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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오도산에서 보았던 두무산의 굽이치는 산줄기를 오늘에사 기어코 답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마음의 하계단합대회와 맞물려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니까 날머리인 수포대계곡을 먼저 입력시켜놓고 흠모하였던 두무산을 넣어 산길을 구성한 셈.
그러한 산길에서 한마음산악회가 일정한 시간을 갖고 단합대회를 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궂은 일기로 인하여 진행하는데 애를 먹는다.
두무산(頭霧山)은 수도지맥상에 위치하고 있으며,밑에서 봤을 때 늘 안개에 묻혀있어 두무산이라하고,또 정상일대가 두루뭉실하다고 두문산으로도 불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두모산(豆毛山)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수도지맥은 백두대간 대덕산(大德山 1,290.9m) 삼도봉(초점산)에서 남동쪽으로 가지를 친 도상거리 105.8km의 지맥.
산제치에서 오르는 두무산의 산길은 골프장 옆길을 오르더니 급기야 너덜을 만나면서 고난이도의 고도를 치고 오른다.
너덜강에 사람을 풀어 놓으면 ‘백인백색(百人百色)’, 뿔뿔이 다른길로 걷게된다.
거기다 춤추는 돌덩이를 만난다면 긴장감은 극도로 치솟는다.
꾸루루하며 낙석(落石)이 쏟아지더니 난석(亂石) 광석(狂石)이 되어 수십미터 석무(石舞)를하며 나뒹군다.
이 수포대를 품은 오도산을 처음엔 자라와 관련지어 오대산으로 불렀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수제자이자 동방오현으로 불리는 일두 정여창과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이 수포대에서 5년간이나 강학한 곳이기도 하다.
두 거목들의 영향으로 산이름은 ‘오도’(吾道)로 바뀌고 마을 이름도 ‘대학동’(大學洞)이라 하였다.
수포대 입구에 있는 모현정(慕賢亭)은 1898년(광무 2) 김굉필,정여창,최숙향 3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평촌공의 후손과 유림들이 건립하였다.
아주 오래 전의 국제신문 '근교산'의 개념도
수도지맥 5,6구간 (산제치~노태산)
수도지맥 전 구간
가조Ic가 가까워지면서 좌측 창밖으로 미녀봉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우측 머리부분 이목구비에서 좌측으로 가슴,또 임신한 듯 불룩한 배의 모습이다.
좌측 미녀의 무릎뒤로 오도산의 시설물도 뽕긋 보인다.
네비엔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도리 산82-9'를 입력하여 '산제치'에 버스를 댄다.이 고개를 넘으면 합천군 가야면이다.
산제치 고개마루엔 두무산이라 적힌 외팔이 이정표가 우측으로 팔을 벌리고 섰다.
비가 온다는 예보대로 가는 빗방울이 내리고 있다. 우리는 대강의 산행채비를 갖추고 산길로 접어드는데,초입의 산길엔 웃자란 풀숲이 비에 젖어있다.
돌아본 합천 방향으로 '아델스코트CC'골프장 안내판이 보인다..
처음엔 소나무 숲길의 산길을 감아돌며...
훼손된 무덤을 만나고...
돌아보니 비계산이 우뚝한 모습으로 시야를 가로 막는다.
좌측으론 골프장 부지인 듯 풀들이 가을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고,너머론 비계산이 우뚝 섰다. 아직까지 길은 평이한 산길.
그러더니 이윽고 소문으로만 듣던 너덜길을 만난다.
살아 꿈틀거리는 너덜을 밟고 조심조심 고도를 높혀가다...
선답자의 표식기도 전무하여 우리는 좌측 작은 지곡으로 방향을 틀고...
다시 좌측 작은 지능으로 올라 붙었는데, 정답은 없어 뵌다. 결국 우리는 봉사 코끼리 코 만지듯 좌로 두 번 지능으로 갈아탔다.
등로를 따라 밧줄이라도 걸어 준다면 훨신 수월하겠는데...
