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한시기행 1부 시인의 호수, 천년의 가인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더라. 유구한 역사와 광활한 대지의 나라 중국. 시간의 장대함과 그 시간 속에 수없이 명멸한 영웅들의 땅으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중국의 오랜 역사에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빛낸 수많은 문인들이 존재합니다. 특히 그들의 한시는 중국을 넘어 아시아의 문학전통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시 속에 숨어있는 옛 시인들의 숨결을 찾아 지금 중국으로 떠납니다.
중국문학을 전공해온 저는 그간 여러 차례 중국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발길 닿는 곳마다 놀라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특히 동남부의 ‘저장성(절강성)은 남송시대부터 경제ㆍ문화ㆍ학술의 중심지가 되어왔는데요, 한시를 찾아 떠난 첫 여정은 저장성의 성도 항저우(항주)에서 시작합니다.
중국의 7대 고도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항저우, 항저우는 중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서호(西湖)’는 항저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데요, 주변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산 때문일까요? 서호는 아련하고 몽환적인 분위기입니다. 오늘처럼 잔뜩 흐린 날씨에는 더 그렇습니다.
▶ 항저우<항주(抗州)> - 7세기 수(隨)나라가 건설한 대운하의 종점으로 남송시대 수도이자 오늘날 저장성(浙江省)의 성도.
▶ 서호(西湖) - 백거이와 소동파 등 중국 남송시대 이래로 문인들의 사랑을 받아 온 호수.
이러한 풍경 덕에 서호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인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전 세계에서 연간 2,500만 명이 찾아온다는 서호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바로 유람선에 오르는 것인데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세 개의 섬까지 여행객들을 실어다 줍니다.
배에 오르니 저도 모르게 시 한수가 절로 나옵니다.
김성곤(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서호가 참 아름다워요. 그래서 이제 보통 그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라고 하잖아요? ‘계림의 산수가 천하에 가장 뛰어나다.’라고 하는데, 거기에 맞춰서 서호의 풍경을 표현하기를 ‘서호승계갑동남(西湖勝계甲東南)이다.’라고 말하죠. ‘승계’란 말은 뛰어난 풍경을 말하죠, ‘서호의 풍경이 중국의 동남부에서는 최고다,’, ‘갑동남’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오래전 시인들도 이렇게 뱃놀이를 즐기며 서호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소동파의 시입니다.
水光瀲염晴方好(수광염염청방호)라, 불빛이 반짝반짝하니 날씨 개어 참 좋구나. 山色空蒙雨亦奇(산색고몽우역기)라, 산색이 몽롱하니 비가와도 또 좋다. 欲把西湖比西子(욕파서호비서자)라, 이 서호를 서씨에 비유해보면 어떨까? 淡妝濃抹蔥相宜(담장농말총상의)라, 이는 마치 서씨가 옅게 또는 짙게 화장을 해도 항상 잘 어울리는 것과 같다.
이 시가 나오면서 서호을 칭송한 시들을 전부 제압을 한 겁니다.“
이곳 호숫가에는 이 시를 지은 북송시대의 위대한 시인이자 문장가인 소둥파의 석상과 기념관이 있습니다. 흔히 ‘소동파’라 불리는 송대 시인 ‘소식’은 송대는 물론 중국 문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입니다.
▶ 소동파(蘇東坡 1037년 ~ 1101년) -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로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음.
“여기에 이게 삼소도, 그러니까 소식은 소식만 뛰어난 게 아니고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까지 해가지고, 이 세 명이 중국 문학사에서 굉장히 뛰어난 역할들을 했어요. 아 이것은 적벽부예요. 소식의 문장 중에서 아주 뛰어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훌륭한 문장이죠.
일엽편주를 가는 대로 내버려두니 아득히 만경창파를 건너가는구나 망망함이여, 공중에 올라 바람을 타는 듯, 어디서 멈출 것이냐 표표함이여, 세상을 버리고 홀로 우뚝 서 있는 듯, 날개 녿아 선계에 오른 듯하구나
제가 지금 쭉 노래하듯이 읊었잖아요? 그것을 음송이라고 합니다. 이게 전통적으로 중국의 시문을 익히는 방식이었어요. 그런데 중국이 근대화되면서 그것들이 이제 상당부분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건데, 근래에 들어서 다시 그것들을 수집하고 정리해가지고 다시 보급하고 있어요.”
