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4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마가복음 12:38-44
짐은 낙타에 맞게
말과에 속한 동물로 말보다 작고 느리지만 힘이 매우 강한 동물이 당나귀입니다. 중앙 아시아에서는 산악지대를 넘어서 물건을 나르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는 동물입니다. 당나귀와 암말 사이에 낳은 잡종이 노새입니다. 아시아 지역에서 당나귀나 노새가 짐을 나르는 데 유용한 동물이라면, 서아시아와 아라비아 그리고 북아프리카 사막지대에서는 낙타가 그 일을 모두 합니다.
당나귀도 그렇고 낙타도 그렇고 어디 하나 버릴 것이 없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살아서는 짐만 나르다가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까지 사용하니까요.
당나귀는 영리해서 주인이 짐을 지우려고 하면 멀찍이 도망을 간답니다. 그런데 낙타는 정말 착한 동물입니다. 낙타는 인간에게 젖을 주어 치즈를 먹을 수 있게도 하지만, 아무리 많은 짐을 실어도 거부를 안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리하게 짐을 싣게 되면, 결국 오래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그러면 낙타도 버리게 되지만, 싣고 가던 짐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짐은 낙타에 맞게 실어라.”라는 속담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이 “짐은 낙타에 맞게”라는 속담에 꼭 어울리는 본문입니다. 이 속담의 본래 의미는 “선행이 선행자의 능력에 부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바쳤습니다. 그 상황을 성전에서 가르치던 예수가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녀보다 먼저 부자들이 많은 액수의 헌금을 바쳤는데, 이 가난한 과부는 동전 두 개를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렙돈 두 닢이라고 합니다.
1 렙돈은 노동자 1일 임금에 해당하는 1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녔다고 합니다. 보통 노동자 최저생계비 수준으로 일당을 계산하면 10만원 정도인데, 128분의 1은 781원입니다. 두 렙돈이니 1500원 정도 됩니다. 이 돈은 그녀의 생활비 전부라고 하는데, 아마도 그날 하루치 식비였을 것입니다. 1500원 가지고는 요즘에 무엇을 장봐서 해먹을 수 있을까요? 라면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넉넉하지 못한 금액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그날 하루를 굶을 각오를 하고 가진 돈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절대로 곁길로 빠지면 안 됩니다. 어떤 경우인가 하면, 종종 헌금을 많이 내도록 “강요”하기 위해서, 가난한 과부가 “전 재산”을 바친 것을 “칭찬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의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성경말씀을 두 단락 연결해서 선택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전체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던 중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말합니다만, 사실 이런 사건들은 따로 따로 전승된 단편들입니다. 하지만 마가는 이것을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에, 마가의 의도를 따라서 이해해 보는 것도 좋은 해석방법입니다.
앞 단락에 등장하는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그들이 매우 “교만하고, 탐욕스럽고, 자기 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자기 신분이 높다는 인식 때문에 항상 상좌를 차지하려고 하는데, 회당 안에서도 그리고 사적인 잔치자리에서도 똑같다고 합니다. 사회적 신분이 정해지면 장소불문하고 높은 자리를 탐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한 것은 정확하게 어떤 짓을 의미하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율법에 대한 법적인 자문을 해주고 뻔뻔하게 과다한 비용을 받아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사야 1장과 1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 나의 백성에게서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하였다.”(사10:1-2) 1장에서는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과부”라는 의미는, 남편을 여읜 슬픔에 더하여, 먹고살 땅(기업)조차 잃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변론해주는 척하면서, 오히려 없는 살림을 노략질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런 반 율법적인 행동을 하는 자들이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율법학자라는 엄청난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 단락에 등장하는 “과부”라는 단어가 두 번째 단락에 다시 또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부자들이 많은 헌금을 하는 상황 속에서 겨우 1500원 정도의 소액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때 어떤 분위기였을까요? 아마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 이 가난한 과부를 비웃지 않았을까요? “저런 시시한 액수를 헌금이라고 들고 나와 하나님께 바친다.”고 수군거리지 않았을까요?