발길이 없는 너덜지대에 함초롬이 비를 맞고 달린 산사과(아가위)를 발견하고...
가까이 카메라를 갖다댄다.
이후에도 낙석이 난무하는 험한 너덜길이 한동안 이어지더니 너덜길이 끝나면서 능선에 올라선다.
올라선 능선은 바로 두무산 고스락의 바로 아래 지점. 바위 전망대에 올라섰다.
먼저 도착한 미옥씨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두무산의 氣를 한껏 들어마시고 있고 저쪽 구름바다 건너엔 비계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비계산에서 본다면 두무산의 모습도 이러할까?
멀리 고령쪽으론 미숭산의 자태도 드러난다.
만대산 방향의 운해(雲海)-구름바다- 산노래 한 자락을 웅얼거린다.
"다시 보면 나를 향해 밀리는 파도와도 같아~♬
어렵사리 발품을 팔아 올라선 두무산 고스락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를 다 누리는 듯하다.
쉬이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정상에선 앞서간 일행들이 불러서 난리다. 추우니까 빨리 정상에서 인증을 하고 떠나겠단다.
"그래도 가만 기다리시오."
"나 이곳에서 잠깐이나마 신선놀음을 해야겠단 말이오.알겠소?"
아마도 저긴 신선들의 영역이 분명할 터.
운 해(雲 海)
이리 보아도 산이요,저리 보아도 또 산이네.
구름 뚫고 솟은 이곳에서 저기 아래를 굽어보면
저 산들은 구름에 묻혀 바다에 뜬 섬 같고
다시 내려보면 나를 향해
밀리는 파도와도 같아.
세상일 다 잊어버리고 나 그안에 취해보면
아~이몸은 정령 세월속의
작은 한 자락 바람이라~♪ ♬
<김정환 작사,작곡>
철도 없는 나물을 채취한 일행이 긴가민가하며 내미는 곰취. 옥분씨가 곰취나물이 맞단다.
기어코 정상에서 선두팀과 조우를 하여 기념사진.
다시...
나도 함 얼굴을 내밀고...
빗물을 머금은 채 신록으로 물든 두무산 정상.
정상아래의 이정표(이제 오도산 방향으로 산길을 잡는다.)
조금 진행하다 만난...
'두무산 신선 통시'. 통시는 경상도 버전의 변소(재래식 화장실)를 말한다.
이기 뭐꼬?
고롷게 통시에 앉아 미처 볼일을 보기도 전에 옥분씨가 "내가 더 급해."하며 빨리 일어나라고 한다.
그러더니 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끙끙~~
애먼 내까지 갑자기 뒤가 마려워서 원...(통시의 어른 발판 아래엔 아이들 발판이 또 있다)
이렇게해서 본의아니게 두 줌마에게 응가를 누이기까지 했다는 이야기.ㅋㅋ
합천군 묘산면 산제리 갈림길을 지나...
산제갈림길 이정표의 다른 각도
또 만난 이정표
두산지음재 조금 못미쳐서 수포대(2.5km) 길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 길은 험한 길이 예상돼 나무 막대로 휀스를 쳐놓고 패스다.
다른 각도로 자세히...
잘록한 '두산지음재'다. 두산지음재(해발 680m정도)에서도 계곡으로 내려서는 십자로가 잡목에 가려져 있다.
이제 여기에서 부터 오도산갈림길까지는 고도를 100여m 치고 올라야만 한다. 그래서 능선을 따라 수포대로 내려서는 길이 오히려 수월하므로...
15분 만에 오도산갈림길에 올라섰다.
오도산갈림길(해발 약 780m)의 이정표
마사토로 이루어진 하산 능선길 좌측으로 잘록한 오도재와 그 뒤 미녀봉의 파수꾼인 869봉이 솟아 있다.
특이한 모양의 석주가 있어 비석을 살펴보니...
"지와처사(旨窩處士) 곡강최공지묘" 곡강 최씨(曲江崔氏)는 흥해최씨(興海崔氏)와 동원분파(同源分派)이다
원추리를 만나면서...
