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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사망에 이르는 죄
“회개할수 없는 죄”
본문/요일5:16-17절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우리는 그동안 죄에 대해 대죄와 소죄가 있다는 것을 가톨릭에서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가톨릭에서 그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바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죄를 나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대죄를 살펴보면 우리가 다 배웠겠지만 이 죄를 지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이 죄는 사람의 의지적인 작용으로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대죄는 하나님과 단절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에는 이 죄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죄가 성경에 몇 군데 나와 있습니다.
고전6:9-10절의 죄입니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에베소서5:5절의 죄들입니다.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계시록21:8절의 죄들입니다.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시록22:15절의 죄들입니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왜냐하면 이 구절들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구원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이 죄들을 짓다가 죽으면 지옥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들만 대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를 유괴하거나 인신매매 혹은 장기를 매매하는 것 역시 대죄에 해당 됩니다. 신약성경에는 없지만 구약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21:16절에서
16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조직 폭력에 가담하거나 마약을 밀매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이 구절들에 나오는 것과 대등한 악질적인 죄는 모두 대죄입니다. 이와 반대로 성경에 나오는 가장 대표적인 소죄는 고전3장과 갈5장에 나오는 ”분쟁과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론도 가능합니다. 롬1:28-32절에 보시면 이방인들이 짓는 죄의 목록이 나오는데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여기에서 ”시기와 분쟁“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하셨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대죄로 보아야 하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보시면 32절의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의 ”일“은 복수입니다. 갈라디아서5:19-21절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짓는 죄를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포괄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죄들이 다 사형에 해당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회개의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언제 어느날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고 영원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하루하루 그날 그날의 죄를 정결하게 예수님의 보혈로 씻는 회개의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말씀을 나눌 것은 회개가 불가능한 죄도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연 회개가 불가능한 죄가 있을까요? 성경을 전혀 안읽고 죄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신 분들은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성령 훼방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태12:28-32)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막9:29절)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영국의 청교도 작가이자 목사로, 그의 대표작인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번연은 영국 청교도 운동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요한 인물로서, 그의 저작들은 기독교 문학뿐만 아니라 교회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번연의 생애와 신학, 문학적 기여, 저서, 영성, 교회사적 영향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 1. 생애 존 번연은 1628년 11월 28일 영국 베드퍼드셔 엘스토우에서 가난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 속에서 자라난 번연은 어린 시절부터 노동을 했으며, 군대에도 복무했지만, 이후 기독교 신앙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게 된다. 초기에는 죄와 구원에 대한 깊은 고민 속에서 방황했으나, 결국 그는 성경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 열정적인 신앙인이 되었다. 번연은 1650년대에 독립파(Independents) 교회에 참여하며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공식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깊은 신앙 체험과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으로 설교자로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 외의 예배를 금지하는 법률로 인해 번연은 1660년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12년을 보내면서 그의 대표작인 『천로역정』을 포함한 여러 작품을 집필하게 되었다. 2. 신학 번연의 신학은 청교도적 칼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의 저작과 설교에서 구원, 죄, 은혜, 신앙의 여정에 대한 깊은 통찰을 엿볼 수 있다. 번연의 신학은 성경을 기초로 하여, 구원의 확신과 은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했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설파했다. 번연의 작품들은 신학적 교리를 단순히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신앙의 여정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그의 대표작 『천로역정』은 성경의 구원론적 메시지를 서사 형식으로 풀어낸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내적, 외적 투쟁과 구원의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출처: https://21s9035.tistory.com/11126338 [信士/박인걸:티스토리] |
존 번연은 ”내가 혹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라는 번민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날 자신보다 연세 많은 선배에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자, 그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용서 받지 못하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고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말만 나옵니다. 그 죄에 대한 구체적은 설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 너무나 논의와 각각의 견해가 난무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어 보시겠습니다.
1.고의로 범하는 죄(참고 레4:2,5:1, 민15:30-31, 18:22)
민수기15:27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은 고의로 범하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27 ○만일 한 사람이 부지중에 범죄하면 일 년 된 암염소로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28 제사장은 그 부지중에 범죄한 사람이 부지중에 여호와 앞에 범한 죄를 위하여 속죄하여 그 죄를 속할지니 그리하면 사함을 얻으리라.
