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아버지 지혜의 어머니 옹기종기 앉은 풀꽃 같은 형제들 이 따스한 느낌은 어디서 오는 걸까
말씀은 산이 되고 뜻은 숲이 되니 어진 나무여! 섬기는 대로 자라거라
기도는 빛이 되고 가르침은 길이 되니 그 길 따라 바르게 걸어가리
가슴꾸러미 가득한 선물 핏줄의 향기로 나누는 기쁨 돌아와 다시 피는 꽃이여! 이 명절엔 모두 행복하여라
정을 나누는 따뜻한 설풍경
음력 1월 1일 정월 초하룻날인 설은 가족의 안녕과 화목을 위해 나쁜 기운을 막고, 복을 염원하는 풍속을 행하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색동 한복을 입고 복주머니를 휘돌리며 동네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어른들, 설 차례상과 세배 손님을 맞기 위해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는 안주인의 손길…. 참으로 정겨운 우리네 명절 풍경입니다.
<GOLD&WISE>는 설이 있는 2월을 맞아, 우리 민족의 얼과 지혜가 깊이 배어 있는 세시 풍속, 설의 참의미를 되새겨보겠습니다. KB국민은행 고객 여러분, 따뜻하고 넉넉한 정을 나누는 행복한 설 맞이하십시오. 에디터 조민진 캘리그래피 강병인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선우
스타일리스트 양은숙(스튜디오 밥) 어시스턴트 김소혜, 박은미 소품협찬 절편(좋은날)
노마드 시대의 농경 문화
일력(日曆)의 새해 첫날을 보내고, 또 설날을 맞는 일은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의미가 퇴색된다. 그러나 달[月]의 주기를 읽어 농사 절기를 정하고 문명을 일궈온 농경 민족에게는 월력(月曆)이 삶의 기준이었다. 하긴, 현대는 노마드 문명이 주류이고, 유목적 삶이 대세이니 의미의 퇴색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대가족 제도는 노동력이 경제력이 되는 농경 민족의 유산이라지만 유목민에게도 가족은 소중했다. 가축몰이에도, 떠도는 유랑의 길에서 맞닥트리는 수많은 적에 맞서기 위해서도.
유목민의 삶은 자연이 결정했다. 날이 가물어 초지가 메마르면 새로운 초지를 찾아 먼 길을 떠돌아야 했고, 한겨울 폭설과 매운바람이 몰아치면 양들이 떼로 얼어 죽어 가족, 공동체의 삶은 위협당했다.
그들에게 신은 하늘을 달래줄 무엇이지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땅에 묻은 조상은 이별의 대상일 뿐이었다.
가뭄에 대비해 저수지를 파고, 곡식을 저장해 겨울을 준비했던 농경 민족에게 자연은 반복적이거나 돌발적인 현상이고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떠돌지 않아도 되는 정주(定住) 문명을 만든 바탕이었다. 하늘이 막연히 두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들을 지켜줄 신은 지혜를 물려준 조상이었다. 월력과 설날, 차례나 제사가 수천 년 농경의 후예인 우리에게 유산이 된 연유다.
문명의 주류가 바뀐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씨족이나 가족 단위의 유목도 아니고 저마다 노마드가 된 삶이니 가족에 점점 소홀하고, 심지어 짐으로까지 여기는 경향도 있다.
그렇지만 가족은 여전히 소중하다. 자신의 뿌리라거나 핏줄에 대한 믿음과 의지 때문이 아니다.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유목이 아니라 저녁이면, 또는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는 정주의 노마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마드의 삶 속에서도 본래의 유목 민족보다는 훨씬 깊은 안온함을 느끼며 사는 것이다. 농경 문명의 정주가 만든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이 입을 가볍게 한다. 한 해에 두 번있는 정주 문명의 축제를 앞두면 여기저기서 ‘명절 스트레스’ 운운으로 재부터 뿌린다.
조상을 기리는 차례나 제사는 그것을 매개로 가족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이전에 안온한 삶의 지혜를 물려준 데 대한 감사의 예(禮)다. 더구나 설날은 정주 문명의 한 해를 시작하는 축제다.
축제에는 많은 수고가 따른다. 성대하고 화려할수록 더 그렇다. 제물을 장만하고, 서로를 대접하고, 평소와 다른 놀이를 즐기기에. 그렇지만 축제를 위한 수고는 번거로움이 아니라 기쁨이다. 아니 기쁨이어야 한다.
기쁨에 미리 재를 뿌리고 예를 욕되게 함은 어리석음을 넘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이미 그 재앙으로 가족이라는 오랜 공동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 부모, 형제, 가족. 그 소중한 안온함을 온전히 지키려면 겸허해야 한다. 별반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저 즐기는 마음이면 된다. 내 기꺼운 수고가 축제의 빈객(賓客)에게 감동이 됨을 생각하면 저절로 즐거울 수 있다. 더불어 축제의 장에서는 외양의 치장보다 주고받는 말이 고와야 한다. 진정 어린 덕담의 전통이 그것이다. 상대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래도 세상은 바뀌었다. 한둘 자녀의 핵가족이 전통의 예를 온전히 지키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지켜내려면 변화가 필요하다. 가볍게는 홍동백서(紅東白西)와 처치 곤란이 되기 일쑤인 각종 전(煎) 등의 형식 변화도 시도해볼 만하다. 차례(茶禮)의 본래 의미는 차(茶)를 주(主)로 올리는 예이니 소박하고 현대적인 제물이라도 기쁘고 정성 어린 진설(陳設)이라면 조상님도 기꺼이 흠향(歆饗)하지 않겠는가.
