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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중적 상반된 말씀의 그 원인이 무엇인가
<요3: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위의 말씀은 기독인들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임향한
일편단심가와 같다. 이천년전 초림 예수님이 흘려주신 육체의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의 죄가 말끔히 씻음받았기 때문에
그분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당장에 구원받아서 살아서는 온갖 축복을 받고
죽어서는 그 영혼이 저 하늘에 올라가 영생복락을 누린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피공로를 믿기만 하면 현생에서도 온갖 재난과 환난에서
구함받고 내생에서는 저 천상천국에 올라가서
황금면류관을 쓰고, 황금궁에 살며, 황금길에서 황금나무열매 따먹고,
황금종 울리며 영생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신자는 일호의
의심도 없이 누구보다 용감하였다.
믿기만 하면!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게 될 두 행악자 중에
하나가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음을 보일 때 즉석에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는 극단적인 예 하나를 들었을 뿐, 예수님은 수없이 예수님의 육체의
피 흘림이 곧 모든 인류의 죄를 씻어 구원으로 직행시키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개념으로 말씀해 주셨고
우리는 지난 이천년 동안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추수철을 맞아
하나님의 곡간에 들여지는 알곡이 되기 위해 아주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즉 예수님은 과연 그렇게 기쁨의 구원일색의 긍정적인 말씀만 하셨는가를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냉정히 검토해 볼 때
예수님은 반드시 긍정적인 말씀과 부정적인 말씀, 이렇게 이중적으로
상반된 말씀을 해주셨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첫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화평과 구원이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그 반대로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주러온 게 아니고 칼을 주러 왔다] 고 하셨다.
둘째.
예수님은 연민의 눈물을 흘리시며 온갖 병든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치유사역을 하셨는가 하면, 그 반대로
[마7:21,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라고 하셨다.
셋째.
예수님이
[막4: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제자들)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라고 하셨는가 하면, 그 반대로
[요16:12,13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제자들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라고 하셨다.
넷째.
[요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그 반대로
[요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라고 하셨다.
다섯째.
끝으로 예수님은 “예” 와 “아니오” 를 분명히 하라고 하셨다.
이는 위의 첫째, 둘째, 셋째, 넷째에서 예를 들었듯이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긍정적인 “예” 부분도 있고, 그것을 다시 뒤엎는 부정적인
“아니오” 부분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예수님의 이중적 상반된 말씀 중에서
오직 “예” 라고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전자의 말씀만을 뜨겁게 용납하고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는 부정적인 후자의 말씀은 아주 무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예수님은 긍정적인 말씀과 부정적인 말씀, 이렇게 이중적 상반된
말씀을 하시고 왜 우리는 그 둘 중에서 예수님의 부정적인 말씀은
짓뭉개 내동댕이 쳐버리고 긍정적인 말씀만을 뜨겁게 달구워진
가슴으로 받아드리고 있는가 이다.
즉 이성의 내 양심은 쓰레기 통에 내버리고 인간의 탐욕과 정욕으로
알박아 있는 달콤한 선악과의 감성만을 앞세우고 있는가 이다.
예수님은 이쪽과 저쪽을 다 함께 살피시는 이성(理性)이셨고
우리는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탐욕과 정욕의 감성만의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도대체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가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가? 그 차이는 오로지 성경의 키워드인 “선악과” 로
말미암은 것이다.
선악과는 저 육천년전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만을 빌려서 오늘의 우리들의 실상을 미리
기록한 것이 에덴동산의 사건이기 때문에 성경은 예언이라고 했던
것이고, 따라서 선악과는 바로 실상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은 기성교단 사람들이 따먹은 것이 된다.
이렇게 선악과의 범법자는 바로 기성교단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최초로
따 먹었고, 그들이 따 먹은 선악과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이천년 동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과란 예수님을 믿는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아버린 “선” 이요,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내 이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악” 이다
라고 하는 성급한 선악간의 구별심이다.
이 같은 성급하고 달콤한 선악과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기성교단은 예수님이 주신 이중적 상반된 말씀 중에서
“예” 라고 하는 구원의 긍정적인 말씀만을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예” 라고 하는 구원의 긍정적인 말씀만을 받아드리고
성급하게 평안하다 안전하다를 외치고 안주하고 있으면
그것은 교만하게 먼저 되어버리는 쭉정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수님의 긍정적인 말씀이 되는 “예” 와
예수님의 부정적인 말씀이 되는 “아니오” 를 함께 아우러
유기체적으로 깊이 있게 한 논리로 찾아내면 그것은 겸손하게
나중 되는 알곡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나중 된자 먼저 되고, 먼저 된자 나중 되리라 하셨다.
겸손히 나중되어 먼저 되면 그것은 오늘날 알곡이 되는 첫 열매요,
왕과 제사장반열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천년통치자들이
된다는 뜻이다.
반면, 교만하게 먼저 되어 나중되면 그것은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천년통치를 통해 영적 교육을 필한 후에 받게 되는
둘째 열매의 대상일 뿐이요, 영원히 통치를 받는 허다한 백성신분의
대상일 뿐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복창을 해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또 다시 반복하지만
이 같은 선악과 범법은 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했는데, 이는 곧 실상인 우리시대의 초림 예수님과 그의
복음백성(기성교단)에 대한 기록을 미리 해놓은 것이므로 성경은
“예언” 이라고 했던 것이다.
초림 예수님의 예표는 아담이고, 그의 아내 하와는 초림주의 복음을
받은 기성교단이 된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득의만만해 하고 기고만장했던 자는 누구인가?
즉 선악구별심의 선악과를 범한 자는 누구인가?(아담이 아니고 하와였다.)
