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김태완
운명에 대하여 외
-오르한 파묵을 생각하며
결국엔 먼지와 연기로 사라져버릴 이야기였다
책에서 모래바람이 짝짓기하고 쌍봉낙타가 긴 주문 외웠다 무시무시한 표정에 담긴 생각 금방 알아맞히고선 매질 당하지 않으려 벌벌 떠는 사막의 개 그림자 보여주었다 때로 번쩍번쩍하는 반달칼에 베어진 달무리가 서녘의 겉장을 물들였다
하녀의 그림자로 술잔 채우던 손, 죽은 말더듬이 노예의 머리 쓰다듬던 손, 돈으로 매수하며 방아쇠 당기던 더러운, 한 번도 씻지 않은 손이, 손가락이 얼룩덜룩 책갈피에 묻어 있었다 책장을 넘기면 검은 개 그림자가 뛰어다녔다
책 표사表辭 열고 악마가 반쯤 몸을 드러냈다 욕망 뒤에 숨은 한밤의 사막이 별안간 꺼지고 술탄의 묘 뒤지던 도굴범이 벼락 맞을 운명을 각오했다 할례 마친 모래알이 떠돌이처럼 피어나는 황홀경에 빠졌다
아랍의 두음頭音으로 기록한 <신은 모든 것을 아시니> 장을 펼치자 달나라 토끼의 붉은 눈이 부릅떠 있었다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고 루게릭병病 모양의 운무가 피어올랐다 어디선가 칠극七克을 대역한 복화술사의 고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르한 파묵(Orhan Pamuk, 1952~)은 터키 출신의 노벨 문학상(2006년) 수상 작가. 국내 번역된 작품으로 《검은 책》, 《내 이름을 빨강》 등이 있다.
*《칠극》은 1614년 스페인 선교사 판토하(Diego de Pantoja, 1571~1618), 중국명 방적아(龐迪我)가 북경에서 한문으로 펴낸 천주교 교양서다. 원제는 ‘DE SEPTEM VICTORIIS’. 인간의 삶을 에워싼 일곱가지 죄종(罪宗)에 맞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처방을 담았다는 뜻이다. 천주교 교리에서 일곱 죄종은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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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阿Q 일기 1
-詩作노트
금쪽 같은 말을 하자면
이건 순 사기다!
속옷에다 똥 싸는 일 빼고
자기가 싼 똥인 줄 모르고 덥석 뜯어먹거나
감명 없는 긴 혀로 꾸며대는
뒷다리 들어 귀 뒤 긁을 기세인 너
그래, 너! 지붕 없는 모자 눌러쓴 너
진드기 벼룩조차 품지 못한 시들시들한 시詩처럼
영구적으로 손상된 타자기 앞에 선 민머리 몽상가
고린내 나는 해진 신발 같은 조롱
예사로이 깁고 덧댄 누더기 디테일
꼬리밖에 까딱거릴 게 없는 무한 긍정으로
그래, 미래 없는 시쓰기에 매달렸다구
최소한 집으로 전화라도 걸어줬다면
저 아집의 넓적다리 물고 있지 않았을 텐데
머릿속엔 물결무늬 주랑과 기둥 같은 게 마구잡이로 서 있고
마개 없는 향수처럼 달아나는 쇠잔한 상상력의 꽁무니 쫓아
울며불며 젖은 소매로 달려가다 넘어지는데
고백하자면 난 아직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지 않았지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
저놈들이 내 머리털 벗기겠다 싸우지도 않잖아
바락바락 악 쓰는 반전의 몽상이 필요한
눈 뒤집고 이 부들부들 갈면서
옳거니, 기도는 왈왈 짖어대는 기도여야 하는데…
김태완
1970년 대구출생으로 2017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대구일보문학상, 박남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세르반테스의 기막힌 연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