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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한성감옥에서 찍은 이승만(왼쪽에서 세 번째)과 그의 아들 태산(이승만 앞)의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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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가을 출국하기 전의 이승만과 그의 가족. 오른쪽에서 두 번째 양복 차림이 이승만, 가운데 모자 쓴 어린이가 태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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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6월 4일자 《워싱턴타임스》에 실린, 태산을 돌봐줄 집을 찾는다는 기사. |
▣ 태산이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 그런데 나는 이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우남이 인터뷰에서 말한 태산이에 관한 것들이 내가 이때껏 알고 있었던 사실들과 다르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태산이의 묘비에는 생년이 1899년으로 되어 있다. 흔히 알려진 대로 태산이의 생년월일이 1898년 7월 27일이라면 음력이었을 것이므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같은 해인 1898년 9월 17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비석의 생년은 1899년이므로 태산이의 생년과 생월은 1898년 12월(음력)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필자가 직접 호적 원본을 대조하지 않았기에 여기엔 확인 여부가 남을 수 있다. 2.태산이가 미국에 도착한 것은 1905년 4월이었다. 《워싱턴 타임스》 1905년 6월 4일자 기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하숙집 작은 방에서 이미 두 달을 살았다고 했다. 태산이가 프랭클린학교(Franklin school)의 정규학생으로 2개월을 지낸 뒤에 《워싱턴 타임스》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다면, 태산이는 아마 4월쯤에 워싱턴에 도착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니까 우남이 조지 워싱턴 대학의 대학생이 된 지 두 달 만에 아들이 찾아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Taisanah의 이름이 우남의 일기 Log Book of S.R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905년 6월 4일자이다. 그러므로 더러의 역사학자들은 이 일자를 태산이가 미국에 온 날짜라고 책에 적고 있지만, 이 6월 4일은 우남이 태산이의 기독교 가정을 찾는 광고가 신문에 나간 날짜이고, 우남의 일기에 의하면 저녁에 기숙할 집의 Mr. Harbough가 태산이를 데리러 온 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알려진 대로 태산이는 미국 와서 8개월 만에 죽은 것이 아니라, 11개월 만에 사망한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3.태산이를 미국에 데리고 온 사람은 우남의 친구인 Peung Yang(풍양인지 평양인지 불분명)에서 온 이인흥(In Heung Lee)과 이관용(kwan Young Lee)이었다. 대개 태산이를 우남에게 데려다준 사람은 우남의 옥중 동지인 박용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남은 이인흥과 이관용 두 사람이 태산이를 데려왔다고 기자에게 말하였다. |
첫댓글 좋은 자료 잘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이승만의 쳣째 부인은 박씨 부인이라고 합니다
태산이의 생모가 되겠죠만
이승만이 한국에 돌아오기 전 이혼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