아담은 예수님을 예표한 자로서, 그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범할 수 없었다. 철부지 하와가 기성교단의 목회자와 신도들 전체를
예표하는 자로서, 그녀가 범했다.
그리고 하와는 자신이 범한 선악과를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고,
아담은 아무 말없이 받아 먹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첫아담)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셨는데 사람들(하와)은
그 독생자로부터 당장에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원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 그렇지 않는가? 이것이 곧 성급한 탐욕의 선악과인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아담)은 그분의 공생애 첫 시작을 개막하실 때,
탐욕의 선악과를 도무지 범하지 아니하셨다. 그것은 그분이 구원이
아직 없는 유대당의 세례 요한에게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이
그 점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이 높으신가? 구약의 마지막 주자 세례요한이 높은가?
당연히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라고 의아해 했으며, 이때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라고 하셨고 이에 요한이 허락했다고 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예수님이 낮은자 요한에게 가서 물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도무지 선악과를 범하지 아니했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이 구원주가 아니라 종의 아들로 오셨음을 뜻한다.
예수님이 초림 때는 종의 아들(율법주)로 오시고 재림 때는
구원주(하나님)로 오신다. 우리들의 예표인 구약의 성전도 그와 같다.
처음 성소는 구원이 없는 율법의 성소요, 나중 성소가 지성소로서
그 지성소에만 구원의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림 때에 벌써 구원주로
오셨다고 믿고 싶어하는 선악과를 범하고 만다. 초림 때 이미 구원을
다 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복음전파의 수퍼스타 바울은
초림 예수님이야말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오신 분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복음은 전하지 말라고 못박아 버렸다.
오로지 초림주 때 이미 구원을 끝장내어 만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급하게 먼저 되어버리는 선악과의 달콤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즉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재림 때까지 도무지 기다리지 못하고
초림 때 이미 구원으로 규정하고 싶어했고 구원으로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만일 이미 초림 때 구원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했을 것이며 천국복음도 땅끝까지 전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점을 아주 잘 아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초림 때 이미 구원이 아니라고 실토하신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질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임을 명백히 알고 계셨다.
때문에 그들이 따 먹고 준 선악과를 말없이 받아먹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니, 이것이 예수께서 자신을 일컬어 구원주로 말씀하실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 “예” 라고 할 수 있는 구원주로 표현하셨으니
그 절체절명의 구원의 표현인즉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 것이다.
이 같은 다 이루심은 양 성소 사이에 둘러쳐진 휘장을 찢어냄으로
말미암아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되지만 아직 지성소
자체는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 마음 속에서는 그 이루심이
율법성소를 다 이루심이 된다. 결코 구원성소의 다 이루심이 아니다.
그러나 선악과로 배불러 있는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는 표면적 이루심은
구원의 지성소를 이루심으로 나타나게 될것이므로, 이야말로 한가지 말로
이쪽과 저쪽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이중적 상반된 말씀이 됨을
그 누가 깨달을 수 있으랴.
그리고 예수님은 다른 한편으로는 위에서 예를 들었듯이, 직설적으로
초림 때 행했던 모든 구원과 성령의 역사를 완전히 뒤엎어서 “아니요” 로
부정하는 일대 전환의 말씀을 수없이 남기셨음을 알아야 한다.
위에서 너댓가지 예를 들었을 뿐이지만 그 외에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중에서 독자들은 예수님이 초림 때 이미 구원주로 오시지
않았음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제가 올리고 있는 이 글 전반에 걸쳐서도 행간마다 모두
예수님이 이중적 상반된 말씀을 피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될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었으되 주도적으로 따 먹지 아니하셨음을 밝히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니
이것이 예수께서 이중적 상반된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이 된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이 원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구원주로
말씀하셨을 뿐이다. 즉 아담은 하와가 따 먹고 준 선악과를 할 수
없이 받아먹었을 뿐이다.
하와라고 하는 복음백성들의 간절한 선악과를 용납해 주셔야만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고 오늘날 다시 오셔서 그 모든 전후사정을
밝히시게 됨과 동시에 따 먹은 선악과를 토해내게 하시고, 대신 임으로
먹으라고 하신 동산각종나무 열매를 친히 따 먹여 주심으로써
마침내 순전한 순종으로 율법을 완성시켜서 생명나무열매로
인도하시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세계화시키기 위해 선악과를 묵인하셨는가 하면,
반대로 그 선악과를 엄히 치시는 이중적 상반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이미 구원주로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반대로 구원의 천국은 나중에 재림 때 올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니,
이것이 예수께서
불가피하게 이중적 상반된 말씀을 하신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 중 예수님의 이중적 상반된 말씀을 아우러 한 논리로,
유기체적으로, 복합적으로, 입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나오겠는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이 금하신 달콤한 선악과에만 취해서 초림 때
“이미 구원을 다 받았다! 모든 죄를 다 사함받았다! 예수천당! ” 을 외치며
(예수께서 경고하셨듯이)
기성교단의 머릿수 많은 멸망의 넓은 길, 평탄한 길만을 달려가고 있다.
양심에 호리의 가책도 없이 예수님이 상반된 말씀 중에 외눈박이로
한쪽 달콤한 선악과의 말씀에만 묻지마 투자와 투신을 하고 있다.
하긴 주도적 선악과 범법의 장본인이 기성교단(하와)임에 어찌하랴.
그 중에서 특히 젖먹이는 자, 아이밴 자들에게 화가 있겠다고 하셨으니,
즉 한쪽 달콤한 선악과로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사랑, 사랑,
사랑노래와 축복, 축복, 축복의 달콤한 꼴만 먹이며 양떼들을
기르고 있는 목자들에게 화가 있겠다고 하셨으니,
그들의 완고함과 무지함을 어찌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