깊은 신앙을 가진 가족이라면 종교의 의식으로 예를 올리고 번거롭지 않은 가운데에 가족의 우애를 다지는 것도 고려할 만하니, 모처럼 마주한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볼 일이다.
글 김정현(소설가)
포토그래퍼 김재이 소품협찬 약과(좋은날, 02-848-6436)
신윤복 ‘어물장수’ (29.7x24.5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머리에는 생선 함지를 이고 채소가 든 망태기를 옆구리에 낀 여인과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인이 장터 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설음식을 장만하거나, 차례를 지내기 위해 여인들은 부지런히 설장을 보고 정성을 다해 제수를 준비했다.
푸지고 고마운 우리 설날
우리에게 새해가 두 번 찾아온다는 것은 때로 헷갈리고 번거로운 일이다. 양력 해가 넘어가며 갖추는 모든 절차와 예를 설이 찾아올 무렵 다시 한번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달리 보면 설은 우리에게 새 출발의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날이다. 한 해를 여는 축복과 벽사의 절차를 제대로 밟는 귀한 시간이다.
새해 인사를 마친 지 한 달여 후에 다시 찾아오는 설. 신정과 구정의 불편함을 호소하며 이를 간소화하려는 움직임도 많았지만, 긴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에게 설의 중요성만큼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는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고종 31년(1894)에 역법이 양력으로 바뀌었으나 음력 설날 풍속은 계속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일본의 강압적인 신정과세(新正過歲) 정책에도 ‘신정은 일본설’이라 반발하며 민가에서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정을 두고 시비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1989년이 되어서야 ‘설날’이라는 정식 명칭을 되찾았다.
이토록 어렵게 찾은 설날의 숨은 말뜻은 무엇일까. 처음 만나는 날이라 낯설어서, 또는 시작하는 날이라는 뜻의 ‘선날’이 바뀌면서 또는 나이 ‘살’이 변하면서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엇이 정설이든 설이라는 말 안에는 ‘삼가다’, ‘새롭다’ 등의 뜻이 있는 것으로 요약된다. 결국 설날에 담긴 선조의 메시지는 한 해 동안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이때, 특히 행동을 조심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나쁜 일은 예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쓰는 ‘정초부터’라는 말이 주는 어감은 말이 담은 뜻보다 넓고 강하다. 정초에는 어느 때보다 몸가짐을 조심하고, 화를 부르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금기 사항도 많은데, 이를테면 ‘정초에 싸우면 1년 내내 싸운다’거나 ‘이날 죽을 먹으면 1년 내내 궁핍하다’, ‘정초에 돈을 빌려주면 복이 나간다’ 등의 속설이 있다.
경거망동을 삼가고 사람과 자연으로부터 좋은 에너지를 받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 골조다. 그래서 설에는 어른을 찾아가 덕담을 듣고 긍정의 기운을 받는다. 아픈 이를 찾아가 걱정하는 말을 건네는 것조차 좋지 않은 기운을 주고받는 일이라 생각해 이날은 피했다.
설을 설답게 만드는 우리 풍속
민족 최대 명절답게 설과 관련된 어휘는 많다.
‘하얗게 쌓인 설밥을 보니 올해도 풍년이 들려나 보다’. 지금은 드물지만 과거 선조들이 흔히 쓰던 말이다. 설밥은 설에 내리는 눈을 말한다.
정월의 눈은 밀이나 보리의 싹을 보호하고 수분을 주는 역할을 해 밥과도 같이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설에 눈이 내리면 풍년이들 거라 믿었다.
또 설에 서는 장은 ‘설장’이라고 했다. 설음식을 만들려면 설을 가까이 두고 장이 서야 했다. 설날 차례를 지낼 제수는 설장에서 마련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 섣달’도 설이 오는 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섣달 그믐날 개밥 퍼주듯’이라는 재미있는 속담이 있다. 해를 넘겨도 시집가지 못한 노처녀가 홧김에 개밥을 팍팍 퍼주는 모습을 빗댄 표현이다. 동기야 어찌 됐든 설과 아낌없이 퍼주는 모양새는 왠지 잘 어울린다.
이에 더해, ‘섣달받이’는 음력 섣달 초순에 함경도 앞바다로 몰려오는 명태 떼를 뜻한다. 지금은 쓰임이 줄었지만 재미있고 정감 가는 표현들이다. 어휘만큼 설 풍속도 다양하다. ‘농가월령가’에 그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시구 뒤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새해에 세배함은 인정 많은 풍속이라
새 옷 차려입고 친척 이웃 서로 찾아 남녀노소 아이들까지 삼삼오오 다닐 적에
와삭버섯 울긋불긋 빛깔이 화려하다
사내아이 연 띄우고 여자아이 널뛰기요
윷 놀아 내기하기 소년들 놀이로다 사당에 세배하니 떡국에 술 과일이로다
움파와 미나리를 무 싹과 곁들이면 보기에 싱싱하여 오신채가 부러우랴
차례 궁에서는 왕과 일월신에게 배례하고, 가정에서는 집집마다 세찬과 세주를 마련해 조상에게 가례를 지낸다. 가양주 문화가 발달한 만큼 명절에는 집에서 만든 술을 정성껏 마련해 차례상에 올렸다.