시(詩), 서(書)에 그림(畵)은 물론 예술의 전 방위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보여준 소동파, 천 년이 흐른 지금에서도 동파의 시문(詩文)에서는 그의 정신과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중국 사람들한테 시(書)는 교양이자 동시에 대화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필수적인 도구 같아요. 말이 조금 어려워지는지 모르겠는데, 공자님이 자기의 아들 ‘백어’한테 가르치는 내용이 논어에 나와요. 제자 중의 한 명이 백어를 만나가지고 ‘야, 자네 아버지께서 자네에게 특별히 좋은 가르침을 주신 것이 있느냐?’ 그랬더니, ‘어느 날 제가 걷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오시더니 너는 시를 배웠느냐? 이렇게 물으시면서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 불학시(不學詩)면 무이언(無以言)이라, 시를 배우지 못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오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중국은 일찍이 시의 나라라 불려오게 되었지요.
서호 말고도 광저우에는 오랜 옛날부터 문인들이 즐겨온 또 다른 명물이 있습니다. 바로 중국 10대 명차 중 하나인 ‘롱진차’입니다. 청나라 건륭제는 이 차 맛에 반해 차 밭에 벼슬을 내렸다고 합니다. 서호 주변에 아련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차 밭이 있고 너머로 민가가 있고 그 너머로 첩첩히 안개 사이로 구름 사이로 산들이 있는 걸 보니까 그림 같은 느낌이 들어요. 江山如畵(강산여화), ‘강산은 그림같구나.’ 더군다나 이렇게 안개비가 멍멍하게 내리는 때는 일반적으로는 ‘시정화의(詩情畵意)가 넘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시정 ‘시의 정서’, 화의 ‘그림의 뜻’ 그래서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이 한 폭의 멋진 시 같은 운치있는 분위기이다.”
베이찡에 이르는 중국 대운하의 끝 항저우는 교통의 요지답게 일찍이 부유한 상인들의 차문화가 발달했습니다. ‘淸河坊(청하방)’이라 불리는 시내 중심가 거리에선 항저우의 오래된 옛 찻집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가계는 무려 7대에 걸쳐 내려오는 집이라고 하는데요, 약 800년 전부터 내려온 남송시대의 ‘태극다도(太極茶道)’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차를 준비하는 모습부터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저렇게 섬세하게 하는 것은 처음 보는데...”
“지금 하고 있는 동작은 찻잔을 데우기 위해서예요.”
“동작을 왜 춤추듯이 하는 거죠?”
“태극권 동작에서 유래했어요.”
중국의 차 문화는 그 종류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흔히 ‘음양의 이치를 도에 담아 마신다.’고 합니다. 특히 이곳에선 주둥이가 긴 주전자를 이용해 태극권의 여러 동작을 선보이며 차를 따릅니다. 처음엔 좁은 가계에서 멀리 있는 손님에게 차를 따를 수 있도록 이 같은 주전자를 발명했다고 하는데, 그 후 다양한 동작을 추가해서 발전했다고 합니다. 차 따르는 방법에도 역사가 숨어있는 셈이죠.
김성곤(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재밌죠. 이 뚜껑이 있는데, 이 뚜껑은 단순히 보온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여기에 있는 차 잎들을 마시기 편하게 밀어내는 역할을 하는 거죠. 들고서 이렇게....”
중국 차(茶)는 차를 불리는 방법과 물을 데우는 온도에 따라 각각의 맛이 다릅니다.
“좋은 차입니다.”
차 따르는 동작 하나에도 태극권법이 살아있듯 이곳에서 마시는 차 한 잔에는 서호를 노래했던 옛 문인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합니다.
항저우에 왔으면 ‘동진차’말고도 꼭 맛봐야 하는 이곳의 별미가 있습니다. 다름아닌 둥포러우<동파육(東坡肉)> 즉 동파육입니다. 이 동파육에는 시인이자 관리였던 소동파의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소 고를 때 대규모로 정리하는 그 준수(?)사업을 할 때, 이쪽 항저우의 많은 인민들을 위해 전부 동원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다 많은 수고를 하고 끝났는데, 이 사람들의 수고에 어떻게 보답을 해줄까? 고민하다가 그 사람들이 보낸 고기들을 이 돼지고기들을 자기 방식으로 자기 ‘동파육’으로 만들어서 다 보내준 거예요. 그런데 백성들이 먹을 때 너무 맛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가게에서 동파가 일러준 대로 그대로 만들어서 ‘동파육’이란 이름을 내걸고 팔기 시작해가지고 이름이 난 거예요.”