29 이스라엘 자손 중 본토 소생이든지 그들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이든지 누구든 부지중에 범죄한 자에 대한 법이 동일하거니와,
30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31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의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어지리라.
위와 같은 구절들을 근거로, ”사망에 이르는 죄“는 고의로 범하는 죄,라고 분류하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는 고의성 없고 부지중에 짓는 죄로 보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모세, 다윗, 바울과 같은 인물도 죄를 지었고 그들이 지은 죄가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견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2.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 라는 가톨릭의 견해입니다.
가톨릭에 의하면 죄를 지난 시간에 나누었지만 소죄와 대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대죄는 회개하지 않으면 즉각 지옥에 떨어진다고, 물론 성경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3.육체적인 죽음의 징계를 받는 죄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망“을 육신의 죽음으로 생각하는 것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이 죄가 실제로 육체적인 죽음이라는 심판을 가져오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나와 삽비라의 죽음(행5:1-11)을 비롯, 고린도전서의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하려고 사탄에게 내어준 부도덕한 사람들과(고전5:5) 성만찬을 범한 죄로 ”잠자는 자“에 대한 언급(고전11:30)을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름 그를듯하지만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성경에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로 명시되어 있는 성령 모독죄와 동일시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것이 좀 전에 소개해 드린 마태 마가와 누가복음서에 나와 있습니다.(마12:31-32, 막3:28-29, 눅12:10)
이 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통점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본문에 나오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데이비드 잭맨)은[요한이 이 문맥에서 성령에 관해 한 마디도 언급하고 잇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견해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죄목만 말하고 그 죄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면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죄를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 경우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성령모독죄가 아니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오히려 사망에 이르는 죄가 바로 성령 훼방죄가 아니겠는가? 라고 봅니다.
성령 모독죄는 진리를 알고도 완고하여 계속 받아들이지 안다가 회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지나치게 그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를 들어 존 놀랜드는 성령 모독죄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모독적인 언사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명백한 구원을 위한 개입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여기서 성령이라는 표현의 사용은 11:20에서의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의 사용과 유사하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행하고 계시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굳게하는 자는 스스로를 하나님께서 종말론 적인 죄 사함을 현재적으로 베푸시는 것에서 배제하도록 만드는 것이 된다.]
하지만 성령모독죄에 대한 성구들을 직접 읽어보시면 이 죄가 성령의 역사를 사탄이나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고 비난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는 것을 봅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데이비드 터너라는 학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를 일반화시키고 이를 불신앙과 동일시하며 또한 마태12:31-32절을 요한3:18절, 16:9절,요일5:16절과 같은 본문들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단순한 불신앙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제압하고 있는 바로 그 귀신 세력들과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을 비난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성령의 사역을 비방한다.(마12:9) 이것이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다. 그런 죄를 오늘날에도 지을 수 있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추정되는 오늘날의 예들은 마태복음 12장에 서술된 상황의 핵심을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해자들은 이 본문을 일반적으로 불신앙에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일에 주의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지만 12:24-32절의 요점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분명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을 말한다기보다는 이러한 메시아적 증거를 귀신적 증거로 묘사하려는 비방을 강조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모독죄는 성령의 역사를 마귀나 귀신의 역사로 매도라고 비난하는 죄로 보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 모독죄에 대한 성구들에서 주님이 계속 ”말“을 강고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12:32절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말“이 등장합니다.
”모독“이라는 것도 ”말“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모독죄는 단순히 복음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범하는 죄입니다. ”말“로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라고 비난하면서 성령을 상대로 짓는 죄가 바로 성령 모독죄입니다.
성령 모독죄는 불신자들이 짓는 것보다 본문에 잘 나타나 있듯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죄를 지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고 유대교의 종교지도층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죄는 오늘날의 믿는 자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많이 해당 되는 죄라고 봅니다.