이를 정조다례(正朝茶禮)라 한다.
상을 차릴 때는 맨 윗줄에 떡국을 조상 수대로 올린다. 둘째 줄에는 탕을 놓고, 셋째 줄에는 생선과 떡을 올린다. 그 아래에는 과일류를 놓는다.
대략의 기준은 있지만 집안마다 상을 차리는 법칙이 다른데, 이는 각 집안의 먹는 음식과 진설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마라’는 속담이 있는 것이다.
‘외진연홀기’ (26.5x7.2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홀기란 혼례나 제사를 지내는 제례 등 연회에서 이뤄지는 의식 절차를 적은 것이다. 이 홀기는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에서 베풀어지는 연회 절차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놀이 설에 하는 놀이로는 윷놀이나 연날리기처럼 널리 알려진 것도 있지만, 지금은 보기 힘든 놀이도 있다.
먼저 여자아이들이 설에 많이 한 송아지따기가 있다.
여자아이들은 설에 모두 긴 치마를 입고 머리에 댕기를 늘어뜨렸다. 송아지따기는 이 댕기를 잡는 놀이다. 한 사람이 술래를 하고 나머지 사람은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일렬로 선다. 술래가 맨 뒷사람의 댕기를 잡아당기면 승리하는 것인데, 지금의 꼬리잡기와 흡사하다. 남자아이들은 빙판에서 장치기를 했다. 산에서 소나무를 구해 하나는 작대기를, 하나는 장불알(소나무를 둥그렇게 깎아 만든다)을 만들어 아이스하키처럼 작대기로 장불알을 쳐서 상대편 골에 넣는 놀이다.
장치기에서 이긴 팀에게는 그날 해온 나무를 몽땅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60년대까지 성행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까치두루마기’ (58.5x35cm(전체 길이x품), 20세기 초, 국립민속박물관) 선조들은 설 전날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고 믿어 설날의 기쁨을 누리고자 까치설날이라 불렀다고 했다. 까치두루마기는 어린아이의 설빔으로, 깃과 고름, 돌띠를 남자아이는 남색으로, 여자아이는 홍색이나 자색으로 지었다. 오늘날에는 오색 두루마기를 아이들의 돌 옷으로 많이 입히며 장수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설빔 설날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설빔이다. 설빔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갖춰야 할 예복으로, 꼭 새것을 장만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형편에 따라 가장 좋고 깨끗한 옷을 차려입는 것이다. 선조는 가을부터 미리 좋은 옷감을 준비해 설빔을 마련하는가 하면, 어른들의 옷에 햇솜을 넣어 따뜻한 옷을 만들어드리기도 했다. 새날을 맞는 정성과 준비, 그리고 효를 강조한 풍습이다.
세배와 덕담 새해 첫날 돈을 주는 풍습은 아시아권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으나 어른을 찾아뵙고 세배를 하는 풍경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전통이다. 보통 차례가 끝난 뒤 조부모, 부모, 형제 순으로 행한다. 친지나 스승이 먼 곳에 있을 경우 정월 보름까지 찾아가면 예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어른께 드리는 세배는 좋은 한 해가 되시라는 일종의 축원이므로 격식을 갖추는 게 좋다. 세배를 받는 사람은 세배하는 사람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뒤에 그의 신상과 소망에 맞는 덕담을 해주었다.
이 덕담은 우리 속담 ‘말이 씨가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언령관념(言靈觀念)에서 비롯한 것이다. 말 자체가 그대로 실현되는 영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 믿음은 음성으로 확대되어 청참(聽讖)이라는 점복술도 생겼다.
설날 새벽, 거리에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맨 처음 듣는 소리로 그해 신수를 점치는 것이다. 이때 까치 소리를 들으면 풍년과 더불어 행운이 온다고 믿었다.
정선 ‘정문입설도’ (30.4×23.4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스승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눈이 쌓이는 와중에도 밖에 서서 기다리는 제자의 모습으로, 설에는 집안의 어른이나 스승의 집을 방문해 세배를 올리고 덕담을 들으며 새해의 기운을 받았다.
전국의 다양한 떡국
설에 차리는 음식을 세찬이라고 한다.
세찬에는 여러 음식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떡이며, 설날 아침에 먹는 떡국은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는 설날에 떡국을 먹는 특별한 이유가 드러난다.
백의민족답게 흰색 음식으로 새해를 시작하면서 천지만물의 새로운 탄생을 고하는 종교적인 의미가 그 첫 번째 이유다. 화려함이라면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우리 떡 중에서도 가장 희고 단순한 가래떡을 선택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떡을 길게 늘여 가래로 뽑듯 재산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축복의 의미가 있다. 가래를 둥글게 썰어 엽전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드니 재복을 비는 마음도 담겼다. 그런데 모든 지역에서 이 엽전 모양의 떡국을 끓여 먹은 것은 아니다.
숙명여대 한국음식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지역별로 떡국의 형태가 서로 많이 달랐다.