그렇게 동파고기, 동파육이 탄생한 겁니다.
“보기에는 이 비계가 많아서 조금 느끼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네요. 밑에 살코기하고 비계의 맛이 적당히 어울려가지고 정말 맛있는데요.”
과연 소동파에게 감사할만한 맛이네요. 항저우의 맛과 멋에 한껏 취한 저는 이제 춘추전국시대에 월나라의 수도로 번성했던 사오싱(소흥)으로 향합니다.
▶ 사오싱<소흥(紹興)> - 당, 송대 유명 시인들 그리고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 노신 등의 고향으로 많은 문인들을 배출함.
사오싱은 과거 금나라에 밀려 내려온 남송이 잠시 수도로 삼기도 했는데요, 시내엔 1,500년이나 되었다는 송의 상징 대선탑(大善塔)이 눈에 띕니다. 이곳 소흥은 도시 전체가 운하로 연결되어 있어서 중국의 ‘베니스’라 불리는데요. 강남 수향의 대표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잡한 도심을 포함하고 있기는 해도 여전히 구석구석 옛 정취가 담긴 수로가 오래된 마을을 속살처럼 품고 있는 곳입니다.
인구 400백만의 소흥은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걸출한 인물들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특히 19세기 말 중국 소설의 개척자이자 혁명가였던 루신의 고향으로도 이름난 곳입니다.
▶ 루쉰<노신(魯迅)1881-1936> - <광인일기>, <아큐정전(阿Q正傳)> 등을 쓴 중국 문학가 겸 사상가.
루신의 생가와 주변을 관광지로 개발한 ‘루신거리’에는 루신의 단편소설 속 주인공인 ‘공을기(孔乙己)’가 술을 마셨던 ‘함형주점’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소설 속의 공을기는 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이게 그 ‘소홍주’예요. 소홍주 한 잔. 또 이것은 ‘보쌍또우’라는 콩 안주인데...”
중국에서는 누렇다 하여 ‘황주’라고 부르는 소홍주와 ‘후이샹또우’라는 향신료로 절인 콩안주.
“주인공 공을기가 늘 여기 함형주점에 와가지고 선채로 이 소홍주를 따뜻하게 데워서 달라하고 안주로 이 간단한, 돈이 없으니까 이 ‘후이샹또우’를 먹고...”
소홍주를 마시며 중국의 전통을 고집하던 공을기는 시류를 타지 못해 비웃음을 샀던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요, 그가 마시는 소홍주의 맛만은 기가 막힙니다.
“그러니까 봉건사회의 폐단이라고 할까 위선 그런 것들을 잘 드러냈고, 그 다음에 사회의 각박함, 자신은 주도적인 질서 속에서 조금 비껴나 가지고... 힘들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에게 동정을 베풀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더 빡빡해... 그런 모습,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들을 신랄하게 드러내는 것. 그것이 그 당시의 소설로서는 아주 신선하고 혁신적이고 또 그런 것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것이 환영을 받았던 것이겠죠.”
당시의 부자들은 주점의 안쪽에서 앉아서 술을 마셨고 돈이 없던 공을기는 저처럼 문 바깥쪽에서 소흥주 한 잔을 기울였지요. 중국의 봉건왕조 시대가 무너지고 서구의 가치관과 문물이 들어와 급격하게 변화하던 격변기 시대에 공을기를 통해 현실을 꼬집었던 루신의 무게감이 새삼 느껴집니다.
그런데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루신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소홍이 가진 오랜 문화적 토양이 중국 문학의 거장 루신을 탄생케 한 거죠. 그 토양 중 하나가 바로 중국 최고의 서예가 왕희지입니다.
▶ 란팅<난정(蘭亭)> - 사오싱 서남쪽에 있는 유명한 정자로 서성 왕희지가 천하제일서인 ‘난정서’를 쓴 곳.