오늘날 신자라고 자처하고 목회자라고 하는 자들이 이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만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매도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은사 중지론자들과 학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겁도 없이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는 일들이 많이 있지 않겠습니까? 과거 부흥의 시대인 찰스 피니 목사님의 부흥회에서 하버드 대학 출신 목회자들이 떼거지로 나와서 집회를 방해하는 역사를 부흥의 방해사 라는 책에 보시면 나와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이 아니겠습니다. 특별히 그런 사역을 하는 자에게 이단으로 매도하는 이단 사냥꾼들이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겠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매도하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성경을 알고 편협한 교리에 빠져서 과거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은 목사와 영적인 지도자들이 얼마나 이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겠습니까? 이 죄는 불신자들보다 신자들이 목회자들이 더 많이 짓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누가 지어도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본문과 같은 맥락의 말을 하면 그것은 성령모독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죄를 짓는 자가 신자냐 불신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신자도 버림받을 수도 잇고, 또한 구원받은 자들이 지을수 있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성경의 다른 곳에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히6:4-6, 10:26-28)
그러므로 학자들이 불신자로 평가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성령 모독죄를 지었다는 점은 이 죄를 누가 지을 가능성이 있느냐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이 될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목사라고 다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중에 거듭나지 않는 학문만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을 따라 믿고 있을 뿐,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지 않은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사람 보기에는 종교 지도자이지만, 주님이 보실때는 회칠한 담이나 평토장한 무덤 같은 외식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비난할 때, 성령 모독죄를 지은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모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를 회개가 불가능한 성령 모독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성령 모독죄는 누가 짓느냐가 아니라. 죄질의 문제입니다.
성령 모독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로 일종의 사형입니다. 사형을 때릴 때 누가 지은 죄인가로 결정합니까? 아닙니다. 얼마나 죄질이 나쁜가를 보고 결정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할 장도로 악의적이고 악질적으로 비난하고 물어뜯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만 생각하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과 사도들을 박해했습니다. 즉 너무 질이 나쁜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목사들 중에는 이들과 달리 무지해서 비판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고 할 때 성경속에는 수많은 진리들과 사회속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진리들을 다 믿어야 합니다. 100가지 있으면 100가지 다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90가지만 믿고 나머지는 자기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목사도 일반 교인들 중에도 많습니다. 오늘날 좌파 기독교인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 중에 기도도 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은사도 받습니다. 그리고 능력까지도 행할 수 있습니다. 마7:21-이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반기독교이고 반교회적인 공산주의를 옹호합니다. 중국를 지지하고 북한의 고통받는 주민들은 외면하고 김정은 정권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배운 잘못된 교리 때문에 일어납니다. 특별히 장로교단은 은사 중지론자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런 교리에 물든 자들은 방언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은사는 오늘날에는 끝났다 라고 말하고 부정합니다.
그런 자들은 무지해서 성령의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는 것들을 다 부정합니다. 그래서 귀신의 역사라고 말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까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단 사냥꾼들의 행태를 추적해보면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질이 나쁘고 악의적으로 이단으로 매도하는 이단 사냥꾼 목사들이 많습니다. 니고데모가 한 말처럼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실제로 그런데, 그러나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중심적이고 일방적으로 때로는 시기심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악질적으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자들이 기업적으로 거짓 음해하고 돈 뜯어먹는 직업적인 이단 사냥꾼들입니다. 돈주면 풀어주고 돈 안주면 끝까지 이단으로 몰아넣는 짓거리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나 신자나 상관없이 이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중의 하나입니다.
성령님 안녕하십니까? 저자인 베니힌은 성령 모독죄를 다음과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곧 성령 췌방하는 죄에 대하여 많은 토론이 있었고 지금도 토론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관해서 언급하셨을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죙화 훼방은 사하심을 받게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은 이미 성령을 모독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현재 우리가 맞고 있는 부흥 운동에 악의를 품고, 이 부흥이 다름 아니라. 사단의 역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에 아주 가까이 근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천국지옥 간증에 보시면 적지 않은 목사들이 지옥에 있는데 지옥에 간 목사들이 성령 훼방죄를 지은 자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보고 배워서 있는 그대로 받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는 현장에서 함부로 말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네째.히브리서6:4-6절에 나오는 배교입니다.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많은 학자들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는 신자가 짓는 죄로 “사망에 이르는 죄”는 불신자가 짓는 죄로 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신자가 타락하여 그리스도를 떠난 배교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죄는 다시 회개가 불가능한 죄로 필히 멸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죄에 대해 장로교단을 창시하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칼빈은 이렇게 좋은 말을 했습니다.
