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잘못 디디면 깨질까 조심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막 얼음판을 벗어나 뭍으로 나왔으니 다시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힘차게 가던 길을 가야죠.”
지난 2일 ‘일제 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49년 반민특위(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와해 이후 45년만에 과거청산이라는 역사적 첫 걸음을 내딛은 셈이다. 지난해 8월 김희선 의원을 비롯한 민족정기 의원모임이 중심이 돼 법안을 발의한 이후 수차례의 역풍을 맞은 끝에 반년만에 이뤄낸 쾌거다. 특별법 통과의 대표발의자인 김희선의원을 열린우리당사에서 만났다. 아직 법안 통과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시종일관 흥분된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했다.
“뜨거운 관심을 보여준 국민들의 승리”
“특별법 통과는 시작에 불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김희선 의원. 그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기도 하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김의원은 특별법 통과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보여준 국민들의 승리”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러나 법안의 내용이 대폭 수정됐기 때문에, 17대에서는 본래 안으로 개정을 하는 등의 후속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의원은 또 “특별법을 통해 반민족행위자를 가려낸 뒤 이를 근거로 독립운동가로 왜곡된 친일파를 가리고, 친일반민족 행위로 거둬들인 재산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법 발의부터 본회의 통과까지 겪었던 우여곡절에 대해서 김의원은 “음모론이나 배후론을 제기하면서 법안 자체가 엎어지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는 이유로 법안을 수정하고 논의 차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의원과 일문일답.
“눈을 비비고 봐도 푸른색. 몇 번이고 다시 봤다”
김의원은 “17대 총선 후 특별법안은 수정·보완해야 한다”며 남은 일이 더 많다고 설명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김의원께서는 특별법 통과를 위해 각 의원방을 돌아다니고, 법안 심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어제 특별법이 통과될 때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눈을 비비고 봐도 거의 푸른색이었어요. 내가 잘못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몇 번이고 다시 봤죠. 사실이었어요. 우리가 해낸 것이죠. 법률 추진에 앞장 섰던 송영길 의원이 수고했다며 힘차게 끌어 안아 주었고, 많은 동료 의원들도 축하해줬습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어요.
법안은 통과됐지만, 법안의 내용은 원안에서 많이 후퇴됐습니다. 법안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있을 정도이고, 법안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심사과정에서 법안 심의과정에서 법안이 심하게 훼손되는 것을 보면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반쪽짜리 법안이라도 전략적으로 법안통과가 우선이라고 판단되어서 받아들였습니다. 총선 전이라 정치적인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수정안도 내지 못 했어요. 그러나 총선이 끝나고 나면 국민들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부분을 보완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계획입니다.
특별법이 시행 된 이후 반민족행위자가 가려지면, 이를 근거로 국가유공자 재선정 또는 재산환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안 상정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당연한 순서입니다. 친일행위를 한 사람이 독립운동가로 왜곡되거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이 좌익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것은 분명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이미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던 당사자들은 대부분 사망했기 때문에 처벌할 대상이 거의 없습니다. 자칫 연좌제로 부활해 후손에게 피해가 가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친일반민족행위로 거둬들인 재산이라면 후손들이 앞장서서 사죄하고, 국가에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적으로 공인된 자료 있어야 친일청산된다 판단
김 의원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거둔 재산은 후손들이 앞장서 사죄하고, 국가에 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처음 특별법을 발의할 때 이야기를 하죠. 김의원이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살면서 느낀 바가 있어서 특별법을 발의하셨나요?
처음 특별법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은 국립묘지에 친일악질군인이었던 김창룡의 묘지이전문제 때문입니다. 악랄하게 독립군을 잡아가두던 김창룡이 어떻게 백범 김구 선생과 나란히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참으로 부끄러웠고, 아이들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립묘지법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먼저 국가적으로 공인된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국가적으로 공인된 친일 관련 자료를 만들기 위한 특별법을 만들기 위해 뜻이 맞는 의원들과 민족정기의원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일본의 역사왜곡 파동으로 국민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죠. 물론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당신 빨갱이 아니야!”라고 항의하는 목소리도 있었죠.
의원께서 의원실마다 돌아다니며 지지를 구할 때 냉담한 반응을 보인 의원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법안 심의 과정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정치권에서는 반년 동안 그런 반응의 연속이었는데, 어떻게 추스리면서 일을 추진하셨습니까.