개성 지방에서는 조롱박 모양의 조랭이떡국을 끓여 먹는데,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아이들이 설빔에 조롱박을 달고 다니면 액막이를 한다는 믿음의 연장으로 떡국도 조롱박 모양으로 끓여 먹은 것이고, 또 하나는 이성계에 대한 미움을 담아 고려 신하가 변절해 조선의 신하가 된 것을 풍자하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한편 충청도에서는 올갱이나 미역, 구기자, 닭 등을 넣은 떡국을, 전남에서는 꿩떡국을, 경남에서는 굴떡국을 먹었다. 조리법과 주재료가 단순한 만큼 지역색에 맞는 부가적인 재료를 첨가해 다양한 형태로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며칠 후면 우리도 모두 떡국 한 그릇을 앞에 두게 될것이다.
올 설은 김종길 시인의 시 설‘ 날 아침에’를 기억하며 맞이하고 싶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양반의 관직 놀이, 승경도
승경도는 양반 가문의 젊은이들이 정초에 실내에서 하던 놀이다. 큰 종이에 간격을 긋고 관직이나 학업의 등급을 차례로 적은 뒤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수대로 승진과 후퇴를 하는 게임이다.
과거에 급제해 고관이 되고 싶은 소망을 담아 연초에 미리 점친다는 의미도 있지만, 관직의 복잡한 명칭과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교육적인 효과가 있어 양반층에서 널리 활용했다.
종이에는 가로 10행, 세로 14행의 칸을 적고 각 칸에는 문과와 무과, 9품부터 1품까지의 등급, 품계에 해당하는 관직명을 배치한다. 주사위 수가 좋지 않으면 계속 강등돼 끝내 파직하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사약을 받고 지게 될 수도 있다. 스토리만 봐도 흥미진진한 게임이지만, 봉건 사회의 몰락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세찬(歲饌), 설 음식에 담긴 의미
한 해의 안녕과 화목을 염원하다 개성 지방에서는 설날이면 조랭이 떡국을 먹는다. 그 유래를 두고 누에고치의 실처럼 한 해의 일이 잘 풀리라는 의미로 누에고치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설과 아이들이 설빔에 조롱박을 달고 다니면 액막이를 한다는 속설에 근거, 이를 떡국에 적용해 조롱박 모양으로 만들어 먹었다는 설이 있다.
조랭이 떡국 대파 뿌리, 황태, 황기, 생강을 넣고 1시간 동안 푹 끓인 육수는 개운한 맛은 물론 겨울 면역력을 높이고, 지단 위에 소고기 완자를 빚어 만든 알쌈은 복을 싼다는 의미와 함께 겨울철 영양을 고려한 음식이다.
음양오행의 지혜를 담다
예부터 우리 전통 음식에는 맵고 달고 시고 짜고 쓴 오미(五味)를, 색상에는 오색을 조화시키려 했다. 파란색·빨간색·노란색·흰색·검은색[靑·赤·黃·白·黑]의 음식 재료를 사용해 오행의 기운을 담은 것. 이를 통해 나쁜 기운을 막고,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전유어 전감에 씌우는 밀가루 대신 현미 가루를 묻혔고, 전에 입힐 달걀에는 울금 가루를 넣어 색깔과 맛을 지켰다. 또, 무쇠 팬에 생들기름으로 전을 지져 과도한 기름 사용을 줄이고 열량 부담도 줄인 음식이다.
오색 나물
무나물은 무를 결대로 썰어야 부서지지 않고, 콩나물은 찜통에 쪄서 가볍게 버무리듯 볶아야 아삭함과 영양소 손실을 막을 수 있다. 도라지는 쌀뜨물에 데치면 아린 맛과 독소가 없어지고, 고사리에 후추를 조금 넣으면 비린내를 잡아준다. 지방 분해에 탁월한 다시마를 우린 육수를 사용해 나물을 볶아 감칠맛은 물론, 기름진 명절 음식의 단점을 보완한 음식이다.
약식동원, 건강한 겨울을 나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은 말 그대로 ‘약과 음식은 그 근본이 동일하다’는 뜻으로, 음식이 영양을 보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을 고칠 수 있는 기능까지 갖고 있음을 말한다.
명절 음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움파처럼 눈 밑에서 갓 돋은 푸성귀로 긴 겨울 동안 섭취하지 못해 부족한 비타민을 보충했고, 육류 등으로 단백질을 섭취했다. 또 자양제, 혈액 정화제의 효능이 있는 대추 등으로 명절 음식에 건강을 더했다.
움파산적 겨우내 추위를 견디며 움튼 연하고 달콤한 대파와 맛있게 곰삭은 김장김치의 양념을 털어내고 꼬치에 끼웠다. 무쇠 팬에 청주, 후춧가루, 생강가루를 넣고 팔팔 끓여서 나온 국물은 따라 버리고 양념한 고기를 30% 정도 앞뒤로 익혀 꼬치에 꿰면 고기 냄새와 기름을 잡아주고 모양도 예쁘다. 무사히 지나온 겨울에 고마움을 갖게 한 음식이다.
