되지 않아 결국 최면 방법을 시도한다. 이력서를 들춰보고, 건물 설계도까지 조사하여 결국 마사는 원장까지 용의자를 몬다. 주교의 압력으로 단지 하루의 말미만 남은 상황에서 마사의 노력으로 마침내 모든 비밀이 밝혀진다.
아그네스의 어머니는 원치 않게 아그네를 낳게 되어 어릴 때부터 그녀를 학대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아그네스는 괴로운 유년 시절를 보냈다. 그러다 노 수녀가 임종하며 지시한 수녀원의 비밀 통로를 지나 50년간 묶혀둔 헛간에서 특별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가 자신과 같은 불행이 없기 위해 이런 실수를 한 신에게 돌려주기 위해 아이를 죽이게 된 것이다. 마지막 재판 판결에서 아그네스는 수녀원으로 돌아가 의사의 치료를 받게 된다.
영화는 영아살인과 아그네스라는 순수자체인 소녀를 대비시켜 아그네스의 행동을 범죄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특별한 기적으로 볼 것인가를 제인 폰다의 정신과 의사 역할을 통해 의학을 포沌?과학과 이성적인 증거로 신앙의 세계, 신의 영역인 신비의 세계를 파헤친다.
노만 감독은 과학으로 신의 영역인 신비의 세계가 증명될 수 없음을 빛, 조명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의 크레딧이 검은 화면에 흰 글씨로 그리고 수녀들에 기도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 기도하는 수녀들의 모습이 측면 조명으로 환하게 보인다. 아그네스가 아기를 낳은 시간은 한 밤중이다. 아그네스는 쾌벡시의 어둠을 가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엠브런스에 실려 간다. 회색과 검은 톤으로 태양빛을 잃은 몬트리올 퀘벡시를 네온사인 십자가를 중심으로 부감으로 패닝한다. 원장수녀가 찾아간 정신과 의사의 마사 리빙스턴의 사무실은 육중하고 높은 건물 꼭대기에 있다. 인간 지성이 쌓아온 과학의 높은 탑에 있지만 그녀 뒷배경으로 보여 지는 퀘벡시는 검푸른 색조의 빛을 잃은 도시이다. 몬트리올 퀘벡도시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란한 도시이며 사람들은 이미 신을 잊은지 오래됐다.
아그네스와의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침실복도는 정면조명으로 은은히 빛을 밝히고 있다. 침실 창가에서 “bonae voluntatis, adoramus te, glorificamus te, gratias agimus tibi....(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 주님을 흠숭하나이다. 찬양하나이다. 주님영광 크시오니 감사하나이다)”를 노래하는 아그네스의 얼굴은 햇살을 받아 환희 빛나며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아그네스는 미사 성제때 하느님께 드리는 ‘대영광송’을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이성적으로 아기가 어떻게 잉태되었고 누가 아기를 죽였는지 증거를 찾으려 아그네스에게 끈 질기에 질문을 던지는 마사에겐 명조명으로 빛이 비치지 않는다. 아그네스가 일하는 젖소 외양간은 따사롭고 평화로운 빛이 깊이 드리워졌다. 아그네스의 얼굴은 빛을 받고 있다. 여기서 엄마가 실수로 태어났다며 박해했던 상해를 털어놓는 아그네스의 얼굴은 빛을 받아 따사롭지만 마사는 후면 조명으로 태양 빛을 등지고 있다.
하느님의 빛을 등지고 있다. 어떤 확실한 단서도 찾지 못한 마사는 아그네스에게 최면 요법 허락을 위해 원장을 찾는다. 헛간으로 들어가는 문은 열려 있고 측면조명이 깊이 들이치는 따사로운 태양을 받으며 원장은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다. 이 사건해결의 실 마무리가 될 이곳에서 신앙을 잃어버린 어릴 때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 리빙스턴의 얼굴이 처음으로 정면조명으로 태양빛을 받으며 밝아지기 시작한다. 마사의 체험이야기를 들은 원장은 서로의 공감대를 느끼며 마사와 수녀원 정원 뜰 한가운데 있는 작은 누각(樓閣)에 앉아 담배와 성인이야기로 수다를 떤다. 몬트리올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들에게는 아직 빛이 가 닿지 않는다. 더욱이 마사는 후면 조명으로 빛을 등지고 있다. 예수는 ‘나는 세상에 빛이다.’라고 했다. 빛을 등짐은 신을 등짐이요 구원을 등진 것이다. 원장도 황량한 자신의 삶을 털어놓으며 기적이 그립다는 원장의 얼굴과 리빙스턴의 얼굴을 천천히 클로즈업한다.