[이 죄는 하나님의 진리의 영광을 접하고 거기에 대해 모른다고 변명할 수 없는 자리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중심으로 반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죄는 매정하고 적의에 가득찬 반항으로 볼 수가 있다.‘]
말은 잘했는데 완벽한 설명은 못됩니다. 온전한 설명은 예수님께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이 부분을 가르쳐 주신 말씀을 기록한 것을 보시면 정말로 명확하게 설명해줍니다.
[예수님은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를 구원받은 이후의 4가지 경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신자가 그 4가지 경험을 하고도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거절하면 다시는 회개할 수 없으며 지옥에 던져진다] 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에 기록한 회개가 불가능한 죄가 아니겠습니다. 그래서 본문 히6:4-6절의 말씀은 “사망에 이르는 죄”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는 죄의 가장 대표적인 죄라고 봅니다.
다섯째.적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미혹된 죄
지금까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견해를 말씀드리고 있는데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견해중 앞의 네가지는 다 틀린 견해들입니다. 그리고 성령훼방죄와 히6장에 나오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사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표현한 요일5장의 말씀의 문맥과 관계가 없는 주장들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에 근거한 해석이 지금해석즉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미혹된 죄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시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요즈음 이 해석을 주장하는 경향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잘 보시면 적그리스도에게 가르침 받은 미혹된 죄가 과언 사망에 이르는 죄인가를 따져야 합니다. 본문에 보시면 사망에 이르는 죄는 회개가 불가능한 죄입니다. 요일2:18-19절과 히브리서 6:4-6절을 비교해 보시면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빠져 미혹된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일 2장과 히 6장의 말씀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8-19)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사망에 이르는 죄”가 회개가 불가능한 죄일 경우, 이 구 두 구절을 비교해 보시면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미혹된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일 본문의 후반부를 보시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이는 앞의 죄와 다른 죄입니다. 즉 구해도 생명을 주시지 않는 죄입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이유는
“그리하면...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와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즉 앞에 나오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는 구하면 생명을 줄 수가 있고 그래서 구하라고 했고, 뒤에 나오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구해도 생명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구하라 하지 않노라”라고 했습니다. 요일5:18-19절의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말씀 앞에 나오는 14-15절을 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기도 응답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뒤의 16절도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역시 기도의 응답의 내용입니다. 그 후에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기 때문에 구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맥을 보면 그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구하라 하지 않노라. 즉 기도하지 마라고 단정 하지는 안습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기도하면 응답을 바덱 된다고 요일5:14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죄를 범한 인간을 위한 중보기도 중에 권하지 안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에 도달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에 대하여는 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죄는 회개가 불가능한 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기도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게됩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는 죄는 당연히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둘다 사망에 이르게되는데 왜 하나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라고 하고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했을까요?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미혹된 것을 뜻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방금 말했듯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지은 자들도 구하지 않으면 사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앞의 것은 회개가 가능하고 뒤의 것은 회개가 불가능한 죄라고 해석하게 됩니다. 회개가 불가능한 죄....
예수님은 원수와 핍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누가 성도들에게 중보기도 하지 말라고 합니까? 그런데 사랑의 사도인 요한이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해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라고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권하지는 안지만 그러나 실제로 금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구하지 말고 중보기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예레미야7:16절과 11;14절, 14:11-12절에 구하지 말라고 나옵니다.
16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4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1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2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기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범죄한 이 백성들을 위하여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중보기도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는 기도해도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렘7:16, 11:14, 14:12절)
마지막으로 그들을 멸하실 것이라고 합니다.(렘14:12)
하나님을 버린 사울왕에 대해서도 이런 명령이 나옵니다.(삼상15:35-16:1)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이를 통해 우리는 요한이 기도를 금한 것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알수가 있으며 구약의 이런 말씀을 볼 때 기도를 금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기 때문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회개가 불가능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단에 빠진 자들, 적그리스도에 빠져 넘어간 자들이 회개가 불가능 할까요?
