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발, 황등행 열차는 20시에 떠나네.(제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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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아침, 서울대학 병원, 명수의 입원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환자의 현재 상태는 전도성 언어상실증 (Conduction Aphasia) 으로 보여지는군요. 이것의 원인은 활모양다발(Arcuate Fasciculus)의 손상으로 인해서 오는 것인데 감각 영역과 운동영역이 모두 정상이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남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모두 가능하지만 남이 묻는 말에 대해서는 동문서답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정신성 기억상실증(Psychogenic Amnesia)'증세도 있어요. 이것은 심리적 원인에 의해서 오는 기억상실증인데요. 즉, 심한 스트레스나 내부적 갈등 후에 오게 되거든요. 그러나 예후는 좋아서 기억은 되찾게 됩니다만 아주 오래 전에 겪은 것은 기억을 못하게 되지요."
이상은, 명수의 입원실에 아침 회진 차 들린, 주치의의 소견이었다.
"정말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거쥬?" 박명수의 아내가 울먹이며 물었다. 그녀와 선옥, 민호 그리고 그 가족들 전부도 영수의 연락을 받고 이른 새벽에 웅포를 출발하여 서울대학 병원에 도착한 것이다.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의사는 그렇게 답하고 명수의 입원실에서 나갔다. 선옥은 엄마를 끌어안으며,
"됐어, 엄마, 천만다행이야, 엄마나 나나 이럴수록 강하고 침착해야돼 알겠지!? 엄마, 우리 집 재산이 다 날아간다 해도 우리에겐 아빠만 계서 주면 돼, 아빠가 지금 보다 더 못한 식물인간 상태라도 좋아, 그냥 숨만 쉬고 계신다 해도 우린 아빠가 절대적으로 계셔야 돼, 엄마 울지마..." 하면서 엄마의 얼굴을 티슈로 닦아주었다. 민호도 눈가를 찍으며 선옥의 등을 다독거렸다.
"그려, 선옥아, 고맙다. 우리에겐 내 남편과 느아빠만 있으면 된다. 아빠가 누어서 사람구실을 허건 못허건 아빠가 그 자리만 지켜주시면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응게, 나나 선옥이 느네도 강허게 버텨나가야 헌다. 알겄지, 그라고 인자서부턴 나도 선옥이 느네도 우는 일이 없도록 허자. 잉~" 이때,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영수야, 대체 이게 뭔 일이 다냐? 속시언허게 말좀 혀봐라 잉~ 하이고, 답답혀 죽겄다."하고 묻는 이는 큰형 민수였다. 또 기수는,
"어떤 씨부랄 놈의 새끼들이 우리 집안을 뭘로 보고... 어이구 정말..." 하면서 울부짖었다.
"큰형님, 그리고 기수형,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 입으로는 차마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영수는 눈물을 훔치며 답했다.
이때, 남승희가, 영수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선배님, 저와 밖에 나가서 잠깐 이야기 좀 하시지요." 영수는 말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병원광장의 그늘 진 벤치에 앉아, 사후 대책을 논의했다.
"선배님, 제가 이미 말씀 드렸지만 그자들은 형님을 생물학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상태로 만들어 놓겠다는 의도가 확실합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에게도 그 여파가 미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선 그자들이 바라는 데로 따라 줘야합니다."
"!?그렇다면, 그 자들이 뭘 또 노린단 말인가? 정말 두렵군." 영수는 놀람 반, 체념 반으로 물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구체적으로 알아볼게요, 저 역시 두렵습니다. 헌데, 닥칠 불행은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마음의 준비를 하지요."
"모든 게 다 날아가도 좋아, 웅포 형님의 집도 그들이 탐을 낸다면 줄 용의가 있다고, 다만 형님의 생명과 우리 가족들의 평화만 지켜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영수는 애간장을 태웠다.
"그 집에 대해 선배님이 먼저 말씀을 꺼내시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그 집이 워낙 경관이 좋다보니 코드원 주변인간들 중에 군침을 삼키는 자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유비손의 친척이 하는 기업에서 유비손에게 은근히 손을 좀 써줄 것을 바라는 눈치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쪽에서 여러 번 그 집을 매수할 뜻을 비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렇다면, 매수해 가라고 그래!" 영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생돈 주고 사갈 그자들이 아니지요."
영수는 긴 한숨을 쉬며,
"그렇다면, 그것도 헌납형식을 취해 야 하나?"자포자기 식으로 물었다.
"물론 그래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 재산은 어디로 들어가는 거야? 김지태의 재산처럼 5,16장학회(지금의 정수장학회)로 들어가나?"
"아닙니다. 그 작자들이 또 뭔 장학회를 따로 설립하겠지요. 어제 헌납절차를 취해준 '황등석재'역시 그 장학회로 들어 갈 것입니다."
"도둑놈의 새끼들...남의 재산 강탈해서 장학회를 만들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말이 좋아 장학회지, 자산을 출자한 명수형님의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정관을 꾸며 주무관청의 허가를 받는 요식 행위를 거친 다음, 운영진도 저희들 마음대로 구성할 것이고... 실제론 그자들 끼리끼리의 사유재산이 되고 마는 거지요. 아마, 웅포의 형님 집은 형식적으론 설립할 재단이름으로 귀속되겠지만 주로 그 기업의 연수원 부지로 사용 할 모양입니다."
"도척(盜蹠)이 같은 놈들!" 영수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어떻게 합니까? 이런 나라에 태어나 살고 있다는 것이 그 죄지요." 남승희 역시 한을 토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