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새벽을 여는 베트남 여성들
이른 새벽 아직은 캄캄한 길. 호수 쪽으로 가다 킹 호텔이라는 간판을 마주했다. 어제 박박사님이 ‘나는 저 호텔만 기억해 둘 거야. ’ 한 호텔이 오늘도 이정표 노릇을 한다. 호수가 어둠에 쌓여 여직 제 모습을 감추고 있다. 간간이 지나치는 오토바이 말고는 적막한 달랏. 한참을 걷다 큰 원형 로터리에 닿았다. 다리 건너 성당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같은 방향으로 난 네 갈래 길이라 헷갈린다. 가로등 불빛만 있어도. 그렇게 붐비던 야시장인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만 같다. 길은 빛을 쫓는다. 인간 또한 길을 따라 줄곧 걸어왔다. 그래서 아득히 먼 옛날 만들어진 바꾸미 길이고 나중 신작로가 되었다. 이른바 문명이다.
그 길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는 예르생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자연 그대로의 삶에 나 역시도 요즘 끌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명은 종잡을 수 없는 너무도 많은 길이 놓여 있다.그러기에 길은 잘 선택하여야 한다. 나라 건너 먼 길까지 나온 쩌런 화교들은 결국 무일푼으로 길을 잃고 보트 피플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또한 누구든 세파에 시달리다 무일푼으로 가는 게 어차피 인생 아닌가. 인생은 나그네 길, 그 노랫말이 맞다. 나는 또 다른 길을 선택한 쩌런 화교를 한 명 알고 있다.
월남 패망 당시 주월 미국 마틴 대사는 남베트남 중앙은행에 있는 금괴 16톤을 뉴욕에 있는 연방 준비은행에 예탁하도록 티우 대통령을 설득한 적이 있었다. 다른 나라도 합법적으로 금을 예탁한 예를 들었다. 티우의 동의는 없었으나 전쟁지역에서 금괴를 후송하는 데에 따른 보험금 문제로 지연되어 미 특별 군용기가 4월 25일에야 탄손누트에 도착하였다. 쩌런 (Cholon) 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중국계 구엔 반 하오(Nguyen Van Hao)는 남베트남의 마지막 경제 장관으로서 금괴의 후송을 반대하였다. 하오는 마틴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이 금괴를 끝까지 지켰고 특별기는 27일까지 대기하다가 돌아갔다. 그 결과 하오는 남베트남 패망 이후 1년 동안 남베트남의 경제문제에 대하여 고문역할을 하였다.
그는 문명의 삶으로서는 그야말로 잘 선택한 현명한 길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전제 하에서는 약삭빠른 그의 길에 의문을 갖는다. 문명은 이렇듯 수많은 길목마다 어둠을 가르는 빛 말고도 이에 하나 더하여 돈을 얹어 놓았다. 마침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문명이 짙을수록 갈수록 회개해야 할 사람은 더 늘고 있다. 나는 회개의 반 이상은 그 돈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계를 보았다. 정각 5시, 다른 길로 갔다 돌아서니 벌써 30분이 지난 상황이다. 그쯤 알겠다했다. 어둠이 조금씩 살라지더니 자연 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문명이 더뎌도 자연 알 수 있는 길도 있다. 산속에 사는 소수 족들이 굳이 문명을 도외시 하는 데는 그런 화평과 길흉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만난 소수민족들은 쳐진 문명속에서도 늘 얼굴은 순수하고 평화롭게 보였다.
수없이 들이닥치는 오토바이, 이곳 시장은 야시장만 성황이 아닌 모양이다. 온 순서대로 정렬 됐을 오토바이가 벌써 초만원이다. 그런 나는 오늘 새벽 또 다시 놀란다. 어제 밤 분명 초입은 털모자부터 해서 온갖 옷가지였는데 밤새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과일과 야채들로 꽉 차있다. 자리싸움도 없이 오는 대로 터를 잡는 사람들, 산딸기를 올망졸망 담아 놓은 것이 산기슭 자연 채취 물로만 보인다. 달랏 근교에 사는 수많은 고산족들은 재배한 각종 농산물과 과일들을 가지고 몇 킬로씩 걸어 내려와 이곳에서 물건들을 팔고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고 하던데 그들임에 틀림이 없다.
찬찬히 그들을 들여다보았다. 바쁘게 서두르지 않고 사람들에게 소리 지르며 물건을 사라고 유혹하지도 않고 제자리에 앉아서 느긋하게 물건을 보기 좋게 정리하는 모습이 분명 화평한 표정의 소수민족이다. 랑비앙 산 오르는 길에 있다는 산딸기가 해맑은 웃음 짓으로 나를 반긴다. 그런데 지금이 몇 시인가. 아직도 어두운 산길을 넘어 당도한 시간이 5시라 한다면. 솔직히 저 바구니 다 팔아봐야 우리 돈 5천 원도 안 된다. 문명은 정말 무서운 측면이 있다. 고사길 넘어 랑비앙에서 밤잠을 설치고 옛길을 쫓아 이 시각 여기에 나와 있지 않은가.