“여기가 그 왕희지가 거위를 굉장히 좋아했데요. ‘아지’, ‘거위 아’에 ‘못 지’자입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두 글자는 왕희지, 왕헌지 부자간에 합필해서 쓴 거래요. 왕희지만 뛰어날 뿐만 아니라 왕희지 아들 왕헌지도 아주 글에 뛰어났어요. 그래서 ‘2왕’이라고 불렸는데, 그 사람이 쓴 거랍니다. 힘도 있고 아주 자연스럽지요.”
왕헌지는 훗날 아버지 뒤를 이어 훌륭한 서예가로 성장했습니다. 왕희지가 거위를 참 좋아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물 위를 헤엄치는 거위의 모습으로부터 필법에 대한 영감을 얻고자 한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 왕희지(王羲之 307~365) - 중국의 서예가로 전통 서법을 집대성함으로써 서예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음.
“잘 생겼어요. 풍유의 남아라서 생긴 것도 잘 생겼고...”
왕희지의 유적지인 이곳 난정은 왕희지가 소흥의 유력인사 여러 명과 함께 굽이져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놓고 시를 짓는 즉 ‘유상곡수(流觴曲水)’를 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유상곡수’는 중국 주나라 때 무녀가 강가에서 재난을 쫓고 병을 물리쳤던 풍속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요, 현재는 무녀 대신 선녀의 차림을 한 여인들이 관광객을 위해 과거의 ‘유상곡수’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유상곡수’는 신라시대 ‘포석정’을 생각하면 되는데, 술잔을 물 위에 띄워놓고 그 잔이 자기 앞에 흘러오면 자작시 한 수를 읊어야 합니다. 미처 읊지 못하면 벌주를 세 잔이나 마셔야 했다고 합니다.
“아저씨부터 하세요.”
“그럼 제가 먼저 술 맛을 볼께요. 술 맛이 좋네요. 이게 소흥주죠? 제가 노래 한 곡 할께요.
이백의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 아미산에 뜬 가을 반달 달그림자 평강강에 들어 강물과 함께 흘러가네. 한밤중 청계역을 떠나 삼협으로 향하나니 그리운 그대 보지 못하고 유주로 내려가네
어때요?”
“좋아요...”
제 뒤를 이어 이번에는 7살도 채 보이지 않은 어린아이가 등장합니다.
“하지장(賀知章)의 <회향우서(回鄕偶書)> 젊어 집을 떠나 늙어 돌아오니 사투리는 그대로인데 머리칼만 세었구나 아이들이 날 보고도 누군지 몰라 깔깔대며 객께선 어디서 오신 뉘시오라 묻는구나“
과연 시의 나라 시의 고장답습니다.
“그거니까 그 때 모여서 그 사람들이 지은 시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걸 한데 모은 것이 ‘난정집’이죠. 그리고 왕희지가 술이 얼큰하게 취해가지고 그 난정집 서문을 썼어요. 그게 ‘난정집 서’야. 근데 그게 굉장히 문장도 아름답고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글씨를 난정집 서문‘에 쓴 그 글씨를 보면 거의 ’신풍‘이다 이겁니다.”
왕희지가 흥에 겨워 ‘난정집 서’에 쓴 글씨는 천하 제일의 행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진품은 당태종이 무덤 속으로 가져가고 현대에 남아있는 이 글씨는 후대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방한 것이라 합니다.
“‘난정집 서’에 재밌는 건 이제 ‘갈지(之)’자가 여러 번 나오거든요, 약 20여 번이 중복이 되는데 하나도 같은 게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왕희지가 술에 적당히 취해가지고 이 글을 썼는데, 술에 깨가지고 다시 한 번 해봤데요. 그런데 안 되더라는 거야. 그래가지고 ‘이건 하늘이 도운 것이다 신이 도운 것이다.’ 그런 이야기기 있어요.”
비록 그 진품을 사라졌지만, 힘이 넘치면서도 자연스러운 왕희지의 필체는 가히 서성이라 일컬어질 만 합니다. 서예를 한지 10년이 못된 저에게 왕희지의 필체는 까마득히 높은 산입니다.
난정을 떠나 강으로 가는 길. 저는 가산 자락에 위치한 ‘가암풍경구(柯巖風景區)’에 들렀습니다. 천 년 전 채석장이었던 이곳은 빼어난 풍광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특히 촛대를 거꾸로 박아놓은 듯한 이 바위에서 영화 ‘아바타’의 배경이 착안되었다고 합니다.