대추단자와 식혜
대추살을 다져 찹쌀가루와 섞어 쪄낸 다음 오래 치대 모양을 빚어 대추채와 밤채를 고물로 묻힌 대추단자는 눈과 입이 즐거운 후식이다. 식혜는 끓일 때 생강을 저며 넣으면 은은한 생강 향과 함께 기름진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
평화의 아버지 지혜의 어머니 옹기종기 앉은 풀꽃 같은 형제들 이 따스한 느낌은 어디서 오는 걸까
말씀은 산이 되고 뜻은 숲이 되니 어진 나무여! 섬기는 대로 자라거라
기도는 빛이 되고 가르침은 길이 되니 그 길 따라 바르게 걸어가리
가슴꾸러미 가득한 선물 핏줄의 향기로 나누는 기쁨 돌아와 다시 피는 꽃이여! 이 명절엔 모두 행복하여라
정을 나누는 따뜻한 설풍경
음력 1월 1일 정월 초하룻날인 설은 가족의 안녕과 화목을 위해 나쁜 기운을 막고, 복을 염원하는 풍속을 행하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색동 한복을 입고 복주머니를 휘돌리며 동네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어른들, 설 차례상과 세배 손님을 맞기 위해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는 안주인의 손길…. 참으로 정겨운 우리네 명절 풍경입니다.
<GOLD&WISE>는 설이 있는 2월을 맞아, 우리 민족의 얼과 지혜가 깊이 배어 있는 세시 풍속, 설의 참의미를 되새겨보겠습니다. KB국민은행 고객 여러분, 따뜻하고 넉넉한 정을 나누는 행복한 설 맞이하십시오. 에디터 조민진 캘리그래피 강병인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선우
스타일리스트 양은숙(스튜디오 밥) 어시스턴트 김소혜, 박은미 소품협찬 절편(좋은날)
노마드 시대의 농경 문화
일력(日曆)의 새해 첫날을 보내고, 또 설날을 맞는 일은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의미가 퇴색된다. 그러나 달[月]의 주기를 읽어 농사 절기를 정하고 문명을 일궈온 농경 민족에게는 월력(月曆)이 삶의 기준이었다. 하긴, 현대는 노마드 문명이 주류이고, 유목적 삶이 대세이니 의미의 퇴색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대가족 제도는 노동력이 경제력이 되는 농경 민족의 유산이라지만 유목민에게도 가족은 소중했다. 가축몰이에도, 떠도는 유랑의 길에서 맞닥트리는 수많은 적에 맞서기 위해서도.
유목민의 삶은 자연이 결정했다. 날이 가물어 초지가 메마르면 새로운 초지를 찾아 먼 길을 떠돌아야 했고, 한겨울 폭설과 매운바람이 몰아치면 양들이 떼로 얼어 죽어 가족, 공동체의 삶은 위협당했다.
그들에게 신은 하늘을 달래줄 무엇이지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땅에 묻은 조상은 이별의 대상일 뿐이었다.
가뭄에 대비해 저수지를 파고, 곡식을 저장해 겨울을 준비했던 농경 민족에게 자연은 반복적이거나 돌발적인 현상이고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떠돌지 않아도 되는 정주(定住) 문명을 만든 바탕이었다. 하늘이 막연히 두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들을 지켜줄 신은 지혜를 물려준 조상이었다. 월력과 설날, 차례나 제사가 수천 년 농경의 후예인 우리에게 유산이 된 연유다.
문명의 주류가 바뀐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씨족이나 가족 단위의 유목도 아니고 저마다 노마드가 된 삶이니 가족에 점점 소홀하고, 심지어 짐으로까지 여기는 경향도 있다.
그렇지만 가족은 여전히 소중하다. 자신의 뿌리라거나 핏줄에 대한 믿음과 의지 때문이 아니다.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유목이 아니라 저녁이면, 또는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는 정주의 노마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마드의 삶 속에서도 본래의 유목 민족보다는 훨씬 깊은 안온함을 느끼며 사는 것이다. 농경 문명의 정주가 만든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이 입을 가볍게 한다. 한 해에 두 번있는 정주 문명의 축제를 앞두면 여기저기서 ‘명절 스트레스’ 운운으로 재부터 뿌린다.
조상을 기리는 차례나 제사는 그것을 매개로 가족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이전에 안온한 삶의 지혜를 물려준 데 대한 감사의 예(禮)다. 더구나 설날은 정주 문명의 한 해를 시작하는 축제다.
축제에는 많은 수고가 따른다. 성대하고 화려할수록 더 그렇다. 제물을 장만하고, 서로를 대접하고, 평소와 다른 놀이를 즐기기에. 그렇지만 축제를 위한 수고는 번거로움이 아니라 기쁨이다. 아니 기쁨이어야 한다.
기쁨에 미리 재를 뿌리고 예를 욕되게 함은 어리석음을 넘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이미 그 재앙으로 가족이라는 오랜 공동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 부모, 형제, 가족. 그 소중한 안온함을 온전히 지키려면 겸허해야 한다. 별반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저 즐기는 마음이면 된다. 내 기꺼운 수고가 축제의 빈객(賓客)에게 감동이 됨을 생각하면 저절로 즐거울 수 있다. 더불어 축제의 장에서는 외양의 치장보다 주고받는 말이 고와야 한다. 진정 어린 덕담의 전통이 그것이다. 상대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래도 세상은 바뀌었다. 한둘 자녀의 핵가족이 전통의 예를 온전히 지키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지켜내려면 변화가 필요하다. 가볍게는 홍동백서(紅東白西)와 처치 곤란이 되기 일쑤인 각종 전(煎) 등의 형식 변화도 시도해볼 만하다. 차례(茶禮)의 본래 의미는 차(茶)를 주(主)로 올리는 예이니 소박하고 현대적인 제물이라도 기쁘고 정성 어린 진설(陳設)이라면 조상님도 기꺼이 흠향(歆饗)하지 않겠는가.