마사는 마지막 검사가 될 수녀원 건물의 비밀통로를 찾아간다. 어두운 지하 통로에 미카엘 대 천사 석상이 있고 그 앞에는 많은 촛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그녀는 악마와 싸우는 상징인 미카엘 천사 촛불에서 불을 댕겨 길을 비추며 들어간다. 마사는 어둠에 싸인 자신의 신앙의 굴을 미카엘 천사의 불로 비추며 깊숙이 들어가 중요한 단서가 될 비밀통로를 찾아낸다. 교회의 심장이며 신비의 생활인 관상수녀원 초인종문을 두드렸고 그 철장 안 봉쇄구역에 들어섰고 고백신부님 현관문을 두드린 그녀는 저버린 신앙의 세계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심리학자 칼융이 말한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하느님의 인장, 그녀의 잠자고 있는 영적자아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아그네스의 결백과 순결함을 입증하듯 흰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따사로운 햇살이 측면으로 비추이는 가운데 새 지원자의 입회 예식이 수녀원 내부에서 거행되고 한편으론 두 번째 최면 요법 시행으로 모든 것이 밝혀지는 새로운 출발이기도 하다. 두 번째 최면을 시행하는 공간은 흰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곳이다. 십자가가 걸려 있고 그 밑에 햐얀 수도복을 입은 아그네스가 눈을 감고 앉아 있다. 원장 수녀가 참석한 가운데 리빙스턴은 최면을 건다. 아그네스는 자신의 체험을 재현하다. 임종하던 폴수녀가 지시 한대로 아그네스는 미카엘 천사 조각상에 놓인 촛불에서 불을 댕겨 어둔 비밀 통로를 지나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 오래된 철 뭉치 빗장을 벗기고 다락문을 연다. 순간 흰 비둘기들이 퍼덕이며 아그네스 주위를 빙빙 돈다. 청명한 푸른빛이 천정사이로 강하게 비추고 있고 따사하고 환한 햇살이 헛간을 온통 휘감는다.
“그가 있어요, 어디 계세요. 난 무서워요, 네 그래요. 왜 저죠...”누워있는 아그네스의 얼굴을 빅 클로즈업하고 경조명으로 그러나 환한 빛으로 얼굴을 온통 가득 채운다. “보고 싶어요. 후광이 퍼져서 깃털이 별처럼 쏟아져요. 신의 홍체 속으로 쏟아져요. 너무 아름답고 푸르러요. 노랗고 검은 날개, 갈색 피 ”아그네스의 손을 빅 클로즈업한다. 따사로운 경조명의 빛나는 햇살이 아그네스 손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을 때 아그네스 손에 못자국이 생기며 피가 흐른다. 오상을 받은 것이다. 흰 벽과 하얀 수도복과 손에 피가 뭍혀있다. 아그네스는 십자가 아래 피흐르는 못자국의 두 손을 펴면서 괴로워한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고통에 동참한 것이다.
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서 얻은 다섯 부분의 상처이다. 오상을 받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며 오상을 드러내는 이의 삶과 진술이 진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상으로 인해 마사는 아그네스의 임신이 성모처럼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수녀가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될 수 없다. 순결을 지켜야하는 어린 수녀 아그네스에게는 이 사건은 곧 죽음과 좌절을 의미한다.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도 역시 이런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래서 요셉은 “몰래 파혼할 마음을 먹었다.” 요셉마저 마리아의 곁을 떠나게 되면 마리아는 살아갈 길이 없을 것이며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왜 아이를 죽였느냐는 질문에 아그네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느님은 저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주셨기(하느님의 실수) 때문에 그것을 다시 그분께 돌려드리기 위해 그렇게 하였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로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여 그분이 허락하시는 “것들을” 부정하는 것은 즉 “아이를 죽이는 일”인 것이다.
