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은 왜 부자를 위한 정당에 투표를 하는가?
기획/특집 / 백무산 시인 / 2016-04-06
가난한 사람들은 왜 부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투표를 하거나 권리를 포기할까? 선거 때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투표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투표를 마치고 나면 왜 많은 사람들은 배반감을 가질까? 투표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민심은 왜 가치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감정에 따라 좌우될까?
사람의 의식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지만, 가난한 자들의 투표는 매번 자신이 속한 계급·계층을 배반하는 투표를 하거나 방관한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의 무지 탓으로 돌리거나, 눈앞의 이익과 기분에 따라 투표할 뿐 정치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 탓이라고 여기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행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정치선진국에서도 적지 않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투표 성향은 일반적으로 직업과 소득, 계층 등 사회학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심리학적, 문화적 영향력이 더 크게 미친다. 사회적 가치나 정책적 판단보다 정서나 감성적 판단에 의존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고소득층이 복지를 지지하고, 중산층과 노동계층의 복지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저학력자들보다 고학력자들이 복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기울어진 사회 환경
최근 한 언론에 따르면 90%의 언론이 현 대통령을 편들고 있는 현실에서 총선을 치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언론의 영향력은 여론의 비판 능력이 떨어지는 소득이 낮은 계층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언론 이외에는 달리 비판적 지식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언론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가치와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수용한다. 진보에 대한 실망감도 대중을 친 보수주의자로 만든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하위계층이 아니라 형편이 상대적으로 나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보다 개선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경제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하층계급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결정적일 수는 없다. 현실에서 드러난 사회·정치적 환경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와 반공주의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마틴 립센은 사회 구성원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으로 가치와 태도를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가치’는 역사적 과정과 사회적 맥락을 통해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것인 반면, ‘태도’는 보다 감성적이고 유동적이며 특정 사건이나 인물, 감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성향을 의미한다. 한국사회에서 ‘가치’보다 ‘태도’를 이끌어내는 두 가지 기제는 반공주의와 지역주의다. 반공주의는 모든 진보적 가치를 잠식하고,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은폐한다. 지역주의 역시 경제적, 계층적 모순을 뒷전으로 몰아낸다. 같은 맥락으로 복지제도와 사회 경제적 문제는 이념의 희생물이 되기도 한다. 한국 정치에서는 언제나 이념과 지역과 세대 문제가 계급과 계층의 문제를 잠식해 왔다. 이러한 정치 현실에서 여전히 국가주의는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남아 있다. 국가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이념의 전위대로 만들고, 부자들보다 더 강력한 보수주의자로 이끌기도 한다.
삶의 불안은 보수성향을 키운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진 자들의 체제에 불만을 가지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그러한 체제에 의존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부와 권력에 분노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지만, 오히려 기존 방식에 적응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 적응방식에 익숙해지면서 내면적으로 순응하는 보수주의 성향을 보인다. 지배계급이 만들어놓은 사회구조에 충실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항은 오히려 얼마간의 배부른 자들의 사치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고, 체제의 하위계열로부터 이탈되지 않는 것이 안전한 삶이라고 여기게 된다. 민주화 운동이 언제나 중산층에서 시작되어온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삶이 개선된 이후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체제로부터 이탈하지 않기 위해 경쟁적으로 힘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시대의 진보를 열어가던 청년들조차 불안해진 미래 앞에서는 오히려 체제에 적응하는 데 모든 정열을 쏟으면서 변화를 두려워한다. 삶의 불안은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만들면서 보수성향의 심리를 만든다.