깊은 신앙을 가진 가족이라면 종교의 의식으로 예를 올리고 번거롭지 않은 가운데에 가족의 우애를 다지는 것도 고려할 만하니, 모처럼 마주한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볼 일이다.
글 김정현(소설가)
포토그래퍼 김재이 소품협찬 약과(좋은날, 02-848-6436)
신윤복 ‘어물장수’ (29.7x24.5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머리에는 생선 함지를 이고 채소가 든 망태기를 옆구리에 낀 여인과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인이 장터 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설음식을 장만하거나, 차례를 지내기 위해 여인들은 부지런히 설장을 보고 정성을 다해 제수를 준비했다.
푸지고 고마운 우리 설날
우리에게 새해가 두 번 찾아온다는 것은 때로 헷갈리고 번거로운 일이다. 양력 해가 넘어가며 갖추는 모든 절차와 예를 설이 찾아올 무렵 다시 한번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달리 보면 설은 우리에게 새 출발의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날이다. 한 해를 여는 축복과 벽사의 절차를 제대로 밟는 귀한 시간이다.
새해 인사를 마친 지 한 달여 후에 다시 찾아오는 설. 신정과 구정의 불편함을 호소하며 이를 간소화하려는 움직임도 많았지만, 긴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에게 설의 중요성만큼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는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고종 31년(1894)에 역법이 양력으로 바뀌었으나 음력 설날 풍속은 계속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일본의 강압적인 신정과세(新正過歲) 정책에도 ‘신정은 일본설’이라 반발하며 민가에서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정을 두고 시비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1989년이 되어서야 ‘설날’이라는 정식 명칭을 되찾았다.
이토록 어렵게 찾은 설날의 숨은 말뜻은 무엇일까. 처음 만나는 날이라 낯설어서, 또는 시작하는 날이라는 뜻의 ‘선날’이 바뀌면서 또는 나이 ‘살’이 변하면서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엇이 정설이든 설이라는 말 안에는 ‘삼가다’, ‘새롭다’ 등의 뜻이 있는 것으로 요약된다. 결국 설날에 담긴 선조의 메시지는 한 해 동안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이때, 특히 행동을 조심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나쁜 일은 예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쓰는 ‘정초부터’라는 말이 주는 어감은 말이 담은 뜻보다 넓고 강하다. 정초에는 어느 때보다 몸가짐을 조심하고, 화를 부르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금기 사항도 많은데, 이를테면 ‘정초에 싸우면 1년 내내 싸운다’거나 ‘이날 죽을 먹으면 1년 내내 궁핍하다’, ‘정초에 돈을 빌려주면 복이 나간다’ 등의 속설이 있다.
경거망동을 삼가고 사람과 자연으로부터 좋은 에너지를 받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 골조다. 그래서 설에는 어른을 찾아가 덕담을 듣고 긍정의 기운을 받는다. 아픈 이를 찾아가 걱정하는 말을 건네는 것조차 좋지 않은 기운을 주고받는 일이라 생각해 이날은 피했다.
설을 설답게 만드는 우리 풍속
민족 최대 명절답게 설과 관련된 어휘는 많다.
‘하얗게 쌓인 설밥을 보니 올해도 풍년이 들려나 보다’. 지금은 드물지만 과거 선조들이 흔히 쓰던 말이다. 설밥은 설에 내리는 눈을 말한다.
정월의 눈은 밀이나 보리의 싹을 보호하고 수분을 주는 역할을 해 밥과도 같이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설에 눈이 내리면 풍년이들 거라 믿었다.
또 설에 서는 장은 ‘설장’이라고 했다. 설음식을 만들려면 설을 가까이 두고 장이 서야 했다. 설날 차례를 지낼 제수는 설장에서 마련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 섣달’도 설이 오는 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섣달 그믐날 개밥 퍼주듯’이라는 재미있는 속담이 있다. 해를 넘겨도 시집가지 못한 노처녀가 홧김에 개밥을 팍팍 퍼주는 모습을 빗댄 표현이다. 동기야 어찌 됐든 설과 아낌없이 퍼주는 모양새는 왠지 잘 어울린다.
이에 더해, ‘섣달받이’는 음력 섣달 초순에 함경도 앞바다로 몰려오는 명태 떼를 뜻한다. 지금은 쓰임이 줄었지만 재미있고 정감 가는 표현들이다. 어휘만큼 설 풍속도 다양하다. ‘농가월령가’에 그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시구 뒤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새해에 세배함은 인정 많은 풍속이라
새 옷 차려입고 친척 이웃 서로 찾아 남녀노소 아이들까지 삼삼오오 다닐 적에
와삭버섯 울긋불긋 빛깔이 화려하다
사내아이 연 띄우고 여자아이 널뛰기요
윷 놀아 내기하기 소년들 놀이로다 사당에 세배하니 떡국에 술 과일이로다
움파와 미나리를 무 싹과 곁들이면 보기에 싱싱하여 오신채가 부러우랴
차례 궁에서는 왕과 일월신에게 배례하고, 가정에서는 집집마다 세찬과 세주를 마련해 조상에게 가례를 지낸다. 가양주 문화가 발달한 만큼 명절에는 집에서 만든 술을 정성껏 마련해 차례상에 올렸다.