의원들의 무관심보다 “이거 김희선이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며 순수한 의도를 훼손시키려 할 때, 더 힘이 빠졌습니다. 심지어 민주당 조재환 의원은 “‘장교’라는 문구가 박정희씨의 딸 박근혜 의원을 공격하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비약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슬프더군요.
민족정기모임은 한나라, 민주, 우리당 3당 의원들이 당을 초월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목적으로 구성된 모임입니다. 나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모임이 아닙니다. 게다가 특별법은 2002년 2월 발표했던 ‘친일파 708명 명단’처럼 의원들은 물론 헌법학자, 역사학자, 변호사 등이 참여해 자문과 공청회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선당시에는 “민족정기모임 대표이나 이회창 후보의 친일전력을 부각시켜 달라”는 당의 요구도 거절 한 바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26일에는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법사위 기본 권한인 자구와 체계 심사 결과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안에 찬반 양론이 있다는 이유로 법안심사소위로 내려보낼 때는 절차를 핑계로 상정을 미루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정말 답답했습니다. 게다가 소위가 미뤄지고 무산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법안 통과를 확신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민족정기의원모임 소속의원들과 함께 뛰어 준 독립운동가 단체와 시민단체분들, 그리고 네티즌과 국민들은 포기하지 않더군요. 배후세력 운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배후세력이 있다면 특별법을 지지해 준 국민들입니다. 국민들 덕분에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친일세력이 정치기반이 될 수 없다는 것 보여줘야”
김의원은 "오직 특별법의 통과를 위해 법안의 비상식적인 처리 과정을 참고 또 참았다"고 전했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심사 과정에서 법안의 내용이 수정되고 심사가 무산되거나 거부될 때 위원장에게 하소연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법안 심사를 유도했습니다. 그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저는 다혈질입니다. 상식이 아닌 일을 보면 ‘욱’하는 마음이 들곤 합니다. 특별법을 심사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번 흥분할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참았죠.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제 와서 감정을 폭발시켜 일을 그르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래힘줄같이 질긴 친일파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거나, 음모가 있다는 등의 오해를 받지 않고 일단 법안을 통과시키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니까요.
특별법 통과 과정에서 네티즌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미디어다음 핫이슈토론에는 참가자의 90%이상이 특별법 통과에 찬성했고, 관련 카페와 사이트를 만들면서 특별법 통과를 염원했습니다. 특별법 통과에 네티즌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나요?
어떻게 그 힘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국회의원들을 압박했고, 2월 27일 본회의 안건상정이 무산됐을 때는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요청하는 사이버시위가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디어다음 핫이슈토론에 이 문제를 올린 것도 봤습니다. 젊은이들이 많이 접속했을 텐데 친일청산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 든든했습니다. 네티즌이 도움이 정말 결정적이었습니다. 네티즌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친일세력이 정치기반이 될 수 없다는 것 보여줘야”
특별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후속 작업이 필요할까요? 정부, 정치권이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총선 후 특별법의 내용 중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보완하는 작업을 취할 예정입니다. 그 다음에는 진상규명위원회가 원만히 가동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정치권의 입김에 좌우될 사안이 아닙니다. 조사로 인해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말로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합니다. 국민들도 위원회 결성에 있어서 정치권의 영향력이 배제되도록 힘을 실어주셔야 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역사 교과서의 친일파에 대한 기술도 옳게 바로잡아야 하고, 국립묘지 친일파 안장문제도 해결되어야 합니다. 친일파 기념사업도 사라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비참하게 살아왔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제대로된 국가적 예우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방치해 둬서 할 일이 산더미 같습니다. 민족정기의원모임 회원들이 힘을 합쳐 이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 생각입니다.
일제청산 문제를 정치개혁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특별법 통과 과정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보면서, 이 정도 의지라면 반드시 청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열기를 총선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일제청산에 관심을 가진다면 정치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일제청산을 위한 법안도 국회에서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누구를 뽑는지는 유권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일단 투표장을 꼭 가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찍는 것이 일재잔재 청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번에 많은 국회의원들이 특별법 통과에 찬성표를 던진 것도 결국 표심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는 친일기득권 세력이 정치 기반이 되니까 이렇게 일제잔재 청산이 힘들었습니다. 이제 친일세력이 정치기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