비포장 임도에 내려선다.(돌아서서 본 내려온 길)
맞은 편엔 관리가 잘된 쌍묘가 있고...
올려다 보면 좌측 우리가 내려온 능선엔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있다.
두무산 갈림길에 닿았다. 우리는 처음에 좌측 두무산 방향으로 올라 원점회귀하려 하였지만 길이 거칠듯하여 포기하고 말았다.
이 지점의 이정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갖고 있는 계곡.
미녀봉 방향 계곡을 건너가면 오도재로 오르는 길.
이정표를 자세히...
이 이정표가 있는 계곡 내리반석에 각자가 새겨져 있다.
모현정 건립당시 수포대 바위에 새겼다는 '훤두양선생장구지소(暄蠹兩先生杖屨之所)'와 '평촌최공강마지지( 坪村崔公講磨之地)' '수포대(水瀑臺)' 라는 글씨는
내리반석에 먹갈고 글 쓰면서 양현(兩賢)의 열강에 감흥하는 유생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훤두양선생장구지소(暄蠹兩先生杖屨之所)'와 '평촌최공강마지지( 坪村崔公講磨之地)'
훤두(暄蠹)는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선생과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양 선생을 말하고,평촌 최공(坪村 崔公)은 평촌공 최숙량(坪村公 崔淑梁)선생을 말한다.
두 분 선생이 지팡이 짚고 짚신 끌며 주유(周遊)한 곳이기도 하고,평촌공 최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라는 뜻.
옥편을 찾아보니 수포대(水瀑臺)의 '포(瀑)'자는 '폭포 폭', '소나기 포 또는 폭포 포', '용솟음칠 팍'으로도 읽힌다고 한다.
이일협(李逸協), 1750年(英祖26)~1808年(純祖8) 이와선생문집(螭窩先生文集(螭窩集)
굳게 잠긴 모현정(慕賢亭)
무오갑자사화(戊午甲子士禍)의 피화(被禍)로 평촌공이 참혹하게 세상을 떠난후 중종반정으로 1517년 중종12년에 신원(伸寃)되었고 증직(贈職)되었다.
평촌공이 가신지 500년간 이 땅 이 고을에서는 상현(像賢) 숭덕(崇德)의 정신은 끊이지 않아 1898년 광무2년에 도향(道鄕=30고을, 약 1,000명) 사림(士林)의 정성을 담아 모현정(慕賢亭)을 창건 하였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6호인 모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형식의 정자 건물로 평면은 우물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으로 구성한 겹처마. <경남 거창군 가조면 도리 58>
누각형식을 채택하면서도 짧은 누하주를 사용하며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입면형식을 유지토록 한 수법이나 튼실한 부재를 사용하면서도 간결, 소박한 가구기법 등
조선후기 건축의 양식과 기법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다.
모현정 옆에는 평촌공 최숙량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세운 오도제(吾道齊)라는 제실이 세워져있다.
조선 건국 이후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으로 유학을 장려하고 선비들을 우대하였다.
선비들(사림파)은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기득권층인 훈구파들의 반대에 부딪혀 매번 실패하고 끝내 네 번의 사화(史禍)로
참화(
마침내 선조대에 와서야 사림파들이 집권을 하면서 억울하게 죽은 선비들을 신원 복원하고 유림에서 조선사람의 표상이 될 수 있는 명현을 문묘종사를 공론화,집중적인
논의를 거치면서 하나의 국론으로 통일되다시피 하여 성사되었다.
그 해 광해군은 남명 조식 선생이 동방오현에 포함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후 종사되는 인물의 사상은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동방오현(東方五賢: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은 문묘에 배향(성균관 대성전에 공자의 위패와 함께 오현의 위패를 모심)되어 추앙된다.