아그네스의 모든 고백이 끝나자 다음 장면은 몬트리올 퀘벡 도시로 옮긴다. 잿빛 구름이 가득한 하늘에 강한 햇줄기가 새어나와 퀘벡시를 비추고 있다.
재판장은 살인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기에 수녀원으로 돌려보내고 통원 치료를 할 것을 권한다. 온 세상이 정화되어 흰눈으로 덮여있다. 수녀들이 십자가를 앞세우고 로자리오 기도를 하며 언덕 위를 돌아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빈 그네가 흔들리며 마사는 고백한다.
“그녀가 부른 노래의 의미를 모르겠다……기적에 대한 바람……그녀가 은총을 입었음을 난 믿고 싶다. 그녀가 그립다. 내게 그녀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면 그 자체가 기적일 것이다.”법정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변해 있었다. 머리는 뒤로 단정히 묶었고 당당히 오만해 보이던 바바리도 벗었고 소박한 단순한 옷차림으로 노래하는 아그네스를 바라본다. 마사는 생일날에는 큰 실수를 한다며 이 사건을 맡지 않으려 했었다. 그렇다 그녀는 정신과학으로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회심의 날이며 새로운 탄생의 날이다.
아그네스의 노래는 천사의 소리이다. 아그네스는 법정에서 그분이 나에게 노래를 부른다고 말한다. 아그네스가 부른 노래는 그레고리안 미사곡이다. 종탑에서 엄마로부터 받은 상해에 대해 처음으로 털어 놓으며 ‘Kyrie eleison(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을 노래한다. 현대의 가족파탄으로 희생양이 된 아그네스는 엄마를 위해 황폐한 무신론세상을 향해 주님의 자비를 구한다. 한 마리의 희생양이 되어 노래한다. 아그네스는 마사에게 소리친다. “내게서 신을 빼앗아 가려하지요. 이 세상은 무신론자 천지입니다.” 원장수녀도 아그네스 노래를 들으며 과거 신앙 깊었던 그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다시 종탑위에서 아그네스는 그레고리안 미사곡의 마지막 곡인 아뉴스데이(하느님의 어린양)의 마지막 소절인 ‘dona nobis pacem(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를 노래하며 흰 비들기를 멀리 날려 보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낸다. 아그네스가 부른 노래는 그레고리안 미사곡이다. 미사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희생양이 되어 목숨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재현하는 것이다. 아그네스에게도 하나의 희생제사였다.
‘아그네스’라는 이름은 ‘어린양’이라는 뜻이다. 어린양은 하느님께 바쳐지는 속죄의 제물이다. <신의 아그네스>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신을 잊어버린 혼탁하고 황량한 이 세상에 희생 제물로 바쳐진 이 시대의 하느님의 어린양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구원을 위해 어린양으로 희생제물이 되셨듯이.
마사가 처음 수녀원에 들어서자 처음 눈에 띄는 것은 창살 그림자가 드리워진 십자가, 빛을 받아 환한 클로즈업된 십자가, 그리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계신 예수님 액자이다. 그녀가 원장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에도 십자가가배경으로 나온다.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신앙의 신비는 드러나고 발생한다. 신의 뜻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그분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섭리를 인간적, 세속적인 인식과 판단으로 은총을 부정하고 예수를 잉태치 못하고 유산시키고 사장시켜버린다. 하느님의 초대방식이 아그네스가 감당할 수 없고 이성적 논리가 되지 않는 것이었기에 수녀들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의 스캔들이었다. 이것이 아그네스에게 가장 합당하고도 유일한 하느님의 선택이었다. 신앙의 신비는 바로 이렇게 우리를 이끄신다. 그런 현실을 수용하느냐 아니면 부정하느냐는 오로지 당사자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마사 리빙스턴 의사는 신비가 현실에서 진정한 의미로 드러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경험 분석적인 정신분석가로 그 현상을 결코 신앙의 시각으로 풀어가지 않음으로 원장수녀와 부딪히곤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역설적이게도 신비와 그 흔적이 이런 사람들을 통해 더디지만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