우리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회개가 불가능한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단에 미혹된 죄를 회개할 수가 없는 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디도서 3:10절에서,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한 두번 훈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회개할 수 조차 없는 죄가 아니라는 것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5:19절 이하에도 비슷한 종류의 말씀이 있습니다.
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진리에서 떠난 자를 돌아서게 하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계시록2:20절 이하에도 있습니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본문에는 이단들을 가르쳐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들은 이세벨 들입니다. 일종의 이단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미혹된 자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단에게 미혹된 것은 회개가 불가능한 죄 즉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적그리스도의 교리에 미혹된 자가 바로 히6:4-6절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히6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배교자들입니다. 이들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된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거듭났습니다. 분명히 영적인 경험을 가진 자들입니다. 히6장4절 이하에서 열거한 4가지 경험은 진짜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체험을 하고도 그리스도에게서 떠났다? 이들은 완전히 배교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에서는 “다시 회개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무뉘만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로 처음 회개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만난자들 입니다.
자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일까요?
어떤 학자가(스테판 스말리) 이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설명되지 않은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독자들이 아무 어려움 없이 이해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 신약성경을 기록할 당시 다른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그런 죄라고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번에 예수님께서 경고한 성령 훼방죄가 떠오릅니다. 또 히6장에 기록한 회개가 불가능한 배교의 죄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케네스 해긴 목사님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 회개가 불가능한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히6장을 가지고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적인 심판을 불러오는 죄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영적인 심판을 보여주는 수많은 구절들이 나옵니다. 이사야6:9-10절입니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로마서11:7-10절에서,
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요한계시록22:11절을 보시면 돌이킬수 없는 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그러면 영적인 심판이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이 기도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 수 차례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고 회개를 촉구하라고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선지자에게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완고해서 완악해서 회개하지 않을 것을 아셨고, 그래서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6:10-11절에 있습니다.
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남편과 아내와 나이 든 사람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이런 것이 바로 영적인 심판입니다. 사람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죄 가운데 살다가 회개가 불가능할 정도로 완악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그가 죽기 전이라도 영적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버리십니다.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스테판 차녹이라는 하나님의 종은 영적 심판에 대해서 다음과같이 설명하고있습니다.
[중생을 외면하면 영적 심판에 회부 됩니다.
복음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영적인 심판은 우리 눈으로 분명하게 볼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지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골적인 죄에 대해서는 가시적인 심판으로 여러분 응징하십니다. 그러나 고집을 피우며 중생을 거부하는 것은 영적인 심판으로 응징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여러차례 무시하고 격노하시게 함으로써 한번이라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옛날에 그러셨던 것처럼 여러분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올수 없다고 맹세하게 만든다면(히3:11) 하나님의 맹세는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맹세를 파기하시느니 차라리 하늘과 땅을 날려 버리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맹세를 들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는 12절에서 심지어 복음의 시대에도 이 맹세는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은 넌지시 암시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사도는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권면합니다.
이사야6:9-10절은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dl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두려운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6번씩이나 인용되고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고집을 부지며 중생하지 않으려고 마음으로 복음의 빛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은 복음의 은헤가 가장 신령한 것이듯, 복음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심판도 가장 신령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멸시함으로써 영적인 심판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신적 분노의 중심인물이 되고 그 사람의 마음은 거룩케하는 은혜를 전혀 입을 수 없도록 완전하게 봉인됩니다. “내가 너를 정하게 하나 네가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겔24:13)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은밀한 판결을 내리시면 성령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들이 가장 애절한 논리력으로 여러분을 설득하려고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신적인 형벌로서 폐쇄하고 봉인한 마음을 결단코 열수 없을 것입니다.]