채소를 담은 지게가 참 이채롭다. 철사 끈으로 바구니를 만들고 양쪽 어깨에 쉽게 메고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속이 곽 들어찬 배추는 아니다. 아티소라는 식물도 눈에 띈다. 아티소는 베트남에서 차로 유명한 식물이다. 말린 과일들과 말린 채소들을 파는 곳도 있다. 가격은 보통 말린 과일의 경우 1팩에 18000동(900원),말린 채소(자색고구마, 호박 등)는 500g에 2만동(1천원). 부피만 작다면 갖고 가고 싶다. 베트남 참기름은 질이 우수해서 많은 나라에 수출도 한다는데 sesame oil 해봐야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고 아침부터 영어를 한다는 게 좀 그렇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물건들이 찰지고 비싼 제품들이다. 시장 맨 안쪽에 차지한 것은 육류들로 가게 터 안에 반드시 놓여있다. 그러니까 길거리 고산족으로 시작해서 정식 가게 상인까지 이곳도 빈부의 순서대로 상품이 놓여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초입에 당연 고산족이다. 벌써 이 시각 물건들을 흥정하고 있다. 그들은 매일 시장에 들러 하루치 먹을 것을 장을 본다고 했다. 싱싱한 재료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매일 맛본다는 것은 자연이 준 그야말로 그들만의 축복이다. 나는 신선한 야채를 곁들여 먹는 월남 쌈을 보고 어떻게 매번 준비하나 했는데 전혀 그들은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웰빙 식 하면 싱싱한 야채 곁들인 월남 쌈이 뜨는 게 아닌가.
이쯤 우리나라 노총각들에게 꼭 할 말이 있다. 베트남 여인을 나는 강력 추천 한다. 요샛말 줄여서 강추!!!. 하노이도 그렇지만 내가 시장 통에서 본 사람들 중 80% 이상은 모두 여자였다. 그뿐인가. 오토바이를 타는 베트남여성은 아주 일상적인 모습이다. 어깨에 멘 지개, 그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는지, 무거운 짐을 들고 장사에 나서는 모습도 흔하다. 수레도 너끈히 끈다. 나는 씨클로 운행도 보았다. 과일지게를 메고 다니는 것도 여성이요, 강이나 호수에서 보트의 노를 젖는 일, 산에서 땔감을 구하는 일, 가축에게 먹일 풀을 베어 오는 일, 논밭에서의 농사일도 여성들의 몫이다. 심지어 관공서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여성 비율이 높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남부 베트남은 쌀이 유명하다. 일부는 팔러 해외까지 나갔을 정도다. 당초는 중국인들이 담당을 했는데 민망황제 때부터 베트남화 정책으로 남베트남인들이 주도권을 되찾았다. 남부베트남은 물길이 많고 쌀 이외에는 생산물의 지역적 편재가 심했다. 강으로 캄보디아와 연결되고 바닷길로는 샴 만으로 태국과의 왕래도 원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국제교역에 익숙하다. 호치민이 하노이 사람들보다 상업에 능통한 것이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 무렵 베트남 여성들은 대담하여 직접 교역을 하러 배를 끌고 다녔다. 보트를 철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자기 몸처럼 부리고 다니는 남부 여성들은 물길이 이어지면 어디고 간다.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 해안을 누비며 교역을 하는 일도 흔했다.
응우엔 왕조의 개국 무렵인 1775년 14살의 왕자 응우옌푹아인이 메콩의 한 지류에서 벌어진 떠이썬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방콕으로 달아나던 길에 풍랑을 만나 배의 돛이 찢어져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그 때 두 자매가 모는 조그만 배가 나타나 실려 있던 직물로 돛을 만들어 왕자 일행이 무사히 탈출했다고 한다. 바로 이 자매는 직물장수였다. 이렇듯 배를 누비며 연안을 누비던 남부 베트남 여성들이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점차 원양 교역선에도 올라 싱가포르 말라카 등지로도 진출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사농공상에서 농업과 상업 분야는 여성이 담당을 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시장은 부녀의 세계라 일컬을 정도로 여성의 교역활동이 활발하다.
그렇다고 돈을 만진다고 되 바래지지는 않았다. 거기에 심성은 온순하고 순종적이지 동남아에서 우리의 문화와 얼굴색과 피부색도 제일 비슷하다. 가족애가 깊고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은 것도 알아줄만 하다. 거기에 중요한 사실, 반면에 상대적으로 베트남 남성들은 조금 게으른 편이다. 그렇다보니 베트남 여인들은 한국 남성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다는 인식과 성실하고 자상하여 여자에게 잘 해준다고 믿고 있어 꽤 호감을 갖고 있다. 그 뿐이랴, 신체적으로 생김새가 동남아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데다가 뜨는 게 한류열풍이고 경제적으로 넉넉하다고 알고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경제력 강한 그녀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 나는 적극 찬성 한다. 그 부지런함으로 늘그막 마누라 덧보고 살 수 있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때쯤은 베트남은 강국이 돼 친정집이 부자가 될지도 모른다. 워낙 자원이 풍부한 베트남이다.
고작 남자일이라고는 고기 칼 손질하는 게 전부인 달랏 시장, 나는 이른 새벽 시장에 꽉 찬 부지런한 베트남 여인들을 보고 너무 부러웠다. 나도 이제는 놀고먹어야 할 나이가 아닌가. 여전히 나한테 기대 사는 내 마누라, 그녀가 베트남에서 태어난다면 저렇게 오토바이 타고 산길 기어오르고 꼬박 하루 종일 물건 팔고 밥 짓고 농사일 끝내고 할 수 있을까. 나는 큰 의문을 갖는다. 그런데 말이다. 돈은 내가 다 벌어오는데 이날 이때 것 나는 꼼짝을 못하고 쥐어 산다. 왜 그런가했더니 바로 돈줄을 아내가 꽉 쥐고 있다. 결국 이 세상 문명은 빛도 길도 문제가 아니라 결국 돈이 문제인 것이다. 그 놈의 돈. 시장 통에서 반미를 시켜 먹으며 나는 그렇게 홍알홍알 해보는 터다. 물론 아내 앞에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안 되는 말이다. 다행히 반미는 그 기격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