오도제(吾道齊) 현판
수포대 강학을 통하여 변화된 것이 그 첫째가 산과 마을의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오두산(烏頭山)이 오도산(吾道山) 즉 우리들에게 인간의 도리를 깨우친 산이란 뜻으로 바뀌었고 마을 이름도 원래는 도동, 산제동이였으나 도를 깨우친 마을이라는 뜻의 도산당(道山堂)으로 지금의 대학촌과 같은 뜻의 대학동(大學洞)으로 바뀌었다.
모현정 앞마당에 댕그러니 있는 지동암(志同巖)의 각자(刻字)는 바위 좌측에 새겨져 있다.
양현을 수포대로 모신 분은 평촌공 최숙량(坪村公 崔淑梁)선생이다. : 1456(세조2) ~ 1515년 (중종 10)
최숙량은 젊은 시절 밀양에서 살면서 김종직의 문하생인 김굉필, 정여창과 형제와 같은 사이였다.
특히 김굉필과 최숙량은 동서지간이 되었다.
이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고, 최숙량은 아버지 최계동이 합천군수가 되면서 밀양에서 거창군 가조면 평촌(들마)에 이주하여 거창 입향조가 된다. (1494년 : 성종 25)
최숙량이 수포대에 강학터를 마련하여 합천 야로의 처가에 거주하고 있던 김굉필과 안의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정여창을 불러들이니
친구이며 동기인 세 어른이 수포대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소문을 듣고 몰려드는 인근 유생들에게 학문을 강마하고 당시의 신문학인 성리학을 무려 5년 동안이나(1494년 ~ 1498년 : 연산군 초)강론하였다.
동방오현으로 불리며 인품이 고매한 현인이였지만 갑자사화로 인하여 김굉필은 극형에 처해졌고,이미 죽은 정여창은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절대권력의 칼날에 허망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작금의 정치판과 하나도 다른 게 없다.
한훤당 김굉필 : 1454년(단종 2) ~ 1504년(연산군 10)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일두 정여창 : 1450년(세종 32년) ~ 1504년(연산군 10)
본관은 하동이며, 함양 지곡면 개평에서 출생, 27세에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과 동문수학하고 조선 전기 성리학의 태두로서 빛나는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45세에(1494년 : 성종 25) 외직을 자원하여 안의현감으로 부임 왕도정치(위민정치)를 실현하였다.
49세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으로 귀양하였으며 55세에 유배지에서 서거하였다.
<펌> 지동암(志同巖)
모현정 전면에 앉은 지동암은 '실천을 통해 도학의 정신을 드러내고자' 한 3인의 '한결같은 의지'를 나타내는 바위다.
유학을 강론하고 음풍명월을 하던 그 자리는 때마침 내리는 빗줄기로 찾는 이 없어 스산해 보이기까지 하다.
우리 차는 모현정에서 불과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양지마을 정자있는 곳에서 터전을 마련하였다.
대형버스가 주차가능하고,U턴이 자유롭다.
양지촌경로당의 모습
마을 앞 보호수 아래에 비닐 차양을 둘러치고 옹기종기 둘러 앉았다.
식당의 장소만 빌리는데 25만원이라 하니(10만원이면 딱 알맞은 가격) 너무 비싸다. 하여튼 겨울철이 아니어서 이만한 곳도 나름 아늑하다.
갖은 약초를 넣어 특별히 삶은 돼지고기 수육. 점심을 먹지 않은 탓도 있지만 고기맛이 일품이다.
우리가 내려온 수포대계곡 방향으로 구름이 잔뜩 묻어 있고...
보호수 아래의 우리 흔적도 말끔이 치워져 있다.
오후 세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귀갓길에 오른다.
가고 싶을 때 가고
쉬고 싶을 때 쉰다
바람을 앞세우기도 하고
어렵게 떠났다가 쉽게 돌아오기도 한다.
수많은 갈래가 겹쳤거나
흩어져 있지만
만나고 싶은 곳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싶은 곳에서 헤어진다
아무리 시끄러운 세상을 가더라도
길은 절대로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만이 길에서
길을 찾아 헤맬 뿐이다
-정규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