완악하고 사악하게 하나님의 말씀앞에 거부하는 자들을 내리시는 영적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플러머 라는 학자도 똑같은 설명을 간단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영향들을 거부하고.,,,,완강하고도 지속적으로 마음을 닫는 것이 가능하다. 그럴 경우 회개는 도덕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마치 너무 오래 굶으면 몸이 음식물을 소화할 수 없는 혹은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영혼도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소멸 될 때까지 은혜의 공급을 계속해서 거부할 수 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죄악의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그 대표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삼상15:26-35절에 보시면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무엘상16:1,14절,
16: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
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다윗왕은 전임인 사울왕의 예를 통해 영적인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직접보고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후 왕위를 빼앗기는 것보다 영적인 심판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51편에 다음과 같은 회개의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이러한 영적인 심판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오늘날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간증을 기록한 책에 보시면 그 이야기를 주님께서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사건입니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를 오랜 시간동안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성령의 다루심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번 이상 그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내게 자신이 거듭났었고 설교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설교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으로부터 떠나 교회가는 것도 그만두고 죄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주님에 대하여 그 사람과 이야기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그는 죄에 깊이 빠져있었고 당신이 말할 수 있는 모든 나쁜 일이란 나쁜 일을 모두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주님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죄책감으로 심히 울었습니다. 나는 계속하여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고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기회가 되는 대로 주님께 돌아오도록 권면했습니다.
내가 이 사람과 마지막으로 이야기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이 진리인 줄 압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를 포기하지 마세요 나를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그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특별히 어느날 밤 나는 그를 위하여 무릎을 끓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이것은 너무 실제와 같아서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하고 내가 말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는 주님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님이 그에게 설교하라고 소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 다시 교제하기를 원하고 탕자와 같이 주님께 다시 돌아가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니다. 그를 위해 더 이상 기도하지 말라라.!”
내게 그를 위해 더 이상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나는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죽지 않고 이땅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 그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다 그는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죽어서 지옥으로 갈 것이다. 나는 그것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나는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내게 말했습니다.
“너는 구약에서 에브라임에 대하여 쓴 것을 읽어본 적이 있느냐? 너는 내가 ’에브라임을 그냐 ㅇ놔두어라 그를 더 이상 건드리지 말아라. 그냥 놔두어라‘ 라고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왜 그렇게 말했겠느냐? 왜냐하면 에브라임은 그의 우상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호4:17) 너도 이 사람을 구냥 놔두어라.
영적인 면에서 보면 이 사람은 그의 우상과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마귀에게 문을 넓게 열었고 주님은 그가 결코 회개하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후로 그에 대하여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위해 기도했지만 주님은 내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고 그 사람은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그의 나이는 55세쯤 되었습니다.
나는 그의 친척에게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죽을 그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한때는 그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끔찍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당신이 마귀에게 문을 넓게 열고 죄짓는 것을 계속하여 고집하면서 절대로 돌아서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단의 영역에 거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여서 사람들이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기를 원하는 곳에 가게할 수도 있습니다.
마귀의 거짓말을 듣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나 죄로 빠지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만일 믿는 자들이 사단의 영역에 있다면 그들이 하나님과 무엇을 하는 데 냉정해져서 신중하게 무관심해지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저주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 저주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심판 즉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철저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회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죄가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에 이르는 죄“는 모두 세 가지 입니다.
1.성령 모독죄입니다.
2.히6:4-6절에 나오는 배교의 죄입니다.
3.죄를 고집하다가 회개가 불가능할 정도로 마음이 강퍅해지고 영적으로 완악해져서 하나님의 영적인 심판을 받는 죄입니다.
이상과 같이 회개가 불가능한 ”사망에 이르는 죄“들이 존재합니다. 소죄와 대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죄들은 얼마든 회개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회개가 불가능한 죄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일2:1-2절을 근거로 구원받은 후 죄를 짓는다고 다 버림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것입니다. 요일1:9절의 말씀대로 예수의 보혈로 씻음받고 정결한 가운데로 살기 위하여 자복하고, 토설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들은 말씀을 생각하면서 내가안이하게 쉽게 넘기는 죄가 잇는지를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주시고, 작은 죄라도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시고 늘 회개의 삶과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을 늘 유지할수 있도록 주님을 닮는데 초점을 맞추고 살아게 하옵소서.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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