제가 보기에 이 상황은, 보호해 주어야할 가난한 과부를 수탈의 대상으로 삼는 율법학자들을 비판하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웃고 조롱하는 이들의 생각이 무척이나 잘못되었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과부는 헌금을 반드시 바쳐야한다는 율법학자의 조언을 들었기 때문에, 하루치 식량살 돈 전부를 헌금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결코 조롱거리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일이고, 조롱이 아니라, 이 여인을 도와줄 생각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읽다가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돈마저 없으면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굶어야하는데, 마침 렙돈 동전이 두 개니까, 하나만 헌금하고 하나는 식량을 살 생각은 왜 못했을까?” 그렇게 하는 게 합리적인 생각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여인이 두 개의 동전을 다 헌금해버린 것은 어쩌면 그래야한다는 압력을 받았거나, 아니면, 삶이 고달픈 나머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될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부자라고해서 많은 헌금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말씀의 핵심은 “부자는 부자니까 그 정도 많은 헌금은 당연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현장을 보면서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낙타가 질만한 짐을 지워야하는데, 지금 이 여인은 지면 죽을 것 같은 무거운 짐을 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왜 못보고 비웃고 조롱하느냐고 주님은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본문을 알레고리로 해석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과부는 교회이고, 죽은 신랑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유대교 회당의 율법은 가난한 교회를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결론은 “교회는 세상의 재물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레고리는 원래 좀 무리한 해석방식이라 권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개하는 이유는 “물질로 평가하는 시각은 교회 안에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만, 한국교회가 너무 심하게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재물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재물에 심하게 몰두하는 것은 나쁜 결과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물건을 생산하고 시장에 내다 팔아서 이윤을 남겼습니다. 노동이 돈을 버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방식은 모두가 구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알빈 토플러(Alvin Toffler)라는 미래학자가 <부의 미래>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경제의 속도는 시속 100마일로 달리는데, 정부의 조직과 기관은 시속 30마일로 달리고, 학교는 시속 10마일로 달린다고 말입니다. 사실 채취와 수렵, 그리고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 속도는 분업과 기계화의 시대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빨라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IT산업의 시대입니다. 심지어 생산하지 말아야할 마약 같은 것들도 돈벌이가 크게 되니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이 만들어 냅니다. 돈에 대한 윤리적인 기준을 상실한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는 생산방식이 완전히 달라져서, 큰돈을 버는 것은 상품생산이 아니라, 자본이 되어버렸습니다. 돈을 투자해서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금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 역시 두 렙돈을 바치는 가난한 과부를 뒤에서 비웃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본문에 대한 설교의 제목을 <짐은 낙타에 맞게>라는 속담으로 정한 것은, 신앙인에게 과도한 신앙의 짐을 지우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공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의 능력에 맞게 공부하도록 해야지 무조건 목표를 높게 잡으면 금세 지쳐버리게 마련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신앙의 정신이 아니라 형식에 심하게 몰두하였고, 그 결과 신앙을 외적으로 평가하는 단계까지 나갔습니다. 교회출석, 봉사실적, 헌금내역 등등이 모두 직분자 선출의 평가기준이 됩니다. 제가 이런 것들을 무조건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수치화해서 커트라인을 정하고, 이에 미달되는 사람을 후보자에서 제외하는 규정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거운 짐을 질 준비와 훈련이 되지 않았는데,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과 평가 때문에 과도한 짐을 지다가 그만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우선으로 들어야하는 청중은 율법학자입니다. 오늘날로 친다면 교회의 목사와 교계지도자들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23: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지 않아야한다는 것을 신앙에 대비시켜 해석하면, 신앙이 당장은 약간 부족한데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더 많이 하도록 하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두 렙돈을 바친 가난한 과부처럼, 그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정말 힘든 일을 이미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제목이 붙어있는데, <과부의 헌금>입니다. 전에는 <과부의 헌금 칭찬>이라고 제목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본문은 마치 주님께서 두 렙돈의 헌금을 바친 과부를 “칭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자기감정”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다시 꼼꼼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이 일을 함께 보고난 제자들을 가까이 모아놓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들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 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43절)라고 말입니다. 만일 물질의 양으로 비교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정성은 그런 진정성입니다. 인간의 내면을 보는 진정성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이 직접 이 여인과 대화를 했는지 본문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멀리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혹시라도 들었는지 모릅니다. 지금 이 여인이 한 행동은 절대로 조롱거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님의 말씀은 “칭찬”이라기보다는 “위로”에 가깝습니다. 이런 말이겠지요, “잘했다. 참 힘들었구나. 남들이 비웃는다고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그 이상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겠니?”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이런 말일 것입니다. “나의 제자들이여 행여라도 저 여인의 헌금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말하는데, 저 여인이 가장 큰 헌금을 한 것이다.” 참 따듯한 위로의 말씀이고, 정겨운 가르침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평화목 교회는 정말 작은 교회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성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일은 힘든 일이지만, 지난 10년의 세월동안 교우 여러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우리는 평화목교회의 정신을 잘 지킬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평화목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교우님들께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교우 여러분, 간절히 바라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이를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이 작은 교회가 이 세상에 작은 소망이 되도록 계속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