이를 정조다례(正朝茶禮)라 한다.
상을 차릴 때는 맨 윗줄에 떡국을 조상 수대로 올린다. 둘째 줄에는 탕을 놓고, 셋째 줄에는 생선과 떡을 올린다. 그 아래에는 과일류를 놓는다.
대략의 기준은 있지만 집안마다 상을 차리는 법칙이 다른데, 이는 각 집안의 먹는 음식과 진설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마라’는 속담이 있는 것이다.
‘외진연홀기’ (26.5x7.2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홀기란 혼례나 제사를 지내는 제례 등 연회에서 이뤄지는 의식 절차를 적은 것이다. 이 홀기는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에서 베풀어지는 연회 절차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놀이 설에 하는 놀이로는 윷놀이나 연날리기처럼 널리 알려진 것도 있지만, 지금은 보기 힘든 놀이도 있다.
먼저 여자아이들이 설에 많이 한 송아지따기가 있다.
여자아이들은 설에 모두 긴 치마를 입고 머리에 댕기를 늘어뜨렸다. 송아지따기는 이 댕기를 잡는 놀이다. 한 사람이 술래를 하고 나머지 사람은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일렬로 선다. 술래가 맨 뒷사람의 댕기를 잡아당기면 승리하는 것인데, 지금의 꼬리잡기와 흡사하다. 남자아이들은 빙판에서 장치기를 했다. 산에서 소나무를 구해 하나는 작대기를, 하나는 장불알(소나무를 둥그렇게 깎아 만든다)을 만들어 아이스하키처럼 작대기로 장불알을 쳐서 상대편 골에 넣는 놀이다.
장치기에서 이긴 팀에게는 그날 해온 나무를 몽땅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60년대까지 성행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까치두루마기’ (58.5x35cm(전체 길이x품), 20세기 초, 국립민속박물관) 선조들은 설 전날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고 믿어 설날의 기쁨을 누리고자 까치설날이라 불렀다고 했다. 까치두루마기는 어린아이의 설빔으로, 깃과 고름, 돌띠를 남자아이는 남색으로, 여자아이는 홍색이나 자색으로 지었다. 오늘날에는 오색 두루마기를 아이들의 돌 옷으로 많이 입히며 장수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설빔 설날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설빔이다. 설빔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갖춰야 할 예복으로, 꼭 새것을 장만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형편에 따라 가장 좋고 깨끗한 옷을 차려입는 것이다. 선조는 가을부터 미리 좋은 옷감을 준비해 설빔을 마련하는가 하면, 어른들의 옷에 햇솜을 넣어 따뜻한 옷을 만들어드리기도 했다. 새날을 맞는 정성과 준비, 그리고 효를 강조한 풍습이다.
세배와 덕담 새해 첫날 돈을 주는 풍습은 아시아권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으나 어른을 찾아뵙고 세배를 하는 풍경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전통이다. 보통 차례가 끝난 뒤 조부모, 부모, 형제 순으로 행한다. 친지나 스승이 먼 곳에 있을 경우 정월 보름까지 찾아가면 예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어른께 드리는 세배는 좋은 한 해가 되시라는 일종의 축원이므로 격식을 갖추는 게 좋다. 세배를 받는 사람은 세배하는 사람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뒤에 그의 신상과 소망에 맞는 덕담을 해주었다.
이 덕담은 우리 속담 ‘말이 씨가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언령관념(言靈觀念)에서 비롯한 것이다. 말 자체가 그대로 실현되는 영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 믿음은 음성으로 확대되어 청참(聽讖)이라는 점복술도 생겼다.
설날 새벽, 거리에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맨 처음 듣는 소리로 그해 신수를 점치는 것이다. 이때 까치 소리를 들으면 풍년과 더불어 행운이 온다고 믿었다.
정선 ‘정문입설도’ (30.4×23.4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스승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눈이 쌓이는 와중에도 밖에 서서 기다리는 제자의 모습으로, 설에는 집안의 어른이나 스승의 집을 방문해 세배를 올리고 덕담을 들으며 새해의 기운을 받았다.
전국의 다양한 떡국
설에 차리는 음식을 세찬이라고 한다.
세찬에는 여러 음식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떡이며, 설날 아침에 먹는 떡국은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는 설날에 떡국을 먹는 특별한 이유가 드러난다.
백의민족답게 흰색 음식으로 새해를 시작하면서 천지만물의 새로운 탄생을 고하는 종교적인 의미가 그 첫 번째 이유다. 화려함이라면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우리 떡 중에서도 가장 희고 단순한 가래떡을 선택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떡을 길게 늘여 가래로 뽑듯 재산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축복의 의미가 있다. 가래를 둥글게 썰어 엽전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드니 재복을 비는 마음도 담겼다. 그런데 모든 지역에서 이 엽전 모양의 떡국을 끓여 먹은 것은 아니다.
숙명여대 한국음식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지역별로 떡국의 형태가 서로 많이 달랐다.