“야, 이거 아주 높으네, 운골(雲骨)이라, 구룸의 뼈라!”
바위 하나에도 시적인 정취가 묻어납니다. 드디어 ‘감호’에 도착했습니다. 소흥의 명물인 소흥주는 바로 이 감호의 물로 빗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 감호(鑑湖) - 사오싱(소흥)의 젖줄로 감호의 물로 주조한 술, 소흥주가 유명.
또 이곳에선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해 노를 젓는 소봉 만의 전통배, 오봉선에 오를 수 있습니다. ‘오봉선’, 까마귀처럼 까매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겁니다. 옛 시인들의 호수에 이르니 문득 감호가 낳은 당나라의 시인 ‘하지장’이 떠오릅니다.
“이백을 알아준 것도 하지장이야. 이백의 자품을 보고나서는 ‘야, 당신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다. 하늘에서 귀양 내려온 신선이다.’ 그래가지고 이백에게 ‘적선’의 호칭 별칭을 붙여준 장본인이 하지장이에요. 두 사람이 굉장히 사이가 좋았죠,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이백도 늘 하지장의 고향인 이곳 감호를 오고 싶어했는데...”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하지장의 시 ‘회향우서’, 고향에 돌아온 감회를 즉흥적으로 묘사한 시로 난정에서의 아이가 읊었던 바로 그 시입니다.
젊어 집을 떠나 늙어 돌아오니 사투리는 그대로인데 머리칼만 희어졌구나 아이들이 날 보고도 누군지 몰라 손님께선 어디서 오셨냐 웃으며 묻네.
“그래가지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자기가 주인이 아닌 객이 되어버린 그런 무상감이라 할까 그런 것을 담담한 어조로 표현한 시인데, 여기 오니까 그 시가 새롭네요.”
하지장 시에 드러나는 순수함의 근원이 여기 거울처럼 맑은 감호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장 말고도 이곳 소흥에는 또 한명의 대시인이었던 송나라 ‘육유’의 발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만 여 편의 시를 남긴 육유는 시마다 뜨거운 애국심을 표현해 지금도 애국시인으로 불리고 있는데요, 그는 또한 중국 시에서 결코 흔치 않은 절절한 애정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20세 때, 사촌동생인 ‘당환(?)’과 결혼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슬픈 이별을 했던 육유. 두 사람은 우연히 이곳 심원(沈園)에서 만납니다.
“바로 이게 이제 육유가 부인 당환과 헤어진 지 8년 만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거든요. 그래가지고 둘이 함께 동석을 하게 됐는데, 두 사람 마음은 여전하거야, 비록 두 사람은 각각 재혼을 했지만. 그래서 그 아픈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육유가 먼저 이 담벼락에 ‘채두봉(釵斗鳳)’이라는 작품의 써요.”
애절한 마음을 담은 이 노래에 당화는 눈물의 답장을 보냈고 급기야는 병이 나서 죽습니다. 훗날 70 노인이 된 육유는 이곳 심원에 다시와 당환을 그리워하는 시른 남겼습니다.
“그대에게 편지로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혼자 난간에 기대어서 혼자말로 중얼거릴 뿐, 아! 세상살이 어렵군요. 어려워요, 어려워요. 난, 난, 나. 이쪽에서는 틀렸어, 틀렸어, 틀렸어. 그래서 착, 착, 착. 중국어로는 ‘추오’, 추오, 추오. 우리의 결정도 틀렸고, 이렇게 헤어져 사는 것도 틀렸고. 이렇게 두 사람이 마음을 주고 받아요.”
사랑했지만 함께 하지 못하는 육유와 당환는 대대로 내려오면서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또 다른 영원불멸에 사랑을 꿈꾸는 연인들이 여전히 이곳 심원을 찾고 있습니다.
“어? 여기에 내 이름자가 있네. ‘성권씨 당신은 영원한 저의 마음이여요. 당신을 좋아한답니다.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저 당신을 축복할 뿐이랍니다.’ 엥? 제 이름은 아니고 제 이름에 들어가는 ‘별 성(星)’자가 있길래, 별 성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마음의 글인 모양입니다.”