인습적 사고와 문화전쟁
인간에게는 과시적인 본능이 있으며, 과시적 소비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과시적인 것에 대한 끌림이 보수 성향을 만든다는 경제학적 지적도 가난한 사람들의 심리를 잘 표현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선망하고 힘을 추종하는 심리가 있다. 부유함이 지닌 여유와 고급스러움에 대한 동경과 힘에 대한 우상화가 보수에 대한 끌림의 정서를 만든다는 것이다. 성공신화에 매료되고, 부가 가진 외형적 긍정성이 보다 인간적이고 이상적인 가치로 포장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선망을 불러와 자신이 속한 계급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심리를 낳는다. 부자들이 만든 법과 구조의 불합리함보다는 고급스런 문화와 세련됨을 선망하게 됨으로써 자연스레 보수적 정서를 받아들인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에서 경제적 이익보다 인습적 사고 등 문화적 요소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지적한다. 개방적이고 평등을 추구하는 성향과 권위에 반대하고 성에 개방적인 자유주의적 성향이 순결과 신성함을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 본능에 위배되기 때문에 경제문제와 관계없이 진보적 가치를 멀리하고 보수에 대한 끌림이 생긴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를 지지하도록 하는 데는 보수주의자들이 ‘문화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가진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토마스 프랭크는 그의 저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에서 미 공화당의 ‘의도적 문화전쟁’을 거론했다. 공화당이 유권자들에게 경제문제를 부차적으로 만들고 애국심 같은 문화적 요인을 우선적인 선택지로 만들어 쟁점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경제문제를 정치문제와 분리하고, 정치의 진짜 문제는 미국의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는 자유주의자들이 낙태, 동성애를 부추기고 총기를 규제하고 신을 부정하는 교육 등으로 인해 국가를 나쁜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경제외적 불안 심리를 부추겨 경제적 불안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전략을 구사해 가난한 자들을 끌어들였다고 분석한다.
특권층 만큼 보수적인 빈곤층
이념적 편견 없이 대중운동의 본질을 파헤친 에릭 호프의 분석은 대중의 심리에 대해 보다 심층적이다. 그에 분석에 따르면 대중은 사회에 불안을 느낀다고 변화를 갈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주위 환경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무리 비참한 처지에도 변화를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익숙한 것을 고수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검증되고 정해진 질서를 따르는 것이 내면 깊숙한 불안감을 중화시키고, 예측이 가능한 보수적인 질서를 선호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보수성은 특권층의 보수성만큼이나 뿌리가 깊다고 분석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의 보수성은 선거 시기에만 나타나거나 권력에 의한 선전과 문화전략에 휘둘려서가 아니라 삶의 바탕으로부터 필연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들이 모두 적절한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대중들을 피상적인 존재로 놓고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또한 대중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볼 능력을 잃어버린 무능력자로 취급되기도 한다. 대중들의 자생적 삶의 능력을 부정한다. 한편으로는 민심을 엄중하게 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중은 자립 불가능한 존재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적 시각을 불식하기 위해 역사적 과정에서 대중들이 오랫동안 억압적 상황에서 살아오는 동안 내면화된 심리 속에 감추어진 것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노동습관이 보수 성향을 만들어
독일의 정신분석가 빌헬름 라이히는 대중들이 역사 속에서 오랜 시간 억압적 상황을 살아오면서 형성된 억압 심리를 분석했다. 권력에 의해 물리적으로 강제된 삶과, 억압된 성은 내면화된 억압심리를 낳고 자기화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지가 되고 나아가 억압적 상황을 재현하게 된다는 논리다. 말하자면 억압당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억압을 내면화하고, 저항의 의지를 잃고 억압 체제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안으로는 가족 내에서 가부장적 질서를 만들고, 밖으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나아가 파시즘적 질서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 그에 따르면 당시 독일 노동자들이 노동자를 위해 싸워온 정당에 등을 돌리고 히틀러의 파시즘 체제를 적극 지지하고 나선 것은 역사의 아니러니가 아니라, 대중의 심리에 내재된 자연스러운 현상인 셈이다.
라이히의 분석은 60년대의 이론이지만 현대 노동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수십 년 동안 주어진 일만 하거나, 극단적인 분업 시스템에서 일을 해온 노동자들은 매우 수동적이고 좌절된 심리를 지니고 있다. 자율적 판단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제한된 장소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료들만 상대하면서 사회성 또한 결여돼 있다. 산업노동은 주어진 일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므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기보다 누군가 결정을 내리고, 그 지시에 따르는 일에 익숙하다. 이러한 노동습관은 민주적 인사보다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하고, 가치 판단보다 감정적 판단에 의존케 한다.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몸에 배인 습관과 내면화된 심리는 보수지향적이 될 수 있다.
노동자들의 배반투표를 정치·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그와 같은 방법은 본질에 접근하는 데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식 속에 내면화된 것은 자신의 신념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노동 그 자체를 성찰하는 운동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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