개성 지방에서는 조롱박 모양의 조랭이떡국을 끓여 먹는데,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아이들이 설빔에 조롱박을 달고 다니면 액막이를 한다는 믿음의 연장으로 떡국도 조롱박 모양으로 끓여 먹은 것이고, 또 하나는 이성계에 대한 미움을 담아 고려 신하가 변절해 조선의 신하가 된 것을 풍자하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한편 충청도에서는 올갱이나 미역, 구기자, 닭 등을 넣은 떡국을, 전남에서는 꿩떡국을, 경남에서는 굴떡국을 먹었다. 조리법과 주재료가 단순한 만큼 지역색에 맞는 부가적인 재료를 첨가해 다양한 형태로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며칠 후면 우리도 모두 떡국 한 그릇을 앞에 두게 될것이다.
올 설은 김종길 시인의 시 설‘ 날 아침에’를 기억하며 맞이하고 싶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양반의 관직 놀이, 승경도
승경도는 양반 가문의 젊은이들이 정초에 실내에서 하던 놀이다. 큰 종이에 간격을 긋고 관직이나 학업의 등급을 차례로 적은 뒤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수대로 승진과 후퇴를 하는 게임이다.
과거에 급제해 고관이 되고 싶은 소망을 담아 연초에 미리 점친다는 의미도 있지만, 관직의 복잡한 명칭과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교육적인 효과가 있어 양반층에서 널리 활용했다.
종이에는 가로 10행, 세로 14행의 칸을 적고 각 칸에는 문과와 무과, 9품부터 1품까지의 등급, 품계에 해당하는 관직명을 배치한다. 주사위 수가 좋지 않으면 계속 강등돼 끝내 파직하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사약을 받고 지게 될 수도 있다. 스토리만 봐도 흥미진진한 게임이지만, 봉건 사회의 몰락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세찬(歲饌), 설 음식에 담긴 의미
한 해의 안녕과 화목을 염원하다 개성 지방에서는 설날이면 조랭이 떡국을 먹는다. 그 유래를 두고 누에고치의 실처럼 한 해의 일이 잘 풀리라는 의미로 누에고치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설과 아이들이 설빔에 조롱박을 달고 다니면 액막이를 한다는 속설에 근거, 이를 떡국에 적용해 조롱박 모양으로 만들어 먹었다는 설이 있다.
조랭이 떡국 대파 뿌리, 황태, 황기, 생강을 넣고 1시간 동안 푹 끓인 육수는 개운한 맛은 물론 겨울 면역력을 높이고, 지단 위에 소고기 완자를 빚어 만든 알쌈은 복을 싼다는 의미와 함께 겨울철 영양을 고려한 음식이다.
음양오행의 지혜를 담다
예부터 우리 전통 음식에는 맵고 달고 시고 짜고 쓴 오미(五味)를, 색상에는 오색을 조화시키려 했다. 파란색·빨간색·노란색·흰색·검은색[靑·赤·黃·白·黑]의 음식 재료를 사용해 오행의 기운을 담은 것. 이를 통해 나쁜 기운을 막고,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전유어 전감에 씌우는 밀가루 대신 현미 가루를 묻혔고, 전에 입힐 달걀에는 울금 가루를 넣어 색깔과 맛을 지켰다. 또, 무쇠 팬에 생들기름으로 전을 지져 과도한 기름 사용을 줄이고 열량 부담도 줄인 음식이다.
오색 나물
무나물은 무를 결대로 썰어야 부서지지 않고, 콩나물은 찜통에 쪄서 가볍게 버무리듯 볶아야 아삭함과 영양소 손실을 막을 수 있다. 도라지는 쌀뜨물에 데치면 아린 맛과 독소가 없어지고, 고사리에 후추를 조금 넣으면 비린내를 잡아준다. 지방 분해에 탁월한 다시마를 우린 육수를 사용해 나물을 볶아 감칠맛은 물론, 기름진 명절 음식의 단점을 보완한 음식이다.
약식동원, 건강한 겨울을 나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은 말 그대로 ‘약과 음식은 그 근본이 동일하다’는 뜻으로, 음식이 영양을 보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을 고칠 수 있는 기능까지 갖고 있음을 말한다.
명절 음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움파처럼 눈 밑에서 갓 돋은 푸성귀로 긴 겨울 동안 섭취하지 못해 부족한 비타민을 보충했고, 육류 등으로 단백질을 섭취했다. 또 자양제, 혈액 정화제의 효능이 있는 대추 등으로 명절 음식에 건강을 더했다.
움파산적 겨우내 추위를 견디며 움튼 연하고 달콤한 대파와 맛있게 곰삭은 김장김치의 양념을 털어내고 꼬치에 끼웠다. 무쇠 팬에 청주, 후춧가루, 생강가루를 넣고 팔팔 끓여서 나온 국물은 따라 버리고 양념한 고기를 30% 정도 앞뒤로 익혀 꼬치에 꿰면 고기 냄새와 기름을 잡아주고 모양도 예쁘다. 무사히 지나온 겨울에 고마움을 갖게 한 음식이다.
대추단자와 식혜
대추살을 다져 찹쌀가루와 섞어 쪄낸 다음 오래 치대 모양을 빚어 대추채와 밤채를 고물로 묻힌 대추단자는 눈과 입이 즐거운 후식이다. 식혜는 끓일 때 생강을 저며 넣으면 은은한 생강 향과 함께 기름진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