부디 이곳에 남겨진 수많은 사랑의 흔적들이 육유와 당환처럼 아픈 인연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육유와 당환, 두 연인에 심취했던 저는 이제 천년의 세월을 넘어 만인의 사랑을 받아온 한 여인을 만나러 갑니다.
중국 역사 속 4대 미인 중의 한 명인 ‘서시’. 이곳 ‘서시고리(西施故里)’는 미인 서시의 고향입니다. 옛 월나라의 여인이었던 서시는 절하산 자락에서 비단을 빨던 여인이었습니다. 서시를 이야기하자면 ‘심어’라는 고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여기 이 물고기가 있는데, 이게 서시와 관련이 있어요. 이게 입을 활짝 벌려가지고 사람들이 동전을 넣게 만들었는데, 사실은 이 물고기가 왜 서시와 관련이 있나면, 서시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이 물고기가 서시의 아름다움에 반해가지고 물가에 거니는 서시의 모습에 반해가지고 지느러미를 펄럭이는 걸 잊어가지고 쭉 가라앉았나는, 거기서 沈魚(침어) ‘가라앉을 침’, ‘고기 어’자를 써서 ‘침어’가 서시의 별명이에요.”
서시 사당에는 지금도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많은 중국인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앞에 보고 절하렴.”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몸을 던져 조국 월나라룰 구했던 서시. 그녀의 헌신을 후대사람들은 지금도 기리고 있습니다.
“여기는 서시에 관한 곳이나까 예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나요?”
“서시는 얼굴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마음이 아름다워요. 나라를 위한 마음도 예뻐서 그녀를 기리는 거예요.”
“자기를 희생하며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요?”
“네. 내면의 아름다움이죠.”
“우리가 서시를 미인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 한 인물, 국가를 위해서 헌신한 인물, 이렇게 보고 있는 거죠.”
“이게 그 유명한 ‘향극랑(響屐廊)’이구요, 이게 뭐냐면 서시가 발을 굴려서 소리 내는 춤을 잘 추었어요. 나막신을 신고서 나막신에 방울도 달고 그리고 춤을 추는데, 오왕 부차가 소리가 잘 나라고 이렇게 나무판자를 깔아줬어요. 밑에 큰 항아리들을 댓 개 쭉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깔아 놓은 거예요. 그러면 그 위에서 춤추면 소리가 얼마나 잘 울리겠어요? 그래서 이곳을 향극랑, ‘나막신 극’자를 써가지고 ‘나막신이 울리는 복도’다. 오왕 부차의 마음을 흔들 정도의 춤이 어떠했을까?”
절하산 아랫마을, 절하촌에 살았던 서시는 어릴 적 줄 곧 강가에 나가 비단을 빨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강변 마을에는 왕희지가 썼다고 전하는 ‘비단 빨던 곳’이라는 뜻의 ‘완사(浣紗)’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서시가 비단 빨던 강가에선 이젠 이 시대의 여인들이 힘차게 삶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아! 완강은 유유히 흘러가고 절세가인 서시도 가버렸고, 그래도 저에게는 비장의 무기(부채)가 있습니다. 이게 중국의 4대 미인을 모아논 거예요. 여기 서시, 한나라 때 왕소군, 그리고 여포가 사랑했던 여인 초선, 그리고 당 현종의 양귀비. 이 네 명입니다.
그런데 이 절세의 가인들도 다 결점이 있답니다. 그게 재밌어요. 서시는 발이 너무 컸답니다. 발이가 작아야 예쁜데 발이 커가지고 그걸 가릴려고 나막신도 신고 긴 치마도 입었다고 그러고. ‘왕소군은 어깨가 너무 좁았다.’네요. 그래서 소를 항상 두루는 것으로 자신을 보완했고, 초선은 귀가 못생겼데요. 귓불이 없어가지고 이것을 보완하려고 귀걸이 큰 것을 박았다고 하고, 양귀비는 몸집이 있었는데, 양귀비는 암내가 많이 났데요. 그래가지고 자주 온천궁에 갔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미인들도 다 좋은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제 소흥을 떠나며 시 한 수를 남깁니다.
소흥을 이별하고 황산으로 가며(辭紹興之黃山) -김성곤-
술 석 잔으로 감호를 이별하고 황혼 만리 황산을 향하네 다정한 가을달 타향의 꿈을 비추고 황홀이 돌아가는 배는 구름 바다로 드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