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끝난 곳인 듯싶어도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여정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다. 막장이나 막창은 탄광이나 내장에서나 찾을 일이다. 더러 절망적인 상황을 막다른 골목이라지만 이는 분명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 갑갑하다면 세상을 좀 여유롭고 느긋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분도 지난 봄날 새벽 부엉이 바위로 오를 것이 아니라 오리쌀 못자리로 가보아야 했다.
창원에서 마산과 진해로 운행하는 시내버스가 있다. 읍면으로도 운행하는 녹색버스도 있다. 이들 버스는 대개 대방동이 종점이고 성주사 앞에 차고지가 있다. 창원역에서 동읍이나 대산면과 북면의 구석구석까지 다니는 마을버스도 있다. 더러는 김해까지 오가는 시내버스도 있다. 장유는 자주 있는 편이고 인제대학 지나 지내동까지도 다닌다. 가야대학이 있는 삼계까지 오가는 노선도 있다.
간밤까지 가을비가 촉촉했던 십일월 둘째 주 토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이른 아침 창원대학 앞으로 갔다. 그곳은 김해로 넘나드는 시내버스 종점이면서 기점이다. 노란 은행잎 가로수가 아름다웠고 국화 향기 그윽했던 날이었다. 나는 창원대학 앞에서 59번 버스를 탔다. 58번과 함께 김해에서 창원으로 넘어온 시내버스다. 근래 이 노선은 매정에서 고개 너머 생림면까지 운행하고 있다.
사실 이맘때면 모교 총동창회 등반행사가 열렸다. 작년에 화왕산을 다녀왔고 올해는 황매산으로 간다고 들었다. 내가 속한 문학동아리에서는 백제문화권 답사를 떠난 날이었다. 나는 동창회 등반에도 동아리 답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두 곳 다 지기로부터 동행하자는 제안에 선뜻 답을 주지 못해 송구했다. 한 주 내내 사람한테 시달렸으면 주말은 호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내가 탄 버스는 나전삼거리를 지나 사촌 종점에 닿았다. 종점까지 타고 온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제법 걸어 면소재지까지 갔다. 보도가 없는 국도 따라 걸으려니 지나는 자동차들로 불편했다. 생림초등학교를 지날 무렵 60번 버스를 타고 생철마을 거쳐 성포마을에서 내렸다. 가을걷이 끝난 마을 앞 들녘엔 군데군데 볏짚 묶음이 보였다. 일찍 심은 보리는 싹이 돋아 파릇파릇했다.
무척산을 뒤로 하면서 강 건너 오른쪽으론 천태산과 만어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왼쪽으론 종남산과 덕대산이 나타났다. 눈앞엔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상판 구조물이 드러났다. 예전엔 경전선 철로와 좁다란 국도 다리만 있었더랬다. 이제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경전선복선철도의 다리가 놓였다. 진해에서 청도 간 58번 국도가 강을 건너면서 새로 덩그런 다리가 놓였다.
나는 송촌마을과 마사마을을 지났다. 독산마을에서 둑을 넘어 세 갈래 물길로 나가 보았다. 태백산 황지에서 시작해 지리산 샘을 보탠 낙동강 본류였다. 운문사 골짝 물을 담은 밀양강과 Y자로 모여져 한 갈래가 되었다. 한강의 두물머리 같은 곳이 삼랑진이었다. 건너편 벼랑 뒷기미나루는 낙동강 파수꾼 김정한님의 글감이 되기도 했다. 나는 강 가장자리로 내려서 한동안 거닐며 서성였다.
큰 줄기 강물은 바람에 일렁거렸다. 샛강엔 갈색 개구리밥과 어리연이 동동 떠 있었다. 몸을 숨긴 청둥오리와 쇠기러기가 간식거리를 찾고 있었다. 흐름이 느려진 강물은 머지않아 을숙도 다대포로 빠져나갈 것이다. 하구로 빠져 나가면서 고요했던 강물은 거친 파도에 휩쓸려 요동치지 싶다. 둑으로 올라 옛길 삼랑진철교를 걸어 건넜다. 강 건너는 폐역이 된 간이역 낙동강역이 나왔다.
나는 이십여 년 전 근처 강변 초등학교에 근무했다. 봄날 아이들 데리고 소풍갔던 백사장으로 나가보았다. 넓었던 모래밭은 흔적 없고 물억새와 갈대만 무성했다. 무성한 갯버들은 숲을 이루었다. 밀양의 지기로부터 연락이 와 냉이를 뽑으려다 말고 되돌아 나왔다. 둘은 양수발전소 부근에서 추어탕과 곡차를 나누었다. 가을이 짙게 물든 안태호반을 한 바퀴 걷고 나니 해가 설핏 기울었다. 09.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